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를 잇는 항구도시 남포를 바라보다 (下-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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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를 잇는 항구도시 남포를 바라보다 (下-1)
대동강은 한강으로 흐른다
  • 2021.01.27 09:00
  • by 이찬우 (테이쿄대학 교수)

고향이 옆 동네인 안창호와 김일성 그리고 손정도

▲남포(이미지 : 구글어스)

평안남도 강서군 초리면의 대동강 도롱섬(현 남포시 천리마구역). 도산 안창호의 출생지다. 강서군의 안창호(1878-1938) 집안과 황해도 해주의 안중근(1879-1910) 집안은 순흥 안씨로 먼 친척뻘이었는데 진남포에서 인연이 맺어졌다. 안창호가 미국 유학에서 1907년 귀국하여 애국계몽운동에 앞장서면서 서울, 평양 등에서 강연집회를 열었는데 진남포로 이사 온 안중근이 안창호 강연집회를 개최하였다. 그 당시 도산 안창호의 연설을 듣고 감동받아 독립운동에 투신한 사람들 중에는 몽양 여운형(출생:경기도 양평군)과 고당 조만식(출생:강서군 반석면- 현 증산군) 이 있었다. 안중근의 동생 정근(1885-1949)도 후에 안창호의 측근으로 활동하였다. 

안창호는 1907년 기독교인들을 기반으로 신민회(新民會)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했다. 이를 통해 교육, 계몽 강연, 언론, 산업육성 등의 활동을 벌였는데 양기탁, 윤치호, 전덕기, 유길준, 이동휘, 이회영, 이승훈, 신채호, 김구 같은 당대의 지사들이 참여했다. 한일병합 후 안창호는 1913년에 흥사단을 설립하였고 1920년대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구성과 독립노선의 통합에 힘썼다.  

▲ 안창호 왼쪽의 여운형 오른쪽의 조만식 두 사람은 안창호의 말년까지 함께 했다. (자료 : 몽양 여운형 기념사업회)
▲ 안창호 왼쪽의 여운형 오른쪽의 조만식 두 사람은 안창호의 말년까지 함께 했다. (자료 : 몽양 여운형 기념사업회)
▲ 안정근 가족과 안창호 뒷줄 왼쪽부터 안창호, 앞줄 왼쪽부터 안정근, 3녀 옥생, 장남 원생, 부인 이정서, 차녀 미생 (자료 : 역사인)
▲ 안정근 가족과 안창호 뒷줄 왼쪽부터 안창호, 앞줄 왼쪽부터 안정근, 3녀 옥생, 장남 원생, 부인 이정서, 차녀 미생 (자료 : 역사인)

당시 안창호의 독립운동 배경에는 기독교가 있었다. 19세기 말부터 평안도지역은 기독교가 왕성했고 한반도 전역으로 퍼지면서 민족적 각성과 독립운동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김일성의 어머니 강반석(1892-1932)도 기독교인이었던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이름도 예수의 제자 베드로를 뜻하는 "반석"이다. 강반석의 아버지 강돈욱(1871-1943)은 평남 대동군 용산면 하리(현 평양 만경대구역 칠골동) 출신으로 칠골교회 장로였고, 칠골교회 교인들을 중심으로 민족교육을 위한 창덕학교를 1907년에 설립하여 교감으로 일했다(1909년 설도 있음). 칠골의 옆 동네인 만경대 출신인 김형직(1894-1926)도 기독교 신자로서 1908년에 강반석과 결혼하였는데 김일성(김성주)이 태어나던 1912년에 김형직은 기독교 계통의 평양 숭실학교를 다녔다. 김일성의 부모는 기독교의 영향을 받았고 김일성은 11살인 1923년부터 1925년까지 2년 동안 창덕학교에 다녔다. 이때 김일성을 가르친 선생은 외조부 강돈욱의 6촌 동생 강량욱(1903-1983)이었다. 김일성의 외종조부가 되는 강량욱은 숭실학교를 졸업하였고 후에 목사가 되어 해방 후 북한에서 북조선기독교연맹위원장, 조선민주당 위원장, 부주석 등을 하였다. 

여기서는 안창호와 김일성 그리고 손정도 목사의 관계를 들여다본다.
먼저 손정도 목사와 김일성의 관계다. 김형직을 매개로 한 관계인데 남한에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지만 북한에서 모르면 북한사람이 아니다. 손정도(1882?-1931)는 남포 위에 있는 강서군 증산면(현 증산군 중산읍)이 고향으로 김형직과는 숭실학교 동문이다. 손정도는 1909년 진남포 신흥리 교회에서 전도사로 일할 때 장남 손원일을 낳았는데 그가 나중에 한국의 초대 해군참모총장이 되었다. 차남 손원태는 1914년 서울 정동교회 목사일 때 태어났다. 손정도는 1919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하였는데 김형직과 함께 정의부 소속으로 활동을 한 것으로 보인다. 평양에 있던 김일성은 1925년 아버지 김형직을 찾아 만주로 가서 1926년에 길림성 화전에 있는 정의부 소속의 화성의숙(교장 최동오)에 다녔다. 여기엔 동학의 천도교인들이 많았다고 한다. 김형직이 사망한 후1927년에 김일성은 손정도 목사가 있는 길림시로 갔는데 손원태와 함께 길림육문중학교에 다녔다. 손정도 목사는 김형직의 아들인 김일성을 친아들처럼 돌보았고 김일성이 길림 감옥에 갇혔을 때 구해내기도 해서 북한에서는 "김일성 수령의 생명의 은인"이라 부르며, 김일성도 회고록에서 "손정도 목사는 비록 나와 사상은 달랐지만, 참으로 민족을 위해 헌신한 애국자"라고 평했다. 손원태는 후에 서울의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이민을 갔는데, 1991년에 북한을 방문하고  <내가 만난 김성주-김일성>라는 회고록을 써서 김일성이 "가짜"가 아님을 증언했다. 

▲ (왼쪽) 손정도 목사의 장남 손원일 해군제독, (오른쪽) 차남 손원태 박사의 회고록
▲ (왼쪽) 손정도 목사의 장남 손원일 해군제독, (오른쪽) 차남 손원태 박사의 회고록

다음으로 안창호와 김일성의 관계다. 
안창호는 1920년대 중반부터 조선인 이민자들의 정착촌 겸 독립운동 근거지 건설과 재원 조달 등을 목적으로 <민족적 이상촌>을 건설하려고 중국 길림성 지역을 여행했다. 김일성 회고록에는 1927년에 2월, 49세의 안창호가 길림을 방문하여 "조선민족운동의 장래"라는 주제로 강연을 한때의 이야기가 있다. 당시 15세인 김일성(김성주)은 안창호가 실력양성론만 반복하였는데 자신이 보낸 질문지 내용에 당황하여 급히 자리를 떴다고 쓰여있다. 질문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고 한다.

-산업과 교육을 진흥시켜 조선민족의 실력을 배양해야 한다고 했는데 나라를 일제놈들에게 통째로 빼앗긴 조건에서 그것이 이루어질 수 있는가?
-우리 민족을 정신수양이 낮은 민족이라고 했는데 어떤 점이 그러한가?
-연사가 말하는 열강이란 미국이나 영국 같은 나라들인데 과연 우리가 그들을 본받아야 하는가? 또 우리가 그들의 "원조"에 의해서 독립을 가져올 수 있는가?

안창호의 운동을 민족 능력을 비하하는 실력양성론, 민족개량주의로 비판한 것인데 이 시기 안창호는 실력양성과 함께 반일 군사단체의 통일과 대독립당 결성을 추진하고 있었다. 김일성의 입장에서 안창호의 위상을 평가하는 것이지만 그러한 김일성도 안창호의 인품과 실력은 인정한다고 하였다. 김일성은 회고록에 "안창호도 조선사람이고 조선의 독립을 위해 투쟁하는 애국지사"로 평하였다.

그리고 안창호와 손정도의 관계다.
1920년대 만주에 있던 손정도 목사는 안창호의 설득에 감화되어 흥사단에 입단하고 안창호가 추진한 <민족적 이상촌> 건설을 함께 추진했다. 손정도는 안창호의 노선을 지지했다. 1927년 2월 안창호가 길림에서 강연하던 중에 중국경찰에 체포 구속되었을 때, 손정도는 중국당국에 항의하고 교섭하여 석방시키는데 앞장섰다. 김일성이 안창호에게 질문지를 내밀어 당황케 했다는 그 강연이었다. 

이후 손정도는 1927년 4월 협동조합 성격의 농민호조사(農民互助社)를 결성했다. 농민호조사 결성은 경제자립과 독립운동의 안정적인 기반을 만들려는 안창호의 <민족적 이상촌> 건설 운동의 일환이었다. 농민호조사는 농민들의 출자금과 저축을 기금으로 토지를 매수하여 신농촌을 건설하고 출자액에 기준하여 성과금을 분배하는 방식이었다. 이를 위해 동생 손경도의 명의로 길림성과 흑룡강성의 경계에 있는 액목현 경박호 일대에 땅을 매입하였다. 학교와 농민은행을 세우고 조선인 권익보호에 힘썼다. 그러던 중 손정도 목사는 건강을 해쳐 1931년 2월 길림시에서 사망했다.

▲ (왼쪽)도산 안창호와 (오른쪽)손정도 목사 (자료 : 흥사단)
▲ (왼쪽)도산 안창호와 (오른쪽)손정도 목사 (자료 : 흥사단)

안창호와 김일성 그리고 손정도의 관계는 독립을 추구했던 민족운동내의 인간관계를 보여준다. 
안창호는 1932년 윤봉길의 상해 홍구공원 의거에 연루되어 구속된 후 1935년에 출옥한 후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고향 근처인 강서군 대보면에 있는 대보산 밑에 8칸짜리 <송태산장>을 짓고 동지들을 불러 토론하고 연설하면서 지냈다. 부자들이 짓고 산다는 "산장"이란 이름 때문에 오해를 샀지만, 일제의 의심을 피하기 위한 방도였다. 김일성의 출생지 언덕인 만경대가 지척에 보이는 곳이었다. 웅기(선봉) 출신의 목사 송창근, 강서군 출신의 최능진, 평양 출신의 주요한 등 수양동우회 회원들이 드나들었다. 

▲ 안창호가 정착한 대보산 송태산장 (현 남포시 천리마 구역) (자료 : 도산 안창호선생 기념사업회)
▲ 안창호가 정착한 대보산 송태산장 (현 남포시 천리마 구역) (자료 : 도산 안창호선생 기념사업회)

안창호는 송태산장의 남쪽 달마산 아래 대동강변에 이상촌(달마부락)을 건설할 계획을 세웠다. 직업교육과 실업을 결합한 방식으로 덴마크의 그룬트비(1783-1872)가 추진한 국민고등학교 운동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이상촌의 내용으로 교통정비, 토지 비옥, 200호정도 집단부락, 상하수도 정비, 공회당, 금융기관, 협동조합, 직업학교, 병원, 여관, 운동장 등 편의시설 설치, 축산업, 원예업 육성 등을 통한 소득증대 등이 있었다. 그러나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안창호는 구속되고 고문 후유증으로 1938년 사망하면서 달마부락 (현 남포시 천리마구역)에서의 이상촌 건설 구상은 실현되지 못하였다.

안창호에게는 안신호(1884-1963)라는 누이동생이 있었다. 안신호는 김구의 첫사랑으로 결혼까지 약속하였는데 안창호가 안신호를 기독교인에게 시집보냈다. 그녀는 해방 전후 진남포에 살았다. 고향 근처였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녀는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살았다. 그런 안신호를 해방 후 김일성이 찾아 남포시 민주여성동맹위원장, 그리고 조선민주여성동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에 임명했다. 김일성은 회고록에서 "안신호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곧 안창호에 대한 믿음이었다"라고 썼다. 1948년 4월 남북협상을 위해 칠순 노인이 된 김구가 평양을 방문하였을 때 환영 나온 이 중에는 50년 전에 헤어진 안신호가 있었다. 

남포는 자원수탈형 식민지 지배의 거점이기도 했지만 도산 안창호의 <민족적 이상촌> 건설을 모색했던 곳이기도 했다. 북한의 현대사에는 기독교계통 인사들의 민족운동이 저류에 흐르고 있다. 역사는 그 모든 움직임의 결합체이다. 기독교 사회운동의 흐름은 해방 후 사회주의와 대결하면서 패배하고 남한으로 이동하였고 6.25전쟁에서 미국의 폭격 등 참상을 겪으면서 지워지고 잊혔다. 

다음 "서해를 잇는 항구도시 남포를 바라보다 (下-2)"는 해방이후 남포의 사회경제적 변화를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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