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를 잇는 항구도시 남포를 바라보다 (下-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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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를 잇는 항구도시 남포를 바라보다 (下-2)
대동강은 한강으로 흐른다
  • 2021.02.03 10:00
  • by 이찬우 (테이쿄대학 교수)

해방 후 남포 : 기술자 부족과 노동계급의 "창발성" 신화 

1945년 8월 해방 당시 남포는 제련소 공업지대, 논과 밀밭, 사과밭 농업지대 그리고 항만을 낀 물산 집적지로 정미소, 제분공장, 저탄장, 공장, 제강소 등이 즐비한 인구 8만여 명의 도시였다. 당시 명칭인 진남포 인구 중 일본인이 약 20%인 1만5천명 정도였다. 이들이 행정, 치안, 금융, 상업, 운수, 기술, 제조, 농업 등 각 방면에서 지배계급을 구성하고 있었다.

종업원 4,600명을 거느린 진남포의 대기업인 일본광업 진남포제련소(후의 남포제련소)에는 일본인 약 1,000여 명이 관리 및 기술직 등에 재직했는데, 해방과 함께 자리에서 쫓겨나서 도로 정비나 항만 하역 등에 배치되었다. 소련 진주군은 공장설비를 소련으로 반출하는 데 일본인들을 투입했다. 일본인들은 이동을 금지당하고 집단시설에 억류되었다. 지배계급으로 살던 일본인들에겐 공포 시기였다. 여기에 만주에서 들어온 일본인 난민집단까지 진남포에 모여들어 집단성이 강하던 일본인들도 이런 상황이 되니, 힘 있는 자들이 집단을 버리고 자기들 살길을 찾는 모습이 도처에서 나타났다. 9월 말에 진남포제련소 공장장과 과장급 이상 간부들만 따로 밀항선으로 진남포를 탈출해 일본으로 도망쳤다. 

해방 후 한반도에 있던 일본인들은 군인 및 공무원 약 20여만 명에 민간인 약 72만 명이었는데 민간인들 중 남한에 있던 약 42만명은 1946년 3월까지 거의 일본으로 돌아갔으나 북한에 있던 약 30만 명은 계속 억류되었고 식민통치와 직결된 이들은 투옥되었다. 그 후 소련의 묵인하에 1946년 말까지 대부분의 일본인이 남한을 거쳐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잡역부로 강등되었던 산업, 운수 부문의 일부 일본인 기술자들은 1945년 10월부터 생산복구를 위해 자발적으로 또는 징발에 의해 생산 현장에 복귀했다. 1946년 8월 17일 북한은 일본인 기술자 확보령을 발표하고 후한 임금계약으로 관리했다. 자발적으로 남은 일본인을 제외한 일본인 기술자들은 1948년 7월 마지막 공식 송환선으로 원산항에서 일본으로 돌아갔다. 

일본인 기술자들을 공장 가동을 위해 후하게 대우하고 묶어 두어야 할 만큼 해방 직후 북한에는 조선인 기술자들이 부족했다. 일본군의 파괴, 소련군의 반출을 겪고 살아남은 공장들은 조선인 노동자들의 "자주관리"로 운영되었으나 기술력 부족으로 제대로 성과를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평양의 승호리 시멘트공장은 전기고장으로 2개월이나 가동 중지되었다가 일본인 기술자가 투입된 지 3시간 만에 복구된 적도 있었다. 조선인 기술자를 양성하지 않은 일본 식민통치의 한 특징이었지만 그렇다고 상황 탓만 하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럴 때 만들어진 것이 <강선 노동계급>의 신화였다. 노동계급 자체의 힘으로 기술력을 돌파했다는 것으로 김일성의 유명한 강선제강소 방문 이야기다. 그 첫 시작이 1945년 10월이었다. 평양에 들어온지 얼마되지 않은 김일성은 지척인 "만경대 고향집"을 지나쳐 바로 옆 동네인 강서군의 강선제강소(구 미츠비시제강소, 현 남포시 천리마제강연합기업소)를 찾았다. 강선제강소는 압록강 수풍발전소 전력을 이용, 전기로를 가동하여 평양부근의 철광을 원료로 방탄 철판 같은 특수강을 연간 1만 톤 정도 생산하는 군수공장이었는데 일본인 공장장이 전기로를 파괴했다. 강선제강소 노동자들은 "일제가 10년이 걸려도 일어서지 못할 것이라고 떠벌인 전기로를 자체의 힘으로 복구하여 1945년 12월에 첫 쇳물을 뽑아냈다"고 한다. 사회주의 노동계급 신화의 탄생이었다. 노동자들의 자체의 힘(=인민 대중의 힘)에 근거한 경제건설 이념이 강선에서 시작했다.

조선인 노동계급만의 힘으로 모든 공장 복구가 이루어진 것은 물론 아니었다. 이는 김일성의 "남포시 책임일군들과 한 담화"에 잘 나온다. 김일성은 1945년 12월 28일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책임비서 자격으로 진남포시를 처음 현지 지도했다. 여기서 평양의 관문이며 중요 항구가 있는 진남포가 건국사업에서 매우 중요하다면서 제련소, 조선소, 항만, 제강소, 제철소 등을 복구 정비할 것을 지시하였다. 이를 위해 김일성은 다음과 같은 대책을 제시했다. 

① 해방 후 각지에 흩어진 기술자와 기능공을 찾아 모을 것
② 일본인 기술자들도 본인의 요구에 따라 동원하고 기술을 배울 것. 마음 놓고 일할 수 있게 할 것
③ 기술강습소 등 기술자, 기능공 양성 대책을 세울 것
④ 애국적인 종교인도 민주주의 깃발 아래 묶어 세울 것

이는 당시 현실에서 필요한 대책이었다고 본다. 어느 시대나 극단주의적 행태들이 있게 마련이다. 북한에서는 일본인에게 기술 배우는 것에 대해 민족적 감정과 실용주의의 대립이 있었고 친일경력의 인텔리와 종교인에 대해 무조건적인 배척이 있는 분위기에서 "무엇이 나라를 위해 더 중요한가"를 기준으로 행동할 수 있게 하였다고 생각한다.

이에 힘입어 진남포제련소의 용광로도 다시 가동되어 금, 은, 동, 아연 등이 다시 생산되어 해방 전 수준을 넘어섰다. 전반적으로 산업이 해방 전 수준을 회복하거나 넘어서면서 진남포엔 생기가 돌았다. 주민생활에서도 해방직후부터 진남포시협동조합이 생겼고 1946년 5월 평안남도소비조합이 설립되면서 산하 남포시소비조합이 공동구매, 공동판매, 양곡수매, 신용 등 다양한 주민 경제활동을 추진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1946년 8월 12일, 이날부터 "진남포" 이름은 사라지고 원래 이름인 "남포"가 되돌아왔다. 이를 기념하여 남포-평양 간 역전 마라톤이 1946년 11월 17일에 있었다. 남포의 기술자 양성을 위해 "남포고등기술원양성소"(1년 수업, 야금과 전기)가 1947년에 세워졌다. 남포제련소에서는 수입해야 하는 코크스 대신 국내 무연탄을 사용하여 제련하는 방법이 시도되었으며, 군수품 알루미늄을 생산하던 남포경금속공장(구 조선경금속 진남포공장)에서는 건전지, 비료, 소금, 초자 등 민수품도 생산하게 되었다. 

또한 중국 동북지방에서 벌어진 공산당과 국민당 사이의 내전 시기에 중국 공산당 군대가 대련-남포 간의 항로를 이용해 북한지역을 경유해 동만주지역으로 이동하도록 지원하는 등 남포항은 중요하게 활용되었다.

▲ 남포제련소 생산현장 (노동신문 1950년 1월 13일)
▲ 남포조선소의 850톤급 철갑선 건조 (노동신문 1950년 4월 15일)
▲ 남포조선소의 850톤급 철갑선 건조 (노동신문 1950년 4월 15일)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1950년 6.25전쟁 발발과 함께 미군의 폭격으로 잿더미로 변했다. 7월 8일 남포시가 폭격을 받아 남포제련소가 파괴되었고 8월 27일 겸이포제철소(황해제철소)의 절반이 파괴당했다. 8월 31일에는 남포화학공장이 폭격을 받아 종업원 300명이 사망했다. 1951년 5월 6일에 가장 큰 폭격이 있었고 1953년 7월 정전협정에 조인할 때까지 남포에 대한 미군의 폭격은 계속되었다. 평양은 쑥대밭이 되었고 군수공장지대와 항만을 낀 남포는 원산, 흥남, 신의주와 더불어 주요한 파괴 대상이었다. 남포의 중심지였던 부두 뒤에서 해방탑에 이르는 넓은 평지는 황무지가 되었다.

남포시 재건은 휴전과 더불어 바로 시작되었다. 김일성 수상은 정전협정 체결 7일만인 1953년 8월 3일, 폭격으로 망가진 강선제강소를 다시 찾았다. 인민대중의 힘인 <강선 노동계급>의 신화를 다시 보여 달라는 것이었다. 김일성 수상이 찾은 후 40일 만에 강선제강소는 다시 쇳물을 뽑아냈다. 남포제련소도 재건되었다. 남포항은 흥남항과 더불어 최우선으로 복구 정비되었다. 북한 중화학공업의 양대 공업지대였기 때문이다. 소련과 사회주의권의 원조가 도움이 되었다. 소련은 남포제련소를, 중국은 남포유리공장을, 루마니아는 남포인민병원을 재건하는데 물자와 기술을 제공하였다.

▲ 강선제강소의 복구 모습 (노동신문 1953년 8월 20일)
▲ 강선제강소의 복구 모습 (노동신문 1953년 8월 20일)
▲ (왼쪽) 남포제련소의 복구공사 모습 (노동신문 1953년 9월 25일) (오른쪽) 남포제련소 복구후 구리 용광로 조업식 (노동신문 1954년 7월6일)
▲ (왼쪽) 남포제련소의 복구공사 모습 (노동신문 1953년 9월 25일) (오른쪽) 남포제련소 복구후 구리 용광로 조업식 (노동신문 1954년 7월6일)
▲ (왼쪽) 남포유리공장 복구 조업식 (노동신문 1954년 5월 11일) (오른쪽) 남포유리공장에서 생산된 판유리 (노동신문 1954년 5월 14일)
▲ (왼쪽) 남포유리공장 복구 조업식 (노동신문 1954년 5월 11일) (오른쪽) 남포유리공장에서 생산된 판유리 (노동신문 1954년 5월 14일)

1954년 3월에는 남포, 청진, 함흥, 원산, 사리원, 강계 등 주요 6개 도시들을 재건하기 위한 국가건설위원회의 총기본계획을 승인하는 내각결정 제42호가 채택되어 전후 북한 도시개발의 기본방향이 정해졌다. 이 결정에 따르면 이 6개 도시들은 주민생활을 되도록 강안 또는 해변에 연결시키고 잔존 시설들을 가급적으로 보존하는 원칙에서 자연지형을 이용하여 생활에 편리한 도시로 재건하도록 되었다. 1인당 녹지 면적을 7-12㎡ 로 배정하여 해안 및 강안에 편의시설을 포함한 휴식시설을 확충하고 거주지역과 산업 용지 사이에는 보호녹지를 설정하여 도시녹화를 확보하고, 생활 문화 교육 등 공공시설들을 도시 전체에 균등하게 배치하도록 하였다. 동독 등 동유럽 도시계획전문가들의 사회주의 도시 설계가 도입되었다.

▲ 남포시 계획 모형도 (노동신문 1954년 3월 23일)
▲ 남포시 계획 모형도 (노동신문 1954년 3월 23일)

북한은 사회주의권의 협력을 끌어들이면서도 인민대중의 자발적 참여를 더 중요한 복구건설의 이념으로 삼았다. 노동대중들의 자발적인 참여, 즉 북한말로 "로력대중의 창발성"은 이후 현재까지 이어지는 일관된 이념이 되어있다. 그리고 동시에 노동당원 및 국가기관 간부들에 대한 "반관료주의 투쟁"은 노동대중의 지지를 얻기 위한 필수적인 지침이 되었다. 이러한 프레임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 시작은 김일성의 교시 "…관료식으로 사업하는 방법을 퇴치하지 않고서는, 또 그와 가혹한 투쟁을 전개하지 않고서는 인민과의 련계를 강화할 수 없으며, 아무리 좋은 결정이나 법령도 관료식 사업에 의하여 파탄되고 말 것은 아무 의심도 없다"(도,시,군 인민 위원장 및 당 지도 일꾼 연석회의에서, 노동신문 1952년 2월 24일 인용)였다. 이는 북한에서 소련파를 통해 소련사회주의의 문제점이었던 관료주의가 이식되는 상황에 대한 김일성의 대응이기도 했다.

<강선 노동계급>의 신화는 북한이 "원조"보다는 "자력"으로 자립경제 건설을 추진하는 동력으로 거듭 나타났다. 1956년 12월 김일성 수상이 강선제강소를 세 번째로 방문하여 노동대중의 경쟁적 증산운동인 <천리마운동>을 일으켰다. 이를 기념하여 강선제강소는 후에 이름도 천리마제강으로 개칭되었고, 공장지대를 중심으로 남포시 천리마구역이 탄생했다. 1960년 12월에는 김일성 수상이 또 강선제강소를 방문하여 생산력 증대를 위해 인민에게 직접 "자력갱생"을 호소하였다. 

남포의 강선(천리마구역)은 수령 김일성이 당과 행정일군들의 관료주의와 무책임성을 비판하고 인민대중에게 직접 호소할 때 반드시 찾는 곳이 되었다.

왜 강선이었을까. 도산 안창호 선생의 출생지이고 <민족적 이상촌> 건설 계획지로 안창호가 근대 시민을 육성하기 위한 계몽운동과 훈련, 그리고 독립운동가를 양성하려 했던 꿈이 서린 곳이어서일까. 강선 노동대중의 눈으로 보면 세상이 달리 보일 수도 있다. 

▲ 강선의 정신력 (천리마제강연합기업소 : 우리민족끼리 홈페이지)
▲ 강선의 정신력 (천리마제강연합기업소 : 우리민족끼리 홈페이지)

※ 다음 (下-3)은 남포의 1960년대이후 80년대까지 변화를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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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찬우 (테이쿄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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