서해를 잇는 항구도시 남포를 바라보다 (下-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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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를 잇는 항구도시 남포를 바라보다 (下-3)
대동강은 한강으로 흐른다
  • 2021.02.10 09:00
  • by 이찬우 (테이쿄대학 교수)

1960년대 남포 : "우리식"(북한식) 사회주의를 만든 땅 - <청산리정신>, <대안의 사업체계>

▲ 남포시 청산리협동농장과 대안전기공장 위치 (구글어스)
▲ 남포시 청산리협동농장과 대안전기공장 위치 (구글어스)

1950년에 인구 약 1,000만 명이었던 북한은 3년간 전쟁으로 인구가 850만 명으로 줄었다가 1960년에 1,140만 명으로 회복되었다. 젊은 노동력이 부족한 상태에서 1958년까지 농업에서 협동화를 완료한 후 1960년에 곡물을 380만 톤 생산했다. 이 수치는 해방 전에 비해 60%나 증가한 것으로 대풍년이었고 북한판 <대동강의 기적>이라 할 수 있었다. 전쟁의 폐허에서 살아난 것이 기적이었다. 소련이나 중국 같은 사회주의 국가들에서는 농업 협동화로 인해 곡물 생산이 오히려 줄어들었는데 북한은 성공했다. 중국에서 대약진운동(1958-61년)이 실패하여 기아에 굶주린 난민들이 북한으로 넘어와 도움을 받을 정도였다. 북한에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북한은 "인민경제발전5개년계획(1957-61)"을 추진하던 1958년에 이미 개인상공업을 금지했고 국유경제를 중심으로 하고 협동경제를 보조로 한 사회주의경제체제를 빠르게 수립했다. 5개년계획도 1년 앞당겨 1960년에 완수했는데, 이때 북한의 1인당 GNI(국민총소득)는 137달러로, 남한(94달러)의 1.5배였다. 남한이 무척이나 못살 때였지만 그렇다고 북한이 월등하게 잘살게 된 것은 아니었다. 1960년에 1달러가 현재가치로 15달러(1만5천 원) 정도라고 하니 현재가치로 환산해보면 북한이 1인당 연간 200만 원(약 2,000 달러), 남한이 1인당 연간 140만 원(1,400 달러) 정도였던 셈이다.

1960년에 나이 50대로 접어든 김일성 수상은 노동당내의 반대세력들을 거의 쫓아냈고 자신감에 넘쳤다. 1956년의 제3차 당대회 5년 후인 1961년에 제4차당대회를 개최하고 제1차 7개년계획을 세워 사회주의경제체제를 바탕으로 본격적인 경제계획을 추진했다. 1962년에 김일성 수상은 "모두가 이밥(쌀밥)에 고기국을 먹으며 기와집에서 비단옷을 입고 사는 부유한 생활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라고 사회주의 이상향을 아주 쉽게 설명했다. 다들 그리될 것으로 그때는 낙관했다. 경상도 출신이 많았던 재일 동포들 중 상당수가 북한을 "사회주의 조국"으로 생각하고 귀국한 것도 북한의 이러한 발전이 배경에 있었다.

석탄과 철, 비철금속, 농수산물을 가진 국내자원을 배경으로 사회주의경제를 수립한 북한에게 아쉬운 점은 물론 석유, 코크스 같은 중요 자원이 없다는 점과 관료주의, 부정, 형식주의, 비능률 같은 경제관리 측면의 문제였다. 북한은 독특하게도 소련이 주도한 사회주의권의 경제통합체계인 <경제상호원조회의(코메콘)>에 가입하지 않고 국내자원과 인민대중의 정신력에 근거한 자립적 민족경제건설을 추구했다. 남한이 1960년대부터 해외의 자원과 기술에 의존한 수출주도형 시장경제를 추구했고 그 추진력을 관료와 기업가에 둔 것과 대비된다. 후에 1970년대부터 북한은 남한의 성공에 자극받아 자본과 기술도입에 노력하고 남한은 북한이 보여준 인민대중의 정신력에 자극받아 "새마을 운동"을 추진한 것을 보면 남북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아 온 것 같다.

북한에서 남포의 강선제강소가 보여준 "강선의 정신력"인 천리마운동은 기술과 생산력이 부족한 것을 인민대중의 정신력으로 돌파하려는 시도였다. 물론 정신력에는 물질적 유인도 포함되는데 경제성장과 함께 노동자들의 임금수준도 함께 올랐다. 노동자들의 개인경쟁이 아니라 집단주의적인 증산경쟁이 고무되었고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라는 구호가 이때 나왔다. 

남포의 인민들은 김일성 수상의 노선을 실현하는 기반이었다. 노동당원들이 인민을 고무하여 노동력을 집중 투입하고 현장에서 기술혁신운동을 일으키는 천리마운동은 현장 중시형 "대중노선"이었다. 이를 농업과 공업분야에서 좀 더 체계적으로 실현하기 위해 김일성 수상이 찾은 곳도 남포였다. 

<남포시 강서구역 청산리 협동농장>: 북한식 사회주의 정신, 방법- 간부는 인민들 속으로 들어가라! 

1960년 2월 5-8일 한겨울에 김일성 수상이 찾아간 곳은 평안남도 강서군 청산리 농업협동조합(당시) 이었다. 평남선(평양-남포) 기양역(현 강서역)에서 내려 서북쪽으로 2km에 산 아래에 늘어선 9개 부락, 관개 수로가 정비된 930정보의 기름진 포전들이 있는 농촌이었다. 김일성 수상이 청산리를 찾은 것은 이때가 처음은 아니었다. 1958년 10월 청산리의 농업협동조합들이 하나로 통합되기 직전 청산리 암화 농업협동조합을 시찰한 적이 있었다.

여기서 김일성 수상은 "알곡 수확고를 높이기 위하여 땅을 30cm 깊이로 갈고 논에 정보당 퇴비 50 톤, 화학비료 300kg을 시비하고 냉상모를 평당 300주씩 밀식하며 관개 면적을 확장하며 기계화를 광범히 도입할 것"과 같은 구체적인 내용을 깨알처럼 지도했었다. 그리고 농업협동조합을 리 단위로 통합하는 것이 영농작업의 기계화, 노동력의 절약과 효과적인 이용, 그리고 관리체계 간편화 등 모든 방면에서 유리하다고 지적하고, 농업협동조합에서 공동식당, 세탁소, 의복수리소, 탁아소 등을 설치 운영하여 여성들의 집안일을 덜어줄 것을 제시하기도 했다(노동신문 1958년 10월 11일).

▲ (왼쪽 ) 청산리 농업협동조합의 봄보리 파종 모습 (노동신문 1959년 2월 23일) (오른쪽) 청산리 농업협동조합을 방문한 김일성 수상 (자료; 김성보 외 『북한현대사』 p164)(청산리 농장을 방문한 김일성 수상은 “방에 들어갈 것이 있는가, 가까이 앉아야 정이 더 든다는데 멍석이나 깔고 앉아 이야기를 하자”며 탈곡장 마당에 멍석을 펴고 농민들과 농사일을 의논하였다고 한다.)
▲ (왼쪽 ) 청산리 농업협동조합의 봄보리 파종 모습 (노동신문 1959년 2월 23일) (오른쪽) 청산리 농업협동조합을 방문한 김일성 수상 (자료; 김성보 외 『북한현대사』 p164)(청산리 농장을 방문한 김일성 수상은 “방에 들어갈 것이 있는가, 가까이 앉아야 정이 더 든다는데 멍석이나 깔고 앉아 이야기를 하자”며 탈곡장 마당에 멍석을 펴고 농민들과 농사일을 의논하였다고 한다.)
▲ "청산리의 멍석" (노동신문 2020년 5월10일)
▲ "청산리의 멍석" (노동신문 2020년 5월10일)

김일성 수상은 1960년 2월의 청산리 당총회에서 "사회주의적 농촌경리의 정확한 운영을 위하여"라는 연설을 하였고 여기서 "세밀한 조사와 연구 및 과학적 분석에 기초하여 사업의 경중과 선후차를 가리며 중심 고리에 역량을 집중"하라는 청산리 교시를 내놓았다. 그 중심 고리란 농촌의 역량을 "알곡생산"에 집중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농사일의 계획화 수준을 높이고 농민의 생산의욕을 높이는 노력평가방법을 개선하도록 하였다. 또한 조합 간부들의 사업에서 형식주의와 관료주의를 극복하고 “군중 관점”을 확립하여 조합원 대중을 광범하게 참가시키는 민주주의 관리원칙을 강조했다. 

이러한 청산리 교시에 따라 전국에서 도-군-리-작업반 순으로 위의 조직이 아래 조직을 돕는 체계가 섰다. 그리고 모든 토지와 노동력을 행정기관이 아닌 현장의 농업협동조합 관리위원회가 통일적으로 관리하여 비효율을 없애고 노동력의 80-90%를 농산물 생산에 집중 투입하도록 하였다. 동시에 농업기술지도원 3천여 명이 농촌에 살면서 관개 수리와 토지개간, 비료생산 등을 위해 농민과 함께 일했고 국가와 당의 지도 간부들도 농촌에 내려가 직접 포전에서 일하며 지도하는 체계를 만들었다. 노동신문은 "중앙 지도 기관으로부터 밑의 작업반에 이르기까지 회의와 문서놀음을 적게 하고 간부들이 사무실에서 떨쳐 나와 상하가 하나로 밀접히 연결되었으며 간부들과 대중들이 증산 조치를 공동으로 토의하였다."(노동신문 1961년 2월 3일)고 평했다. 

농사분배는 각 작업반이 중심이 되어 일한 양을 평가하여 <노동수첩>에 매일 기입하여 연말 결산에 분배기준으로 삼았다. 남자는 하루 일하면 하루분의 배분을 받고 여자는 25일 일하고 3일간 유급 휴식을 주고 휴식하지 않을 경우에는 3일분을 더 평가해 주는 원칙을 세웠다. 그리고 "작업반 우대제"를 실시하였는데, 국가가 규정한 생산계획을 초과한 작업반원들은 초과 부분을 전부 자기 소유로 할 수 있었다. 모내기, 김매기 등 힘든 노동에는 작업 등급을 높이 평가해 주었다. "일을 많이 하면 많이 주는" 분배 원칙이 세워졌다. 
결과적으로 1960년 대풍이 들었고 청산리 농민들은 집마다 평균 알곡 3.2 톤, 현금 436원을 분배 받았다(노동신문 1960년 11월 21일). 전국의 평균 호당 분배는 알곡 2.1 톤, 현금300 여 원이었다. 북한은 "어쩌다가 한 끼 쌀밥이라도 먹으면 《생일을 치루었다》고 여긴 가난한 백성들이 살던 이 땅, 오늘은 온 나라가 중농 수준으로 되었다"(노동신문 1960년 11월 19일)며 환호했다. 그때는 그랬다. 

▲ (왼쪽) 청산리의 풍년 (노동신문 1960년 9월 15일) (오른쪽) 청산리 농업협동조합의 최대렬 조합원 부녀-100여 가마니를 분배받음(노동신문 1960년 11월 21일)
▲ (왼쪽) 청산리의 풍년 (노동신문 1960년 9월 15일) (오른쪽) 청산리 농업협동조합의 최대렬 조합원 부녀-100여 가마니를 분배받음(노동신문 1960년 11월 21일)

청산리에서 김일성 수상이 제시한 정책은 <청산리정신, 청산리방법>으로 이름 지어졌는데, "웃기관이 아래기관을 도와주고 웃사람이 아래사람을 도와주며 늘 현지에 내려가 실정을 깊이 알아보고 문제해결의 올바른 방도를 세우며 모든 사업에서 정치사업, 사람과의 사업을 앞세우고 대중의 자각적인 열성과 창발성을 동원하여 혁명과업을 수행하도록 하는" 것으로 정형화되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2020년 2월 6일 노동신문은 청산리정신을 "가장 위력하고 혁명적인 대중지도사상"으로 언급했다. 김정은 시대에 부각된 <인민대중제일주의>는 김일성 시대 남포에서 나온 청산리정신에 뿌리를 두고 있다.

▲ 청산협동농장의 2021년 농사준비 모습 (노동신문 2021년 2월 8일) ("당의 농사제일주의 방침을 철저히 관철하자!")
▲ 청산협동농장의 2021년 농사준비 모습 (노동신문 2021년 2월 8일) ("당의 농사제일주의 방침을 철저히 관철하자!")

<남포시 대안구역 대안전기공장>: 북한식 공업관리체계 – 생산자대중의 집체적 지혜와 힘에 의거하라! 

청산리방법을 제기한 지 약 2년 후인 1961년 12월 6-16일에 김일성 수상이 찾아간 곳은 청산리에서 남쪽으로10km떨어진 대동강변의 대안군(현 남포시 대안구역 덕성동)에 있는 대안전기공장이었다. 대안전기공장은 원래 1941년에 일본이 세운 제철소의 일부로 변압기, 전동기 등의 수리를 전문으로 하는 전기기계 공장이었다. 해방 후 1947년에 강서전기공장으로 개칭되어 변압기와 전동기를 생산하는 기계공장으로 되고 1955년에 대안전기공장으로 개칭되었다. 대안구역은 북한의 중요한 전기기계공업 기지가 되었다. 이후 1980년에 대안중기계종합공장과 통합하여 발전기를 중심으로 각종 산업생산설비를 생산하는 공장으로 되고 현재 이름은 대안중기계연합기업소이다.

▲ 대안전기공장을 방문한 김일성 수상 (노동신문 1961년 12월 18일)
▲ 대안전기공장을 방문한 김일성 수상 (노동신문 1961년 12월 18일)

공업에서 생산력을 높이려면 새로운 공장관리 운영체계와 생산지도체계가 필요했다. 노동자들의 정신력과 현장의 기술혁신을 일으키는 천리마운동, 사회주의 시대의 대중지도사상과 방법인 청산리정신, 청산리방법을 경제관리분야에 구현하기 위해서는 공장과 공업의 체계를 혁신할 필요가 있었다. 

공장의 관리체계를 바꾸는 핵심은 이전까지 공장지배인(경영책임자) 이 단독으로 관리하고 각 부서가 분산되어 책임 전가가 많았던 "지배인 유일관리제" 방식을 집단지도 방식으로 바꾸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생산대중의 의견이 공장 관리에 직접 반영되는 체계로 전환하는 것이다.

김일성 수상은 대안전기공장에서 "당위원회"가 집체적으로 지도하는 체계를 발기했다. 지배인과 당비서 그리고 기사장(기술책임자)을 중심으로 생산과 기술을 통일적으로 지도하는 <공장 참모부>(참모장을 기사장이 담당)를 만들도록 했다. 관리 운영 뿐 아니라 자재 공급, 노동자들의 생활물자 지원 등에 대해서도 당위원회가 책임지도록 했다. 이렇게 해서 산만하고 분산적이었던 공장운영을 정비하고 기술 역량을 최대한으로 동원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리고 전기기계생산에 필요한 원료와 자재를 수입에 의존하지 않고 자체로 보장하는 “자력갱생직장”을 구성하여 자립경제노선을 추진했다. 북한은 대안전기공장의 변화된 관리방식을 “대안의 사업체계”라고 이름 붙였다. 그 주요 내용을 정리해 보면 ①집체적 공장관리, ②통일적 생산지도, ③위에서 도와주는 자재 및 생활보장, ④자력갱생 등으로 볼 수 있다.

1962년 11월 9일에 대안전기공장을 다시 방문한 김일성 수상은 당위원회 확대회의에 참석하여 "대안의 사업체계를 더욱 발전시킬데 대하여"라는 연설을 하였다. 내용은 경제에 대한 당적 지도를 강화하고 정치를 선행하여 생산자대중을 기업관리에 주인답게 참가시키며 민주주의 중앙집권제를 강화하고 경제를 과학적으로 관리하라는 것이었다. 

▲ (왼쪽) 김일성교시를 집행하기 위한 대안전기공장 종업원회의 (노동신문 1962년 1월 12일) (오른쪽) 500kW 발전기를 조립하는 대안전기공장 (노동신문 1962년 2월 14일)
▲ (왼쪽) 김일성교시를 집행하기 위한 대안전기공장 종업원회의 (노동신문 1962년 1월 12일) (오른쪽) 500kW 발전기를 조립하는 대안전기공장 (노동신문 1962년 2월 14일)

1963년 4월 직업총동맹 중앙위원회 상무위원회는 대안전기공장에 북한에서 첫 천리마공장 칭호를 수여하기로 결정하여 대안전기공장은 천리마대안전기공장으로 되었다. 대안전기공장 노동자들은 자력갱생으로 기술혁신, 자재절약, 설비보수를 추진하여 "한 달에 한 건 이상의 새 기술도입운동"을 벌이는 등 1년 동안에 778건의 창의 고안 및 합리화안을 생산에 도입하였고 생산성을 높였다고 한다. 노동자들이 신명 났다.

▲ 대안전기공장에 천리마공장 칭호 수여 (노동신문 1963년 4월 16일)
▲ 대안전기공장에 천리마공장 칭호 수여 (노동신문 1963년 4월 16일)

그런데 1964년부터 북한은 공장의 생산계획을 더 세부화하고 중앙정부가 일원화하여 관리하는 체계를 만들면서 생산현장의 자율성이 약화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원래 계획 세부화는 생산자 대중이 참여하여 수립하는 아래로부터의 계획화였는데 실제로는 위로부터 계획이 하달되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되었다. 이로부터 공업에서 생산성 향상과 품질혁신이 이루어지기보다는 생산 수량을 달성하면 된다는 나쁜 습성과 통계 조작 등이 나타났다. 게다가 1962년 10월 발생한 <쿠바 미사일 위기> 이후 북한은 사회주의체제의 위기상황이 도래했다고 보고 군사력 증강에 박차를 가하는 "경제 국방 병진노선"을 추진했다. 경제외적 분야인 국방분야에 자원이 집중되는 상황이 발생하여 민수분야는 그만큼 자재 부족 상황이 되고 공급 감소로 이어졌다. 1961년에 시작한 제1차 7개년 계획도 1970년까지 사실상 10개년 계획으로 연장되었다. 1960년대 중반 이후 북한은 군사동원체제가 체질화되어갔다.

이로 인해 경제발전을 위한 인민대중의 창발성은 "위로부터" 요구되는 이념체계로 되었다. 그리고 계획경제의 부정적 측면이 유산으로 남았다. 그 결과 1970년대부터 북한은 저성장과 생산성 하락을 겪었다. 대안전기공장은 아직도 제대로 된 발전기를 생산하는데 어려워하고 있다. 북한이 자력갱생으로 만든 발전설비의 보수문제는 전력생산에 큰 결함으로 되고 있는 형편이다.

그래도 북한은 대안의 사업체계를 "사회주의 경제관리의 가장 훌륭한 형태"로 규정하고 1972년 헌법에 명문화했다. 그런데 공장의 당위원회가 집체적으로 지도하는 방식은 사실 중국이 먼저 실시했다. 1956년부터 중국은 기존의 공장장(북한의 지배인) 책임제를 "당위원회 영도하의 공장장책임제"로 바꾼 바 있었다. 생산, 기술, 재무, 생활물자 등과 관련하여 주요 사항을 결정할 때에는 모두 공장 당위원회가 집단적으로 토의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이에 따라 당위원회가 공장의 관리 운영에 관한 권한을 장악하게 되었는데, 실제로는 당서기가 최종적인 의사결정 권한을 쥐면서 정치적 판단이 우선하게 되었다. 중국은 1979년부터 개혁개방을 시작하면서 1983년에 당위원회 지도방식을 공장장책임제로 다시 환원했다. 

북한은 2010년에 새로 제정한 기업소법에서 <대안의 사업체계> 항목을 넣지 않았고, 2019년 수정한 헌법에서는 <대안의 사업체계>를 삭제했다. 그 대신 수정 헌법에는 생산 현장에 자율성을 더 부여하고 시장 요소를 도입한 <사회주의기업책임관리제>를 새로 명시했다. 그러나 대안의 사업체계의 핵심인 "공장 당위원회"의 집체적 지도가 폐기되었다는 소식은 아직 없다. 지배인의 역할이 더 중시되고 있을 뿐이다. 수정 헌법 제33조 1항은 "국가는 생산자 대중의 집체적 지혜와 힘에 의거하여 경제를 과학적으로, 합리적으로 관리운영하며 내각의 역할을 결정적으로 높인다"라고 되어있어, 대안의 사업체계가 갖는 중요 개념인 <생산자대중의 집체적 지혜와 힘>이 여전히 중시되고 있다. 

▲ 대안전기공장의 변압기 생산 모습 (노동신문 2020년 9월 2일)
▲ 대안전기공장의 변압기 생산 모습 (노동신문 2020년 9월 2일)

<개인상공업이 사라지고 국유경제와 함께 협동경제가 이끈 남포>

해방 후 남포의 소비조합은 1958년에 상업망을 남포시 인민위원회에 이관하였고 농촌지역에 있던 농촌소비협동조합은 리 단위 농업협동조합(협동농장)에 통합되었다. 그리고 개인상공업은 금지되었다. 이렇게 해서 사회주의적 생산관계가 정립되었는데 1960년대 이후 사회주의하의 협동경제는 농어촌의 협동조합과 생산협동조합, 그리고 서비스(수리 등)를 제공하는 편의협동조합이 이끌어갔다. 

사회주의체제로 전환되어 가던 1958년의 4월 13일. 남포시 공설운동장에서는 부정부패를 처단하는 공개재판이 열렸다. 피고인은 소비조합 평남도 연맹 부기장 리인걸. 개인 상업을 경영하다가 1954년에 소비조합에 들어간 자였다. 죄목은 "사회주의적 협동 경리의 재산을 연속적으로 횡령하여 낭비"한 죄였고 횡령액은 주택 950세대분을 지을 수 있는 거액이었다고 한다. 공재 재판에 2만5천여 시민이 방청했다. 피소자의 죄행을 단죄하는 검사의 논고가 있고 변호인의 변론이 있은 다음 형법에 따라 사형 및 재산 몰수가 언도되었다(노동신문 1958년 4월 16일). 개인상업과 소비조합이 사라지는 시기에 상징적인 재판이었다. 간부들의 부정부패는 심각한 사회문제였기에 공개재판으로 사형에 처할 정도였다. 

인민대중의 창발성에 의거한 협동경제의 생산 방식은 생산협동조합에서 주로 구현되었다. 남포에는 남포제련소 종업원들의 부양가족들이 만든 "남포제련소 벽돌생산협동조합", 그리고 철공생산협동조합, 일용품생산협동조합, 편직물생산협동조합, 식료생산협동조합, 화학생산협동조합, 수출피복생산협동조합, 담배생산협동조합, 완구생산협동조합 등이 있었다. 

▲ 남포식료생산협동조합의 느타리버섯 생산 (노동신문 1966년 4월 14일)
▲ 남포식료생산협동조합의 느타리버섯 생산 (노동신문 1966년 4월 14일)

북한이 집단주의를 강화하면서 그 내용에서 생산현장을 중시하고 간부들을 아래로 접근시키려는 방향은 남포에서 구현한 <청산리정신, 청산리방법>이었다. 이는 지금도 북한의 지도사상이다. 그러나 같은 남포에서 시작한 <대안의 사업체계>는 결과적으로는 국가가 인민생활을 책임지지 못하고 대중의 창발성을 구현하지 못하였기에 현재는 언급하지 않는 상황이 된 것 같다.

남포의 1960년대 이후 경험은 북한에서 인민대중이 경제와 정치의 중심이라는 것이며, 당의 지도가 형식화하고 무능하고 위에서 내려 먹이는 식이면 인민대중은 창발성을 내놓지 않는 것으로 대응한다는 "불편한 진실"이 있다는 것이다. 

 

※ 다음 호에는 1980년대까지의 남포의 변화를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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