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향한 원산을 바라보다 (中) - 해방후 현재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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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향한 원산을 바라보다 (中) - 해방후 현재까지
  • 2020.06.03 09:30
  • by 이찬우 (테이쿄대학 교수)
▲ 원산 지도(빨간선은 6.25전쟁전) [필자 작성]
▲ 원산 지도(빨간선은 6.25전쟁전) [필자 작성]

<"신고산이 우르르" "원산폭격" 우리가 이미 아는 원산>

"신고산이 우르르 함흥 차 가는 소리에 
구고산(또는 고무공장) 큰애기 반봇짐만 싼다
어랑어랑 어허야 어야디야 내 사랑아"

누구나 아는 신고산타령이다. 기차가 모티브이니 근대시대에 들어서 생긴 민요다. 어릴 때 민요가수 김영임이 부르던 이 노래를 들으면서 신고산은 함흥 옆에 있는 무슨 산 이름인 줄 알았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경원선 철도역 중에 원산에서 서울 쪽으로 고산역이 있는데 이 고산역이 들어선 곳을 신고산이라 했고 이전 마을이 구고산인 거였다. 

고산역이 개통된 것은 1914년 9월이요 함흥역이 개통된 것은 1919년 12월이니 신고산타령이 나온 건 1920년대 이후겠다. 신고산에서 경원선 타고 원산역 지나 함경선 타고 함흥역이다. 왜 구고산 큰애기는 근처의 원산보다 더 먼 함흥에 갈 마음이 컸을까. 철도역으로는 함흥역이 평양역보다 컸다고 한다. 원산역은 작았다. 원산은 아무래도 항구를 중심으로 발달했기 때문인데, 구고산 큰애기는 항구는 별로였던 모양이다. 

1945년 8월 해방공간에 원산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원산 사람들의 자의식은 어떤 변화를 겪었을까. 해방 후 70여 년의 원산을 생각할 때 머리속에 맴도는 화두이다.

지형적으로 보면 서울과 원산 사이에는 추가령구조 곡이라는 저지대 통로가 있어 경원선이 1914년에 일찍 개통된 데 비해, 평양과 원산 사이에는 산맥이 가로막혀 평원선이 1941년에야 개통되었기 때문에 원산은 평양보다는 서울에 더 가까웠다.

해방 당시 원산은 인구 11만 명을 넘는 규모로, 북한에서는 평양(34만), 청진(18만), 신의주(12만), 함흥(11만)과 함께 인구 10만이 넘는 5대 도시 중 하나였고 무역과 상업이 흥한 항구도시였다. 원산은 구고산 큰애기에겐 별로였겠지만 다른 도시에 비해 온화한 기후에 해산물 그리고 명사십리, 송도유원지 같은 휴양지가 있고 금강산도 지척이라 선망의 도시였다. 해방후에 동해에선 정어리 30년 회유기가 겹쳐 정어리, 명태, 고등어 대풍이었다고 한다. 1946년 북한 전체 어획고 20만 톤 중 명태가 10만 톤이었다. 원산은 수산업으로 활황을 맞았다. 

원산의 유명한 요리로는 해산물 볶음밥, 해물 잡채, 감떡, 우레기(우럭)튀김, 추어탕 같은 것이 있고 조개밥도 있다. 원산조개밥은 대합조개살과 찹쌀, 쌀, 말린 고추, 풋고추, 생강, 계피가루 등을 잘 섞어서 조가비속에 넣어 그것을 곰취잎이나 호박잎, 양배추잎, 깨잎과 같은것에 싸서 쪄낸 요리라 한다. 

▲ 원산조개밥 ⓒ 조선신보(2019년 11월 18일)
▲ 원산조개밥 ⓒ 조선신보(2019년 11월 18일)

원산은 함흥처럼 조선왕조 전통의 자존심과는 달리 근대시대를 연 평민들의 맛과 멋, 그리고 자존심이 깔린 곳이었다. 그래서 토박이 인구보다 타지 출신들이 더 많고 더 개방적인 곳이었다. 종교인구를 보면 해방전후 원산은 평양과 더불어 기독교 신자들이 많은 지역이었다. 기독교계 학교가 많았고 특히 당시 동북아시아에서 가장 큰 천주교 베네딕도회 수도원이었던 덕원수도원과 부설 덕원신학교가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 원산은 식민지통지 말기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을 이겨내고 전향하지 않은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원산 노동자들의 조직은 코민테른이나 중국공산당 또는 일본 공산당과 연계 없는 자생적인 것이었는데 더 끈질겼다. 일본 경찰의 감시 속에 원산에서 민족적이고 사회주의인 노동운동을 이끌었던 지도층을 "원산그룹"이라 했다. 해방 후 북한 공간에서 이들은 원산의 자존심이자 자랑거리일 수 있었다. 이들은 어떤 변화를 겪고 원산사람들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원산항으로 입국한 김일성, 원산을 키우다>

1945년 8월 6일 소련군은 만주로 진격하였다. 이어 11일에는 김일성의 부인 김정숙이 포함된 조선인부대와 함께 함경북도 웅기항(현 선봉항)에 상륙 점령, 이어 나진, 청진으로 진공. 15일에 일본 천황의 항복선언에도 청진에서 저항하는 일본군에게 포격하며 17일에 청진 상륙. 이어 21일에 원산항에 무혈상륙. 원산의 일본군은 원산항에 집결하여 소련군의 진주를 기다렸다고 한다. 소련군은 26일에 평양 입성. 러시아 극동지역에 남아있던 김일성은 부대원들과 함께 약 한 달 후인 9월 19일 소련 군함을 타고 원산항으로 입국한 후 22일에 평원선 열차로 평양에 입성하였으니, 원산은 김일성에게도 각별한 곳이다.

식민지 기간 동안 북한지역에서 경제개발은 서해안으로 신의주-해주 축, 동해안으로 나진-원산 축으로 이어지는 해안선 개발이 중심이었고 자원의존형 중화학공업 개발이었다. 해방 후 북한은 "기형적 식민지적 편파성을 숙청하며 민족 경제가 자립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정책을 추진하게 된다. 평양-원산 간 평원선 철도는 해방 후 동서 균형 발전을 위한 축으로서 중요했고 동서와 남북을 잇는 원산의 발전에 대한 북한지도부의 생각은 각별했다. 

그래서 북한은 1946년 8월까지 함경남도 소속이었던 원산을 9월 5일 자로 문천, 안변과 함께 강원도로 편입하고 철원에 있던 강원도 인민위원회를 원산으로 이전하였다. 남북 분단으로 강원도가 갈라진 후 북강원도의 경제력이 작았기 때문에 공업지구인 문천(제련소, 제강소, 시멘트, 탄광, 석탄전용항)과 대도시 원산을 함께 강원도로 통합해서 원산을 중심으로 강원도를 발전시키기 위한 방책이었다. 

그런데 평양의 북조선노동당(북로당) 지도부가 원산의 지역지도층에 대해 가진 생각은 그리 좋지 않았던 것 같다. "원산그룹"으로 알려진 원산의 지역지도층은 원산을 "이주하의 땅"이라 불렀다고 한다. 함경남도 북청의 빈농 출신에 독학으로 도쿄의 일본대학에 유학했던 이주하는 1928년에 원산부두노동자로 들어가 1929년의 원산총파업에서 활약하고 30년대 "혁명적 노동조합운동" 같은 사회주의 활동을 포기하지않고 끌고나간 리더였다. 1945년 12월에 서울로 간 후 남조선노동당(남로당) 중앙위원이 되고 1950년 3월 체포되어 6월 28일 남산에서 처형되기까지 이주하는 서울에서 남로당 핵심으로 활동하였다. 이주하로 인해 북로당의 평양보다 남로당의 서울을 중시했던 "원산그룹"을 평양 지도부는 지방주의, 종파주의로 비판했다. 노동신문 1947년 1월 15일 자 <사상통일의 결여 엄격히 자기비판 - 제3차 원산시당 열성자대회> 보도는 평양지도부의 다음과 같은 인식을 보여주고 있다. 

"원산은 항구를 중심으로 한 역사적 소시민 도시인 관계상 소시민 근성이 농후한 점, 둘째 일제 항쟁의 역사를 가진 그것이 지방적이고 통일된 지도 아래서 투쟁이 아니고 지방 어느 구룹바적(파당적) 지도층이 투쟁을 가져온 역사적으로 지방성을 가진 경향이 지금도 존재하고 있다는 점, 셋째 사상 통일에 대한 규율 강화가 미약하였던 관계로 이들을 엄격하게 비판 분쇄 못하였다는 점으로 참으로 과거 지방주의적이고 종파적 경향이 농후하고 자유주의적이던 원산시 당내의 옳지 못한 공기들을 허정숙 동지가 무자비하게 비판하였다"

그렇다. 남로당을 중앙으로 여겼던 "원산그룹"을 누르기 위해 북로당 중앙위원회가 원산에 보낸 이는 서울 출신의 사회주의 인텔리 여성 혁명가로 한시대를 풍미한 북로당 간부 부장 허정숙이었다. 1902년 서울 종로구 관철동에서 태어난 허정숙은 김일성보다 10살 위였고 자유연애 주의자인 그녀를 조선사람치고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유명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조선 최초의 변호사(대한제국시기 1기 변호사)요 3.1운동 33인의 변호사로 활약하고 동아일보사 사장을 했고 여운형의 친구이면서 조선공산당에도 관여한 허헌(1948년에 김일성종합대학 총장)이었다.

허정숙은 1920년대에 주세죽과 함께 여성해방운동가로서, 각기 임원근, 박헌영의 애인이자 동지로서 함께 조선공산당(화요파) 활동을 하였으며, 30년대에는 중국으로 건너가 최창익 등과 함께 연안파 조선독립동맹 간부로서 통칭 "누님"으로 불렸다. 서울 출신으로 사회주의운동에서 원조 국내파이기도 하고 연안파이기도 하면서 김일성의 북로당을 지지한 허정숙. 원산과는 별 관련이 없던 허정숙이 "원산그룹"을 눌렀다.

원산의 당원들은 소시민 근성이라고 지방주의, 종파주의를 한다고 비판받았다. 이를 원산 사람들이 그 자리에서 진지하게 받아들였을까는 의문이다. 적어도 6.25전쟁 때까지는 "평양이 뭐길래"라는 생각이 있었을 법도 하다. 

그래서인가 김일성 위원장은 원산에 대해 지방 자유주의적인 파쟁적 경향을 버리라고 비판하면서도 원산을 발전시키는 구상을 동시에 제시하였다. 그 내용은 원산을 철도, 해운, 교육, 문화 등에서 발전시키는 것이었다(노동신문 1947년 1월25일). 이후 원산에서는 이 4가지 부문에서 집중적인 개발이 진행되었다. 나중에 6.25전쟁으로 원산이 폐허가 된 이후에도 4가지 항목은 원산 복구발전계획의 중심항목으로 되었다. 

첫째로 철도는 원산이 평원선과 경원선, 함경선의 연결고리여서 동서연결과 남북연결의 핵심지역이기 때문에 북한지역의 통일적인 발전을 위해 가장 중시된 항목이었다. 원산은 철도수송을 위한 객차와 화차 등 철도차량의 대부분을 생산하는 곳으로 지정되었다. 원산철도공장(현 원산철도차량종합기업소)은 해방 전 일본인이 세웠던 공장인데 이후 북한 최대의 철도 및 궤도차 생산공장으로 자라났다. 한편 철도 기관차는 평양이 중심이 되어 생산(서평양철도공장으로 후에 김종태전기기관차연합기업소) 하게 된다. "기관차는 평양이 차량은 원산이" 만들어 북한의 철길을 움직이는 식이다. 철도관련 교육시설도 평양에 평양철도대학을, 원산에 철도전문공장대학을 세웠다.

▲ 원산철도공장의 객화차 제작소 건설현장 ⓒ 노동신문(1950년 3월 7일)
▲ 원산철도공장의 객화차 제작소 건설현장 ⓒ 노동신문(1950년 3월 7일)

둘째로 해운의 중심이기도 했던 원산에는 1943년에 동양척식, 식산은행, 조선우편선박 등이 공동 설립한 조선조선공업(朝鮮造船工業)원산조선소가 있었는데, 1946년에 원산조선소로 되고 1,000톤급 철조화물선 건조를 시작하는 등 원산은 해운사업의 중심기지로 되어갔다. 

▲ 원산조선소에서 건설중인 1천톤급 철조 화물선 ⓒ 노동신문(1950년 4월 29일)
▲ 원산조선소에서 건설중인 1천톤급 철조 화물선 ⓒ 노동신문(1950년 4월 29일)

셋째로 교육에서는 인구 10여 만의 원산에 10개의 대학이 들어서게 되었다. 북한당국은 1948년 7월에 평양에 있던 김일성종합대학 농학부를 평양농업대학으로 분리하고 1949년 5월에 원산농업대학으로 개칭하여 원산으로 이전하였다.

북한 최고의 농업대학인 원산농업대학(2009년에 원산농업종합대학으로 승격)의 학교 건물은 천주교의 베네딕도수도회 덕원수도원과 신학교였다. 1947년 9월에 김일성 부인 김정숙 여사가 아들 김정일과 함께 이곳을 와보고 농업대학으로 꾸리기 아주 좋은 자리라고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폐쇄된 수도원의 사제, 신학생들은 체포, 추방되고 전쟁 중에 고난을 당하였다. 그리고 원산사범대학(1949년), 일하면서 배우는 원산공업대학(1949년), 원산교원대학(1958년, 지금의 리수덕원산교원대학), 원산수산대학(1959년), 원산경제대학(1960년, 지금의 정준택원산경제대학, 별도 칼럼을 참조), 원산의학대학(1971년) 들이 들어섰다.

대학 외에도 해운 기지 원산의 특성으로 1948년 6월에 해양기술 분야의 간부를 양성하기 위한 [북조선 해양간부학교]가 원산에 설치되었다. 1950년에는 원산농업대학 내에 별도로 노동학원을 설치하여 인민학교(초등학교) 졸업정도의 실력을 가진 자로써 배울 기회를 놓친 사람들에게 중고등과정의 수업을 받게 하고 대학에 진학 또는 생산 현장에서 종사하도록 하는 제도도 만들었다. 

▲  (좌측)가톨릭 원산교구의 덕원수도원과 신학교(1927-49) 일제시대 모습 (우측) 6.25전쟁 중 폐허가 된 원산농업대학(덕원수도원) ⓒ 가톨릭평화신문(2009년 8월 30일)
▲ (좌측)가톨릭 원산교구의 덕원수도원과 신학교(1927-49) 일제시대 모습 (우측) 6.25전쟁 중 폐허가 된 원산농업대학(덕원수도원) ⓒ 가톨릭평화신문(2009년 8월 30일)
▲ 현재의 원산농업종합대학 전쟁시기 폐허가 된 덕원수도원 자리에 새로 세웠다(왼쪽 갈색 건물이 구 베니딕도 신학교 건물). ⓒ 조선의 오늘(https://dprktoday.com/tourist/89)
▲ 현재의 원산농업종합대학 전쟁시기 폐허가 된 덕원수도원 자리에 새로 세웠다(왼쪽 갈색 건물이 구 베니딕도 신학교 건물). ⓒ 조선의 오늘(https://dprktoday.com/tourist/89)

넷째로 문화면에서는 송도원에 송도원 휴양소가 1947년 7월에 개소되었다. 송도원은 일제시대 소위 돈 있고 권력 있는 사람들의 별장지대여서 평민들은 그 부근에 얼씬도 못 했다고 하는 곳이었는데, 1946년 12월에 공포된 사회보험법 실시에 따라 전국의 "근로 인민"들이 10일간 휴양하는 곳으로 되었고 그 이후로도 계속 이어졌다. 

▲ 송도원휴양소 ⓒ 노동신문(1949년 9월 1일)
▲ 송도원휴양소 ⓒ 노동신문(1949년 9월 1일)

<6.25전쟁, 원산은 폐허가 되다>

1950~53년의 6.25전쟁을 거치면서 북한의 공업과 인프라 시설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석기시대로 돌아갔다는 표현이 생길 정도였다. 북한의 발표로는 산업의 근간인 에너지공업, 금속공업, 화학공업, 발전소, 수산업 및 건재공업 등이 극심한 피해를 입었는데 그 생산액은 66~93% 감소되었고, 선철, 구리, 화학비료 등의 생산능력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철도운수의 경우 총 차량수의 70~90%와 대대수 역 시설이 파괴되었고, 수천 개의 교량과 터널을 포함한 총연장의 50% 이상의 선로가 피해를 입었다. 

원산의 피해 상황은 극심하였다. 왜냐하면 원산이 북한지역을 장악하는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이기 때문이었다. 역사적으로 원산은 청일전쟁 때 일본군이 평양으로 침공하는 루트의 하나였고, 유엔군은 일본군이 했던 것처럼 인천상륙작전과 함께 원산상륙작전을 실행하였다.  

6.25전쟁 시기 13만명의 도시였던 원산은 거의 폐허가 되었다. 인구는 반으로 줄었다. 많은 시민이 죽었고 모든 학교 건물과 병원 건물들, 공장건물들이 파괴되었다. 전쟁기록을 종합해보면 1950년 7월7일부터 30일까지 원산에 대한 미군 전투기의 폭격이 있었다. 9월에도 미군 폭격기들의 공습이 있었고 병원시설, 주택가 가리지 않고 파괴되었다. 10월 9-14일에는 유엔군이 원산상륙작전으로 원산을 점령하였다. 12월 3-15일에는 원산항을 통한 국군-유엔군 철수 과정에서 치열한 전투가 있었다. 1951년에는 2월 16일부터 7월6일까지 원산항에 대해 무려 141일 동안 매일 해상포격을 하였다. 유엔군의 해상포격과 전폭기 폭격은 휴전일까지 지속되었다. 

이 원산 파괴는 나중에 한국 국군에서 "원산폭격"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부대 내 가혹행위의 대명사가 되었다. 한국에서 군대 갔다온 남자들의 괴로운 추억인 "원산폭격"은 뒷짐지고 머리를 직접 땅에 박는 것인데 실내 내무반에서는 치약뚜껑을 야외에서는 작은 돌멩이를 놓고 머리를 땅에 박기도 했다. 한국군대내의 "원산폭격"은 잠시 아프면 그만이었지만, 원산이 당한 "원산폭격"은 수많은 목숨을 앗아갔고 문명을 폐허로 만들었다. 

원산 사람들에게 6.25전쟁의 결과는 무엇이었을까. 서울로 간 이주하는 1950년 6.25전쟁 발발과 함께 처형당했다. 원산이 미군의 공중폭격과 해상포격으로 완전 폐허로 된 상태에서 정전협정이 체결되고 뒤이어 남로당계의 이승엽과 박헌영이 미국의 스파이로 재판받고 숙청되었다. 전쟁과 더불어 원산 사람들에게 모든 악은 "미제국주의"가 되었다. 현실적으로도 "살길은 오로지 김일성장군님" 밖에 없었으니 지방주의나 종파주의로 비판받을 일도 없어졌다. 김일성 수상이 제시한 "모든 것을 전후인민경제복구발전을 위하여"”라는 슬로건 아래서 원산은 평양과 함께 사회주의경제를 복구 발전시키는 보루가 되었다. 그리고 70년을 걸어 원산 사람들이 다다른 데가 김정은 위원장이 제시한 <강원도 정신> 즉 "자력갱생만이 살길"이 아닐까 싶다. 

<폐허더미 위에서 원산은 불굴의 도시가 되다>

정전협정 직후인 1953년 8월에 "원산시 복구 총 기본 계획도"가 만들어졌다. 여객 부두를 신설하고 송도원 일대를 종합경기장과 해수욕장이 들어선 시민들의 문화휴식 공원으로 재정비하며, 북서풍을 고려하여 남부지역을 산업지대로 재편하며 산업지대와 주택지구 사이에 수림 지대를 형성하여 주민들의 위생에 도움을 준다는 계획이었다. 

▲ 원산시 복구 총 기본 계획도 ⓒ 노동신문(1953년 8월 28일)
▲ 원산시 복구 총 기본 계획도 ⓒ 노동신문(1953년 8월 28일)
▲ 군인들과 시민들의 손으로 복구되는 원산 ⓒ 노동신문(1954년 4월 6일)
▲ 군인들과 시민들의 손으로 복구되는 원산 ⓒ 노동신문(1954년 4월 6일)

원산시 복구 설계를 한 인물은 강원도 건설위원회 설계사무소 고병수 건축기사였다고 노동신문(1954년 4월 16일)이 소개했다. 그는 도시계획 및 설계사업에 대한 지식과 경험이 풍부치 못하였는데, 소련에서 온 유명한 건축가 아.라치꼬로부터 협력을 받아 소련 건설기술자들의 경험을 연구하면서 현실에 적용하면서 설계도를 작성하였다고 한다. 그가 중심이 되어 만든 원산시 총 기본 계획도는 원산시로 하여금 바다를 비롯한 모든 자연과 명승유적들과 조화되도록 하며 기존 도시구조물들을 합리적으로 이용하면서 민족적 특성을 갖춘 현대적이며 인민적인 항구도시로 재건될 수 있게 하였다고 소개하였다. 당시 소련이 북한에게 기술적인 측면에서 많은 협력을 하였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원산은 점차적으로 다시 항구문화휴양도시, 철도물류도시, 교육도시로서의 면모를 되찾게 되었다.

▲ 5.1절을 경축하는 원산시 군중대회 ⓒ 노동신문(1954년 5월 3일)
▲ 5.1절을 경축하는 원산시 군중대회 ⓒ 노동신문(1954년 5월 3일)

1960년대에는 동유럽과 소련에 유학한 기술자들이 돌아와 도시계획을 추진하였다. 1963년에 원산시의 중심인 항구 앞 해안거리에 대해 극장, 백화점, 아파트, 해안공원 등을 포함하는 시가지계획이 수정 완성되었는데 소련과 동독 등의 시가 지구를 참고로 한 설계가 많았다. 대체적으로 60년대에 원산은 전후 복구사업이 완료되었다.

▲ 원산역 새역사와 아파트 건설 ⓒ 노동신문(1965년 8월 2일)
▲ 원산역 새역사와 아파트 건설 ⓒ 노동신문(1965년 8월 2일)
▲ 복구된 원산시가지 ⓒ 노동신문(1965년 8월 15일)
▲ 복구된 원산시가지 ⓒ 노동신문(1965년 8월 15일)

1970년대에 들어 원산은 "조선사람들의 생활감정에 맞게 건설"하라는 김일성 주석의 지시(1972년 3월, 원산 현지 지도)에 따라 민족적 특색을 강화하는 건설로 방향을 잡는다. 

1978년에는 평양-원산 간 147km 고속도로가 완공되어 철도와 더불어 고속도로를 통한 동서연결이 이루어졌다. 평양과 원산 간에는 고속버스가 있어 문제가 없다면 2시간 만에 도착했다.

원산조선소는 남포조선소와 더불어 북한의 양대조선소로 성장했고 1980년에는 14,000톤급 절임가공선 "룡남산호"를 건조했다.

▲ 평양-원산 고속도로 완공을 둘러보는 김일성 주석 ⓒ 노동신문(1978년 9월 4일)
▲ 평양-원산 고속도로 완공을 둘러보는 김일성 주석 ⓒ 노동신문(1978년 9월 4일)
▲ 원산조선소에서 건조한 14,000톤급 절임가공선 "룡남산호" ⓒ 노동신문(1980년 9월 23일)
▲ 원산조선소에서 건조한 14,000톤급 절임가공선 "룡남산호" ⓒ 노동신문(1980년 9월 23일)

1980년대까지 원산은 전후 복구에서 더 나아가 사회주의경제의 발전된 모습을 대내외에 선전하는 상징적인 도시로 탈바꿈했다. 

노동신문은 1990년에 만경봉호를 타고 50년 만에 원산에 온 재일 동포 노인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면서 원산의 개변을 자랑하였다. "지난해의 어느 날 동포로인이 눈을 자꾸만 비비며 원산시의 전경을 보고 또 보는 것이었다. 《과연 저 도시가 내가 50년전에 떠났던 원산이란 말입니까! 너무도 놀라와할 말을 찾지 못하겠습니다.》 그날 저녁 그는 자기가 탯줄을 끊었던 원산거리를 걷고 또 걸으며 이 전변이야말로 《천지개벽》이라고 감탄해 마지 않았다."(노동신문 1991년 1월 6일)

6.25 전쟁시기 13만 명에서 6만 명 수준으로까지 줄었던 원산의 인구는 30만 명을 넘긴 대도시로 발전했다. 

▲ 원산항 전경 ⓒ 노동신문(1991년 1월 6일)
▲ 원산항 전경 ⓒ 노동신문(1991년 1월 6일)

<협동조합이 시민 생활을 챙기다>

원산이 철도, 해운, 교육, 문화의 중점지역으로 성장해 가는 과정에서 원산시민들의 자립적인 경제활동도 진행되었다. 해방 후에 원산시에 소비조합이 재건되었는데, 원산시 소비조합(위원장 김상설)은 수산물과 농산물의 수매와 수공품의 공급 등을 진행하였다. 원산, 안변, 문천 등의 소비조합은 산하에 유기, 제과, 목공, 해산물 가공품, 가마니 새끼 같은 수공업품을 생산하는 생산합작사를 설립하였다(지역 소비조합은 1958년에 농업협동조합으로 통합). 생산합작사는 전시인 1952년 4월부터 생산협동조합으로 변경되어 지방의 자체원료를 가지고 지방공업을 일으키는 생산단위로서 지방의 개인 기업가 상공인들을 망라하여 협동화하는 방식이 추진되었다. 그리고 전쟁에서 상해를 입은 영예 군인들과 후방가족, 부양가족들의 생활 보장을 위한 생산(판매)협동조합도 조직할 수 있게 되었다. 

원산에서는 주요 공장인 원산철도공장, 원산조선소, 문천기계제작소, 문천제련소, 천내리시멘트공장 등에서 부양가족의 생산판매협동조합이 12개 조직되었는데, 예를 들어 40명으로 모인 원산철도공장 부양가족생산판매협동조합에서는 두부, 콩나물 등 부식물의 생산판매와 공장내 "노동식당" 운영, 그리고 폐재로 나무젓가락, 비누갑, 치솔갑, 프라이팬을 생산 판매하는 사업을 하고 공장 측에서는 건물, 시설 등을 제공하는 협력방식이었다. 

원산에서는 철공, 철제일용품, 금속, 구두, 가구, 식료품, 섬유, 화학품, 운동구, 공예품, 시계 등의 이름이 붙은 생산협동조합들이 활발하게 조직되어 활동하였다. 

원산철공생산협동조합은 해방 전에 철공소를 하던 개인 기업가들이 모여 만든 조합이었고 현재까지도 가동 중이다.

▲ 원산 철공생산협동조합 조합원들. (좌측)프레스작업반 김순애 조합원(노동신문 1960년 7월 8일) (우측)자동전기밥솥 생산(노동신문1972년 8월 21일)
▲ 원산 철공생산협동조합 조합원들. (좌측)프레스작업반 김순애 조합원(노동신문 1960년 7월 8일) (우측)자동전기밥솥 생산(노동신문1972년 8월 21일)
▲ 원산 섬유생산협동조합원들 ⓒ노동신문(1964년 10월 8일)
▲ 원산 섬유생산협동조합원들 ⓒ노동신문(1964년 10월 8일)

<강원도 정신 : 자력갱생만이 살길이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 이후는 "고난의 행군"이었다. 원산은 일본과 무역이 있고 재일 동포들의 방문이 원산을 통해 이루어진 관계로 타지역보다는 정도가 심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식량부족과 원자재 에너지 부족 등으로 산업생산은 급속히 감퇴했다. 일본의 경제제재로 무역과 방문이 중단된 이후는 원산 사람들의 생활도 힘들어졌다. 사회주의경제의 근간이랄 수 있는 국가의 생산보장과 생활보장이 공급부족으로 흔들리면서 시장에 생활을 의존해야 하는 상황이 보편화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중앙정부는 계획경제 운영을 실리를 중심으로 개선하여 지방정부와 기업 단위들의 자율성을 보장하고 국가는 통일적인 전략 방향 설정과 중요한 전략물자 공급에 주력하는 방향으로 경제정책이 설정되었다. 2002년의 [7.1경제관리개선조치]와  2014년 이후의 [사회주의기업책임관리제] 의 내용이 그렇다.

경제 재생에 가장 중요한 에너지, 그 중에서도 전력 문제를 푸는 것이 급선무였다. 중국이나 남한에서 전선을 끌어다 공급하는 방안도 있을 수 있었겠지만, 개성공단이나 중국과의 접경 지역에서 부분적으로는 그렇게 하였어도 기본적으로는 자력으로 발전소를 건설하는 방향을 잡았다. 강원도에서는 청년들과 군인들이 중심이 되어 2000년에 안변청년발전소가, 2009년에 원산청년발전소가 완공되었고, 2016년에 원산군민발전소가 완공되었다.

원산군민발전소는 강원도 법동군의 임진강 상류에 댐을 쌓고 마식령을 가로지르는 지름 3m 길이 수십km의 수로터널을 뚫어 동해로 돌려 낙차를 이용하여 전기를 생산하는 유역변경식 발전소다. 물길을 돌리는 터널을 뚫느라 착공 후 8년의 시간이 걸렸다. 원산군민발전소 김철만 기사장은 "강원도에서는 모든 주민들이 이제는 다 전기밥가마로 밥을 짓고 전기난방을 쓰면서 생활한다. 남에게 의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힘을 믿고 난관을 뚫고나갈 때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현실로 증명하였다"다며 자랑하였다(조선신보 2017년 4월 3일). 건설자들은 원산군민발전소 댐에 "자 력 갱 생"을 큰 글씨로 써넣었다.

▲ 완공된 원산군민발전소 ⓒ 노동신문(2016년 5월 1일)
▲ 완공된 원산군민발전소 ⓒ 노동신문(2016년 5월 1일)

2016년 12월 원산군민발전소를 현지 지도한 김정은 위원장은 원산군민발전소야말로 자력갱생의 창조물이라며 <강원도 정신>을 제기하였고 이후 4년간 현재까지 북한경제 운영의 기본정신으로 되고 있다. 원산 사람들이 해방후 70년간 경험한 결과는 결국 살길은 자기힘이라는 <강원도 정신>이었다.

지금 북한에서 자력갱생이란 "조악해도 우리 것을 쓰자"라는 수준은 벗어난 듯하다. 경제 제재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는 분석도 외부 세계에는 있지만, 북한에서는 자력으로 과학기술과 품질향상을 통해 만들어 쓰고 세계에 내놓아도 자랑스럽도록 하자는 뜻으로 쓰인다고 한다. 세상이 다시 바뀌고 있다. 그 한 실례가 원산구두공장이다.

원산구두공장의 전신은 1959년 3월에 발족한 원산구두생산협동조합이었다. 김정일 위원장의 제기로 2007년 6월에 연간 100만 켤레 생산능력을 가진 원산구두공장으로 개편되었다. 원산구두공장은 그 이후로 경공업 부문의 중요한 모델로 되었다.

2014년 7월 이후 2018년까지 매년 원산구두공장을 현지지도한 김정은 위원장은 원산구두공장을 경공업부문의 본보기공장으로서, "원료, 자재의 국산화와 제품의 경량화, 설비의 현대화를 실현"하는 것을 과제로 제시하였다. 2015년에 공장설비가 대대적으로 개건되었다. 

2016년 12월 김정은 위원장은 원산구두공장을 현지지도 하면서 "우리나라 제품의 질이 다른 나라의 것보다 못하면 인민들이 우리의 것에 대한 긍지를 가질 수 없으니 다른 나라의 구두와 관련한 좋은 자료들을 참고도 하면서 구두의 질을 높이기 위한 투쟁을 힘있게 벌려야 하겠다"고 언급하였다. "품질경영"에 대한 언급이었다.

▲ 원산구두공장 ⓒ'우리민족끼리' 홈페이지(2018년 8월 6일)
▲ 원산구두공장 ⓒ'우리민족끼리' 홈페이지(2018년 8월 6일)

이후로 원산구두공장은 전국의 상업망에 구매자들을 위한 의견 수첩을 두어 제품에 대한 반향, 의견을 생산에 적극적으로 반영하는 체계를 세우고, 기성품이 아닌  신발 주문 생산 체계도 만들었다. 신발 견본을 가지고 학교를 비롯한 여러 사회단체가 나가 봉사하고 주문도 받아 배송까지 해주었다. 원산구두공장의 문영옥 초급직맹위원장은 "구두에 대한 요구는 사람마다 다르다. 한 켤레 주문을 받아도 10컬레 주문을 받아도 인민들이 요구하는 것이라면 주문을 다 받아들여 생산한다. 인민들을 위한 봉사자가 되자는 것이 우리 공장 종업원들의 결심이다"고 말하였다(조선신보 2017년 4월 8일). 이런 수고가 있어 <매봉산> 상표의 원산구두는 2019년 국내에서 생산된 최우수제품에 수여 되는 "12월 15일 품질 메달"을 받았다. 

▲ 원산구두공장의 구두제품들 ⓒ 노동신문(2020년 5월20일)
▲ 원산구두공장의 구두제품들 ⓒ 노동신문(2020년 5월20일)

원산 사람들이 결국 다다른 자력갱생의 <강원도 정신>은 원산의 21세기적 자존심이 되고 있다. 없다고 남 탓 윗 탓 하지 말고 스스로 찾아서 해결하고 개선해가는 정신은 협동조합의 정신이기도 하다. 북한 사회를 밖에서 보면 통제와 획일성으로 보이고 <본보기 공장>을 위에서 만들어주는 것으로 보이나, 지방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폐허와 성공과 좌절을 다 겪고 스스로의 힘을 찾아 나선 아이덴티티가 보인다. 원래 원산구두생산협동조합이었던 원산구두공장의 표어 "나의 사상을 알려거든 내가 만든 제품을 보라!" 가 의미하는 바가 그것이리라.
 필자는 이렇게 보고 싶다.

"원산 사람들은 스스로 들어선 근대문명의 참뜻이 <스스로 만드는 것>임을 70년 경험으로 알아냈다."

[칼럼] 정준택원산경제대학의 정준택은 개성사람이었다?

※ 다음 편 '세계를 향한 원산을 바라보다(하)'는 원산의 대외관계, 즉 대외경제와 안보문제, 그리고 갈마지구 관광 개발을 다루면서 남북협력의 가능성을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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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찬우 (테이쿄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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