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를 잇는 항구도시 남포를 바라보다 (下-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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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를 잇는 항구도시 남포를 바라보다 (下-4)
대동강은 한강으로 흐른다
  • 2021.02.17 17:38
  • by 이찬우 (테이쿄대학 교수)

1980년대 남포 : 치수(治水)의 시대, 대동강 하구 남포갑문(서해갑문)의 성과와 후과

<남한보다 한발 늦은 강 하구둑 공사>
서해의 강 하구를 막아 홍수와 가뭄에 대비하고 농업, 공업용수를 확보하려 한 치수 사업은 남한이 북한보다 빨랐다. <영산강 하구 둑> 공사가 먼저였다. 1978년에 목포항 동쪽 무안군 삼향면 옥암리와 맞은편인 영암군 삼호읍 산호리 사이에 하구 둑을 쌓는 공사를 시작해 1981년 12월에 완공했다. 그리고 이어서 1979년에 현대건설이 착공한 서산 간척지 공사는 1984년에 마지막 물막이 공사를 "고철 유조선"을 가라앉혀 해결한 "정주영 공법"으로 유명했다. 

개발이라는 이름 하에 자연을 정복하여 강을 막고 바다를 막아 물을 관리하여 농토를 확보하고 물걱정을 해결하려는 치수사업은 북한도 마찬가지였다. 북한은 치수사업을 "대자연개조 전투"라고 불렀다. 그 시작이 대동강이었다. 지리적으로 볼 때 대동강은 긴 상류와 중류에서는 경사도가 급하고 하류는 완만한데 강우량의 70-80%가 장마철에 내리므로 여름철에 범람하는 것이 관례로 되어왔다. 그리하여 옛날 평양 동쪽 성천지방에 있던 릉라도가 통채로 떠내려와 평양 청류벽 아래에 물러앉았다는 전설까지 생겼다. 

북한은 남한보다 한발 늦은 1981년에 대동강 하구를 막기 시작했다. 1981년 5월 22일 김일성 주석은 대동강 하구에 남포갑문(1986년 9월에 서해갑문으로 개칭)을 건설할 것을 교시하였는데, 영산강 하구 갑문 건설에서 영향을 받았으리라 짐작된다. 그해 10월에 열린 당 중앙위 전원회의는 남포갑문을 1985년까지 완공할 것을 제기하였다. 10리(4km) 길의 영산강 하구 둑을 건설하는데 약 4년 걸렸는데 그 두배인 20리(8km) 길의 대동강 하구둑을 4년에 걸쳐 건설한다는 야심찬 계획이었다. 영산강 하구둑은 목포항을 바다쪽에 두고 건설한 것이라 화물선이 드나드는 갑실을 건설하지 않았는데, 남포갑문은 남포항에 배가 드나들도록 여러 개의 갑실을 건설하는 난공사여서 일반적으로는 10년이상 걸리는 공사였다. 여기에 북한식 "속도전"이 제시되었다. 남포갑문은 조석간만의 차가 심한 대동강 하구에 둑을 쌓아 27억톤의 물(민물)을 가두어 대동강의 수위를 3m정도 높이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래서 바다 수면과 강수면에 차이가 있어 갑실에는 입출구에 수문이 달려있고 갑실안의 물높이를 조절하기 위한 급수로와 배수로가 설치되었다. 배들은 갑실에서 승강기처럼 상하로 움직여 나간다. 북한은 이 남포갑문 공사를 엄청난 속도로 5년만에 해치워 1986년 6월에 완공하였다. 

<김정일 비서는 남포갑문 건설을 군대에 맡겼다>
북한은 남포갑문을 건설하면서 이 사업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평남도와 남포시 그리고 황해남북도의 농경지에 물을 충분히 대줄 수 있을 뿐 아니라 새로 건설되는 방대한 면적의 서해안 간석지 논이 풍년대지로 전변되게 된다. 그리고 대동강하류에 큰 인공저수지가 생김으로써 이 지대가 짠물과 해일 피해를 모르는 지대로, 공업용수와 음료수문제가 완전히 풀린 풍요한 대지로 전변되게 된다. 그리고 대동강이 대운하로 변모되여 남포항과 송림항에 크고 작은 배들이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게 되고 남포로부터 시작하여 순천과 덕천, 재령에 이르는 공업지대들과 알곡생산지대들이 하나의 운하로 연결되여 내륙지대 수상운수의 전망이 열리게 되며 우리나라 철도에 새로운 서해안 윤환선이 형성되어 철도운수가 크게 발전하게 된다. 이렇듯 대동강이 거대한 인공저수지로, 대운하로 전변되면 언제나 맑고 깨끗한 물이 차 있어 대동강 연안의 풍치는 더욱 아름다워질 것이다. 어디 가나 잔교만 놓으면 부두가 되고 또 수영장을 만들 수 있으며 도처에 근로자들을 위한 휴양소와 정양소, 소년단야영소들이 일떠서고 물밑으로는 숭어와 잉어, 뱀장어 등 물고기들이 떼 지어 흐르게 된다."(노동신문 1981년 10월 14일)

남포갑문을 통한 대동강 치수사업이 풍년을 가져오고 산업과 운수를 일으키고 문화생활을 보장하는 모습을 그렸다고 하겠다.

남포갑문 건설의 현장 지휘는 김정일 비서가 맡았다. 그는 1980년 10월 6차 당대회에서 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상무위원, 당 중앙위원회 비서, 당 중앙군사위원으로 선출되면서 후계자로서 지위가 확정되었는데 익명인 "영광스러운 당중앙"으로 노동신문 등에 표현되다가 공식 호칭이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로 되었다. 남포갑문 건설은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 김정일 비서가 그 지도력을 발휘할 첫 대형 사업이었다. 그는 남포갑문 건설을 인민군대에 맡겼다. 인민군대가 설계부터 완공까지 건설의 책임을 맡은 것은 남포갑문이 처음이었다. 2000년대까지 이어진 김정일식 경제건설의 시작이 남포갑문 건설이었다고 할 수 있다. 내각 조직을 통해서보다는 군대가 중심이 되고 전당과 전국가조직 그리고 전인민(전당, 전국, 전민) 속에서 건설자들을 동원하는 경제건설방식이 이 때부터 진행되었다.

군인들은 "절대성"과 "무조건성"에 익숙하다. 지시를 받은 군인에게는 "알았습니다"라는 오직 하나의 대답만이 있다. 식수 운반차가 목재 수송에 돌려져 마실 물이 부족하여 밥을 짓지못하자 석달이나 바닷물로 <소금밥>을 해먹고 바다에서 세면과 빨래를 하면서 "속도전"을 해댔다. 김정은 비서는 김일성 주석이 과거에 했던 것처럼 남포 천리마구역 강선제강소를 찾아 강선의 노동자들에게 호소하여 <소금밥> 문제를 해결하였다. 인민에 의거하지만 현실에서는 군대에 의거하고 인민의 헌신을 요구하는 방식, 당에 대한 무조건적인 충성을 인민대중의 자발성으로 이해한 것이 김정일 비서의 정치였다. 김정일은 김일성과 달리 인민대중 속에서 연설을 하지 않았다. 그 첫 실험이 남포갑문 건설이었다. 그런데 결과는 성공이었다. 왜일까. 인민을 잘 만나서가 아닐까 싶다.

▲ 남포갑문 둑 공사 (노동신문 1982년 10월 23일)
▲ 남포갑문 둑 공사 (노동신문 1982년 10월 23일)

하구둑의 물막이 공사는 1983년 9월부터 "대형함형부재" 들을 제작하여 바다에 연속으로 가라앉히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대형함형부재에 대해 노동신문은 "높이가 고층주택을 방불케 하고 길이와 너비가 각각 수십 미터씩 되며 둘레와 밑바닥이 두터운 콩크리트벽으로 둘러 막힌 말그대로 뚜껑을 열어놓은 함처럼 생겨 바다의 한가운데서 갑문의 언제를 대신하게 된다. 바다에 가라앉힌 함형부재 안의 빈공간에 수만 입방메터의 돌을 다져넣고 그 위로 철길과 자동차 길을 건설하게 되면 그것은 그 어떤 파도나 자연적현상에도 끄떡하지 않는 만년 언제로 되는것이다"(노동신문 1983년 9월 6일) 라고 설명했다.  북한은 이를 "주체공법"이라고 불렀다. 김정일 비서는 군인들의 공사작업을 과학기술적으로 책임지고 지원하는 조직으로 <2월17일 과학자 돌격대>를 조직하였고 이들은 갑문 건설 현장에서 침식을 같이하였다.

▲ "대형함형부재"를 바다에 가라앉히는 작업(노동신문 1983년 9월 6일)
▲ "대형함형부재"를 바다에 가라앉히는 작업(노동신문 1983년 9월 6일)

남포갑문공사 건설자들은 주로 20대의 젊은 새세대였다. <16해상돌격대 잠수편대 2중대 1소대>의 20여명의 잠수공들은 소대장 이외 소대의 평균나이가 1984년 기준 스물살이었다. 그들은 남포갑문 건설장에 왔을 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입대한 청년군인들이었다. 그 청년들이 9kg이나 되는 철모자를 쓰고 32kg 잠수추를 달고 21kg잠수신을 신고 밧줄과 공기호스에 의지하여 수십 미터 바다 밑에서 세찬 물살과 싸우며 갑문의 기초를 쌓았다. 북한의 공식자료에는 남포갑문 공사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순직했는지 밝히지 않고 있으나 남포에 살던 분들은 참 많은 젊은 군인들이 목숨을 잃었다고 전한다. 그러고 보니 이들은 필자와 비슷한 세대다. 내가 북에서 태어났다면 남포갑문을 건설하는 현장에 있었을 것 같다. 그들이 남에서 태어났다면 산업역군이 되었거나 민주화 데모를 하거나 했겠다. 

▲ 남포갑문 군인 건설자들 (노동신문 1984년 1월 11일)
▲ 남포갑문 군인 건설자들 (노동신문 1984년 1월 11일)

김일성 주석은 1981년 5월 남포갑문 건설을 발기한 후 1984년 4월과 1985년 9월에 김정일 당비서와 함께 현지지도하였다. 김일성 주석은 남포갑문 건설로 해상운수가 급격히 발전하게 되기 때문에 남포항을 확장 개건할 것과 남포시를 훌륭한 항구문화도시로 만들 것을 교시하였다(노동신문 1985년 9월 20일).

▲ 남포갑문 건설을 현지지도하는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당비서 (노동신문 1985년 9월 20일)
▲ 남포갑문 건설을 현지지도하는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당비서 (노동신문 1985년 9월 20일)

1986년 2월 들어 남포갑문 공사의 핵심인 갑실과 회전다리 공사 설치가 성공했다. 갑실은 2만톤급, 5만톤급 화물선이 통과하는 수로이고 갑실 위에 철도와 도로를 연결하는 90도 회전다리가 당시 세계적으로 가장 긴 것이었다. 이 90도 회전다리 방식의 원형은 1911년에 일본이 완공한 압록강철교(현재의 압록강 단교)였는데 70년이 지나 북한 자신의 설계와 기술로 완성했다. 

▲ 남포갑문의 회전다리 설치 (노동신문 1986년 2월 16일)
▲ 남포갑문의 회전다리 설치 (노동신문 1986년 2월 16일)

이어 1986년 4월에는 대동강을 인공호수로 만든 마감물막이 공사가 완료했다. 수천수만년을 두고 흘러내리던 대동강물의 흐름이 멈추었다. 남포갑문은 바다로 흘러들어가려는 대동강물에게 "넌 바다로 그냥 못가, 여기서 모였다가 간석지로 가야 해" 라고 말하지 않았을까 싶다.

▲ 남포갑문의 마감물막이 공사 완료 모습 (노동신문 1986년 4월 19일)
▲ 남포갑문의 마감물막이 공사 완료 모습 (노동신문 1986년 4월 19일)

이윽고 1986년 6월에 남포갑문은 완공되었다. "어지간히 큰 산을 몇개나 통채로 바다에 옮겨쌓고도 매일 천여대의 대형화물차로 물동을 실어들여야 하는 방대한 공사"였고 "하루동안에 콘크리트치기를 무려 2만여㎥까지 하여 건설역사에 새기록을 세운" 남포갑문 이었다(노동신문 1986년 6월 15일). 그리고 단 한명의 외국기술자도 없이 북한의 과학자, 기술자들과 군인들이 공사를 진행하여 "100% 우리 설계, 우리 자재, 우리 기술, 우리 힘"으로 완공한 1980년대 "주체조선"의 기념비적 창조물이 되었다고 북한은 자랑하였다. 남포갑문은 3개의 갑실, 36개의 수문을 갖춘 하구 둑으로 그 위에 철도와 도로, 인도가 놓였다. 총공사비는 약 40억달러가 들었다고 한다.

▲ 남포갑문 전경 (노동신문 1986년 6월 19일)
▲ 남포갑문 전경 (노동신문 1986년 6월 19일)

1986년 6월 24일 남포갑문 준공식이 열렸다. 9월8일에는 서해갑문으로 개칭되었다. 

▲ 남포갑문 준공식 (노동신문 1986년 6월 25일)
▲ 남포갑문 준공식 (노동신문 1986년 6월 25일)
▲ 남포갑문의 해돋이 (노동신문 1986년 6월 26일)
▲ 남포갑문의 해돋이 (노동신문 1986년 6월 26일)

북한의 자랑이 된 서해갑문, 여기에 1989년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평양)에 참가하기 위해 남한에서 간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대표 임수경도 참관했다. 

▲ 서해갑문을 참관한 임수경 전대협 대표 (노동신문 1989년 7월 12일)
▲ 서해갑문을 참관한 임수경 전대협 대표 (노동신문 1989년 7월 12일)

<서해갑문의 성과 : 평안도와 황해도 연백평야까지 대동강물로 적시다>

▲서해갑문과 대동강 물길(붉은 점선)  황해도의 파란선은 산맥(필자 작성)
▲서해갑문과 대동강 물길(붉은 점선)  황해도의 파란선은 산맥(필자 작성)

서해갑문이 완공되면서 대동강은 크게 변하게 되었다. 담수호가 된 대동강으로 인해 남포시민들이 의외의 불편을 겪었다. 이전에는 대동강물과 서해바다물이 남포에서 합류하기에 소금기가 있어 간수를 받아 두부를 쉽게 만들 수 있었는데 서해갑문이 들어서 대동강의 염도가 급속히 낮아지면서 이제는 그러한 호사를 누리지 못하게 되었다. 

한편 좋은 점은 겨울철에 대동강이 얼 때 그 모습이 스케이트장처럼 고르고 매끈해졌다. 이전에는 밀물과 썰물의 영향으로 얼음장이 떠돌고 겹싸여 들쑥날쑥한 복잡한 모양새였는데 이제 대동강 위에서 빙상경기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서해의 개펄물(감탕물)이 대동강으로 올라오지 못하게 됨으로써 대동강 물이 맑아졌다. 남포 앞 대동강은 그전에는 1m깊이에 있는 물고기도 보이지 않더니 물이 맑아져 10m깊이에 있는 숭어떼도 보일 정도로 되었다고 한다(노동신문 1986년 7월 24일). 대동강 수위가 높아져 남포항과 송림항의 처리능력이 현저히 높아졌다. 남포항은 북한 최대의 무역항으로 성장했다. 그리고 사리원시까지 사실상의 운하로 연결되어 사리원이 항구도시가 되었다.

그리고 기상변화도 있었다. 대동강 수역이 넓어지면서 갑문건설이전에 비하여 겨울철에는 평년에 비하여 기온이 2-3도 올라가고 여름철에는 반대로 그만큼 더 내려가는 현상이 나타났다. 

남포항의 준설작업도 서해갑문 갑문 완성후 1989년까지 3년간 한 번도 하지 않아도 될 만큼 퇴적현상이 줄었다. 갑문 건설 전에는 바다에서 밀려들어온 뻘이 퇴적의 주범이었으나 이것이 막혔고 대동강 상류에 건설한 미림갑문과 봉화갑문, 성천갑문과 순천갑문 등이 토사유출을 막았기 때문이었다. 

서해갑문 건설의 최대의 목적은 가뭄과 홍수 대책, 그리고 농업용수 확보였다. 사실 벼농사에 적합한 강수량은 연간 1,000mm 이상인데 대동강 연안의 평안도-황해도 지역은 연간 800-1,000mm 정도도 벼농사보다는 밀 농사에 적합했다. 게다가 여름철 집중호우 특성으로 자연재해를 달고 사는 형편이었다. 물 문제 해결은 국가운영에 사활적인 과제였다. 그리고 밀보다는 쌀에 집념을 가진 우리 민족의 “쌀 사랑”때문에 적은 강수량에도 기어이 논을 풀고 물을 대려는 민심과 국가정책이 어우러져 대동강물을 퍼나르는 물길 공사에 다시 군인들과 기술자, 농민들이 달라붙었다. 

북한은 담수화한 대동강물을 우선 평안남도 남포시 온천군의 간척지, 강서군, 대동군, 증산군 등 평안남도 각군에 공급했다.

남포시 온천군에는 대규모 간척지가 조성되고 있었다. 여기에 대동강물을 공급하기 위해 서해갑문 근처에서 수로를 내어 광량만을 지나 온천군으로 뻗어가는 "간석지물길공사"가 추진되었다. 이 공사는 1989년 4월에 1단계 완공되었다. 그리고 수위가 높아진 대동강물을 강서군과 대동군, 증산군, 평원군 등 평안남도 각 군으로 보내는 양수사업도 진행되었다. 태성호에 대동강물을 퍼올려 태성호에서 온천군으로 물을 공급했다. 태성호의 물은 2000년대에 증산, 대동, 평원, 순천, 개천까지 160km자연흐름식 관개수로를 통해 흘러 들어가게 되었다. 

▲ 서해갑문에서 온천군 간석지로 가는 물길공사(왼쪽: 노동신문 1986년 2월 8일, 오른쪽: 노동신문 1988년 6월 17일))
▲ 서해갑문에서 온천군 간석지로 가는 물길공사(왼쪽: 노동신문 1986년 2월 8일, 오른쪽: 노동신문 1988년 6월 17일))
▲ 서해갑문-온천군 물길 2단계 준공 (노동신문 1990년 4월 12일)
▲ 서해갑문-온천군 물길 2단계 준공 (노동신문 1990년 4월 12일)
▲ 대동강물을 양수기로 태성호에 퍼올리는 기양(강서)지구관개관리소 (노동신문 1989년 3월 6일)
▲ 대동강물을 양수기로 태성호에 퍼올리는 기양(강서)지구관개관리소 (노동신문 1989년 3월 6일)

대동강물은 재령강을 통해 관개수로로 황해북도 송림시, 황주군과 사리원시, 봉산군으로 이어졌다. 황해남도도 대동강물을 기다리기는 마찬가지였다. 대동강에서 60km 관개수로를 건설해 황해남도 재령군, 안악군, 신천군의 평야에 물을 공급했다. 

▲ 대동강물로 모내기하는 신천군 벌판 (노동신문 1987년 5월 24일)
▲ 대동강물로 모내기하는 신천군 벌판 (노동신문 1987년 5월 24일)

대동강물을 신천과 재령 벌판을 지나 서쪽으로 삼천, 송화, 장연, 룡연군에 연결했다. 그리고 남쪽으로 초당 16톤씩 퍼올리는 양수기 힘으로 황해도 멸악산맥을 넘어 한쪽은 옹진군과 강령군으로 나아갔다.

▲ 서해갑문-태탄, 옹진 물길 준공 (노동신문 1993년 6월 12일)
▲ 서해갑문-태탄, 옹진 물길 준공 (노동신문 1993년 6월 12일)

다른 쪽은 멸악산맥의 은파호와 장수호를 거쳐 신원군과 해주시를 지나 첨단군, 연안군, 배천군의 연백평야로 이어나갔다. 산맥을 넘는 수로 공사와 양수장 건설은 군인들과 황해간석지 건설 종합기업소 노동자들, 그리고 재령군과 신원군 등의 협동농장원들이 담당했다. 1990년 4월에 대동강물이 멸악산맥의 장수호에 도달하면서 연백평야를 바라보게 되었다. 

▲ 서해갑문-장수호 물길 준공 (노동신문 1990년 4월 12일)
▲ 서해갑문-장수호 물길 준공 (노동신문 1990년 4월 12일)

이윽고 1990년 5월 연백평야에 대동강물이 도달했다. 산을 넘어 차가워진 대동강물이 연백평야에 공급되면서 농장에서는 낮에 더워진 논판의 물을 빼고 차거운 대동강물을 대줌으로써 고온의 피해를 막고 논벼의 생육을 더욱 왕성하게 하여 수확고가 높아졌다. 

"천리물길"로 이름 붙여진 황해남도의 대동강물길은 연백평야에서 예성강물과 합쳐졌다. 그리고 그 물은 강화도, 교동도 앞바다로 흘렀다. 대동강에서 멸악산맥을 넘은 물이 교동도 앞에서 한강에서 흘러나온 물과 합류한 것이다. 연백평야에 살던 농민들이 6.25전쟁 중에 피난 나와 정착한 교동도. 그곳은 대동강물이 산을 타고 넘어와 한강물과 만나는 곳이었다. 강화도 교동도 앞바다 그곳은 평양의 물과 서울의 물이 만나는 곳이다.

▲ 교동도 앞의 북한 연백평야 ⓒ블로그 '강화도팔각집'
▲ 교동도 앞의 북한 연백평야 ⓒ블로그 '강화도팔각집'

<서해갑문의 후과 : 환경을 생각하다>
서해갑문의 긍정적 역할은 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정체된 대동강물은 다시 오염되기 시작했다. 공업 농업 및 생활하수가 밀려들어오면서 생태계에 교란이 발생했다. 이는 남한의 영산강도 마찬가지였다. 해수유입을 통한 수질정화가 필요하다는 영산강인데 대동강도 그러한 상황일 수 있다. 유럽에서는 이미 1980년대부터 하구둑을 열어놓는 개방형 배수갑문으로 바꾸거나 기존의 방조제에 터널을 뚫어 해수를 유입시켜 담수호를 정화시키는 방식으로 대응하고 있다. 대동강의 수질정화문제는 평양-서울간의 협력사업으로 협의되기도 한 바 있다.

그리고 1980년대 건설한 관개수로는 양수장을 동반한 물길로 전력이 필요했다. 1990년대 후반이후 급속히 악화된 전력사정으로 양수장이 기능을 하지 못하면서 건설한 관개수로는 물이 제대로 다니지 못하였다. 북한은 2000년대에 양수기가 필요없는 자연흐름식 관개수로인 태성호-개천 물길을 건설한 바 있다. 그러나 이 물길도 태풍 등에 의해 둑이 무너지면 홍수로 이어지는 위험이 있다. 

북한의 자연재해는 북한의 문제가 아니라 한반도의 문제이다. 대동강이 흘러 한강과 만나 듯 남북이 만나 환경을 같이 보호하는 것이 시급하다.

 

※ 다음은 종결편으로 남포의 현재와 미래를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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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찬우 (테이쿄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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