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만강 넘어 대륙과 해양을 향한 라선을 바라보다 (下) : 두만강지역개발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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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만강 넘어 대륙과 해양을 향한 라선을 바라보다 (下) : 두만강지역개발의 꿈
  • 2020.10.28 09:00
  • by 이찬우 (테이쿄대학 교수)

두만강을 다시 생각하는 현대의 라선 
① 해방후 1980년대까지 라선의 변화

▲ 라진의 뒷산인 사향산에 올라 내려다본 라진 시가지, 라진만, 라진항 (2017년 필자 촬영)
▲ 라진의 뒷산인 사향산에 올라 내려다본 라진 시가지, 라진만, 라진항 (2017년 필자 촬영)

바다를 낀 라선(라진, 선봉)은 수산물은 물론이요 산이 많고 토질로 보아 목축과 콩, 감자 농사가 적합하다. 두만강 변에는 옥수수밭과 논이 펼쳐져 있다. 강변은 겨울에 모래바람이 심한데 이 문제만 없다면 사시사철 천혜의 농, 축, 수산 지역이다. 그래서인지 라진에서 먹은 냉면이나 쟁반국수에는 고기가 많이 들어있었다.

라진의 식당에서 나온 쟁반국수와 감자냉면 (2017년 필자 촬영)
▲ 라진의 식당에서 나온 쟁반국수와 감자냉면 (2017년 필자 촬영)

먼저 해방 전후 라선의 변화를 짚어본다. 해방 전에는 일본이 1931년에 만주국을 세운 이후 동해가 일본제국의 사실상 내해(内海)가 된 상태에서 만주-조선-일본의 경제통합을 위해 이른바 "만주국의 현관" 항구로 라진항이 건설되었다(1932년 8월 일본정부 각의결정). 동시에 라진시가지 건설을 위해 조선총독부가 1934년 6월 20일에 식민지 조선에서는 첫 도시계획법인 <조선시가지계획령>(총독부령 제18호)을 제정하고 그 첫 대상지역으로 라진을 선정하여 1935년부터 토지구획정비사업을 진행하면서, 장래 라진과 웅기를 통합하고 인구 30만명을 포용할 수 있는 계획을 추진한 바 있다. 사실 1990년대에 라진과 웅기(선봉)를 통합한 라진선봉시(라선시) 설립의 원래 구상은 해방 전에 조선 총독부가 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1940년대에는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으로 라진 개발은 멈춰지고 결국 일본이 패망하면서, 두만강 하구 변의 라진과 웅기가 일본의 통치에서 가장 먼저 벗어났다. 동해로 난 천혜의 부동항(不凍港)이며 중국 동북지역의 관문이었던 라진항의 기능은 변할 수밖에 없었다. 라진항을 통해 만주의 콩을 매년 수십만 톤 일본에 수출했고 또한 연간 5-6만 명이 라진항으로 만주를 드나들었었는데, 일본이 망해서 그 역할을 더는 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청진항도 마찬가지였지만 청진은 제철소 등 중공업 기반을 가진 20여만 인구의 도시로 성장해 있었던 반면에, 라진은 수산물가공공장, 콩을 원료로 한 장류 생산 공장 정도로 대규모 공장이 없었고 해방 전 약 4만 정도에 그쳤던 인구가 해방 후에는 일본인들이 빠져나가면서 3만 명 정도로 줄었다. 자연히 도시 기능이 쇠락하면서 국내 수송을 담당하는 철도와 항만 기능만 중시되었다. 참고로 1940년 인구통계를 보면 함경북도에서 청진이 약 20만 명, 성진 6.2만, 경성 주을 3.4만, 어랑 3.2만, 웅기 3.2만이었다(평양은 당시 약 29만 명, 서울은 약 94만 명). 

그리하여 1949년 2월에 라진시는 라진군으로 개편되었다. 말하자면 도시에서 농촌이 된 것이다. "라진시는 원래 일본제국주의가 만주를 침략하기 위하여 개설한 항구이였으나 해방 후에 그 역할이 변환되면서 현재는 시로서 독립할 만한 조건과 사업량을 가지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공식적인 설명이었다(최고인민회의에서 행정구역 개편에 관한 홍명희 부수상 보고, 노동신문 1949년 2월 1일). 라진시로 다시 복귀한 것은 1967년 8월이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해방 전까지 소련이 국경을 막았고 항일유격대들이나 밀항자들만 넘나들던 두만강 하류 15km 소련국경이 해방과 더불어 대신 열렸다. 라진을 중심으로 지리적으로 본다면 1920년대 이후 해방 전까지는 동만주-라진-일본의 두만강 종단축(남북축)만 있었고 청진-라진-핫산의 두만강 횡단축(동서축)이 없었는데 해방 후에는 반대로 되었다. 

해방 후에 이 두만강을 합법적으로 처음 넘어 소련으로 들어간 이들은 유학생들이었다. 1946년 9월 18일 오후 6시, 평양역에서 환송을 받고 기차로 출발한 이들이 청진에서도 큰 환송을 받은 후 두만강 국경을 넘기 위해 도착한 곳은 안중근 의병대가 1908년에 들이쳤던 홍의리였다. 이곳에 국경검역소가 있었고 이 검역소는 소련군이 관리했는데 이들 유학생들이 홍의에서 보낸 편지가 다음과 같이 노동신문에 실려있다.

"홍의는 대단히 한적한 촌락이 오나 우리들을 위하여 소를 잡고 멀리 웅기 라진에서까지 정당 사회단체학생 부녀들이 동원하여 와주신데 대하여서는 넘우도 황송하여 어찌할줄을 모르고있습니다. 국경이라 아침저녁으로는 일기가 좀 추우나 오이려 건강에는 퍽으나 유리합니다. 우리들을 위한 특별한 설비 알들한 걱정 붉은군대동무들에게는 거저거저 감격과 감사뿐입니다. 그런데 우수운 일은 식당에서 식사할 때에 식사의 방법과 절차를 몰라서 어리둥절하는 일이 각금 있습니다. 그리하여 식당에서 일하는 쏘련녀자동무들에게 각금 웃끼고합니다. 그날그날의 규률있는 문화적 생활을 체험하면서 우리는 지난날 너무도 그날그날이 무질서하였으며 개인주의적이었으며 자유주의적이었다는 것을 반성합니다. 우리조선도 하루바삐 쏘련과 같은 전인민이 잘살수있는 문화의 나라 진정한 민주주의적나라를 만들기 위하여 힘껏 배우겠습니다" (로동신문 1946년 10월 6일, 맞춤법은 원문 그대로 인용)

당시 해방 후 북한사람들에게 소련이란 존재가 어떤 것이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청진-라진-핫산의 두만강 횡단축이 철도로 연결된 것은 1960년대에 이르러서였다. 소련이 먼저 1952년 6.25 전쟁 중에 핫산에서 두만강을 건너 두만강역에 이르는 나무다리 철도(광궤)를 개통했다. 라선지역은 6.25 전쟁 기간 중에 점령되지 않은 지역이어서 도시시설이 파괴되지 않았고 라선 주민들은 남한 국군이나 유엔군을 한 명도 보지 못했다고 한다. 소련은 두만강 다리를 1959년에 철교로 바꾸었고 이 철교가 지금까지 <조러 우정의 다리>라는 이름으로 북한-러시아 사이에 유일한 육상 교통로로 되어있다. 

▲ 러시아 핫산 쪽에서 본 '조러 우정의 다리'(또는 조러친선교) 혼합궤도①	③ : 북한 표준궤(1435mm),  ② ④ : 러시아 광궤(1520mm)
▲ 러시아 핫산 쪽에서 본 '조러 우정의 다리'(또는 조러친선교) 혼합궤도①③ : 북한 표준궤(1435mm), ②④ : 러시아 광궤(1520mm)

북한은 1960년에 두만강역에서 홍의역에 이르는 9.5km 철로(표준궤)를 완공하여 핫산-두만강역(환적)-홍의-웅기-라진 사이(54km) 철도가 이어졌다. 라진-청진 구간 78km(청라선)는 1962년에 착공하여 65년에 완공되었다. 그 뒤 1973년에 철도 전기화가 이루어지고 1989년에는 러시아 광궤철도와 북한의 표준궤 철도의 혼합선(4궤도)이 청진까지 부설되었다. 이로써 소련은 웅기항(선봉항) 과 라진항 그리고 청진항에 철도 환적 없이 직접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소련은 1980년대에 라진항 제1 부두를 자국의 화학비료 수출 부두로 사용하였다. 

▲ (왼쪽) 1965년 청진-라진간 청라선 개통(증기기관차) (노동신문 1965년 6월 11일) (오른쪽) 1973년 청진-라진간 청라선 전기화(붉은기호 전기기관차) (노동신문 1973년 4월 16일)
▲ (왼쪽) 1976년의 라진역 (노동신문 1976년 8월 28일), (오른쪽) 라진항의 부두 상하역 작업 모습 (노동신문 1992년 9월 3일)
▲ 라진역 (2016년에 개조, 2017년 필자촬영)
▲ 라진역 (2016년에 개조, 2017년 필자촬영)
▲ 두만강역 (2017년 필자촬영)
▲ 두만강역 (2017년 필자촬영)

일본제국이 심혈을 기울여 건설했던 라진항은 수산 및 국내 해운수송 그리고 소련 화물의 중계수송 역할을 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국내 해운은 철도수송의 부담을 덜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었는데 예를 들어 서부지구에서 기차로 실려 온 광석, 무연탄 등을 흥남항에서 싣고 기차보다 빨리 곧바로 청진, 라진까지 수송하고 아오지 등 북부 탄전에서 캐내는 석탄을 흥남지구의 공장들에 공급하는 식이었다(노동신문 1966년 7월 28일). 그리고 라진항에 있는 라진조선소는 3천 톤급 화물선(목선)을 건조할 수 있었다.

▲ 라진조선소에서 배수량 3천톤급 화물선 건설(노동신문 1960년 3월 17일)
▲ 라진조선소에서 배수량 3천톤급 화물선 건설(노동신문 1960년 3월 17일)

라진항의 해운 관계 전문가를 육성하기 위한 교육기관이 들어서기 시작했는데 1950년에 해양 간부 양성소와 초급해양기술원 양성소가 세워졌고, 1956년에는 4년제 라진해양전문학교(항해과, 선박기관과)가 설립되었다. 1968년에 이를 격상하여 설립한 라진해운대학은 북한에서 유일한 해운대학이다. 

▲ 라진해운대학 항해학부의 항해실험실습 (노동신문 1979년 5월 17일)
▲ 라진해운대학 항해학부의 항해실험실습 (노동신문 1979년 5월 17일)

라진, 웅기 지역은 이와 같은 수송 분야를 빼면 1980년대까지 농, 축, 수산 부문이 중심이 되고 지방공업을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한가지 예외라면 웅기지역에 1970년대에 북한 최대의 원유가공기지인 승리화학공장(연간 원유 200만 톤 정제능력, 후에 연합기업소)과 여기에 전력을 공급하는 중유발전소(6.16화력발전소)를 소련의 지원으로 건설한 것이다. 소련이 제공하는 원유는 소련의 원유수송선에 실려 웅기항(선봉항) 앞바다에서 해저파이프를 통해 승리화학공장으로 보내졌다. 

▲ 승리화학공장을 현지지도하는 김일성 주석(노동신문 1981년 6월 12일)
▲ 승리화학공장을 현지지도하는 김일성 주석(노동신문 1981년 6월 12일)

라진, 웅기에서 농, 축, 수산 분야와 지방공업의 발전 방향은 1954년 7월과 1959년 3월에 있은 김일성 수상의 현지 지도에서 정해졌다. 59년 현지 지도 직후 열린 노동당 함경북도위원회 확대전원회의는 김일성 위원장이 함경북도 당간부들의 관료주의, 지방주의, 종파주의가 특히 농업 분야에서 해방 후 15년 동안 깨어지지 않았다고 맹렬히 비판하면서, 그 이유가 농촌에 "지난날 행세거리로 《혁명》을 한 멋쟁이들만 앉아있고 그들이 《혁명》을 했다는 간판만 팔아먹으면서 당정책을 성실하게 집행하지 않고 있기 때문"(노동신문 1959년 3월 26일)이라고 일갈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때 김일성 수상은 라진, 웅기의 농업협동조합에 대해서는 산간지역의 특성에 맞게 목축(젖소, 돼지, 양 사육)과 감자 생산을 장려하였고 수산부문과 생산협동조합을 포함한 지방공장 들을 통해 지방공업을 육성할 것을 지도하였다. 

당시 김일성 수상이 성공사례로 방문한 협동농장은 1954년에 조직된 라진군 무창 농업협동조합이었다. 무창 농업협동조합의 사례는 북한이 생각하는 <관료주의 병폐> 그리고 <타성>과 싸우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준다. 무창 농업협동조합에서는 1957년부터 지역 사정에 맞는 감자를 많이 심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도에서 군으로 내려 먹인 옥수수 (주; 북한에서는 옥수수를 강냉이라고 하지만 1970년대까지는 옥수수와 강냉이 명칭을 함께 썼다). 면적을 리에 일률적으로 할당한 <관료주의 병폐>, 그리고 과거부터 해오던 조(좁쌀) 농사를 계속하려는 일부 조합원들의 <타성>이 문제였다. 옥수수가 잘 되는 밭에는 옥수수를 심어야 하지만 감자가 유리한 밭에까지 일률적으로 옥수수를 내려 먹이는 관료들은 책벌을 받을까 무서워 보신주의 때문에 그리한 것이었다. 무창리 당위원회와 농업협동조합 간부들이 꺾이지 않고 조합원들을 잘 설득하고 유도하여 감자 농사와 축산으로 성공을 이루었다고 한다. 1957년에 조합이 농사지은 감자로 10여 톤의 쌀과 교환하여 조합원들에 분배한 것으로 조합원들이 감자 농사의 의미를 알고 1958년엔 감자 농사가 50%나 늘었다고 한다. 이를 모범으로 삼아 라진과 웅기에서는 목축과 감자농사, 옥수수, 쌀농사를 적지적작(適地適作;토지에 맞는 작물을 재배)의 원칙에서 융통적으로 실현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웅기군(1952년에 경흥군에서 분리)은 김일성 수상이 1959년 현지지도에서 제기한 방침 즉, "웅기군에서는 다양한 군내 농업협동조합들과 수산사업소, 수산협동조합들을 다 합쳐서 시험적으로 전 군을 한 개 국영농장으로 만들어 보자"에 따라 전국에서 처음으로 군 전체가 하나의 <군종합농장>으로 되었다. 실제로는 지방공업과 상업 부문까지 다 포괄하는 전국에서 유일한 군 단위 국영농장이 만들어져 2000년까지 40년간 이어졌다. 이는 1958년에 북한이 농업부문의 협동화를 완료한 시점에서 협동소유, 협동경리의 다음 단계가 전인민적 소유(국유, 국영경리)라는 사회주의 발전 방향을 실험적으로 해보려는 취지였다고 보인다. 그 후 국영농장은 목장, 과수원 등을 중심으로 한 종합농장이 몇 군데 생기지만 군단위에서 모든 생산단위를 포괄하는 종합농장은 <웅기군 종합농장>이 유일했다. 웅기군 명칭은 1981년에 선봉군으로 바뀌었다. 선봉군에서는 1989년까지 30년간 군 안의 9,000 정보의 늪과 습지, 모래언덕, 산을 정리 개간하여 배수로를 치고 방풍림을 조성하고 방목지, 양어장 등을 조성하여 젖소, 오리, 물고기를 길러서 1959년에 비해 비하여 고기생산이 7.3배, 양식 물고기생산이 16배, 우유 생산이 95배로 증가하였다고 한다.

▲ 선봉군 우암리 젖소목장 (노동신문 1989년 3월 27일)
▲ 선봉군 우암리 젖소목장 (노동신문 1989년 3월 27일)
▲선봉읍의 변화 (노동신문 1991년 8월 18일)
▲선봉읍의 변화 (노동신문 1991년 8월 18일)

수산분야에서는 1940년 이후 13년간 동해 북한해역에서 자취를 감추었던 정어리 떼가 1953년부터 다시 회유를 시작하여 라선의 수산업 활황으로 이어졌다. 1930년대에 청진항과 라진항은 정어리 풍어로 일대 황금기를 맞은 적이 있었다. 정어리는 식용, 화학 공업 원료 등으로 사용되는데 정어리는 지방질이 고등어보다도 약 4배나 더 많은 식품이다. 그리고 정어리 기름으로 글리세린을 만들어 이에 화학작용을 가하면 폭발력이 강한 화약을 제조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각종 약품과 화장품, 양초, 비누의 원료가 된다. 또한 어분을 만들어 이 어분에서 사료와 비료를 생산하는 만능 원료이다. 1953년 이후 1980년대까지 동해의 어획은 정어리 회유의 시기에 따라 부침을 하는데 대략 60년대 중반-70년대 중반, 80년대 중반 이후 90년대에 어획량이 줄었다. 

지방공업은 지방 자체의 원료를 가지고 소비품을 생산하는 것이 기본인데, 도내의 중앙기업이 설비 등을 지원하는 형태로 육성되었다. 한 예로 라진종이공장은 포장지 정도만 생산하던 수준이었는데 성진제강소의 절단기, 농축기 등 설비 지원을 받아 필기용지와 신문지도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노동신문 1966년 12월 6일). 라진의 대표적인 지방공장으로는 당시로써는 혁신적으로 소음이 없고 쓰기 간편한 전기이발기를 생산한 라진철제일용품공장, 수산식품을 생산하는 라진물고기가공공장, 라진장공장, 라진지방공업종합공장(화학일용품, 수지일용품, 유리, 모피 등) 등이 있었다. 라진에도 생산협동조합들이 생겨났는데 라진가구생산협동조합이 대표적이고 사금을 채굴하던 <라진락산 사금생산협동조합>도 있었다. 그리고 도시지구(동, 노동자구)의 인민반원 들 중심으로 구성된 가내생산협동조합들이 어디나 있었다. 

▲ (왼쪽) 라진철제일용품공장의 전기이발기 생산 (1966년 5월 24일) (오른쪽) 라진물고기가공공장의 생산설비(노동신문 1970년 10월 24일)
▲ (왼쪽) 라진철제일용품공장의 전기이발기 생산 (1966년 5월 24일) (오른쪽) 라진물고기가공공장의 생산설비(노동신문 1970년 10월 24일)

상업 서비스로는 철도 복무원들의 곽밥(도시락) 영업을 빼놓을 수 없다. 청진철도국 라진영업소는 라선의 유명한 청학동 약수 공급과 함께 특산물로 만든 도시락을 판매하였다. 노동신문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려있다.

"판매원 오연희동무는 푸짐한 곽밥을 다 공급하고 뒤따라 청량음료를 공급하려다가 바로 앞의 식탁에서 곽밥의 찬들을 밀어놓고 한 아주머니가 내놓은 반찬을 맛있게 드는것을 보게 되였다. 그것은 집에서도 입맛을 당기게 하느라고 가끔 밥상에 올려놓군하던 불깃불깃하고 보기에도 먹음직한 방게 반찬이였다. - 이 고장 특산물이며 손님들이 저렇게 좋아하는 방게 반찬을 렬차에 올릴 생각은 왜 못했을가. 그는 퇴근길에 바다가 도래굽이로 나가 저녁 늦도록 방게잡이를 한것은 연희동무만이 아니였다. 영업소에서는 이 사실을 좋은 본보기로 하여 자체의 힘으로 지방의 특산물과 원료원천을 더 많이 탐구동원하기 위한 투쟁을 힘있게 벌렸다. 이와 함께 해당기관과의 련계를 강화하여 지방의 특산물을 비롯한 여러가지 부식물을 철따라 확보하고 계획적으로 주방에 공급해주게 되니 반찬의 질은 더욱 높아지고 봉사활동도 잘되여나갔다." (노동신문 1977년 11월 4일, 맞춤법은 원문 그대로 인용)

▲ 라선 원정리 근처의 청학 약수장 (2017년 필자 촬영)
▲ 라선 원정리 근처의 청학 약수장 (2017년 필자 촬영)

1980년대까지 라선(라진, 선봉)은 대외적으로는 소련과 연계하면서 승리화학공장이라는 원유정제공장도 생기고 소련의 무역선도 다녔지만, 국내적으로는 철도 및 해운 수송, 협동농장과 수산협동조합, 생산협동조합, 지방산업공장이라는 기층 생산단위가 중심이 된 소박한 국경도시였다. 라선의 인구는 1980년대 말에도 10만 명 정도의 인구였다. 라진항이나 라진역사는 일제시대 모습에서 거의 변하지 않았다. 두만강은 그저 국경이었고 두만강 너머는 심리적으로 멀어졌다.

그러다 소련의 붕괴와 함께 1990년대 대격변의 시대를 맞아 라선은 근본적인 변화와 함께 새 출발을 한다. 

 

※ 다음 호 두만강 넘어 대륙과 해양을 향한 라선을 바라보다 (종결) 은 라선경제특구의 탄생과 새출발을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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