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향한 원산을 바라보다(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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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향한 원산을 바라보다(上)
  • 2020.05.28 09:00
  • by 이찬우 (테이쿄대학 교수)
▲ 원산항과 만경봉-92호  ⓒ 통일TV 진천규 기자 촬영
▲ 원산항과 만경봉-92호 ⓒ 통일TV 진천규 기자 촬영

나는 20년 전인 2000년 가을에 동해의 일본 쪽 도시인 니가타(新潟)시에 살 때 니가타항에서 <만경봉-92호>를 탔다. 아내와 어린 두딸을 놔둔 채로(!). 이 배는 총련계 재일 동포들의 기부로 북한에서 1992년에 건조해서 그전까지 일본 니가타항과 북한 원산항을 오가던 <만경봉>호를 대체한 배다. 

이 배에 탄 이유는 북한에 가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6.15공동선언>이후 시대인 터에 이 배의 취항 8주년을 기념해서 니가타의 관계자들을 초청해서 선상연회를 열었는데, 내가 다니던 연구소 소장(일본인)을 대리해서 참석하였다. 접대하던 복무원들이 내가 재일 동포가 아니라 한국에서 온 사람이라고 하니 무척이나 놀라워했다. <남조선사람> 처음 만난다고, 6.15시대인 것을 실감해서 참으로 좋다고 했다. 참석자 모두가 통일 기차놀이도 하면서 즐거웠고 배의 객실이며 기관실도 구경했다. 니가타에서 이 배로 이틀이면 원산에 도착해서 해당화로 유명한 명사십리(明沙十里)와 송도원해수욕장에서 놀 수 있겠다는 생각도 했다. 그 후로 나는 동해를 둘러싼 환동해지역에서 북한이 참여하는 국제적인 경제협력이 이루어지는 꿈을 그리고 있다.

환동해지역이라 하면 좁게 보면 한반도의 동해안과 중국 길림성, 러시아 연해주 그리고 일본열도의 서부해안 지역을 말하지만, 넓게 보면 동북아시아 지역이라는 말로 바꾸어 부를 수도 있다. 어떻게 부르던 동해가 어디 먼 바다가 아니라 경제협력이 활발한 유럽의 지중해 같은 내해(内海)로 되는 것이다. 북한에서 동해에 면한 지방 도시 중에 무역항을 갖고 있는 곳은 원산, 흥남, 단천, 청진, 나선(나진, 선봉)이다. 이들 도시는 1920-40년대에 일본에 의해 제국주의적인 개발이 이루어졌던 곳이기도 하다. 북한은 이들 항구 도시들을 자립경제 기반 위에서 국제적인 경제개발구로 발전시키려는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이들 동해안의 도시 중에서 원산이 근대시대에 들어 먼저 1880년에 문을 열었다. 원산은 근대 식민지 산업을 통해 성장한 노동계급이 1929년에 총파업을 한 곳이기도 해서 원산사람들의 자존심이 세다. 해방과 6.25전쟁을 거친 원산에는 폐허 위에서 자립정신으로 경제를 일군 협동조합들의 역사가 있다. 원산은 일본과 그리고 해방 후에는 소련(러시아)과도 경제와 문화적으로 가장 밀접한 창구다. 북한 정부는 원산을 고등교육, 수산, 무역과 국제교류 그리고 국방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1968년 1월에는 원산 앞바다에서 미국 간첩선 푸에블로호가 북한해군에 붙잡히는 사건이 있었고 최근 년간에는 미사일 발사실험, 국제항공 쇼가 보도되기도 했다. 지금 갈마반도의 명사십리 해변가에는 대규모 관광단지 건설이 완공을 앞두고 있다. 김정은 위원장이 태어난 곳이라고 알려진 곳이기도 한 원산은 북한에 있어서 새로운 미래다. 새 시대 원산과 남한은 어떻게 마주할 것인가, 특히 강원도는 어떤 구상을 가질 수 있을까. 국제협력과 남북협력에서 동해안 지방의 미래를 생각해보고자 한다.

원산에 대해서 지면 관계상 원산의 개항에서 일제시대까지(상), 해방 후 현재까지(중), 원산과 남북협력(하)로 나누어 쓴다.
 

원산 개항의 의미 : 식민지로 된 근대의 국제성 
① 지배와 수탈의 통로, 일본적 산업개발
② 피지배를 넘어선 근대적 사회 추구


<지배와 수탈의 통로, 일본적 산업개발>

원산은 조선왕조 시대 말까지 함경도의 조그마한 어촌인 원산진(元山津)이었다(원산이 강원도에 속하게 된 것은 1946년 9월 이후다). 1868년에 메이지유신이 성공해서 도쿠카와 막부의 신분제 봉건 통치 시대를 끝내고 유럽과 미국의 문명을 쫓아가던 일본은 근대문명의 본질 중의 하나를 빨리 알아챘다. 근대적 민권보다 국가의 국권을 우선하는 것인데, 국가는 산업력과 무력으로 약한 나라를 위협하여 식민지 수탈을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른바 함포 외교다. 조선에서는 고종임금시대 섭정통치하던 흥선대원군이 프랑스와 미국의 함포 외교를 물리쳤지만, 1874년에 권좌에서 물러나고 고종이 직접 통치하기 시작했다. 일본 정부의 움직임은 빨랐다. 1875년에 해군 군함 운요호(雲揚號)가 부산에서부터 원산에 이르는 동해안 해로를 측량하고 서해로 가서 강화도 사건을 일으켰다. 이 함포 외교로 일본은 조선과 1876년에 불평등 조약인 [강화도 조약]을 맺고 부산과 원산 그리고 인천을 개항시켰다. 일본이 원산을 선정한 것은 부산항과 더불어 가장 좋은 항만조건을 갖춘 영흥만에 있고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할 수 있는 지정학적 위상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 일제시대 원산부 ⓒ 가나가와대학비문자자료연구센터
▲ 일제시대 원산부 ⓒ 가나가와대학비문자자료연구센터
▲ 원산 일본인거류지 ⓒ Gale, James Scarth(1898년)
▲ 원산 일본인거류지 ⓒ Gale, James Scarth(1898년)

조선 정부도 개항 의지가 있었기 때문에 1876년 부산 개항에 이어 1880년에 원산을 개항하였다. 인천 개항은 1883년이다. 개항과 더불어 일본인 거류지가 바로 설치되었다. 

1893년 기준으로 추정인구 15,000명 정도의 원산에 일본인은 795명이 살았다(부산 4,750명, 인천 2,504명, 한성 779명). 원산의 적전천(赤田川)을 경계로 남측이 원산진(원산리)으로 조선인 마을, 북측이 일본인 거류지가 설치된 원산항으로 나뉘었다. 

이 시기에 원산을 여행한 영국인 이사벨라 버드의 기록 [Korea and her Neighbours]에 따르면 원산항의 일본인 거류지에는 선착장, 일본영사관, 일본체신회사 [NYK], 은행, 세관건물, 상점, 양복입은 교사가 가르치는 학교가 들어서 있어 조선 국내에서 가장 정돈되고 매력적인 거리라고 평하였다. 서양인의 눈으로 서양문명에 가장 가까운 곳이 일본인 거류지였을 터이다. 원산은 서울과 전신이 통했고 일본체신회사의 선박편이 일본의 나가사키, 고베, 중국의 홍콩과 상해, 천진 그리고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톡과 왕래했다. 

원산은 동해안의 무역항으로서 조선의 쌀, 콩, 소가죽, 수산물, 인삼, 금 등을 영국 또는 일본산 면직물, 성냥, 양초 등과 같은 개화 물품과 교역하는 장소가 되었다. 면직물을 수입하게 되면서 전통 수공업인 면직업이 붕괴했다. 도자기, 유기, 철기, 종이 등 자연경제에 기초한 조선 수공업이 쇠퇴해가고 곡물의 유출로 물가가 급등했다. 

1889-93년의 원산방곡령(元山防穀令) 사건은 이런 배경에서 발생했다. 1889년에 일본에 흉년이 들어 조선 곡물을 대량으로 수입하였기 때문에 조선의 곡물 가격이 급등했다. 원산에 들어온 일본 상인들은 이른바 모리간상배들로 조선에서 한몫 잡으려는 한탕주의자들이 많았다. 당시 일본 쌀 가격은 조선 쌀의 두 배. 일본 상인들에게 조선 곡물 수입은 크게 돈 벌 수 있는 한탕 장사였다. 그런데 조선의 곡물 가격이 올라 원산을 관할하던 함경도 관찰사 조병식이 방곡령을 발동해서 일본으로 가는 쌀과 콩의 반출을 막았다. 피해를 입은 일본 상인들은 일본 국가권력을 이용해 배상을 청구했는데, 배상원금(실피해액 약 5 만엔)을 훨씬 넘는 약15 만엔(후에 22만 엔으로 늘림)을 요구하는 행패를 부렸다. 결국 조선정부가 11만 엔을 배상하는 것으로 결말이 났지만, 이 사건 이후로 그동안 개화파로 일본에 가까웠던 왕비 민 씨(명성황후)가 러시아를 끌어들이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게 되는 한 요인이 되었다. 일본이 명성황후를 1895년에 시해하는 배경이기도 하다.

일본이 군사적으로 중요시했던 원산은 청일전쟁이 벌어진 1894년에 일본군 상륙지이기도 했다. 일본군은 평양에 주둔한 16,000명의 청국군을 공략하기 위해 인천에 상륙하여 서울을 점령하고 북상함과 동시에 동해를 가로질러 원산을 통해 평양에 진입했다. 8월 27-30일 원산에 상륙한 일본군은 4,700명.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9월14일에는 평양 동북쪽에 도달했다. 15일 총공격을 개시하여 하루 지난 16일에 평양이 일본군 수중에 떨어졌다. 일본군은 여세를 몰아 요동반도로 진격하고 해전에서도 승리해 청국은 패전.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상실했다. 조선 정부는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견제하는 쪽으로 기울었고 그 결과 명성황후 시해와 아관파천(고종이 러시아영사관으로 피신하여 집무)이 있었다.

▲ 1894년 9월 청일전쟁시 일본군의 평양 침공 지도(일본군의 인천상륙과 원산상륙을 통한 평양점령은 후에 6.25전쟁시 유엔군의 작전에 큰 참고가 되었다) ⓒ 加登川幸太郎『三八式歩兵銃――日本陸軍の七十五年』pp.68-88
▲ 1894년 9월 청일전쟁시 일본군의 평양 침공 지도(일본군의 인천상륙과 원산상륙을 통한 평양점령은 후에 6.25전쟁시 유엔군의 작전에 큰 참고가 되었다) ⓒ 加登川幸太郎『三八式歩兵銃――日本陸軍の七十五年』pp.68-88

숙명이 된 러시아와의 한판 전쟁에서도 승리한 일본은 1910년에 대한제국을 병합하고 한반도에 대한 식민지경영에 본격 착수했다. 일본에 부족하고 조선에 상대적으로 풍부했던 자원인 무연탄, 금, 철광, 곡물 이렇게 4가지는 일본경제의 발전을 위해 개발하고 수탈해야 할 주요 품목이었다. 원산을 비롯한 동해안 지역은 일본과 직접 연결되는 지리적 근접성과 함께 상기 자원들이 풍부한 생산지대였기 때문에 일본은 한반도 북부의 동해안 지역에 중화학공업을 중심으로 철도, 전력과 항만 등 인프라개발을 진행하였다. 1914년에 서울과 원산을 잇는 경원선을 개통하였고, 원산을 기점으로 동해 북부지역을 연결하는 함경선과 평양을 연결하는 평원선 등이 개통되면서 원산은 육로와 해상교통의 요지로 성장하였다.

▲ 일제시대 원산역 ⓒ한국철도공사
▲ 일제시대 원산역 ⓒ한국철도공사

원산항은 1910년에 해면을 매립하여 창고시설, 하역장을 세웠으며, 북쪽에서 오는 파도를 막기 위한 방파제(563m)를 건설하였다. 이후 증축공사를 통해 연간 화물처리능력이 40만 톤 규모로 되었다. 1939년에 화물처리량이 85만 톤에 달하는 등 원산항의 능력이 한계에 달하였다. 1936년부터 연간 150만 톤의 화물처리능력을 목표로 6,000톤급 선박 3척이 동시에 접안할 수 있는 건설계획이 수립되었는데, 완공 하지 못하고 끝났다.

▲ 일제시대 원산항 모습
▲ 일제시대 원산항 모습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로 수탈하는 데서 초기에 중시한 것은 무연탄이었다. 일본이 러일전쟁의 해전에서 이길 수 있었던 데에는 무연탄을 연료로 사용하는 함선을 영국에서 제공받았던 것이 큰 요인이기도 했다. 무연탄을 엔진 연료로 사용하면 열량이 높아 엔진 마력이 세지니 빨리 움직일 수 있고 완전연소 시 연기가 나지 않기(무연) 때문에 석유 시대 이전의 해군 군함의 입장에서는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반면에 유연탄은 휘발분이 많아 불완전연소 시 많은 연기를 내기(유연) 때문에 군함의 입장에서는 불리한데 러시아함대는 유연탄을 연료로 사용했다. 러일전쟁 중 쓰시마 해전(1905년 5월) 에서 일본함대가 러시아함대에 승리한 것은 작전의 승리도 있겠지만 무연탄의 승리이기도 했다. 그런데 정작 일본에서는 무연탄 생산이 한반도와 가까운 규슈에서만 나고 조선 특히 평양은 품질 좋은 무연탄 [평양탄] 산지로 19세기 말부터 이미 유명했다. 무연탄 공급기지를 바로 옆에 둔 일본군으로서는 한반도를 병탐할 중요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한일합방후 일본이 한반도에 제일 먼저 세운 시설이 평양에 세운 "일본해군 연료 창고"였다. 

평안도의 무연탄을 일본으로 수송하는 데 대동강을 이용하여 진남포항(지금의 남포항)에서 수송하였다. 그러나 겨울철에 항만이 결빙하는 진남포항은 사시사철 수요가 따르는 무연탄의 수송항만으로서는 불완전하여, 일본에 바로 연결되는 부동항으로서 원산항을 이용하는 방안이 제기되어 평원선(평양~원산) 철도건설 계획이 1920년에 수립되었다. 그러나 1923년의 관동대지진 등의 영향으로 1941년에야  개통되었다. 이 평원선을 통해 평양지역의 무연탄을 원산으로 운반하여 원산 북항(석탄전용항)에서 일본으로 수송하였다.

석탄은 군수용으로서만 아니라 도시화의 진전과 더불어 가정 연료의 민수용으로, 그리고 보일러용, 화학공업 원료용(카바이드, 시멘트 생산), 양잠업(생사 생산)을 위한 산업용으로 중시되어 일본경제 및 식민지 조선경제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1930년대 이후 석탄이 산업용으로 본격 사용되면서 흥남에 일본질소비료흥남공장, 청진에 미츠비시광업청진제련소, 원산 근처 천내리에 조선오노다小野田)시멘트 등 공장이 이 시기에 설립되었다. 오노다 시멘트는 1928년에 석회석 산지인 천내리에 공장을 건설하여 1936년까지 연산 40만 톤의 대규모 생산능력의 설비를 갖추었다. 현재 북한에서 유명한 천내리시멘트공장의 전신이다. 2차 세계대전 시기 천내리의 오노다 시멘트공장에서는 화약을 생산하였기 때문에 소련군이 진주하면서 오노다 시멘트의 일본인 공장장은 전범으로 처형되었다. 

1944년 당시 북한지역은 무연탄광 24개소 324만 톤, 유연탄광 43개소 282만 톤인데 반하여 남한지역은 무연탄광 12개소 153만 톤, 유연탄광 8개소 3만 톤에 불과하였다. 북한지역의 비중이 탄광 76.7%, 생산 79.6%를 차지해 남북 지역 간의 극심한 불균형이 있었고 이는 해방 이후 남북한 산업정책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해방 후 북한이 자립경제로서 석탄중심의 공업체계(에너지, 석탄화학)를 이어나간 것에는 이러한 배경이 있다. 반면에 남한은 해방과 더불어 북한과 단절됨으로 인해 에너지 위기가 발생했다. 그 후 삼척 태백 등 강원도 탄광이 각광을 받게 되지만 남한은 점차로 석유와 천연가스 그리고 원자력을 중심으로 하는 에너지 공급과 석유화학산업으로 전환하였다.  해방후 연료 및 원료 공급에서 북한은 자립형, 남한은 해외의존형을 선택하였다.

석탄 이외에 함경도와 강원도 지역에는 일본에서는 생산되지 않는 텅스텐, 마그네사이트가 대량으로 매장되어 있고, 철광과 비철금속광 또한 풍부하게 매장되어, 이와 관련한 중공업 공장들이 동해안지역에 들어섰다. 원산에는 일본 강관이 제철소를 건설하여 20 톤 용광로 1기로 조업하였다. 스미토모광업(住友鉱業)은 1937년 원산 근처의 문평에 금, 은, 구리, 납을 제련하는 제련소(스미토모광업조선광업소 원산제련소)를 건설하였다. 이 원산제련소는 해방 후의 문평제련소로서 북한의 납, 아연 제련의 중심지가 된다. 

이상으로 원산이 개항한 후 일본의 식민지로 된 상황에서 지배와 수탈의 통로가 되고 또한 산업개발이 진행된 것들을 살펴보았다. 일본 제국주의는 서구제국주의와 좀 달랐던 것이 농산물과 광물의 수탈만이 아니라 항만, 철도, 전력 등 인프라를 개발하고 이어서 자원의존형 산업개발을 통해서 종주국인 일본과 식민지 간의 [수직적 경제통합]을 추구하는 방식이었다고 할 수 있다. 원산은 그 대표적인 장소였다.

<피지배를 넘어선 근대적 사회 추구>

한반도의 근대역사가 수탈의 역사만은 아니다. 자신들의 힘으로 신분제적 전통사회를 넘어서 만민평등의 근대사회를 일 구려했던 선각자들의 노력이 있었고 피지배에 저항하는 조직적인 사회운동도 있었다. 이런 움직임들이 독립운동의 기반이 되고 해방 후 사회건설의 토대가 되었다.

원산과 관련한 근대적 사회 추구는 교육 운동과 노동자 운동에서 볼 수 있다.

원산에는 1883년 8월에 근대적 의미의 교육을 실시하는 학교가 원산주민들의 자발적인 운동을 통한 출자와 정부 관리들의 협력으로 설립되었다. 이름하여 원산학사(元山學舍)이다. 초중등과정의 문예반 50명과 무예반 2,000명 정원으로 편성되었는데 무예반을 설치한 것은 원산에 들어온 일본인들이 조선인을 멸시하고 도발하는 일이 빈번해지면서 자위력을 갖추고자 했기 때문이다. 문무 공통과목으로 산수, 물리, 기계기술, 농업, 양잠, 광업 등을 가르쳤다. 그리고 일본어 등 외국어와 국제법, 세계지리도 가르쳤다. 특수과목으로서 문예반은 실학자들의 유학을, 무예반은 병서(兵書)를 가르쳤다. 과목 내용으로 서당을 개량한 측면도 있고 근대문명의 지식을 가르치는 내용도 있어 당시의 시대 상황을 반영했다고 할 수 있는데 시기적으로 1885년 7월에 서울에서 미국 선교사 아펜젤러가 세운 배재학당보다 2년 빨라, 조선 최초의 근대 학교로 불린다.

▲ 원산학사(원산시 남산동)
▲ 원산학사(원산시 남산동)

이 원산학사 설립은 외국인에 의해서도 외국의 압력에 의해서도 아니었다. 밀려오는 근대 문명 앞에서 우리 민족 스스로가 적극적으로 대응한 교육 운동이며, 그것도 민간이 주동하고 개화파 관리들이 협력하여 만들었다는 데서 커다란 의의가 있다. 설립 시에 원산의 민간인 118명이 합계 5,325냥을 냈다. 아이를 입학시킨 원산주민들이 240냥을 내고, 매년 200냥의 경비를 보조하기로 하였다. 개화파 관리로는 덕원부사 겸 원산감리 정현석이 100냥, 서북 경략사 어윤중이 100냥, 승지 정헌시가 100냥을 기증하였다. 일본의 침탈에 직면한 원산에서 전통적인 서당교육을 계승하면서도 근대 학교로 발전시킨 점은 지혜로웠다. 

그런데 원산학사는 1894년 갑오경장 때에 중등과정을 정부가 세운 역학 당으로 분리하고 원산소학교로 축소되었다. 아쉬운 부분이다. 원산소학교는 일제시대에 원산 보통 학교, 원산 제일 국민학교로 운영되었다. 원산사람들의 교육 운동으로 원산에는 사립학교가 많아졌다. 기독교 선교가 활발해지면서 기독교 계통의 학교들이 많이 생겼다. 보광중학교, 루씨여학교 등이 기독교계이고 원산상업학교, 원산여자사범학교 등이 생겼다.  

노동자들의 운동으로서는 1929년 초에 전국을 진동시킨 원산 총파업이 유명하다. 원산은 개항장으로서 도시화가 진행되었고 노동자들의 조직적인 활동도 활발했다. 원산 총파업의 첫 도화선은 1928년에 영국인이 경영하는 석유회사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이 회사의 일본인 감독이 조선인 노동자들을 구타하였고, 이에 분개한 200여 명의 노동자들이 일본인 감독의 철직 및 임금인상 그리고 단체계약의 체결 등의 요구 조건을 제기하고 파업에 들어갔다. 회사는 이를 무시했고 1929년 1월14일에 다시 파업에 들어갔는데 이번에는 지배인 파면, 단체계약권 확립, 8시간 노동제 실시 등 더 적극적인 요구를 제기했다. 여기에 당시 원산에서 가장 강한 조직력을 가지고 있던 부두 운수 노동자들이 함께 파업에 들어갔다. 부두 운수 노동자들은 1921년에 원산 노동회를 조직했었고 이어 1925년에 운송, 인쇄, 제화, 양복 등 직업별 노동 조직체들의 연합조직인 원산노동연합회(원산노련)로 발전한 상태였기 때문이 여기에 망라된 24개 노동조합의 2,200여 명의 노동자들이 총파업에 들어갔다. 그들의 가족까지 합세하여 총파업에 참가한 수는 원산시 총인구의 3분의 1에 달했다. 원산경제가 완전히 멈추었다. 원산 노동자들의 요구는 노동조건 개선에 그치지 않고 일본의 식민지통치를 반대하는 운동으로 나아갔다. 

계급투쟁과 민족투쟁의 두 성격을 모두 가진 원산의 총파업에 당시 최대의 민족단체였던 신간회가 총파업을 지지 선언 했고, 평양과 경상도 등 전국 각지에서 격려문과 파업 후원금을 보냈다. 부근 농민들은 식량과 숯을 무료로 제공했다. 일본의 고베와 오타루의 운수 노동자들이 동맹파업을 일으키기도 했다.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노동 착취에 대해 조선 노동자들이 순응하지 않고 조직적으로 대응하면서 총파업은 82일간이나 지속했다. 노동자들이 술도 끊고 하루 5전씩 내어 파업기금을 마련했다. 

원산 총파업은 총독부 경찰의 탄압으로 지도부가 체포되고 생활 조건이 악화되면서 함남노동회라는 어용노조가 등장하고 원산노련 새지도부가 타협하면서 결과적으로는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이후 1930년 1월 부산에서 2천여 방직노동자들이 민족차별 대우 철폐, 8시간 노동제 실시, 대우 개선 등을 내걸고 파업하였고, 5월에는 신흥 탄광 노동자 파업, 8월 평양 고무공장 노동자총파업 등 노동자들의 대중적 파업 투쟁이 이어졌다. 

원산 총파업에 대해서는 실패 이후 원산에서 합법적인 운동이 불가능하게 되었다는 분석, 또는 이후 비합법 또는 무장투쟁이 주류가 되는 혁명적 전환점으로 되었다는 분석 등 관점에 따라 여러 평가가 있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식민지 산업화에서 성장한 노동자들이 스스로를 사회 조직을 만들어, 피지배를 넘어서 근대적 사회를 추구하는  자발적이고 자조적인 운동을 벌였다는 점이다.

▲ 원산노동연합회와 원산총파업 ⓒ 한국학중앙연구원
▲ 원산노동연합회와 원산총파업 ⓒ 한국학중앙연구원

원산 총파업을 주도한 원산노련은 노동조합 이외에 두 가지 중요한 사회조직을 만들어 시민 생활에 중요한 연대와 복지의 토대를 만들었다. 그 하나는 소비조합이다. 1922년 5월에 부두 운수 노동자들의 원산노동회가 100명의 조합원으로 원산소비조합을 설립했고 이어 원산노련 산하의 원산소비조합으로 발전해서 원산지역 최대의 소비조합으로 발전했다. 원산소비조합은 곡물부와 잡화부를 두어 조합원에게 싼값에 필수품을 공급하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원산총파업 시 노동자들의 생활을 뒷받침하는 병참기지 역할을 하였다. 당시의 소비조합은 일상생활에서 민중의 각성과 자조를 촉진했고 상호단결의 방법과 실천을 학습케하였다(한국 협동조합 운동 100년사 1권 p25, p130). 

그리고 또 하나는 노동자들이 기금을 조성하여 원산노련 산하 구제부에 노동자 전문병원인 원산노동의원을 1928년에 설립한 것이다. 이 병원은 조선에서 노동자들이 기금을 조성해서 "상호부조적"인 병원을 운영한 최초의 사례인데, 경성의학전문학교 출신 의사인 차철순과 이정권, 간호부 겸 조산사로 김순정을 초빙하였다. 차철순 의사는 1899년 함북 명천 태생으로 1918년 경성의전을 졸업하고 함북 웅기군(현재의 나선시 선봉지구)에서 의사로 활동했다. 1925년에 조선사회운동자동맹 웅기지역 대표로 참가한 바 있는 사회활동가이기도 했다. 김순정 간호사는 1921년에 평양의 기독교계열 병원에서 일했으나 병원장 동생의 횡포와 열악한 노동환경에 동맹휴업을 추진하다 사직하고 이후 원산에서 원산여자청년회 임원으로 일한 사회활동가였다. 원산노동의원은 원산노련 소속의 노동자에게 무료로 진료하고, 일반환자에게는 진료비의 40%를 할인해주었다. 하루 이용자 수 60-70명, 연간 이용자 수가 2만여 명에 달했다. 2년 정도의 짧은 운영기간이었지만 요즘 한국에서 활발한 의료협동조합(의료사회복지협동조합) 운동의 사회적 기원이라고도 볼 수 있다. 

▲ 원산노동의원  ⓒ동아일보(1929년 2월 1일)
▲ 원산노동의원 ⓒ동아일보(1929년 2월 1일)

총파업을 탄압한 총독부에 의해 원산소비조합과 노동의원은 폐업되었으나 피지배의 엄중한 식민지 상황에서 노동자들의 경제적 상호부조적인 토대를 구축하는 근대적 사회조직을 만들어 내었다는 것은 의미가 컸다. 원산노련과 원산소비조합을 탄압하기 위해 경찰이 회계장부를 압수해 조사했으나 투명하고 정확한 회계 관리가 이루어졌다는 것을 오히려 증명해주었다고 한다. 노동병원은 이후 전국의 각종 노동조합이나 조합의 기본정책으로 중시되었고 노동자들이 "자조적 사회보장" 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이후 원산에는 기독교 계통의 YMCA 산업부가 원산협동소비조합을 창립하고 사회주의운동계열도 원산노동자소비조합을 조직하여 서로 노선 차이를 가지면서 소비조합 운동을 추진하였는데 일제의 식민정책이 민족운동과 민중운동에 대해 파시즘적인 말살 정책을 실시하면서 폐쇄되고 해방 이후에 다시 등장한다.

<근대적 세계를 향한 원산>

원산이 개항 후 식민지로 된 상황에서 지배와 수탈의 통로가 되고 또한 산업개발이 진행된 것과 이 과정에서 원산 사람들의 대응을 살펴보았다. 산업개발에 대해서는 "식민지근대화론" 등 견해 상의 이견들이 등장하지만, 일본이 자국의 자본주의 성장 과정에서 근린 나라들에 대해 제국주의적 팽창정책을 일관되게 추진했다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다. 

제국주의에 동화되는가 안되는가는 지배당하는 사람들의 자의식이 무엇을 지향하고 만들어내었는가에 달려있다. 또한 "독립운동사"만으로 식민지 시대의 모습을 다 그려낼 수도 없다. "있었던 현실"을 부정하지 않고 직시하되 다르게 해석할 줄 알아야 한다. 바로 그 제대로 보고 다르게 해석하는 관점이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낸다. 필자의 관점은 다음과 같다.

"원산은 일본에 의해 세계로 열렸지만, 원산 사람들에 의해 근대문명으로 들어섰다." 

 

※ 다음편은 [세계를 향한 원산을 바라보다(中) : 해방후 현재까지의 원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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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찬우 (테이쿄대학 교수)
이찬우 (테이쿄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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