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롭고 의로운 땅"으로 다시 서는 신의주를 바라보다 (종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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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고 의로운 땅"으로 다시 서는 신의주를 바라보다 (종결)
압록강이 부르는 새 동북아 평화경제의 꿈
  • 2020.12.23 09:30
  • by 이찬우 (테이쿄대학 교수)
▲ 신의주 지도 (필자 작성)
▲ 신의주 지도 (필자 작성)

1. 김정일 시대의 신의주 새로 만들기 – 경제가 어려울 때 중국을 어떻게 볼 것인가

1-1) 2000년대 경제특구 개발 노력과 아쉬움

18년 전인 2002년 9월 초였다. 북한의 김용술 무역성 부상 겸 대외경제협력추진위원회 위원장(당시)을 단장으로 한 비공식 방문단이 일본을 방문했을 때 도쿄에서 열린 간담회에 참석한 적이 있다. 시기적으로 북한에서 <경제관리개선조치(7.1조치)>가 발표된 후였고 또한 고이즈미 총리(당시)가 평양을 방문하여 북일평양선언(9월 17일)을 하기 전이어서 김용술 무역성 부상의 언행에 관심이 높았다. 김 부상은 북한의 경제정책에 대한 간담회에서 "조만간 깜짝 놀랄 정도의 개방정책이 발표될 것"이라는 귀띔을 해주었다. 

김 부상이 귀국한 뒤인 9월 12일에 그 깜짝 놀랄 정책이 북한에서 발표되었다. 신의주를 경제특구로 지정한 것이었다. 북한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 정령을 통해 남신의주지역을 제외한 북신의주 지역과 위화도, 유초도, 의주지역 일부, 철산군, 및 염주군 일부 해안지역을 포함하여 총면적 132km2의 신의주특별행정구를 지정하고 신의주특별행정구 기본법을 채택하였다. 이어 23일에는 그 김용술 무역성 부상과 네덜란드 국적의 화교인 양빈(楊斌) 어우야(歐亞)그룹 총재가 평양에서 신의주특구에 관한 기본합의서에 조인하였다. 다음날 24일 양빈 총재는 신의주특별행정구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신의주 특구가 자체의 입법·행정·사법권을 갖고 북한정부는 외교 업무만을 담당한다는 파격적인 조치였다. 신의주를 홍콩처럼 개방하고 특구의 법률을 50년간 개정하지 않겠다고 선언까지 했다. 신의주특구의 개발 분야는 국제적 금융, 무역, 상업, 공업, 첨단과학, 오락, 관광 분야로 되어있고 발표된 청사진에서는 특구중심지(행정, 금융, 상업), 공업단지, 공항 및 물류지역, 주거지역, 국제회의장 등 7개 지역으로 나뉘어 개발하는 것이었다. 공업단지에는 정보기술단지와 경공업단지를 건설하고 유희시설도 개발하는 것으로 되어있었다. 유희시설에는 카지노도 들어있었다. 

그런데 계획에서 보인 압록강 신규 다리 위치로 보아 중국 당국과 사전 협의가 되지는 않은 것 같았다. 중국 요녕성이 2000년에 입안한 단동개발계획은 단동 구도심지역에서 압록강 하류에 가까운 신도시(新城区)로 시청 등 도시기능을 이전하고 북한과도 신도시에서 다리를 놓아 연결하려는 구상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중국정부는 카지노를 좋아하지 않았다.

▲ 신의주특별행정구 발표 당시의 개발 모형 (한겨레신문 2002년 10월2일)
▲ 신의주특별행정구 발표 당시의 개발 모형 (한겨레신문 2002년 10월2일)

어쨌든 흥미진진한 2002년 9월이었다. 당시 북한은 김정일 위원장이 남한과 <6.15남북공동선언>이후 대립을 완화하고 경제교류와 협력을 추진하고 있었고, 일본과는 경제협력으로 과거 역사를 청산하자고 합의한 <북일 평양선언>을 했다. 1990년대 후반 식량난을 비롯한 경제위기에 시달렸던 북한이 2000년대에 바야흐로 개혁과 개방으로 방향키를 잡은 것처럼 보였다. 남북 간에는 "연평해전"이라는 군사적 충돌도 있었지만, 북한은 남한 및 일본과 경제협력 하면서 신의주까지 개방하는 정책을 통해 새롭게 발전하려는 구상을 가졌던 것 같다. 

신의주특구 발표 후인 10월 4일 필자는 중국 심양 출장 중에 양빈의 어우야그룹이 건설한 허란춘(荷蘭村: 화훼단지 및 고급 아파트단지)을 둘러보기도 했는데 바로 그날 중국정부는 양빈을 탈세혐의로 연행하여 구속해버렸다. 정말 쇼킹했고 동시에 아쉬웠다. 중국 정부는 화교 양빈이 신의주 특별행정구의 장관으로 활동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 같다. 신의주 개발을 놓고 중국과 북한 사이에 정부간 사전협의가 없었던 것은 신의주 특구 개발에 걸림돌이 되었다. 북한정부는 자주적으로 하고 싶었겠으나 중국정부는 "관리"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결국 양빈은 18년형을 선고받고 2016년에야 출소했다. 

그리고 북한과 일본의 관계 정상화도 일본정부가 "납치문제"의 완전한 우선 해결을 요구하는 강경 입장으로 선회하면서 진전되지 못했다. 

이렇게 북한의 의도대로 되지 않은 데는 2002년 1월에 등장한 미국 부시정부의 강경한 대북정책이 배경에 있었다. 이 해에 벌어진 북한 관련 일지를 살펴보면 북한이 경제개방 정책을 펼치기 위해서는 안전보장상의 문제들이 함께 해결되어야 함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미국은 "북한의 비핵화"에 우선순위를 두었다. 

2002년 1월 19일 = 부시 미 대통령, 북한을 '악의 축' 지칭
6월 29일 = 제2 연평해전
7월 31일 = 미국, 북미 외교장관 회담시 북한의 고농축 우라늄(HEU) 프로그램 의혹 제기.
10월 3∼5일 = 제임스 켈리 미국 정부 특사로 방북 후 "북한이 HEU 프로그램 보유 시인했다"고 주장 (핵위기 재발)
11월 14일 =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 집행이사회, 대북한 중유공급 중단 발표
12월 12일 = 북한, 핵 동결 해제 선언
12월 26일 = 북한,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관 3명 추방 통보

북한은 2003년 1월에 핵 비확산조약(NPT) 탈퇴를 선언하였고 소위 "제2차 북한 핵위기"가 조성되면서 신의주특구정책은 사실상 물거품이 되었다. 중국정부는 양빈 구속을 통해 북한의 신의주특구정책을 방해한 꼴이 되었다. 미국 부시정권의 강경한 대북정책을 고려한 대응이라는 분석도 가능하나 진의는 알 수 없다. 

공교롭게도 1992-94년의 제1차 북핵위기나 2002-03년의 제2차 북핵위기에 공통된 특징이 있다. 두 차례 모두 북-중 관계가 좋지 않던 시기(1992-2003년)에 북한이 남한 및 일본과 관계개선에 나선 직후 미국이 개입하면서 북한에 압박을 가하고 북한이 이에 반발하면서 위기가 조성된 점이 같다. 물론 북한이 핵을 보유하려는 군사전략을 가졌던 것을 미국이 용인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미국은 남한과 일본이 북한에 독자적으로 "너무 가깝게" 다가가는 것을 견제하고 미국의 전략 아래에서 움직이는 상황을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중국은 1960년대 핵개발 시기에 경험한 것처럼, 미국이 북한봉쇄 정책을 계속하는 한 북한도 핵개발을 포기하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중국정부는 2차 북핵위기 직후, <6자 회담>을 관련국에 제안하여 "핵동결"을 사실상의 목표로 조정역을 맡으면서 북한과 관계도 개선하고 동북아 국제외교에서 주도권을 쥐었다. 미국이 중국에 북한을 관리하는 역할을 주문했다고도 할 수 있고 미-중관계가 <상호의존> 관계였기 때문에 가능하기도 했다. 
북한이 야심작으로 내놓은 <신의주특별행정구> 구상은 피지도 못하고 꺾였다. 다시 수면위로 등장하는 것은 북-중 경제협력이 추진된 2010년에 들어서였다.

1-2)김정일 시대 북한 나름의 신의주 개발

① 신의주-대계도 지역 연계개발, 남신의주 개발

사실 북한이 신의주지역을 대대적으로 개발하려고 한 구상은 1980년대부터 밑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신의주와 서해안 염주군에 있는 다사도 지역은 일제시대인 1940년 전후에 철도와 전력을 연결하여 항만과 공업지대를 건설하는 [신의주-다사도 개발계획]이 추진된 바 있었다. 해방 후 한동안 방치되었던 다사도 지역은 1980년대에 들어 간석지 공사를 통한 식량증산 대상지역이 되었다. 김일성 주석이 1981년 노동당 제6기 4차 전원회의에서 1989년까지 30만정보(황해도 8만, 평안도 22만정보)의 간석지를 조성한다는 계획을 제시하면서 서해안에 대규모 간석지 공사가 시작되었는데, 다사도-대계도-철산반도를 연결하는 대규모 간척공사(대계도 간석지 공사)를 시작하였다. 방조제 총길이는 14km나 되었는데 1997년 8월에 태풍으로 큰 피해를 입는 등 고초를 겪으면서 결국 30년 가까이 걸려 2010년 6월에 준공되었다. 

이 대계도 간석지 개발은 2002년의 신의주특별행정구 설치에 반영되어 특별행정구의 구역에 대계도 간석지 지역도 포함되었다. 유명무실하게 된 <신의주특별행정구>를 북한이 2004년에 <신의주-대계도 경제개발지구>로 개명하면서 공개한 지도에도 대계도지역을 신의주와 연계하여 개발하려는 구상이 드러나 있다.

▲ 신의주-대계도 경제개발지구 위치도 (자료: 남북경협연구소)
▲ 신의주-대계도 경제개발지구 위치도 (자료: 남북경협연구소)

그리고 신의주특구에 포함되지 않은 남신의주 지역은 신의주 주민들의 거주공간으로 1980년대부터 개발이 진행된 바 있는데 신규 공업지대로도 조성하기 시작했다. 한 예로 1949년에 북한 최초의 화장품공장으로 신의주 압록강가에 설립된 신의주화장품공장이 2001년 2월에 남신의주 지역으로 확장 이전하였다. 

② 고난의 행군과 경제관리 개선: "인민생활 제일주의", <봄향기> 대 <은하수>

1990년대 경제위기 시대를 ‘고난의 행군’시대로 명명한 북한이지만 사실 ‘고난’ 그 자체였다고 할 수 있다. 중국으로부터 식량도 들어오지 않고 홍수에 가뭄에 에너지 공급이 끊기면서 신의주에서도 공장의 숨소리도 죽어갔다. 건설은 정체되었고 반면에 날로 발전하는 압록강 대안의 단동에서 보는 신의주는 ‘한숨’과 ‘슬픔’으로 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었다. 

일제시대부터 고무신 만들던 신의주고무공장은 1973년에 신의주신발공장으로 이름을 바꾸고 천신발을 위주로 생산하여 전국에 공급하였는데, ‘고난의 행군’시기에 정상가동을 못하여 국가에 공급하는 신발생산을 맞추지 못했다. 어찌어찌해서 주민들의 주문을 받아 ‘내부예비’로 불리는 자체 원자재를 찾아내어 신발을 생산하여 그 판매대금(시장가격)으로 겨우 종업원들의 생활을 보장하는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2000년 7월부터 경제관리개선조치가 실시되면서 기업들이 자기 실정에 맞게 계획을 세우고 경영할 수 있는 일정한 권한이 부여되면서 신의주신발공장은 다시 살아났다. 국가납품 이외에 자체로 무역을 할 수 있어 중국으로부터 자재를 조달하여 생산한 자체의 ‘기업지표’ 상품을 시장에 팔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생산품목도 천신발 위주에서 구두생산 위주로 전환하였다. 2002년에는 연간 2,100만컬레의 구두생산능력을 가진 종업원 4,200명규모의 1급기업소로 커졌다.

▲ 경제관리개선조치(7.1조치) 후의 신의주신발공장 (조선신보 2002년 11월 18일)
▲ 경제관리개선조치(7.1조치) 후의 신의주신발공장 (조선신보 2002년 11월 18일)

중국과의 무역은 국경도시이자 경공업도시인 신의주 경제에서 국가의 공급이 약화되었을 때 생산과 소비를 유지하기 위한 필요조건이었다. 후에 <사회주의기업책임관리제>로 이어진 2000년의 <7.1경제관리개선 조치>로 기업들이 자체적으로 무역을 하고 자율적으로 경영결정을 할 수 있게 되면서 신의주가 살아나는 길이 열렸다. 사회주의가 어떤 고정된 제도가 아니라 개선 발전해가는 과정에 있고 그 속에 인민들의 생활 문제가 가장 중심에 서 있어야 한다는 것이 신의주에서도 확인되었다고 할 수 있다. 2008년 1월의 신년공동사설에서는 <인민생활 제일주의>가 처음으로 제창되기도 했다. 신의주에는 도매시장으로 채하시장(후에 남민시장으로 이전)이 평성, 원산, 청진, 강계 등에 연결하는 시장 물류망 역할을 하였으며 그 외에 소매시장으로 친선시장, 신남시장, 남신의주시장, 락원시장, 연하시장 등이 생겼다. 

남신의주의 공기 좋고 물 좋은 석화산지구로 이전한 신의주화장품공장은 김정일 위원장이 직접 이름을 지어주었다는 <봄향기> 브랜드로 화장품의 품질을 발전시켰다. 화장품에 들어가는 합성유화제를 쓰지 않고 무균성 샘물을 써서 노화방지와 미백효과가 큰 천연기능성 약재들과 천연건강 약재들을 배합한 천연화장품을 만들었다. <봄향기>화장품의 주요성분은 개성고려인삼, 게 껍질로 만든 키틴 유도체, 각종 약초를 가공한 철쭉 수, 특수한 균의 발효물인 누룩산, 동서해의 감탕 추출물인 생장수 등 30여 가지의 천연기능성약재들이 들어갔다고 한다(조선신보 2007년 3월 22일). 

▲ 신의주화장품공장 화장품 (자료 : 중국중앙방송)
▲ 신의주화장품공장 화장품 (자료 : 중국중앙방송)

2003년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신의주화장품공장의 <봄향기>와 평양화장품공장의 <은하수> 가 "경쟁을 하여야 제품의 질이 높아질 수 있고 발전할 수 있다고, 앞으로 평양화장품공장은 신의주화장품공장과 질(품질)경쟁을 잘하여 화장품의 질을 계속 높여나가도록 하여야 한다"고 지시하였다. 참고로 평양화장품공장의 전신은 1957년에 설립되어 비누와 크림 등을 생산하던 평양화학생산협동조합이었다. 이후로 두 화장품공장의 경쟁은 유명한 일화들을 많이 낳았다. 신의주와 평양이 자존심을 걸고 경쟁을 시작했다. 신의주화장품공장에서 새로 개발한 제품이 전시될 것이라는 소식이 나면 평양화장품공장에서는 계획한 것보다 더 좋은 기능성화장품을 전시 결정하였고, 그러자 신의주화장품공장에서는 포장과 질에서도 좋아진 화장품을 열차로 실어다 전시회가 시작되기 전날 밤에 전시 배치하는 식이었다(조선신보 2010년 12월 23일). 

▲ 전국화장품전시회 기사 (노동신문 2019년 11월 21일)
▲ 전국화장품전시회 기사 (노동신문 2019년 11월 21일)

이러한 품질경쟁은 김정은시대에 들어와 신의주와 평양 간의 사회주의경쟁으로 정착되어 화장품공장 외에도 신의주방직공장과 김정숙평양방직공장, 신의주신발공장과 류원신발공장이 품질경쟁의 상대로 되었다. 북한의 기업경쟁은 "우리 힘과 기술, 자원에 의거하고 질적 수준이 높은 제품일 때 인민들이 제일로 선호한다"는 입장에 선 경쟁인데 여기에 합리적인 가격경쟁도 있으면 제격이겠다.

1-3) 김정일시대 끝무렵의 신의주의 "북-중 공동개발"과 중국의 "동북진흥"

2002년의 신의주특별행정구 구상은 인프라 정비 측면에서는 식민지시대 총독부의 신의주-다사도 개발 구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2000년부터 중국 요녕성 정부가 추진한 단동 개발계획도 만주국시대의 안동지역 개발계획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1940년전후 만주국은 안동(단동)-대동항(동항) 개발을 통해 인구 200만명을 수용하는 대규모 공업지역을 조성하려고 했었다. 2000년대 신의주와 단동의 개발계획은 일본제국의 식민통치기관이었던 조선총독부와 만주국이 그렸던 인프라 개발계획이 책상서랍에서 다시 튀어나온 것 같았다. 그러나 일본제국의 조선개발정책은 대륙침략의 병참기지(화학산업 등), 만주생산품(곡물, 석탄, 철강 등)의 물류기지, 저생산비용의 산업입지(제지, 비철금속 등)로 개발하는 것이었기에 2000년대의 개발 방향과는 다른 것이었다. 

중국의 단동 개발정책은 2003년 10월에 결정된 "동북진흥" 정책에 나온 바와 같이 민간자본과 외자를 유치하고 대외개방을 촉진하여 동북아시아 각국과의 경제협력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최종적으로는 중국 동북지방이 사회적으로 안정되고 경제적으로 발전하는 중국의 일부로서 국내경제통합을 구현하고 “중화민족”의 번영을 확고히 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북한과 교통 인프라를 확충하고 단동을 중심으로 한 물류, 유통, 가공수출 등을 추진하여 신의주를 단동 발전의 통로이자 외연에 두었다. 

북한의 신의주특별행정구 계획이 좌절된 후 중국정부는 2003년부터 핵문제 협의를 위한 <6자회담>을 주도하면서 동시에 북한과 관계개선을 위한 경제지원을 시작하였다. 약 3,200만 달러를 투입하여 모든 자재와 설비를 중국이 제공하면서 2005년에 완공한 대안친선유리공장이 대표적이었다. 2006년 1월에 김정일 위원장이 중국(북경, 무한, 광주 등)을 방문한 후에 북중관계가 완전히 회복되고 이후 장성택 당행정부장이 중심이 되어 북-중간에 "정부간 상호협의"를 통한 신의주-단동 경제협력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 결과물이 신의주 지역의 <황금평, 위화도 경제지대>였다. 2010년 12월에 북한 합영투자위원회와 중국 상무부가 공동개발과 공동관리를 위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한 후 2011년 6월에 최고인민회의상임위원회 정령으로 법제화하고 황금평 공동개발 착공식을 열었다. 북-중 양정부가 구성한 <공동개발 및 공동관리를 위한 조중 공동지도위원회>가 작성한 공동개발총계획요강에는 "총체적인 계획, 단계별 실시, 정부인도, 공동개발, 기업위주, 시장운영, 우세의 상호보충, 호혜공영" 등 8대 원칙이 제시되었고, "조선의 공업화수준과 인민생활수준을 높이고 조선제품의 수출외화획득능력과 제품의 경쟁력을 높이며 조선의 인력, 토지, 광물 등 자원우세를 경제우세로 전환시킨다"는 개발목표가 설정되었다. 8대 원칙은 중국의 "사회주의시장경제" 개혁개방 노선을 반영한 것이고 개발목표는 북한의 경제현실을 반영한 것이었다고 하겠다. 흥미로운 것은 위의 8대 원칙에 들어있는 "기업위주와 시장운영"을 북한이 받아들였다는 것인데 결국 이것이 후에 황금평 경제지대 개발의 걸림돌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2012년 이후 김정은 시대에 들어 황금평 경제지대는 조중공동관리위원회 건물 건설과 중국 진입도로 건설 등이 이루어진 상태에서 더이상의 진척이 없었다. 이 사업을 추진했던 장성택이 2013년 말에 숙청된 것이 한 원인이었다. 중국과 경제협력을 책임지던 장성택은 "국가전복음모죄"로 사형판결을 받고 처형되었다.

중국측이 건설비용 22억 위안(약 3천700억 원) 전액을 부담하면서 2010년 말에 착공한 신압록강대교(조중압록강대교)는 2015년에 완공된 상태로 2020년까지 개통되지 않았다. 

2002년 이후 북한의 신의주특구 개발 전략을 요약해보자면, 2002년에 중국정부와 협의 없이 "자주적"방식으로 개발하려던 신의주특별행정구 계획이 좌초된 후 2010년에 중국 정부와 공동으로 개발하는 "공동개발, 공동관리" 방식으로 전환되었다. 여기까지가 김정일 시대였는데, 2012년부터 김정은 시대가 열리고 장성택 숙청과 함께 2014년 이후 다시 “자주적”방식으로 회귀하였다고 할 수 있다. 

▲ 황금평, 위화도 경제지대 북중공동 개발, 공동관리 착공식 (조선중앙통신 2011년 6월8일)
▲ 황금평, 위화도 경제지대 북중공동 개발, 공동관리 착공식 (조선중앙통신 2011년 6월8일)
▲ (왼쪽) 황금평경제지대 입구 (2014년 10월, 필자 촬영) (오른쪽) 2015년에 완공된 상태의 신압록강대교 (2015년 9월, 필자 촬영)
▲ (왼쪽) 황금평경제지대 입구 (2014년 10월, 필자 촬영) (오른쪽) 2015년에 완공된 상태의 신압록강대교 (2015년 9월, 필자 촬영)

2. 김정은 시대의 신의주 새로 만들기 – 원칙과 실리 사이에서 

2-1)신의주국제경제지대와 경제개발구 개발 : 더딘 "자주적" 개발

김정은 시대에 들어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각 지방에 경제개발구를 무더기로 설정한 것이었다. 2013년 10월에 13개 경제개발구를 발표한 것을 시작으로 2020년 현재로 총 22개 경제개발구가 설립되었고 5개 경제특구(라선, 원산-금강산, 개성, 신의주, 황금평-위화도)가 있다. 이 중에 신의주권에 있는 것이 중앙급의 신의주국제경제지대, 황금평-위화도 경제지대 그리고 지방급의 압록강경제개발구 등 3군데다. 

압록강경제개발구는 중국 단동시의 호산산성지역에 거의 붙어있는 어적도와 구리도 등에 농업 및 관광휴양을 위한 개발을 추진하는 것으로 설정되었다. 경제개발구와 관련된 법들이 정비되면서 외자 유치와 함께 북한의 기업들이 개발구의 주체로서 자율적인 경영을 할 수 있게 되었지만, 실제 진척은 지지부진했다. 신의주권도 마찬가지였다.

중앙급 특구로 2013년에 설치한 <신의주특수경제지대>는 2014년에 <신의주국제경제지대>로 개명하고 2016년에 개발계획을 발표하였다. 그 내용은 신의주특구 지역을 최신정보기술산업구, 생산산업구, 물류구역, 무역 및 금융구역, 공공봉사구역, 관광구역, 보세항구 등으로 구성된 종합적인 경제특구이자 35만 명 인구의 국제도시로 개발하는 계획이었다. 이를 위한 인프라로서 대계도지구에 공항과 항만을 건설하고 40만kW급 복합화력발전소를 건설하며, 홍수피해방지를 위한 운하건설, 평의선(평양-신의주) 철도의 고속철도화 등이 계획에 담겨있었다. 2018년 11월에는 김정은 위원장이 신의주 개발계획을 현지 지도하기도 하였다. 

▲ 신의주국제경제지대 투자안내서의 신의주 지도 (내나라 홈페이지 www.naenara.co.kp) (사진에 대계도지구는 생략되어있음)
▲ 신의주국제경제지대 투자안내서의 신의주 지도 (내나라 홈페이지 www.naenara.co.kp) (사진에 대계도지구는 생략되어있음)
▲ 김정은 위원장의 신의주 개발 모형 현지지도 (노동신문 2018년 11월 16일)
▲ 김정은 위원장의 신의주 개발 모형 현지지도 (노동신문 2018년 11월 16일)

김정은시대의 신의주특구 개발은 중국정부와 공동개발하는 방식이 아니라 북한이 주체로서 외자와 국내자금의 투자를 통해 개발하는 원래의 "자주적" 방식으로 돌아섰다. 그만큼 더디고 불투명성이 증가하는 부작용도 생겼다. 외자는 불안하면 움츠리고 안 들어가는 법이다. 모험투자가들은 이를 기회라고 접근하는 데 실패하는 경우가 많았던 과거의 경험으로 신중해졌다. 거기에 2017년부터 강화된 유엔안보리의 대북 경제제재로 인해 외자가 들어가지 못하고 국내자원만으로 개발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당연히 그 속도는 더욱 더뎌졌다.

2-2)신의주 관광과 건설 : 활황은 끝나고 국경봉쇄의 후과

김정은 시대에 들어 신의주에는 중국인 관광 붐이 불었다. 당일 코스, 1박 2일 코스 등이 있어 중국인들이 단체로 신의주를 무비자로 관광할 수 있었다. 다만 중국인 이외의 제3국인의 신의주 관광은 엄격히 통제되었다. 그중에는 중국인들이 압록강에서 유람선을 타고 무관세로 쇼핑할 수 있는 <신의주 상륙관광원구>(호텔, 수영장, 보트 선착장, 식당, 관광기념품상점) 가 2015년 12월에 중조우의교 옆에 들어섰다. 그러나 유람선에서 선착장에 내려 바로 무관세 쇼핑관광하는 것은 북-중간에 의견불일치로 실현되지 못하고 보트 선착장은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 신의주 상륙관광원구(2층 건물) 모습 (2018년 8월, 필자 촬영)
▲ 신의주 상륙관광원구(2층 건물) 모습 (2018년 8월, 필자 촬영)

중국과 하는 육상무역의 70%가 신의주세관을 통과하는 터라 신의주는 무역특수를 누렸는데 중국세관통계 기준으로 2008년에 28억달러 정도였던 북중무역 규모가 2013년에 65억 달러로 2배이상 증가하였다. 그 후 다시 통계상으로는 감소하여(원유수출을 통계에서 제외하기도 했음), 2019년에 28억 달러 수준으로 줄었고 2020년에는 4억 달러대로 주저앉았다. 그렇지만 2018년까지 신의주에서는 북한 내에서 성장한 <돈주>들이 부동산 건설 투자를 하면서 건설경기 활황을 구가했다. 단동은 신의주에 부족한 것을 제공해주는 통로였고 지지대였다. 단동은 북한의 각 기관, 기업소, 무역회사의 주재원, 파견원들로 흥성거렸다. 

▲ 단동에서 바라본 신의주시의 모습 (2019년 12월, 필자 촬영)
▲ 단동에서 바라본 신의주시의 모습 (2019년 12월, 필자 촬영)
▲ 신의주세관옆의 신축 오피스필딩 (2019년 12월, 필자 촬영)
▲ 신의주세관옆의 신축 오피스필딩 (2019년 12월, 필자 촬영)

그러나 중국과 무역이 급감하고 더욱이 2020년에는 코로나감염대책으로 국경봉쇄를 하면서 신의주의 무역도 궤멸상태에 들어갔다. <돈주>들의 활동도 억제되고 축소되었다. 국경봉쇄를 스스로 선택한 북한은 무역에 의존하지 않는 자립경제 노선을 다시 강화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노동신문이 2020년 10월 17일에 국경봉쇄의 의미에 대해 "완전 봉쇄한 현재의 상황은 자체의 힘과 기술, 자기의 원료, 자재에 의거하여 우리의 내부적 힘과 발전 동력을 최대로 증대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언급한 것이 이를 뒷받침한다.

그렇지만 북한의 국내자원과 기술의 의거한 경제건설 능력을 어떻게 발휘할 수 있을까, 대외경제 관계없이 가능한 일 일까 하는 염려는 북한 내에도 있어왔고 지금도 있을 것이다. 자신이 모든 것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면 대외교류를 통해 보충하는 것은 북한의 경제정책에서도 인정하는 바였다. 신의주가 경제위기에서 다시 살아났던 것도 "“인민생활"의 기초가 되는 물자를 중국에서 들여올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중국에 의존하는 "수입병"의 문제를 강제적으로 끊는 방식으로 접근하는 방식이 아니라 "없는 것은 들여와서 자기 것으로 만들 줄 아는"” 실리추구 방식이 경제를 살려왔던 것이다. <원칙>을 강조하면서 <실리>를 잃는 우를 범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3. 신의주의 미래 : 국제협력을 통한 새 동북아 평화경제의 꿈

이상으로 신의주의 과거와 현재를 살펴보았는데 이로부터 얻을 수 있는 미래모습 구상은 무엇일까. 필자는 국제협력이 신의주 사람들의 미래를 더 밝게 해 준다고 생각한다. 코로나 방역을 이유로 무역을 막아서는 안 된다. 국제협력을 통해 신의주를 더 "새롭고 의로운 땅"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과거 일본제국이 꿈꾸었던 신의주, 기독교 세력이 꿈꾸었던 신의주, 사회주의가 꿈꾸었던 신의주를 경험해오면서 신의주의 "인민"들은 생활력으로 지탱해왔다. 그 생활력을 지지해준 것은 대외경제 교류(交流)였고 시민들의 자조(自助)와 협동(協同) 정신이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세 가지가 신의주의 미래를 동북아 평화경제로 이끄는 힘이 될 것이다.

국경 관문도시 신의주의 지경학적 특성을 고려한다면 신의주의 미래는 국제물류네트워크를 활성화하는 방향과 주민들의 자생적 경제력을 활성화하는 방향으로 잡혀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① 국제물류네트워크 활성화 : 남신의주-대계도지구 

신의주는 중국에 접속되어 있다. 여기에 물적, 제도적, 인적 기반이 부족하여 북한이 자주적으로 개발을 추진하고 싶어도 중국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중국은 신의주가 목표지점이 아니라 평양과 부산으로까지 이어지는 물류 망을 확보하는 것을 구상하고 있다. 요녕성의 <일대일로>전략에 그리 나와 있다. 북한이 "자주적"인 개발을 추구하는 원칙을 갖고 있다면 중국과 협력하면서도 중국하고만 상대하는 것보다는 다국적인 협력 틀을 구성하여 개발을 진행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이를 고려한다면 신의주지역 개발의 공간구조에서 기존의 압록강가의 신의주지역보다는 남신의주-대계도지구(항만, 공항, 임해공업지역)를 연결하는 물류망을 강화하여 이곳에 다국적 기업들의 보세가공무역, 임가공무역 등의 기지를 형성하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다. 2002년 신의주특별행정구 구상으로 2014년 신의주국제경제지대 설치까지 신의주-대계도지구 연계 개발 구상이 일관되어 있는데 여기에 다국적 협력 구상(임해공업단지 조성 등)을 해볼 수 있다. 대계도지구의 항만은 중국측의 대동항과 경쟁 관계를 가지면서 물류협력이 가능할 것이다.

▲ 신의주-대계도 지역 위치 (구글어스)
▲ 신의주-대계도 지역 위치 (구글어스)

그리고 신의주와 남한이 경제 네트워크로 연결되는 루트로서 육상으로는 서울-평양-신의주간 고속도로 건설 및 철도 현대화 사업이 필요하며 이를 신압록강대교와 압록강철교를 통해 단동으로 연결한다. 그리고 해상으로는 인천-남포-대계도/다사도항을 연결하는 수송로 형성이 필요하다. 육상과 해상을 같이 중시하는 경제네트워크 형성이 한반도의 미래경제에 꼭 필요하다. 이 육상 및 해상 루트는 한반도만이 아니라 중국-유라시아 및 동남아 등과 연계되면서 신의주가 국제물류기지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② 신의주 주민들의 자생적 경제력 활성화 

신의주 주민들은 1950년대 이후 복구사업과 90년대 고난의 행군 시기를 넘기면서 스스로 강인한 생활력을 보여주었다. 협동조합들은 그러한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되었고 지금도 신의주 주민경제의 기초력으로 되어있다. 신의주초물생산협동조합, 신의주과자생산협동조합, 신의주편의협동조합 등이 그러한 곳이었다. 미래의 신의주를 그려본다면 경공업도시인 신의주에 각종 생산협동조합과 더불어 슈퍼마켓, 커피점, 가구점, 호텔, 식당, 창고, 병원 등을 운영하는 협동조합들도 활발히 설립되고 있는 모습이 어떨까 생각한다. 시장경제로만 북한경제의 미래상을 그리는 것보다는, 시장과 함께 북한 주민들의 역사적 경험을 살려 "협동경제" "사회적 경제"의 가능성을 함께 추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특히 의료분야는 북한의 미래모습에서 필수적인 과제이다. 방역한다고 국경을 완전히 막아버리는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국경지역의 의료보건 시스템은 확고하게 보장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남한이 참여하는 국제 의료기관을 통한 의료보건 및 방역 센터를 신의주에 건설하는 것은 근미래에 실현되어야 할 과제이다. 

이와 더불어 북한이 갖고 있는 한방(고려의학) 치료능력을 활용하여 남신의주에 호텔, 온천 등 휴양시설과 의료시설을 갖춘 국제의료관광요양시설을 세운다면 중국인들에게도 큰 수요가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전망들을 생각한다면 북한에 가해지고 있는 경제제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이 절실하다. 북한도 국제사회도 안전보장과 관련한 문제 해결 없이는 경제협력이 어렵다는 지난 경험들을 반추하면서 더 많은 대화를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유엔안보리의 경제제재에 해당하지 않는 남한의 단독제재인 <5.24조치>는 공식적으로 풀어서 북한 주민들의 생활과 관련한 경제교류가 가능하도록 해야 한다. 신의주에 국제협력을 통한 새 동북아 평화경제의 꿈은 이런 노력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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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찬우 (테이쿄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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