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호의존과 격리의 경계선에서 개성 땅을 바라보다(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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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호의존과 격리의 경계선에서 개성 땅을 바라보다(上)
  • 2020.04.30 09:10
  • by 이찬우 (테이쿄대학 교수)

신형 코로나바이러스가 세상을 흔들고 있다. COVID-19라고 이름 붙은 이 전염병이 실체가 분명하지 않고 치료 약도 아직 없다는 것 때문에 사람들은 죽음이라는 공포감으로 두려워한다. 그러나 옛날 흑사병이나 천연두는 물론 17년 전의 사스나 최근의 메르스 등과 같은 전염병이 창궐할 때마다 인류가 결국은 이겨냈듯이 이도 조만간 퇴치할 것이다. 이 싸움의 전선에서 공포에 맞서고 있는 의료관계자를 비롯한 모든 봉사자분들에게 경의와 존경을 바친다. 

전염병을 퇴치해온 역사를 통해 사람들은 미신과 우상보다는 과학과 이성의 힘을 더 신뢰하게 되었지만, 삶과 죽음이라는 영원한 화두는 인류에게 종교적 심성을 계속 남기고 있다. 꼭 종교가 아니더라도 말이다. 이는 고통하는 사회와 감정을 공유하는 것이며, 내가 살아있는 것의 의미에 겸손해지는 심성이다. 다시 말해 나와 이웃이 함께 살아남기 위해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격리]를 어찌할 수 없을 때, 나는 더욱더 이웃과 연결될 수밖에 없다는 [상호의존]을 자각하게 된다. 지금 우리들은 모두 상호의존과 격리의 경계선에 서있다.

ⓒ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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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정치 분야로 돌려서 보자면, 미국에서는 상호의존(Interdependence)과 격리(Isolation) 개념을 모순관계 (트레이드 오프; Trade-off)로 인식하는 것 같다. 이 개념을 가장 잘 활용한 사람은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이다. 그는 1972년에 미국의 전통적 적대국인 소련을 격리(또는 봉쇄)하기 위해 적대적이었던 미-중 관계에서 상호의존(또는 긴장완화)을 실현한 책략가로 유명하다. 지금 미국의 대중정책은 상호의존에서 격리로 전환되었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상호의존과 격리 개념을 보완관계로 인식하는 것 같다. 자민당 정권의 대중국 정책이 그 실례인데 경제적 상호의존과 정치군사적 격리 정책을 동시에 추진하고 있다. 미국과 중국이라는 강대국 사이에서 비교적 "약소국"인 일본이 취하는 실용주의적 정책이다. 미국과 일본의 사례에서 국가가 처한 입장에 따라 정책은 다양한 모습을 띄면서 변화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국도 대북 정책에서 정권에 따라 정책이 변화해온 바 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정책을 잇는 문재인 정부는 남북 관계를 기본적으로는 상호의존 관계로 가져가는 입장인 것 같다. 보수정부의 정책과는 그 결이 다르게 보인다.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 사업의 재개나 남북철도 연결, 기타 남북협력사업에 대해 실행력은 모르겠지만 기본적으로는 전향적인 입장인 듯하다.

2018년에는 그러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2019년 이후에 북미 간 협상에서 비핵화와 관계 정상화에 진전이 없고 북한이 남한에 대한 기대를 접으면서 문재인 정부의 대북정책 실행력이 벽에 부딪힌 감이 있다.

게다가 남한의 기득권익층(Establishment)이 "북한의 비핵화"를 추구하는 미국의 정책에 협력하여 대북한 격리(봉쇄)를 중시하는 입장을 보이는 것도 정부엔 걸림돌이다. 이제 문재인 정부는 국회 과반수를 장악하였다. 대북 정책에서 상호의존과 격리의 경계선에 서서 어떠한 실행력을 보여줄지 역사적 시간이 기다리고 있다.

북한에게도 남북 관계는 장차 한반도의 모습을 상상할 때 가장 중요한 과제이다. 당면한 현실 인식이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자주성"에 있다 하더라도, 결국 "인민의 생활향상"을 위해서는 남북통일이 지상의 과제이다. 사실 북한은 그 나름대로 남한과 관계 개선을 추진해온 바가 있다.

남한 사회에서는 이를 남한혁명을 위한 북한의 통일전선전술로 치부해버리는 것이 "안보 교육"이었지만, 북한의 내부 사정을 알아보는 것도 이제는 필요하다고 본다. [온고지신]의 한 시도로서 남북경협의 상징 지역인 개성의 역사를 들여다본다. 

▲ 개성특별시 전경 ⓒ wikipedia
▲ 개성특별시 전경 ⓒ wikipedia

개성은 황진이가 자신을 포함해 서경덕과 박연폭포를 송도 3절로 불러 유명한데, 왜 이 셋인지는 모르겠으나 박연폭포엔 이런 전설이 있다. 그 옛날에 박진사라는 퉁소 명수가 이 못가에서 퉁소를 부는데 못 속에서 용왕의 딸이 감동받아 솟아 나왔다.

박진사는 그 공주와 한참 자연을 즐기다 함께 못 속에 들어가 수궁 용왕의 사위가 되었다 한다. 그 후부터 이 못을 박연이라 하고 폭포를 박연폭포라 불렀다 한다. 4월 중순이면 꽃으로 뒤덮이고 예로부터 박연폭포를 세 번만 구경하면 사후에 극락으로 간다는 곳이다. 하늘에 닿는다는 천마산 너머 박연폭포를 세 번 구경하기가 옛날엔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 박연폭포 ⓒ 현대아산
▲ 박연폭포 ⓒ 현대아산

6.25전쟁이 끝난 후 개성 땅은 남한에겐 빼앗긴 미수복지역이지만 북한에겐 신해방지구였다. 개성시 농촌지역에서는 휴전 이전부터 농민들이 돼지, 닭, 오리들을 함께 길러 파는 농촌부업협동조합을 만들기 시작해서 1953년 12월에 개성시 덕암리 정동마을에서 처음으로 25가구 빈농들이 모여 자기들의 토지를 출자 통합하여 제2 형태의 농업협동조합(토지의 사적소유를 유지한채 토지를 출자하여 공동 경영하고 노동력과 토지의 크기에 따라 분배 받는 형태)을 조직하였다. 이것이 소위 신해방지구에 나타난 첫 농업협동조합이었다. 국가의 지원은 있었지만 개입보다는 농민들에 의한 자발적인 조직이었다는 것이 특징이었다. 그것도 휴전 직후의 삼엄한 대치전선 땅에서다.

이후 1955년까지 개성지역 농촌에 65개 농업협동조합이 생겨 개성 농촌의 11.3%의 농가가 참여하였다. 자발적인 농업협동조합 조직화는 이 정도 수준이었던 것 같다. 1956년부터는 농민의 자발성과 국가의 유도가 결합된 방식이 기본이지만 정부의 개입이 사실상 강화된 농업협동화 방침이 추진되면서 1958년까지 제3형태의 농업협동조합(토지와 생산수단의 사적소유를 포기하고 공동소유와 공동경영을 통해 노동력에 따라 분배받는 사회주의적 형태)이 주류로 되었다.

▲ 개성시 덕암리 정동 농업협동조합 (노동신문 1954년 10월24일)
▲ 개성시 덕암리 정동 농업협동조합 (노동신문 1954년 10월24일)

예로부터 아름다운 고장으로 이름났던 송도 개성은 전투의 상처로 많은 유적과 시설들이 폐허로 되었다. 휴전 직후부터 개성시는 복구 사업에 달라붙어 학교, 주택, 공장, 상점, 극장들이 다시 들어서기 시작했다.

전쟁 전에 몇 개의 초중등 교육기관만 있었다고 하는데 전후에 초등학교 45, 중학교 8, 고등학교 12, 전문학교 1, 대학교 1 곳이 들어섰다. 전문학교는 개성 사범 전문학교이고 대학교는 송도 정치 경제대학으로 1953년 10월에 개교하였다. 송도 정치 경제대학은 당중앙 조직부 소관으로 남한 출신 학생을 받아들여 민족 통일 간부를 양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고 한다(1960년대에 해체되고 그 자리에 송도 사범대학이 들어섰다).

그리고 유명한 고려 인삼밭이 다시 회복되고 선죽교, 목청전, 남대문, 안화사, 태조릉, 공민왕릉 등 유적도 복구되기 시작했다. 만월대는 군대와 중국 인민지원군 그리고 개성시민들이 함께 복구 공사를 진행하였다. 국영백화점이 다시 개점하고 개성시 소비조합은 각종 곡물과 농민들의 부업 생산품인 바구니, 나무 그릇 그리고 각종 식료품 등을 일반 시장가격보다 저렴하게 판매하였다. 그리고 1954년 8월 14일에는 국립 개성역사박물관이 개관하였다. 

▲(왼쪽) 복구된 개성고중 (노동신문 1955년 4월 23일), (오른쪽) 송도정치경제대학 (노동신문 1954년 1월 16일)
▲(왼쪽) 복구된 개성고중 (노동신문 1955년 4월 23일), (오른쪽) 송도정치경제대학 (노동신문 1954년 1월 16일)

파괴된 개성 철도역사도 휴전 후 1년여 만에 신축(건평 724평방미터)되었다. 개성시의 복구건설을 위한 총기본 계획이 수립된 것은 1955년 4월(내각결정 제41호)이었다. 이 계획에 따라 개성은 인민위원회 종합 청사가 들어서는 시가지 중심을 남대문 앞 광장으로 하여 덕암리, 운학리 쪽으로 거주 지역이 형성되는 구조로 되었다. 시의 기본 산업 지역은 용산동으로 정하고 조선식 건물들과 고전 건축들을 보존하며 새로운 민족적인 건축을 추구하였다. 전 주민의 75% 이상이 상수도를 이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 휴전후 신축된 개성철도역사 (노동신문 1954년 11월 26일)
▲ 휴전후 신축된 개성철도역사 (노동신문 1954년 11월 26일)
▲ 버스가 달리는 개성거리 (노동신문 1955년 7월 28일)
▲ 버스가 달리는 개성거리 (노동신문 1955년 7월 28일)

휴전 후에 김일성 수상(당시)이 현지지도로 개성 땅을 찾은 것은 1954년 12월 상순이었다. 김일성 수상이 제기한 것은 아이들을 공부시키는 학교 건물을 다시 짓는 것과 일제시대 소년형무소 자리에 개성방직공장(당시 개성직물생산협동조합)을 짓는 것이었다. 방직산업은 개성지역의 중요 산업이었기 때문이다.

학교와 공장과 주택들을 다시 짓는데 많은 벽돌이 필요했다. 이때 한 평범한 개성시민인 강일준이란 사람이 스스로 벽돌을 만들어볼 생각을 한다. 그는 오랜 기와집 동네인 만월동에서 미군의 폭격으로 집들이 허물어지고 굴뚝만이 서있는 모습을 보다가 넘어진 담장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저것으로 벽체를 만들면…). 그 후 용수산 밑의 그의 자그마한 집 대문에는 [개성석회건재생산협동조합]이라는 간판이 붙었다. 조합에서는 대용 자재로 만든 벽돌을 건설장들에 보내기 시작했다.

강일준은 조합관리위원장으로서 기술개발에 힘써 협동조합 스스로의 힘으로 8개의 소성로를 건설하여 겨울에도 벽돌 생산을 진행할 수 있게 하였다. 이 개성석회건재생산협동조합은 현재까지 [개성건재생산협동조합]이라는 이름으로 65년간 개성땅의 지방원료로 건축자재, 비닐하우스용 비닐 등 농업자재등을 생산하면서 건재하다.

휴전후 1955년까지 2년 내에 개성에는 소비조합 이외에 상기의 석회건재생산협동조합, 직물생산협동조합을 비롯하여 식료품생산협동조합, 농기구생산협동조합, 공예품생산협동조합, 피복생산협동조합, 일용품생산협동조합 등 13개소의 생산협동조합이 새로 조직되여, 지방의 원료를 활용한 각종 소비품을 생산 개시하였다. 

개성의 생존은 그 주민들이 스스로 개척해간 것이 밑바탕에 있었다. 개성지역은 전통적으로 상업과 개인 수공업이 상대적으로 발전한 곳이었다. 그러나 많은 상인과 수공업자들은 3년간의 전쟁으로 인하여 생활이 곤궁하여졌는데 생산협동조합을 통해  이들은 협동을 통한 재활의 길을 열어갔다.

그런데 노동신문 기사(1987년 8월 25일)에 따르면 당시 개성에 대해 김일성 수상은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놀고있는 사람들에게 하루빨리 일자리를 마련하여주려면 생산협동조합을 빨리 조직하고 지방산업공장도 많이 건설해야 한다고 하시며 그들을 어엿한 나라의 주인-로동계급으로 키우도록 이끄시면서 원래 자본주의적 자유상업도시였던 개성시를 경공업도시로 발전시킬 웅대한 구상의 실현을 위한 방도를 환히 밝혀주시였다"고 한다. 북한 노동당의 화법이다. 

1957년 8월에 개성을 다시 찾은 김일성 수상이 방문한 곳은 개성 직물생산협동조합, 피복생산협동조합, 개풍군 고남농업협동조합, 용산농업협동조합, 개성시 제1중학교, 송도정치경제대학(제1회 졸업식), 박연폭포 등이었다. 김일성 수상은 생산협동조합들과 지방 공업공장들의 지방 공업제품을 더 많이, 더 좋게 생산할 것을 강조하였다고 한다.

북한에서 신해방지구인 개성이 어느 정도 안정되어 가면서 북한당국은 남한에 대해 교류와 경제협력을 제의하는데 그 협의 장소로 개성을 제안하였다. 그 첫 제의는 1954년 12월 1일이었다. 당시 북한 내각 체신상은 남북 간의 체신 우편 재개를 위한 토의를 위하여 1955년 2월에 남북 체신 대표 회담을 개성(또는 판문점)에서 소집할 것과 이를 위한 준비회담을 12월 17일에 판문점에서 가질 것을 남측에 제의하였다.

그 후 1955년 5월 26일에는 내각의 수산상이 남북수산당국자 회담을 제기하고, 11월 8일에는 내각의 전기상이 남한의 전력 기근과 관련하여 북한에 풍부한 전력(일제시대 건설된 수력발전소)을 남측에 공급할 용의를 표명함과 아울러 남측의 대표자들과 1955년 11월 25일에 개성시에서 회담을 진행할 것을 제의하였다. 1956년 8월 24일에는 내각의 보건상이 남북 보건 당국자 간 방역 정보 교환을 제의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교류와 경제협력 제의에 대해 남한 정부는 이를 북한의 "기만 전술"로 보고 거부하였다. 남북 교류와 경제협력을 처음 제의한 것은 남측이 아니라 북측이었다. 

▲ 2018년 9월 14일 문을 연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 전경 ⓒ 사진공동취재단
▲ 2018년 9월 14일 문을 연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 전경 ⓒ 사진공동취재단

지금 북한은 남한의 방역 협력 제의를 포함한 각종 교류 협력 제의를 거부하고 있다. 남한의 "기만 전술"로 보기 때문일까.

남북이 서로에 대해 상호의존을 말하면서도 격리라는 주술에 갇혀있다면 남북 관계 개선을 통한 민족 융성의 꿈은 그냥 꿈일 뿐이다. 서로의 속마음이 설사 격리에 있다 하더라도 상호의존을 추구하는 경계선에서 서로를 보아야 할 것이다. 개성은 바로 그 경계선에 서있다. 개성에는 상호의존의 본보기인 개성공업단지가 있고 지금은 격리되어 있다. 

경계선은 분단이지만 연결의 시작이기도 하다. 헨리 키신저는 1974년 10월에 "만약 우리가 상호의존 상태에 있다는 것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면 우리가 아는 바의 서구 문명은 거의 분명히 해체될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나는 이를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바꿔보려 한다. 

"만약 남북이 상호의존 상태에 있다는 것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면 우리가 아는 바의 민족 문명은 거의 분명히 해체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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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찬우 (테이쿄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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