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를 잇는 항구도시 남포를 바라보다(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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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를 잇는 항구도시 남포를 바라보다(中)
대동강은 한강으로 흐른다
  • 2021.01.20 09:40
  • by 이찬우 (테이쿄대학 교수)

진남포항: 평양의 석탄을 바다로 실어 나르기 시작하다

조선은 금과 철 그리고 석탄의 나라였다. 조선왕조 말기에 한반도의 광물을 탐사했던 서구열강과 일본은 한반도 북부지역이 금, 은, 철, 구리, 석탄 같은 광물자원이 풍부하다는 것을 알았다. 조선에는 관영 또는 민간이 운영하던 광산이 이미 있었기 때문이다. <광업개발 특허권>을 열강들은 노렸는데 그중에서도 금광과 탄광은 가장 관심이 컸던 교섭 대상이었다. 무연탄은 석유시대가 도래하기 전에는 도시철도와 산업 및 가정의 연료, 그리고 해군의 군함 연료로 필수적인 전략물자였다. 지구온난화는 생각지도 못하던 한 세기 이전 시대의 이야기다.

그 무연탄이 평양과 평안도 지역에 집중적으로 매장되어 있었다. “평양탄(Pyongyang Coal)”은 탄소 80% 이상으로 화력이 강하여 제국들의 큰 관심을 모았다. 평안도 주민들은 무연탄을 채굴하여 가정연료로 일부 이용하고 있었다. 일본과 프랑스가 여기에 주목했다. 일본은 1880년대부터 평양의 무연탄을 조사하기 시작했는데, 일본에는 무연탄이 규슈지역에서만 나기 때문에 한반도를 지배하고 싶은 군사적, 경제적 욕구가 분출했다. 프랑스도 아시아에서 해군력을 증강하기 위해 무연탄 공급이 필요했다.

먼저 손을 쓴 나라는 프랑스였다. 1903년 1월에 대한제국 황실 궁내부와 프랑스 용동상회(龍棟商會)가 평양탄전(대동군 사동탄광)을 합작 개발하는 계약을 맺고 <평양광업소>를 세운 것이 한반도 최초의 근대적 탄광이다. 그러나 2년만인 1905년 러일전쟁 중에 일본의 압력으로 프랑스와의 합작 계약이 해지되고 일본으로 넘어갔다. 

일본은 평양탄을 해군 군함 연료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평양탄을 수송하는 항구로 대동강 하류의 하천항만인 진남포항을 선택했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통해 진남포가 보급기지로서 가치가 높았던 것도 배경에 있었다. 진남포 개발이 본격화되었다. 먼저 철도 연결이 추진되었다. 일본이 설립한 임시 군용철도감부가 평양역에서 진남포항까지 철도(평남선 55.2km) 부설을 추진하여 1905년 8월에 측량을 마치고 용지 매수를 진행하였다. 실제 착공은 1909년 9월이었고 한일병합 직후인 1910년 10월에 개통하였다. 

평양탄은 일본의 군수물자였다. 그래서 1908년에 일본해군연탄제조소(후의 일본해군연료창) 소장인 다케다 히데오(武田秀雄) 대좌(대령)가 평양광업소 소장을 겸임했다. 1908년 평양광업소에서는 광부 300명이 무연탄 46,587톤을 캐냈다고 한다. 1910년에는 광부 800명이 7만톤을 생산했다. 평양탄을 진남포항에서 일본 야마구치(山口)현 도쿠야마(徳山)에 있는 해군연료기지로 수송한 회사는 1905년 설립된 해운회사 나카무라 구미(中村組)였다. 이 회사를 세운 나카무라 세이시치로(中村精七郎,1872-1948)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일본군의 물자수송을 맡았던 군상(軍商)이었다. 나카무라구미는 한반도의 무연탄과 철광석을 일본에 수송하는 해운회사로 성장했다. 1928년 평양광업소는 광부 2,500명에 채탄량은 14만톤으로 당시 식민지 조선 탄광중에서 최대규모였다. 

1920년대가 되면 무연탄에 대한 일반산업용 그리고 가정용 수요가 높아졌다. 조선총독부는 1924년에 민간회사도 석탄생산을 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1927년에 조선무연탄주식회사(미츠비시제철이 대주주)가 설립되어 평안도지역 무연탄 개발이 본격화되었다. 1941년 조선무연탄주식회사의 채탄량은 160만 톤에 달했다. 진남포항은 석탄을 실어나르느라 무척 바빠졌다.

진남포항은 일본이 평안도지역에서 본격적으로 자원수탈과 광물개발을 진행하는 전진기지가 되었다. 진남포항은 대동강변에 길이 500m, 폭 200, 수심 6m (썰물 때)의 굴입식(掘入式)으로 건설되었기에 상시 준설이 필요했다. 1912년부터 개축 확장공사가 진행되어 1915년까지 항의 동쪽에 254m 안벽과 기중기가 설치되었다. 1929년부터 항의 서쪽에 333m 안벽과 기중기가 설치되어 1930년대에는 3,000톤급 선박 4척 동시 접안할 수 있게 되었다. 국내항로는 인천과 신의주, 군산, 목포, 부산에, 외항로는 중국의 위해, 청도 대련과 일본의 규슈와 오사카, 고베로 연결되었다. 

▲ 진남포항 평면도(자료 : 조선총독부 내무국, 1929년)
▲ 진남포항 평면도(자료 : 조선총독부 내무국, 1929년)
▲ 진남포항의 모습(자료 :조선총독부 내무국, 『조선항만요람』, 1931년)
▲ 진남포항의 모습(자료 :조선총독부 내무국, 『조선항만요람』, 1931년)

1933년의 총독부 통계를 보면 진남포항의 화물 수출입량은 112만 톤, 연안운송을 합하면 150만 톤이었다. 당시 대동강을 이용한 수출입 총량은 198만 톤으로 식민지 조선에서 최대규모였다. 진남포항의 주요 수출 품목은 석탄 43만 톤, 쌀 약 135만석(약 20만 톤), 콩 20만석(약 2.6만 톤), 사과 9천 톤 등 합계 약 70만 톤 규모였다. 

진남포항은 석탄뿐만 아니라 평양평야 재령평야의 쌀과 콩도 일본으로 실어날랐다. 진남포 사과는 알이 크고 맛이 좋아 명성이 대단했다. 1905년에 일본인이 사과 묘목을 진남포에 들여와 재배한 것이 시작이라고 한다.

▲ (왼쪽) 해방전 진남포 사과 과수원, (오른쪽) 대동강과수종합농장 사과과수원 (출처 : 내나라)
▲ (왼쪽) 해방전 진남포 사과 과수원, (오른쪽) 대동강과수종합농장 사과과수원 (출처 : 내나라)

그리고 진남포는 고려청자 생산지로 유명해졌는데 유럽에까지 수출되었다. 진남포에서 고려청자가 생산된 유래는 좀 이채롭다. 강화도조약 후 조선과 일본 사이에 무역이 활발해지면서 1880년대 이후 골동품 고려청자의 인기가 일본에서 하늘을 찔렀다고 한다. 청자를 생산하지 않고 백자를 주로 생산하던 조선시대에 고려청자를 구하러 조선에 온 일본인 도미타 기사쿠(富田儀作 1858-1930)가 1908년 진남포에 삼화고려소(三和高麗焼)를 차렸다. 일본에서 도공을 데려다가 고려청자를 재현하여 1911년부터 일본으로 수출했다. 일본에는 임진왜란 때 끌려간 조선도공의 후예들이 청화백자나 일본식 청자를 만들었기에 이들을 진남포에 불러 고려청자 모조품을 만든 것이었다.

당시 대한제국 정부도 관립 도자기 공장을 설립해 고려청자 재현품을 만들기 시작했다. 남강 이승훈 선생은 1908년에 평양에서 민족 자본으로 <평양자기주식회사>를 설립하여 일본에 대항하였다. 그러나 한일병합 이후 일본이 주도한 도자기 산업정책과 제작환경은 일본에게 유리한 것이었고 일본공장들이 들어와 지배하게 되었다. 평양자기주식회사도 운영자금 부족으로 1918년 이후엔 일본인이 운영하게 되었다. 진남포의 일본 기업이 생산하는 고려청자 생산은 계속 이어져 진남포의 명품으로 대접받았다. 역사의 아이러니다.

진남포: 자원개발형 공업도시에 진로소주 공장도 들어서다

철도와 항만이 들어선 진남포는 이제 공업도시로 성장할 수 있게 되었다. 진남포항의 석탄 해운수송에 진출한 나카무라 세이시치로(나카무라구미 사장)는 1910년에 광산기계 제작, 수리를 하는 진남포공장을 세웠다. 이 공장이 근대적 기계공장(철공소)의 효시였다. 나카무라 사장은 1919년에는 조선상공주식회사를 설립하였는데 이 회사는 토목, 비료, 기계, 철공, 조선, 운송 등 많은 업종을 거느리며 "조선반도의 미츠이물산"이라 불렸다. 조선상공진남포공장 부설의 선박공장은 평양탄을 수송하는 바지선을 건조했다. 

진남포에서 본격적인 대규모 공장으로는 1915년에 일본광업이 진남포에 세운 <일본광업 진남포제련소>이 있다. 이 제련소는 금, 은, 동광을 제련하였는데 구리 산출량 월 216톤 규모에 종업원 1,400명으로 시작했다. 1936년 10월에는 당시 세계에서 제일 높은 183m 굴뚝을 세웠고 1941년에는 5만 평의 부지에 제련광량 22만 톤, 종업원 수 4,600명을 헤아린 조선 최대의 제련소가 되었다. 

▲ 일본광업 진남포제련소의 거대 굴뚝. 6.25전쟁시 파괴되었다. (인터넷 자료)
▲ 일본광업 진남포제련소의 거대 굴뚝. 6.25전쟁시 파괴되었다. (인터넷 자료)

그리고 진남포 부근의 겸이포(현재 송림시)에는 1915년부터 미쯔비시 재벌이 선철 5만 톤 생산능력의 제철소를 짓기 시작해서 1918년에 조업을 시작했다. 겸이포와 인근의 재령, 은율 그리고 평양 북쪽의 은산에서 철광석이 산출되었기 때문이다. 석탄은 평양부근 대동군의 대보탄광에서 공급했다.

진남포가 공업도시로 인구가 증가하면서 경공업 분야의 공장도 들어섰다. 조선방직의 면생산공장이 진남포에 들어섰고 도멘섬유(東棉纖維)도 직물공장을 세웠다. 그리고 정미소, 제분소, 제염소, 양조공장 등이 들어섰다. 

1924년 진남포 위에 있는 룡강군에 합자회사 진천양조상회가 설립되었다. 룡강군은 샘물이 나는 약수터가 많고 물맛이 좋기로 유명했다. 설립자는 장학엽, 룡강군의 과수원집 아들로 태어나 보통학교 국어선생을 하다 사직하고 술도가의 길에 들어섰다. 도산 안창호 선생의 가르침을 학생들에게 가르치다 사직을 강요받은 장학엽은 사립학교를 세우기 위해 소주사업을 시작했고 시행착오를 겪은 후에 크게 성공했다. 그 상표는 <진로(眞露)>였다. 장학엽 사장의 고향인 룡강군 진지리(眞池里)의 진(眞)을 따고, 증류주인 소주가 이슬처럼 맺히는 모습에서 이슬 로(露)를 따서 지었다고 한다. 진로소주는 평안도의 대표적인 소주로 자리 잡았다. 1950년 6.25전쟁 발발로 남한으로 내려온 장학엽 사장은 휴전 후 서울 영등포에 공장을 짓고 진로를 다시 내놓았다. 소주사업에 성공한 그는 1974년 학교법인 우천학원(우신중고등학교)를 설립했다. 필자는 1977년 그 우신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학교기숙사 앞에 <두꺼비상>을 세운다고 해서 학생들이 반대 데모를 해서 결국 세우지 못했는데 되돌아보니 미안한 마음이 든다.

그리고 1930년대 후반부터는 북한지역에 군수공장, 중화학공장들이 대거 들어서는데 진남포에도 좋은 입지 조건을 배경으로 많이 설립되었다. 1938년에 알루미늄을 제조하는 조선경금속 진남포공장이 들어섰다. 알루미늄은 비행기와 군함 제조에 쓰이는 군수물자였다. 신에츠화학(信越化学)은 육군의 지시로 1941년에 마그네슘공장을 진남포에 건설했다. 화학공장으로는 닛산화학(日産化学)이 1940년에 조선닛산화학 진남포공장을 설립하여 진남포제련소에서 나오는 유화철로 유산(연산 5만 톤능력)과 인비료(연산 6만 톤능력)를 제조하였다. 인조흑연전극제조의 대표적인 기업인 토카이전극제조(東海電極製造)는 1940년에 연산 4,800톤 규모의 전극생산능력을 가진 조선동해전극을 진남포에 설립했다. 1944년에는 조선연마재료주식회사가 진남포에 공장을 세웠다.

진남포 부근의 미쯔비시 겸이포제철소는 1930년대 이후 생산능력을 확대해 선철 생산이 1941년에 30만 톤, 강재생산이 1943년에 11만 톤에 달했다. 겸이포제철소는 해방후 황해제철소로 개명되었고 현재까지 북한에서 김책제철소(청진)과 함께 양대 제철소의 하나이다. 미쯔비시는 1942년에 진남포 북쪽의 대동강변 강서군 강선리에 제강소를 건설해 탄소강과 합금철을 생산했는데 주로 방탄용 철판을 육해군에 공급했다. 강서군 강선리는 현재 남포시 천리마구역이다. 강선제강소는 현재 천리마제강연합기업소이다.

진남포는 군수공업도시가 되었다. 해방 이후 북한정권이 중공업 정책을 추진하는데서 진남포는 대단히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진남포의 인구는 1934년에 4.6만 명, 그 가운데 조선인 약4만 명, 일본인 5,400명, 기타 중국인 등 600명이었다. 10년 후인 1944년에 인구는 8.2만 명으로 늘어 서울(99만), 평양(34만), 부산(33만), 인천(21만), 대구(21만), 청진(18만), 신의주(12만), 원산(11만), 함흥(11만) 다음으로 10번째 규모였다. 진남포와 같은 인구를 가진 도시는 광주와 해주였다. 

진남포 기억하기: 민족지도자들의 교육

진남포는 객관적으로 보아 일본제국의 수탈기지였지만 주체적으로 보면 근대 시기 민족지도자들과 백성들이 포부를 품고 부딪친 곳이기도 하다. 여기서는 안중근(1879-1910)이 의병장이 되기 전에 진남포에서 하였던 교육사업을 언급하고자 한다.

안중근은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나 신천군 청계동에서 유년과 청년시절을 보냈는데 근대화를 위해 애국계몽운동을 펼치기로 작정하고 안정근, 안공근 등 형제와 가족이 모두 1906년에 진남포로 이주하여 삼흥학교(三興學校)를 설립하고 계몽교육을 시작했다. 국채보상운동에 가족이 모두 참여하였으며 안창호, 이준 등 애국지사들을 진남포에 초청하여 강연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천주교 신자였던 안중근은 천주교 계열의 남포 돈의학교를 인수하여 직접 교장으로 활동했다. 삼흥학교와 돈의학교는 명문학교로 바로 성장하였고 교련 훈련시에는 목총과 나팔 그리고 북을 사용하면서 군대식으로 훈련을 실시하였다고 한다.

안중근 가족은 평양에서 “삼합의 (三合義)”라는 무연탄개발 합자회사를 설립하여 학교재정을 보충하는 노력을 하였는데 일본의 방해로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다 1907년 고종이 일본의 압력으로 퇴위하고 군대가 해산되자 안중근은 노선을 바꾸어 독립을 위한 의병항쟁에 뛰어들었다. 1907년 7월 안중근은 학생들과 교직원에게 행한 고별사에서 “도끼(형벌)가 내 앞에 있어도 인(仁)을 임하면 반드시 실천하고, 솥(형벌)이 내 뒤에 있어도 의(義)를 본다면 반드시 나아가리라”는 말로 의병활동의 결심을 나타냈다. 진남포에서 안중근의 약 2년간에 걸친 교육사업은 그냥 묻히지 않고 교육을 받은 제자들의 마음속에 이어졌다.

진남포의 삼흥학교 자리엔 지금 남흥중학교가 있다. 남포공원에는 1963년 3월 26일(서거 53주년)에 건립한 애국열사 안중근선생기념비가 있다.

▲ 남포의 남흥중학교 (자료: 춘천MBC특별기획, 안중근 분단을 넘다. 2010년 3월 26일 방영)
▲ 남포의 남흥중학교 (자료: 춘천MBC특별기획, 안중근 분단을 넘다. 2010년 3월 26일 방영)
▲ 남포 남산공원의 안중근기념비 (자료: 춘천MBC특별기획, 안중근 분단을 넘다. 2010년 3월 26일 방영)
▲ 남포 남산공원의 안중근기념비 (자료: 춘천MBC특별기획, 안중근 분단을 넘다. 2010년 3월 26일 방영)
남포시의 안중근 관련 유적 위치 (구글어스)
▲ 남포시의 안중근 관련 유적 위치 (구글어스)

※ 다음 "서해를 잇는 항구도시 남포를 바라보다 (下)"는 해방 이후 남포의 변화를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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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찬우 (테이쿄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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