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롭고 의로운 땅"으로 다시 서는 신의주를 바라보다(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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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고 의로운 땅"으로 다시 서는 신의주를 바라보다(上)
압록강이 부르는 새 동북아 평화경제의 꿈
  • 2020.11.18 09:00
  • by 이찬우 (테이쿄대학 교수)

압록강은 경계선이면서 민족의 원류(源流)

신의주 하면 왠지 "신의주 찹쌀순대"가 생각나는데 정작 신의주의 전통요리에 순대요리는 없다고 한다. 대신 신의주에는 바다의 물고기나 새우젓, 그리고 콩, 밀 등을 원료로 한 음식이 많았고 특히 북한음식의 대표 격인 왕만두가 유명하다. 신의주에 가서 원조 왕만두를 먹을 날을 상상하며 연재를 시작한다.

신의주는 압록강의 하구 근처에 있고 인구 약 36만 명으로 북한 쪽 압록강변에서 가장 큰 도시다. 압록강이 없다면 신의주도 없다. 

▲ 평안도지방 만두요리 (왼쪽) 만두국, (오른쪽) 찐만두 ⓒ조선료리
▲ 평안도지방 만두요리 (왼쪽) 만두국, (오른쪽) 찐만두 ⓒ조선료리
▲압록강 상공에서 본 신의주(왼쪽) (2006년 3월 필자 촬영)
▲압록강 상공에서 본 신의주(왼쪽) (2006년 3월 필자 촬영)

압록강은 백두산 천지 바로 밑에서 흘러나와 중국과 국경을 이루면서 한반도에서 가장 길게 790km를 달려 서해로 흘러 드는 강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안다. 그리고 압록강의 이름이 압록인 것은 오리 압(鴨)에 푸를 록(緑)자라 푸른 강물에 오리가 노닐고 있는 모습이 연상되고 실제 그런 모습이 있으니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중국에서 편찬된 <신당서新唐書(1060년)>〈고구려전高句麗傳〉에도 "물빛이 오리의 머리색과 같아 압록수라 불린다(色若鴨頭 號鴨淥水)"라고 쓰여 있다. 그러나 지명의 유래가 꼭 한 가지만은 아니고 별칭도 많다. 별칭으로는 패수(浿水), 엄리대수(奄利大水), 청하(靑河) 등이 있고 압록의 이름 유래 중에는, 중국어 발음인 야루(Yalu)가 만주어로 "경계"를 뜻하는 야루(Yalu)에서 유래했다는 어원설도 있다. 한편, 고대 역사서에 나오는 압록강이 지금의 압록강이 아니라 중국 요녕성에 있는 요하(遼河)라는 설도 있다. 

푸른 강이라 고구려 시대에 청하(靑河)로 불린 압록강은 5세기 초까지 수도였던 국내성(지금의 중국 길림성 집안현集安県)의 앞을 흐르는 국내 하천이었다. 서울의 한강처럼, 경계가 아니라 나라의 중앙을 흐르는 강이었다. 이리 생각하고 한반도 민족 형성의 시원을 따지면 압록강은 경계의 강이 아니라 원류라고 할 수 있다. 만주와 한반도는 원래 하나의 무대이고 그 중앙에 압록강이 흘렀다. 

고려말 이성계는 요동 땅을 정벌하러 북진하다 압록강 위화도에서 군사를 되돌려(위화도 회군)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개국했다. 압록강을 명백한 "경계"로 만든 건 조선왕조를 개국한 조상들이다. 

오늘 우리에게 경계선으로 각인된 압록강은 그래도 여전히 푸르고 오리들이 노닌다. 

압록강 하구 가까이에 신의주, 왜 거기에 있나

이 압록강 하구 가까이에 신의주(新義州)가 있다. 의주 옆에 새로 건설했다고 해서 신의주다. 통군정(統軍亭)이 있는 의주는 조선왕조시대의 국경 관문이고 연암 박지원이 1780년에 사신들과 함께 중국을 방문하면서 쓴 <열하일기>가 시작되는 곳이다. 그런 의주를 옆에 두고 따로 신의주를 건설한 이들은 누구이며 언제인가? 일본제국이 1904년 러시아와 전쟁 (러일전쟁; 1904.2~1905.9)을 일으키면서 경의선(서울-신의주)을 급조하고 1905년에 신의주라고 명명하였다는 게 답이다. 이때 일본제국은 압록강 하구변의 저지대에 제방을 쌓아 신의주역과 시가지(의주군 신의주동)를 조성하고, 중국 쪽으로는 안동(지금의 단동)에서 봉천(지금의 심양)으로 이어지는 안봉선 군사용 협궤철도를 건설했다. 그래서 한반도의 신의주와 중국의 안동(단동)은 처음부터 한 세트로서 일본제국이 철도를 통해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으로 대륙을 침탈하려는 시도로 개발하는 곳이 되었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안봉선 협궤철도를 표준궤 철도로 개편하고 압록강에 철교를 놓았으며 대한제국을 병합하였다. 신의주는 일본 제국주의의 상징 도시였고 그 힘의 바로미터였다. 일제시대에 들어 1914년에 신의주동은 신의주부(府)로 개편, 승격했고 1924년에는 의주군에 있는 평안북도청이 신의주부로 옮겨왔다. 일제시기말 약 6만 인구로 커진 신의주는 해방후에 신의주시로 개칭되었다.  

한반도와 대륙을 잇는 철도의 관문 신의주의 근대 역사는 일본제국의 식민 역사로 시작되었지만, 그 속에서도 근대정신을 추구한 능동적인 사람들의 삶이 있었다. 신의주 사람들 속에는 개방적이고 적극적이며 국제적인 시야를 가지고 민족의 앞길을 열어간 분들이 많다. 신의주 옆 용천이 고향인 함석헌 선생도 그런 분들 중 한 분이었다. 

신의주가 "새롭게 의로운 땅"이 되는 길

근대 시대 신의주에는 기독교 인구가 많았다. 중국과 연결된 지리적 이점과, 선교사들의 포교, 조선인 신자들의 선교활동 덕분에 신의주는 일본에 저항하는 민족적 기독교 신앙의 중심지로 부상했다. 기독교인들에게 신의주는 한자이름 그대로 "새롭게 의로운 땅"이었을 것이다. 이런 점 때문에 해방 후 신의주에서 기독교 세력은 공산주의 세력과 크게 대립했고, 남한사회에 내려와서 반공주의를 확립하는 데 앞장섰다. 유명한 "서북청년단"은 신의주와 평양 출신 기독교 청년들이 중심이었다. 

그런 신의주가 6.25전쟁을 겪으면서 폐허가 되었고 복구를 거쳐 다시 고난의 행군을 경험했다. 2000년대 이후에는 중국의 경제 발전과 함께 신의주를 통한 무역과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신의주는 북한의 경제발전을 끌고 가는 새로운 공간이었다. 북한당국은 중국의 투자에 신의주 건설을 맡기는 방식을 취하기도 했다가 다시 자신의 힘으로 경제특구를 건설하겠다고 방향선회를 했다. 1990년대 이후 성장과 생활 수준이 멈춰 있던 신의주는 최근 몇 년 사이에 새 건물들이 많이 들어서고 남신의주 개발이 이루어지는 등 새로운 도시건설이 진행 중이다. 신의주 사람들의 얼굴에도 그림자보다는 희망이 커졌다. 하지만 아직 갈 길이 먼 것 같다. 가령, 2015년에 완공된 <조중압록강대교>는 아직도 개통을 못 하고 있다. 

그래도 북한이 그리는 미래에 신의주가 다시 "새롭게 의로운 땅"이 될 것으로 기대를 가진다. 그 미래는 과거의 침탈의 경제를 넘어 동북아에 평화의 경제를 가져오는 때이다. 

▲단동에서 바라본 신의주 (2019년 12월 필자 촬영)
▲단동에서 바라본 신의주 (2019년 12월 필자 촬영)
▲신의주시의 신축건물들 (2019년 12월 필자 촬영)
▲신의주시의 신축건물들 (2019년 12월 필자 촬영)

이제 이 압록강의 신의주가 만들어낼 동북아 평화경제를 생각하면서 근대 이후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 꿈꾸는 평화경제 도시 신의주의 모습을 그려보고자 한다. 

다음 호 신의주를 바라보다(中)는 근대 이후 해방 전까지의 신의주를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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