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만강 넘어 대륙과 해양을 향한 라선을 바라보다(中) : 두만강지역개발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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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만강 넘어 대륙과 해양을 향한 라선을 바라보다(中) : 두만강지역개발의 꿈
  • 2020.10.21 09:00
  • by 이찬우 (테이쿄대학 교수)

두만강을 넘나든 근대의 라선 : 동북아의 대격변기 19세기 말-20세기 초의 사정

▲ 북한 북부지역 철도망과 라선 (필자 작성) 
▲ 일제시대 조선 북부-만주 철도망 연결과 라선 (필자 작성) 

한반도 동북쪽 귀퉁이 두만강 하구 변에 있던 라진과 선봉(구 웅기)이 주목을 받게 된 것은 러시아제국이 1860년에 북경조약으로 청나라로부터 연해주를 할양받으면서부터였다. 이때 두만강 하구에서 15km까지가 러시아와 조선의 국경하천이 되었다. 이로부터 두만강 하류 지역에서는 조선왕국(이후 일본제국, 북한)과 청나라(이후 중국) 그리고 러시아제국(이후 소련, 러시아연방)이 국경을 맞대고 교류와 격리를 반복하였다. 두만강을 넘어 사람과 물자와 사상과 혁명이 오갔다.

중국지역에선 훈춘이 국경 마을이 되었는데, 중-러 사이에서는 바다를 상실한 두만강 지역의 중국이 훈춘-크라스키노(포시에트항) 간의 경제교류로 육로를 통해 바다로 나갈 수 있도록 양해가 있었다. 그러나 1917년 러시아혁명 후 소련 시대를 통틀어 두만강하구 포시에트항을 포함한 소련지역은 봉쇄되어 중국지역으로서는 두만강을 넘어 한반도 쪽 통로로 경제교류를 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러한 러시아-중국 쪽 정세변화와 일본의 조선(대한제국) 합방 이후 대륙진출이라는 일본-한반도 쪽 정세변화의 흐름 속에서 라진과 선봉(웅기)도 부침을 경험했다. 

그런데 당시 조선사람들의 관점에서 근대를 이해하려고 한다면 함경북도 지역에 조선의 주민이 원래부터 주로 모여 살고 경제면에서나 물류 면에서 중심적이었던 곳을 알아야 한다. 함경북도에서 항만을 낀 곳으로 중심적이었던 곳은 ①길주-성진항(지금의 김책시), ②경성-독진항, ③경흥-웅기항 이렇게 세 곳이었다. 함경북도에서 길주는 남쪽, 경성은 중앙, 경흥은 북쪽에 있다. 청진항과 라진항은 후에 일본제국이 개발한 항만이다. 성진항은 1899년에 개항하였는데 길주-성진은 조선인 사회가 강력했다. 주로 콩과 소(生牛)를 평안도지역은 물로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 수출하는 것으로 발전했다. 경성은 함경북도 지역의 중심지로서 상업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경흥에는 러시아와 소(生牛) 교역을 위해 시장이 열렸고 웅기항도 콩과 소 교역의 중심으로 성장하였다(1921년 개항). 

1860년대 이후 경흥-웅기에서 두만강을 건너 러시아 핫산-블라디보스톡 지역에 정착한 조선사람들은 주로 농축산업과 소 교역을 통해 러시아군과 시민들에 공급하는 것으로 부를 일구었다는 것이 1894년에 포시에트 지역을 방문한 영국인 비숍 여사의 다음과 같은 기록에 잘 나타나 있다.

"포시에트만(灣)은 멋진 막사와 상점들이 있는 커다란 군 주둔지로, 민간인이 사는 것 같지 않았지만 멀지 않은 곳에 한인마을들이 자리 잡고 있어, 블라디보스토크에 공급되는 소고기의 대부분이 이 곳으로부터 나왔다. 우리는 강건하고 윤택해 보이는 한인들이 60마리의 매우 살찐 소를 몰고 증기선으로 내려가는 것을 목격하였다."(이사벨라 버드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

이렇게 길주-경성-경흥으로 연결되어 콩과 목축을 중심으로 두만강을 넘나들며 성장하던 조선인 지역사회의 축은 일본에 의해 청진과 라진을 중심으로 중국 만주와 연결, 그리고 지하자원개발과 중화학공업, 수산업을 건설하는 것으로 변화하였다. 청진항은 1904년 러일전쟁시 일본군의 상륙 지점이었고 청진-회령 군사철도를 부설하였기에 그 군사적 가치를 높이 산 일본이 1910년이후 적극적으로 개발하여 일본인 시가지를 만들었다. 청진-회령 철도는 1917년에 함경선 연장으로 개통되었고 1927년에 회령을 지나 중국 쪽 개산툰을 연결하는 두만강 국제철교가 개통되어 중국 길림성으로 이어졌다. 제국 일본이 개발한 청진은 근처의 라남에 일본군 제19사단(라남사단) 설치와 더불어 지역사회의 인구이동을 수반하는 식민지적 변화를 만들어냈다. 청진-라남과 청진항이 중심이 되면서 근처에 있던 경성-독진항은 1910년대 이후 쇠퇴의 길을 걸었다. 1920년대까지 청진항은 중국-일본 사이의 통과화물이나 라남의 군수물자, 일본인들의 수요물자를 공급하는 항만으로 기능하였고, 성진과 웅기항은 콩과 소의 수출항으로 기능하였다. 그래서 길주-성진항과 경흥-웅기항이 함경북도의 조선인 사회 및 경제와 밀접히 연결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농축산업-상업에 발전 가능성이 있던 함경북도 조선 사회는 식민지 통치하에서 일본의 계획에 따라 근대 산업화와 도시화에 말려들어갔고 함경북도에도 산업재편과 인구이동이 급격히 일어났다. 

이러한 과정은 필연적으로 조선사람들의 변화뿐 아니라 일본에 대한 저항을 불러일으켰고 이는 두만강을 넘나드는 의병운동과 러시아와 중국으로 이주한 조선인(한인)들의 항일운동으로 나타났다. 러시아로 이주한 한인중에 항일운동의 중심인물은 최재형 선생이었다. 

최재형은 1860년에 경흥군 북쪽에 있는 경원군에서 노비의 아들로 출생하였는데, 1869년 홍수 기근 때에 가족이 두만강을 넘어 크라스키노 지역의 포시에트에 있는 지신허 마을(러시아 최초의 한인 마을)로 도망하였다. 러시아에 초기 이주한 경우인데 최재형은 러시아인 고용주의 도움으로 학교를 다녔고 원양상선을 선원을 하고 장사도 하였다. 그러한 과정에서 러시아 문화와 중국어까지 익숙한 인텔리 교양을 몸에 지니게 되었고 1895년에는 러시아 국적자로서 크라스키노(연추) 지역 한인 자치군의 도헌(책임자)로 임명되어 13년간 활동하였다. 그는 러시아에 이주한 한인들의 교육에 힘썼으며 회사를 설립하여 러시아군에 소고기, 군복 등을 공급하는 군납업으로 크게 돈을 벌었다. 상기 영국인 비숍 여사가 본 1890년대 포시에트의 육류 판매 한인 중에 큰 부자가 된 사람이 최재형이었다. 

그는 이 돈으로 독립운동의 후견자 역할을 하게 되는데 1908년 4월에 국권 회복 항일운동단체인 동의회(同義会)를 자신의 집에서 설립하고 그 총재로 선출되었다. 동의회는 국권회복을 위한 민족정신 함양, 실력양성과 함께 국내 진공 작전도 하였다. 국내 진공 작전에는 의병들이 소부대별로 두만강을 건너 북한지역으로 진공하여 국내에 거점을 만들어 장기적인 국내항전을 도모하였다고 한다. 무기조달은 러시아군과 가까운 최재형이 주로 담당하였다. 1908년 여름 함경북도지역은 두만강을 건너온 의병들에 의해 장악된 곳이 많았으며 웅기지역의 일본군 소부대가 궤멸 당하기도 하였다. 이 국내진공 작전에 참가한 의병의 한사람이 바로 최재형과 가까웠던 동의회 평의원 안중근이었다. 안중근 부대는 두만강을 건너 경흥군 홍의리를 습격하여 일본 수비대 병사 2명과 헌병 1명을 사살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회령에서 일본군에게 패배한 후 안중근은 구사일생으로 두만강을 다시 건너 러시아로 퇴각했다. 이후 최재형은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제거하기 위한 의거를 계획할 때 물심양면으로 지원하였다. 안중근이 1909년 3월 새끼손가락을 자른 유명한 "단지동맹"의 본래명칭이 "동의단지회(同義断指会)"였고 그 결성 장소가 바로 포시에트의 <최재형의 집 창고>였다. 

최재형은 1910년 한일 합방 이후에는 블라디보스톡 신한촌에서 권업회(勧業会)라는 이름의 경제단체를 조직(1911년 12월)하고 항일 독립운동을 이어나가기도 하였고 1919년 3.1운동 이후 상해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재무총장으로 선임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그는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조선해방은 임시정부를 조직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조선인 해방군대를 조직 양성하는 데 있는 것이다. 나는 본시 조선의병대에 종사하였고, 지금도 종사하고 있다. 만일 상해로 가는 여비가 있다면 나는 그 돈으로 총을 사서 우리 독립군대로 보내겠다." 

최재형은 사실 무장항쟁을 지원했지만, 무장항쟁만을 추구하는 강경론보다는 교육과 기업을 통해 힘을 키운 뒤에 독립한다는 온건론의 입장에 가까웠다고 한다. 그러던 최재형이었지만, 러시아 혁명 후 일본이 시베리아 극동지역에 군대를 파병하여 볼세비키 적군에 대항하여 전쟁을 벌이게 되면서 1920년 4월 최재형은 우스리스크의 자택에서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어 죽임을 당하였다. 그의 시신은 돌려받지 못하였다. 

한편 두만강가의 웅기 출신으로 근대시대의 민족정신을 추구한 인물로는 기독교계의 송창근 목사(1899~1951년?)와 김재준 목사(1901~1987년)를 들 수 있다. 송창근 목사는 한국기독교장로회를 창립한 김재준 목사를 기독교로 전도한 인물이며 함경도 출신이면서 유명한 평양 산정현교회에서 시무하였고 6.25 전쟁 때 서울에서 납북되어 52세에 사망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송창근은 개화사상과 기독교를 받아들인 집안에서 태어나 중학교를 독립운동가이자 교육가인 이동휘가 세운 간도의 광성중학교를 나왔다. 이동휘의 기독교에 대한 희망은 "민족 갱생을 위한 인간 변화"였다고 하는데 이 마음을 이어받아 1916년에 서울에 가서 피어선 성경학원(현 평택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였고 이때 중앙기독청년회(YMCA)에 가입하여 이상재 선생의 지도를 받았으며 이후 일본 유학(아오야마학원 신학부)기간까지 10년간 서울YMCA와 동경YMCA에서 활약하였다. 1920년에 송창근은 독립운동 노래를 배포한 일로 "정치범죄 처벌령"과 "출판법 위반"으로 구속되어 징역 6월을 살았다. 출감 후 그는 고향 웅기와 회령 등지에서 강연회 연설을 하고 다녔는데 당시 나이 22세 미남형에 유머에 능했고 폭발적인 강연으로 매회 400여 명의 청중들이 몰릴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당시 김재준은 웅기항에 있던 웅기 금융조합 서기로 있었는데 2살 연상인 송창근을 만나고 직장을 치워버리고 서울에서 신학 공부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미국에서 김재준, 한경직 등과 함께 신학 공부를 하고 신학 박사학위를 받고 돌아온 송창근 목사는 진보적인 신학을 추구하였고 부산에서 빈민구제 활동 등 사회사업을 하였으며 1937년에는 수양동우회(흥사단) 사건으로 2년간 옥살이를 하였다. 출옥 후 신사참배 등을 하고 종교보국회 이사 등을 한것으로 친일 행적이 있어, 신사참배 거부로 옥살이를 한 기독교인들로부터 해방후 친일파로 규탄받기도 하였으나 자의에 의한 행위가 아닌 소극적 행위였다는 것이 교계의 대체적인 견해다. 송창근은 1940년에 조선신학교(현 한신대학교)를 김재준과 함께 설립하였다. 김재준 목사는 송창근 목사에 대해 "바울의 고백과 같이 내 민족을 위해서라면 그리스도로부터 끊어져도 좋다고 할 만큼 민족애에 불타는 애국자였다"라고 평가하였다.

1930년대 라진 개발의 의미 

러시아 혁명 이후 소련 연해주 지역은 혼란시기를 지나 소련 적군이 장악하면서 일본군은 1922년에 러시아 연해주에서 완전히 철수하였다. 이로부터 두만강 건너 러시아 지역은 봉금지대가 되었다. 새로이 등장한 사회주의 국가 소련에 대항하여 일본은 한반도와 중국 만주를 일본의 지배하에 강력히 묶어 두기 위한 일본-조선-만주의 경제권통합 정책을 추진하게 되는데 군사적 관점에서 산업정책이 본격화되고 이에 결합한 철도, 항만 건설과 공업지대 건설이 추진되었다. 

이를 위해 조선총독부 철도국은 1927년부터 "조선철도 12년(1927-38년) 계획"을 새로 시행하여 그중에 두만강 변을 따라 도문선(웅기-종성, 163km, 1927년 착공하여 1933년 개통)을 신설하였다. 이때만 해도 만주-조선-일본의 경제결합을 위한 조선 함경도 항만은 청진항과 두만강 쪽의 웅기항 두 군데였다. 그런데 1931년 만주사변과 함께 만주국이 건설되면서 일본은 동해를 건너 만주로 직행하는 루트에 대한 검토를 하였는데 일본 육군의 입장은 라진 앞바다가 수심이 깊어 전함과 화객선이 접안할 수 있고 섬이 자연 방파제 역할을 하는 천혜의 항이라면서 라진을 개발하기로 주장하였다. 결국 청진, 라진, 웅기의 세 항이 "북선3항(北鮮3港)"이라는 이름으로 함께 취급되었고 남만주철도주식회사(만철)의 만주 신경(장춘) -도문 철도의 조선쪽 최종착역으로 라진이 결정되었다(1932년 8월23일 총독부관보 1689호). 그래서 웅기와 라진을 연결하는 철도를 만철이 1933년 4월에 착공하여 당시 한반도 최장의 3.85km의 터널을 포함하는 15.2km의 웅라선을 1935년 8월에 개통하였다.

▲ 라진역의 건설 직후 모습 ⓒ 일본 항만협회('항만'제13권 12호, 1935년)
▲ 라진역의 건설 직후 모습 ⓒ 일본 항만협회('항만'제13권 12호, 1935년)

라진항도 만철이 연간 화물처리능력 300만톤의 대형 항만으로 건설하는 제1기 5개년 공사를 1933년 5월에 착공하였다. 장기적인 목표는 900만톤의 연간화물처리능력을 갖는 것이었다. 1935년 11월 제1부두의 완성과 함께 만주국 도문세관사무소, 국제운수창고 등을 갖추고 개항장으로 되었다. 이로부터 만철이 직접 경영하는 라진항은 만주직통열차를 통해 북한지역 동북부에서 중국 동만주지역과 일본을 연결하는 주요한 상업항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1938년까지 8,000천톤 급 선박 12척이 동시에 접안할 수 있는 3개 부두와 방파제, 창고, 화물야적장이 건설되었다. 라진항의 주요화물은 결국 중국 화물이어서, 라진 주위에 상공업이 수산가공업 이외에는 본격적으로 형성되지 못한 탓에 당시 “방은 갖추어져있지 않은데 현관만은 훌륭하다”고 놀림을 받았다고 한다. 일본과는 니이가타(新潟)와 츠루가(敦賀), 사카이미나토(境港)에서 연락선이 청진-라진-웅기 3항에 기항하였다.

▲ 라진항 개항당시 모습 (제1부두), 사진상의 아마쿠사마루(天草丸)는 원래 1902년에 러시아제국이 건조한 배수량 2,346톤의 '아무르'호인데 러일전쟁 때 일본군이 탈취하여 사용하였음  ⓒ항만협회 상동
▲ 라진항 개항당시 모습 (제1부두), 사진상의 아마쿠사마루(天草丸)는 원래 1902년에 러시아제국이 건조한 배수량 2,346톤의 '아무르'호인데 러일전쟁 때 일본군이 탈취하여 사용하였음 ⓒ항만협회 상동

한편 웅기항은 연간 60만 톤 정도의 화물처리능력을 갖는 항으로 정비되어 1936년 4월에 만철이 라진항의 보조항으로 시설을 무료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주요 화물은 석탄, 어유, 목재로 바뀌었다. 

▲ 웅기항의 1930년 모습  ⓒ 조선총독부 내무국, 『조선항만요람』1931년
▲ 웅기항의 1930년 모습 ⓒ 조선총독부 내무국, 『조선항만요람』1931년

이와 같이 두만강하구 지역은 1945년까지 조선 쪽의 라진과 웅기가 하나의 세트가 되어 일본의 대륙지배를 진행하는 교두보 역할을 하게 되었다. 라진은 도시 건설을 통해 새로 일본인 사회가 형성되었고 웅기에는 조선인 사회가 중심이 되었다.  

일본인 사회가 중심이었던 청진과 라진이 해방 이후에도 북한 함경북도 지역의 중심지로 유지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하지만 이는 중국 만주지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일본에 의해 강제된 근대의 산물이 토대가 되어 새시대를 연 굴절의 역사도 우리의 역사이다. 

필자는 이 흐름을 딛고 스스로 근대를 찾아나선 조선사람들의 "주체성"을 더 중시하고 싶다.


※ 두만강 넘어 대륙과 해양을 향한 라선을 바라보다 (하)는 해방이후 라선의 변화와 경제특구 개발을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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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찬우 (테이쿄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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