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를 잇는 항구도시 남포를 바라보다 (下-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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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를 잇는 항구도시 남포를 바라보다 (下-5)
대동강은 한강으로 흐른다
  • 2021.02.24 13:00
  • by 이찬우 (테이쿄대학 교수)

1990년대 이후 남포 : 남북경제협력의 창구 
<북한에 처음 "남북 합영기업"이 들어선 남포>

▲ 남포시 항구구역 모습 (구글어스)
▲ 남포시 항구구역 모습 (구글어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남북 간에는 무역과 경제협력이 실제로 이루어지는 큰 변화가 있었다. 왜 대립하던 남북이 이때 서로를 필요로 하게 되었을까? 필자 생각으로는 국제정세 변화에 더하여 한반도 내부의 수요 변화가 배경에 있었던 것 같다. 

국제정세에서는 동유럽과 소련, 몽골 등에서 사회주의가 해체되고 시장경제체제로 전환하면서 "냉전후시대" 도래라는 패러다임 변화가 있었다. 중국과 베트남도 각기 개혁개방, 도이모이(쇄신) 정책 같은 사회주의정권하의 시장경제화를 전략으로 내세웠다. 이는 북한정부에게 불리하고 남한정부에게는 유리하게 작용했다. 

한반도 내부정세에서는 남한이 경제성장과 1988년 서울올림픽 성공을 바탕으로 해외시장개척, 자본진출 등 선진공업국으로 들어서는 능력을 갖추게 되었고 정치적으로 민주화 진행에 성공하면서 북한에 대해 적극적으로 접근하는 정책을 펼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남한정부의 "북방정책"으로 나타났다. 

북한은 1980년대 경제 저성장을 겪고 사회주의권이 무너지는 불리한 상황에서 "안전보장과 경제발전"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새로운 접근법을 선택했다. 그 첫째는 핵개발이요 둘째는 경제특구설치 등 경제개방 정책이며 그리고 셋째는 남북관계 개선이었다. 새로 만든 경제특구에 외국자본을 끌어들이고 또한 남한이 발전시킨 기술과 자본을 받아들여 경제성장에 연결시키고, 체제는 국방력(핵무력) 강화로 유지하겠다는 접근 방식이었다. 남북간에는 경제부문에서 상호 협력의 수요가 있었고, 정치부문에서도 안전보장을 위한 대화가 필요했다. 또한 남한의 1987년 "6월항쟁" 등 일련의 정치민주화 과정을 북한이 자신에게 유리한 국면으로 해석했을 가능성도 있다. 

남북한 정부는 1990년부터 5번의 고위급회담을 했고 그 결과로 1991년 12월에 <남북 간 화해와 불가침 및 협력교류에 관한 합의서>(남북기본합의서)를 채택했다. 이는 1972년 남북정부가 <7.4공동성명>을 통해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이라는 3대 통일원칙을 합의한 이래 20년 만에 이룬 정치적 합의였다.

북한이 새로 전개한 위의 세 가지 정책은 이후 30년간 한반도 정세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네 번째로 있었어야 할 국내정치와 경제에 대한 개혁정책은 "사회주의의 원칙을 지키고 실리를 추구"하는 것에 머물렀다. 이러한 점에서 북한은 다른 사회주의국가들의 대응방식과 아주 다른 전략을 추구했다고 할 수 있다. 북한은 이 때문에 경제침체와 체제불안 그리고 대외관계 위기라는 비싼 대가를 치러야 했다. 

다만 1990년대 초 한반도의 앞날을 아직 단언하기 힘들 때, 냉전이 해체되는 국제환경에서 남북 간에 큰 기회가 왔던 것도 사실이다. 남북이 상호 경제 협력하려는 수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기회를 포착하고 적극적으로 움직인 기업가로는 북한지역인 강원도 통천에서 태어난 현대그룹의 정주영 회장(1915-2001)이 대표적이었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북한과의 사업에서 선두에 선 사람은 대우그룹의 김우중 회장(1936-2019)이었다. 김우중은 대구에서 태어났는데 부친 김용하(1896-1950 실종) 씨가 제주도 출신이면서 평양고등보통학교(고등학교)를 나왔고 1950년 6.25전쟁 시기에 납북되었기 때문에 북한과 인연이 없지 않았다. 부친 김용하 씨는 대구사범학교 교장을 할 때 학생 박정희를 가르친 은사이기도 했다. 

김우중은 전두환 대통령시기(1981-87년)와 노태우 대통령시기(1988-92년)에 북한과 무역을 추진했는데 노태우 대통령이 대북특사(비공개)로 임명했다. 김우중은 남북 간에 기본합의서를 체결하는 것을 추진하기 위해 막후에서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20여 차례 만났다고 한다. 김우중은 1991년 5월에 대한축구협회장 자격으로 평양을 방문하여 그해 12월 체결된 남북기본합의서 작성을 위한 막후교섭 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이러한 활동을 바탕으로 김우중은 남북경제협력(투자)의 물꼬를 텄다. 1992년 1월에 남한 경제인 방문단을 구성해 북한을 공식적으로 처음 방문한 것이다. 김우중 회장 일행이 둘러본 곳은 평양시의 컬러 TV, 피복 공장, 평안북도 구성시의 공작기계공장, 황해북도 사리원시의 시멘트, 면방직 공장, 황해남도 은률군의 아연광산, 그리고 강원도 원산시의 수산물 가공공장과 남포항 등이었다. 

▲ 1992년 1월 북한을 방문한 김우중 회장 등 경제인 방문단과 김일성 주석 (자료:대우세계경연연구회)
▲ 1992년 1월 북한을 방문한 김우중 회장 등 경제인 방문단과 김일성 주석 (자료:대우세계경연연구회)

남포항을 본 김우중 회장은 남포를 남북경제협력의 장소로 마음먹었다고 한다. 남북 간에 남포-인천 해상항로를 통해 반출입을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대우그룹의 (주)대우는 1992년 10월에 정부의 남북경협사업자승인(대북투자사업자격부여) 제1호를 받아 남포시 항구구역 신흥리에 공업단지를 조성하는 사업을 개시하였다. 평양-남포 고속도로(청년영웅도로)변에 위치하고 항구구역 초입에 자리잡아 교통편이 좋은 곳이었다. 

1995년 5월 대우는 정부로부터 남포에 남북경협사업승인 제1호 (투자사업에 대한 승인: 512만 달러)를 받았다. 내용은 경공업 분야로 연간 3백만 장의 셔츠와 60만 장의 재킷, 30만 개의 가방을 생산하여 반입하는 것이었다. 1996년 4월에 대우는 북한의 조선삼천리총회사와 <민족산업총회사>라는 이름의 합영회사를 설립(남북 지분비율 50:50)하고 9월에 조업을 개시하였다. 이로써 남북 간에 기업 간 합영회사를 설립하여 공동경영을 진행하는 첫 역사가 시작되었다. 

▲ 대우 남포합영회사(출처-mbc 1995년 5월 17일 뉴스)
▲ 대우 남포합영회사(출처-mbc 1995년 5월 17일 뉴스)

남포에서 진행된 남북 간 합영사업은 남한에서 원자재를 인천항-남포항을 통해 들여다 임가공 하여 다시 그 항로로 남한으로 내오는 위탁가공 형태로 운영되었다. 1998년에는 2천만 달러 이상을 수출하였는데 예를 들어 일본 미즈노사에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 방식으로 남포에서 생산한 골프가방, 셔츠, 스키재킷을 수출하였다. 대우의 추가계획은 TV와 냉장고 등 가전공장도 남포공단 내에 건설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1999년에 아시아 통화위기의 영향으로 자금 유동성이 악화된 대우그룹이 해체되는 상황을 맞으면서 남포의 합영회사는 2000년에 합영사업이 중단되고 북한의 국영기업으로 전환되었다.

▲ 남북한관계와 대우그룹의 남포공단 사업개시까지의 추이 (자료) 필자 작성
▲ 남북한관계와 대우그룹의 남포공단 사업개시까지의 추이 (자료) 필자 작성

대우의 남포 합영회사에서 일한 북한 측 생산노동자는 약 1,200명이었고 비생산(관리, 후생, 운전, 경비 등)부문이 약 100명이었다. 생산직의 평균임금은 약 120달러로 이후에 개성공단 노동자들의 임금보다도 높게 책정되었다. 1990년대 후반 북한경제가 식량위기 에너지위기 등으로 곤경에 빠진 상황에서 남포 합영회사는 점심 식당을 운영하면서 노동자들의 생활을 지탱해주는 중요한 버팀목이 되었다. 

남포에는 대우그룹 이외에도 남북간 경제협력을 진행한 회사가 있었다. 대우그룹이 경영난으로 해체되고 남포에서 철수할 즈음인 1999년에 통일교 산하 기업인 평화자동차가 서울에서 설립되었다. 통일교 산하 기업이 북한에 관심을 가진 것은 통일교 총재 문선명(1920-2012년)의 고향이 북한 땅인 평안북도 정주군이었던 것이 크게 작용했다. 문선명은 평안북도 정주의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증조부 문윤국 목사는 평양신학교 출신으로 3.1운동당시 평안북도 총책임자였다고 한다. 문선명은 해방 후 북한지역에서 "신령주의"” 포교활동을 하다가 사회문란 혐의로 형무소를 드나들었고 6.25 전쟁시 흥남수용소에서 유엔군에 의해 석방되어 남한으로 갔다. 반공주의적인 기독교 신종파 활동을 한 문선명은 1991년 11월 북한을 방문하여 고향 정주를 둘러보고 김일성 주석과 면담하면서 공동성명을 발표하고 북한당국과 화해하는 모습을 보여 세상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서울에 설립된 평화자동차는 2000년 1월 정부로부터 남포에 자동차 제조 판매를 위한 남북경협사업승인 제10호 (투자사업에 대한 승인: 666만 달러)를 받았다. 그리고 동시에 북한의 조선민흥총회사와 합영(남북 지분 비율 70:30)으로 "평화자동차종합공장"을 남포시 항구구역에 세웠다. 2002년 4월에 공장 준공과 더불어 첫 번째 승용차 모델인 <휘파람>을 내놓았으며 이후 <뻐꾸기> <준마> 등 SUV 승용차와 <삼천리> 미니버스를 선보였다. 첫 생산라인은 베트남에서 생산하던 피아트 승용차 모델을 옮겨와 조립하는 것이었고 이후 폭스바겐의 제타, 쌍용자동차의 체어멘 등도 라이센스 생산(자체 개발 생산이 아니라 외부의 설계나 기술을 빌려 생산)하였다. 2006년에 투자액은 5,500만 달러로 늘어났다. 북한 노동자 400여명에 생산능력은 연간 1만 대 수준이었으나 실제 생산은 2010년 1,450대 수준이었다. 2010년 5.24 조치 이후 남북 경제교류와 협력이 중단되면서 남포의 평화자동차 경영도 어려워졌고 결국 2013년에 평화자동차는 북한의 국영기업으로 전환되었다. 

▲ 2002년 4월 남포시 항구구역 평화자동차종합공장 준공식 (출처: 평화자동차 홈페이지, http://pmcgroup.co.kr) 
▲ 2002년 4월 남포시 항구구역 평화자동차종합공장 준공식 (출처: 평화자동차 홈페이지, http://pmcgroup.co.kr) 
▲ 평화자동차의 광고 입간판 (출처 :Flickr 'Ryuugakusei')
▲ 평화자동차의 광고 입간판 (출처 :Flickr 'Ryuugakusei')

<남포항 – 인천항 항로 개설: 대동강은 한강으로 흐른다> 
남포항과 인천항 사이 항로는 사실 남포항이 개항한 이후부터 남분 분단 전까지 이어져 왔었다. 일본인 가세 와사부로(加瀬和三郎)가 1908년에 낸 [인천개항 25년사]에는 인천항과 남포항에 대해 다음과 같은 설명이 있다.

"국내 무역 중 당시 인천과 관계가 가장 깊은 곳은 진남포다. (중략) 진남포에서 일본으로 수출하는 곡물과 일본 혹은 청나라에서 수입하는 화물은 모두 인천항을 거쳤다"

인천항이 남포항의 환적항 역할을 하였다는 내용이다. 이러한 서해 뱃길이 남북분단으로 닫혔던 것이다.

남포항과 인천항 사이에 해운화물 항로가 다시 개설된 것은 1998년 8월이었다. 이때부터 남포항은 개성공업지구의 육로를 제외하면 남북교역과 경제협력사업의 중요한 물류창구 역할을 하였다. 처음엔 비정기항로였는데 2002년부터 국양해운이 파나마선적의 트레이드포츈(TradeFortune)를 투입하여 주 1회 정기항로로 운항했다. 남포에서 남북간 경제협력이 진행되고 남포항과 인천항 사이에 해운항로도 이어져, 대동강이 한강으로 흐르는 물류가 기적처럼 펼쳐졌다. 남한의 김대중 정부(1998-2002년), 노무현 정부(2003-07년) 기간 중에 서해의 물길은 남포와 인천을 연결하는 배를 통해 하나로 이어졌다.

더 나아가 2005년 8월 1일부터는 남북 간에 <남북해운합의서>가 발효되어 해운 협력이 본격화했다. 이 합의에 따라 남북한이 각각 7개 항만을 지정항으로 하여 항로 연결이 가능하게 되었다. 북한은 남포, 해주, 고성, 원산, 흥남, 청진, 라진항을 지정했고, 남한은 인천, 군산, 여수, 부산, 울산, 포항, 속초항을 지정했다. 남북은 이 합의서에 따라 남북간 선박운항을 "연안수송"으로 규정하여 국내수송에 준하도록 하였기 때문에 양측 항만은 국내전용 부두를 이용하였다. 국양해운의 인천-남포 해운사업도 2006년에 흑자로 되었다.

인천항에서 남포항으로 가는 선박에는 쌀, 밀가루, 비료 등 인도적 지원  품목 이외에 경제협력 사업목적의 섬유원자재, 전자 및 전기부품, 화학제품 등이 실렸다. 그리고 남포항에서는 섬유 및 전기전자 임가공품, 농수산물, 광물자원 등이 실렸다.

그러나 2010년 "천암함 침몰" 사건에 대한 남한 이명박 정부의 대북경제제재 조치(5.24조치)에 따라 개성공단을 제외한 남북 간의 모든 경제관계가 중단되면서 남포항-인천항 항로도 중단되었다. 

▲ "5.24조치" 이전 남북간의 정기 화물항로 (자료)국토해양부
▲ "5.24조치" 이전 남북간의 정기 화물항로 (자료)국토해양부

2017년에 등장한 문재인 정부는 인천-남포 간 서해안 항로를 재개하는 데 관심을 가졌다. 남북 간 관계는 롤러코스터를 타듯 엄청난 변화가 있다가 결국 아무런 구체적 성과 없이 2021년에 들어섰다. 5.24조치는 해제되지 않았고 북한에 대한 경제제재는 그대로다. 남북간 대화는 중단된 상태다. 

남포-인천 해운항로 재개는 남북이 합의만 하면 새로운 투자 없이도 바로 이루어질 수 있는 사안이다. 그 전제는 무역 재개이다. 남북 간에 서로의 필요에 따라 교역을 재개하는 것이 끊긴 서해 뱃길을 다시 잇는 유일한 방법이다.

※ 다음 편은 마지막 종결편으로 남포의 전망을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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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찬우 (테이쿄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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