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롭고 의로운 땅"으로 다시 서는 신의주를 바라보다(下-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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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고 의로운 땅"으로 다시 서는 신의주를 바라보다(下-1)
압록강이 부르는 새 동북아 평화경제의 꿈
  • 2020.12.09 09:00
  • by 이찬우 (테이쿄대학 교수)

해방 후 신의주의 새 모습 ; 기독교는 가고 사회주의가 오다

① 기독교와 사회주의가 대결한 신의주학생사건 

1945년 8월까지 만주와 조선은 일본제국의 대동아공영권 일부여서 신의주는 사실상 경제권 내의 연결 통로였다. 하지만 일본제국이 사라지고 난 만주와 조선은 새 시대 모색을 놓고 치열한 갈등을 경험한다. 만주를 점령한 소련의 공식 협력자는 연합국의 일원인 중화민국의 장개석 국민당 정부였고 비공식 협력자가 모택동의 공산당이었다. 북한을 점령한 소련은 민족주의 세력을 포섭한 "인민정권" 수립을 원했다. 만주도 북한도 역사의 수레바퀴가 어디로 굴러갈지 모르는 형국이었다. 

만주에서 국민당과 공산당의 내전 상황으로 신의주는 만주와 분리된 조선의 국경도시 종점이 되었다. 신의주에 많던 일본인들은 구금되든가 일본으로 돌아갔다. 만일 만주에서 장개석의 국민당이 승리했다면 신의주, 아니 북한의 모습도 지금과는 달랐을지도 모른다. 북한은 모택동의 공산당 군대에 총포와 화약 등을 제공하여 만주에서 국민당군이 패퇴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만주와 북한에서 해방 후 시대의 흐름은 사회주의자들에게 유리했다.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메이었다.
………
이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 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 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 보며,
어는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워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이 시는 시인 백석(白石, 1912-1996)이 1945년 해방과 함께 만주 유랑을 접고 신의주로 들어와 잠시 머물 때 쓴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의 일부다. 백석은 1941년에 쓴 <국수> 시에서 국수를 "이 히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것은 무엇인가"라고 표현할 만큼 서정적 감성이 풍부한 시인인데, 해방 후에 쓴 시 치고는 "환희" 대신 "쓸쓸함"이 베어 있다. 왜 자그마한 기쁨조차 읊지 않고 신의주에서 헤메이면서 "더 크고 높은 것이 나를 마음대로 굴려 가는 것을 생각하는" 마음을 드러내었을까. 해방 직전 수년간 붓을 꺾은 시인 백석이 친일행적으로 과오를 뉘우칠 일도 없었는데도 말이다. 그가 자란 배경이 관련 있지 않을까 싶다.

백석은 경의선이 통과하는 평안북도 정주(신의주 남방 100km)에서 태어났다. 그곳에 남강 이승훈 선생이 세웠고 고당 조만식 선생이 교장으로 있던 기독교 계통의 오산학교를 졸업했다. 오산학교는 한경직 목사와 함석헌 선생, 시인 김소월, 화가 이중섭, 공산주의 계열 독립운동가 최용건, 민족주의 계열 독립운동가 김홍일 장군 등 쟁쟁한 이들이 어릴 적 다닌 중고등학교다.

정주는 조선왕조 시대 <홍경래 난(1812년)>의 보루였고 일제하 민족운동의 중심지였는데 신의주와 더불어 평안도에서 기독교 세력이 강하게 뿌리내린 곳이었다. 정주의 정주읍교회와 신의주의 제일교회, 제2 교회 등이 그 중심이었다. 그런 곳에서 자란 백석은 해방 후 신의주에 있다가 고향인 정주에 가 있었는데 고당 조만식이 "평양으로 와서 나를 좀 도와주게" 하며 기별을 보내왔다. 러시아어를 잘했던 백석은 스승인 고당의 러시아어 통역을 맡아 평양으로 가는데, 이런 배경을 보면 백석은 공산주의가 아니라 기독교권에 가까웠다고 할 수 있다. 공산주의 세력이 지배력을 확보해가는 해방 후 북한에서 신의주는 기독교권이 맞붙어 대립 전선을 형성하는 곳이 되었다. 백석은 그 대립의 기운을 느끼면서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가는 것이 힘든 일"임을 생각하고 헤메이는 마음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신의주에서 기독교권은 1945년 9월 18일에 <기독교사회민주당>(해방 후 최초의 정당)을 창당하면서 정치 활동을 개시하였다. 이 기독교사회민주당은 김구의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지하고 "민주주의 정부의 수립과 기독교 정신에 의한 사회개량"을 정강으로 내세웠는데 한경직 목사 등이 중심이었다. 11월 3일 평양에서 고당 조만식이 결성한 <조선민주당>과도 연계를 가졌다.

기독교세력과 사회주의세력의 첫 대립은 신의주 옆의 용암포에서 발생했다. 11월18일에 용암포 제일교회 부속 구세국민학교에서 기독교사회민주당과 조선민주당이 연합하여 지부당 대회 겸 독립촉성대회를 개최하였는데 반공, 반소 발언이 이어지고 이를 소련군과 공산당 세력이 진압하면서 제일교회 장로가 사망하고 조선민주당이 운영하던 병원이 파괴되었다. 공산당계 용암포인민위원장 이용흡의 횡포, 상점과 여성들을 약탈하는 일부 소련군들의 비윤리적 행태도 있어 이에 분개한 용암포의 학생들이 시위를 벌였다.

이 여파가 신의주로 이어져서 11월 23일에 신의주의 중고등 학생과 시민 5천여 명이 평안북도 인민위원회 보안부, 평안북도 공산당 본부, 신의주 보안서를 습격하는 <신의주학생사건(남한에서는 '신의주학생의거'로도 불림>이 발생하였다. 소련군은 신의주 학생들에 대하여 기관총으로 사격하는 등 수많은 사상자를 내며 진압하였다. 이 과정에서 기독교사회민주당 간부들이 체포되고 조직이 해산되었으며 구속된 사람들 중 일부는 시베리아에 억류되었다.

▲ 신의주학생사건을 보도한 중앙일보 1945년 12월 8일자 기사
▲ 신의주학생사건을 보도한 중앙일보 1945년 12월 8일자 기사

한편 신의주학생사건에 대응한 김일성의 움직임도 빨랐다. 11월 26일 소요가 가라앉지 않은 신의주에 비행기로 날아간 김일성은 다음날 27일 신의주 동중학교 운동장에서 <신의주 군중대회>를 열고 "해방된 조선은 어느 길로 나갈 것인가"”라는 연설을 하였다. 노동신문이 후에 전한 이때의 상황은 다음과 같았다.

"연단 가까이에서 누구인가 《장군님도 공산주의자이십니까?》하고 묻는 것이었다. 너무나도 당돌한 질문이어서 사람들은 잠시 웅성거리며 발돋움하였다. 사실 그때 공산주의에 대한 사람들의 감정은 한결같지 않았다. 오랜 기간에 걸친 일제놈들의 공산주의에 대한 터무니없는 악선전에다가 해방 후 《공산주의자》로 자처하고 나선 어중이떠중이들의 비행, 반동들의 악랄한 책동으로 적지 않은 사람들에게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의혹이 남아있었다. 그래서 군중대회에서 인민정권기관 및 민주주의적 정당, 사회단체 대표들이 연설을 할 때에도 공산당 대표는 연단에까지 나갔다가 군중의 압력에 못 이겨 연설을 못 하고 내려왔던 것이다." (노동신문 1985년 9월 26일)

조선공산당 대표가 연설도 못 하는 상황이 신의주에서 발생했다는 것이다. 그만큼 공산주의에 대한 신의주 사람들의 의혹이 깊었다는 것이며 그 바탕에는 반공선전과 기독교적 인식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신도 공산주의자인가"라는 한 청중의 질문에 김일성은 "나도 공산주의자입니다. 만일 공산주의자라고 하는 사람이 자기 나라와 자기 민족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는 참다운 공산주의자가 아닙니다. 나는 어떤 다른 나라를 쳐다보는 공산주의자인 것이 아니라 우리 인민에게 의거하고 조선민족과 조선인민을 위하여 싸우는 공산주의자입니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신의주와 용암포, 정주 등 기독교 세력이 강한 곳에서 발생한 반공, 반소련 소요사건으로 사회주의 세력은 공산당 조직이 평안도 지방에서 취약하며, 반면에 기독교 세력의 힘이 크다는 인식을 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평안도 기독교세력의 주요한 사회경제적 기반인 지주와 상공인들의 힘을 급속히 약화시키는 방향으로 정책을 펼치게 된다. 

그 시작은 1945년 12월부터 농촌의 소작료를 <3.7제>(소작료 3할)로 낮추고 <양곡매상운동>을 실시한 것이었다. 기독교사회민주당과 조선민주당은 <3.7제>의 소작료가 낮다는 이유로 반대한 바 있었다. 지주의 땅을 빌어 소작을 하면서 소작료를 5-6할 내던 소작농들이 많았던 농촌사회는 공산당 지지로 돌아섰다. 정부기관이 양곡을 수매하여 도시서민에게 공급하는 <양곡매상운동>은 도소매 상인들의 반발을 꺾으면서 노동계층의 지지를 얻었다. 

그리고 1946년 3월 5일 발표된 <북조선 토지개혁에 관한 법령>이 기본적으로 "무상몰수 무상분배"방식을 취하면서 지주계급이 몰락하는 결과로 되었다. 당시 기독교사회민주당은 토지문제 해결에 대해 "정부의 유상매입에 의한 분배"를 주장하였는데 평안북도에서 지주들의 이해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빈농, 소작인, 농업노동자들이 중심이 된 각 지역의 농촌위원회가 토지개혁을 강력히 실행하였고 농민자위대도 만들었다. 종교단체의 토지도 예외가 아니었다. 지주들의 반발은 성공하지 못했고 이들 중 일부는 남한으로 내려갔다. 빠른 속도로 달성했던 북한의 토지개혁으로 북한의 사회주의 세력은 강력한 지지기반을 만들었다. 1945년 12월 4,530명에 불과했던 북한의 조선공산당원 수는 1946년 8월에는 36만 6천 명(북조선노동당으로 개칭)으로 80배나 증가했다. 

지주의 자제들이 많이 다녔던 신의주의 중학교(중고등과정) 학생들 속에서도 토지개혁을 지지하는 결의서를 작성하는 운동이 벌어졌다. 신의주학생사건은 묻혀졌다. 결국 평안도의 다수 기독교인들은 남한으로 내려갔다. 신의주의 기독교인들이 꿈꾸었던 "새롭고 의로운 땅"은 사라지고 사회주의자들이 꿈꾸는 "새롭고 의로운 땅"이 나타났다. 대신 신의주 기독교인들은 남한에 가서 새로운 "신의주"를 찾았다. 기독교와 사회주의 대립의 상징이었던 신의주학생사건은 이후 한국 현대사 질곡의 서막이었다. 

신의주학생사건은 한국 현대사에서 보수적인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들이 선교했던 평안도의 기독교가 반공주의와 결합하는 시작이기도 했다. 반면 함경도와 만주 간도의 기독교는 리버럴했던 캐나다 선교사들의 영향도 있어 한국에서 진보적 기독교의 흐름을 형성했다.

② 전쟁 후 신의주의 변화 : 전쟁 폐허를 딛고선 "피플 파워"

▲ 신의주 지도
▲ 신의주 지도

해방 전 만주-조선을 잇는 물류와 상업 그리고 목재, 방직, 정미업 등의 도시였던 신의주는 사회주의 공업화 정책에 따라 경공업을 중심으로 하는 국경도시로 탈바꿈하였다. 신의주 건너편인 중국의 안동(현 단동)은 국민당 장개석 군대가 장악하고 있었으나 1947년 6월 6일에 중국공산당 주도의 동북민주련군이 탈환하였다. 1949년까지 이어진 중국의 내전에서 모택동이 이끈 공산당이 승리하면서 신의주-안동은 사회주의권 교류의 관문으로 되었다. 해방 전부터 있던 시장은 <인민시장>이 되었고, 1950년 3월 5일에는 전국 각 도시에 동시 개설된 <농민시장>이 신의주에도 개설되었다. 신의주 농민시장에는 국영상점과 식당, 창고, 상품진열대가 배치되어 쌀과 부산물을 농민들이 직접 소비자들에게 판매할 수 있고 국영상점에서 생활필수품을 인민시장 가격보다 저렴한 가격으로 직구입할 수 있게 되었다.

신의주에 해방 전부터 있던 공장으로는 방직공장, 잠사공장, 제사공장(비단실생산), 펄프공장, 제지공장, 제유공장(대두유생산), 피복공장(양말, 내의생산), 화학공장(성냥생산), 고무공장(신발생산), 주정공장(알코올 생산) 등이 있어, 나름대로 경공업 기반을 갖추고 있었다. 신의주방직공장은 사리원방직공장과 더불어 해방당시 북한지역에 있던 두 개의 방직공장 중 하나였다. 

문제는 기술인재였다. 일본인들이 철수한 상황에서 북한에 턱없이 부족한 기술인재 문제를 타개하기 위해 1946년부터 중등기술전문학교를 각 지역에 설립했다. 신의주 사람들의 교육열은 대단했다. 일제하에서 눌렸던 기술지식에 대한 욕구가 일거에 분출했다. 신의주에는 광산전문학교, 전기전문학교, 토목공업전문학교, 의학전문학교, 경제전문학교, 공업전문학교, 사범전문학교 등이 설립되었다. 대학으로는 교원대학이 1947년 설립되었고, 사범대학, 의학대학, 농업대학, 공업대학, 경공업대학 등이 후에 설립되었다. 1959년부터는 사회인을 대상으로 한 고등기술학교도 설립되는데 신의주에는 고등경공업학교가 개설되었다.

북한의 다른 도시들도 마찬가지지만 6.25전쟁 시기에 신의주는 미군의 폭격으로 초토화되었다. 1950년 11월 5일 자 유엔군 작전명령서에 따라 B-29 중폭격기가 소이탄을 투하해 압록강 교량파괴와 도시 파괴를 시작했다. 청진, 강계, 신의주가 차례로 당했는데 군수공장이 없던 신의주에 11월 8일에 78대의 B-29기가 신의주시 전체를 소이탄(불태우는 폭탄)으로 폭격하고 압록강 철교를 절단냈다. 하루 동안 640톤의 폭탄(소이탄 8만5천 발)이 투하되었다고 한다. 10일과 11일에도 이어진 폭격으로 주택과 학교, 병원, 교회, 철도역, 공장 들이 파괴되어 신의주 전체가 잿더미가 되었으며 5천여 명이 사망했다. 미군은 소이탄 투하를 하고나서 불을 끄려 나온 시민들을 저공비행으로 기총소사로 살해하였다고 한다. 17개 기독교 교회 건물 중 15개가 폭격으로 파괴되었는데 교회건물에 피한 이들이 떼죽음을 당하였다.

전쟁당시 신의주시는 1만4천 호 가옥에 인구가 12만6천명이었는데 8일 하루의 폭격에 건물 1채당 6.1발, 사람 1명당 0.7발에 달하는 소이탄이 투하되었다. 북한측 주장(워커 엠 머프린 미공군 대령 심문 결과)에 따르면 1952년 5월에 신의주에 세균탄을 투하하였다고 한다. 직후인 6월에는 수풍댐을 폭격하여 발전시설의 70%를 파괴하였다. 휴전협상 중이었던 1953년 3월 17~18일에도 B-29기가 남신의주 주택지대를 폭격했다.

신의주 시민들은 토굴, 천막, 지하실 등에 살면서 도시 복구 활동을 통해 "새롭고 의로운 땅" 신의주를 다시 만들게 된다. 

▲ 전쟁고아들에게 선물을 주는 신의주시 여성동맹원들 (노동신문 1951년 5월4일)
▲ 전쟁고아들에게 선물을 주는 신의주시 여성동맹원들 (노동신문 1951년 5월4일)

전후 폐허를 복구하는 협동조합

이런 상황에서 신의주 시민들의 힘이 된 것이 협동조합이었다. 해방 직후에 설립되었던 신의주소비조합은 식료품 등 일용품 수매와 공급을 담당하였는데 산하에 식료가공공장, 연필생산합작사, 제본합작사 등을 두어 직접 생산 판매하는 체계를 갖추었다. 그리고 1951년부터 설립되기 시작한 생산협동조합이 신의주에도 각 품목별로 등장했다. 노동신문에 보도된 신의주의 생산협동조합만 추려보아도, 철공생산협동조합, 밧데리생산협동조합(이하 생산협동조합 생략), 전기, 유지(식용유), 직물. 가구. 유리제품, 피물(털가죽제품). 농기구. 제혁. 목공. 성냥. 기계. 특수고무(벨트, 색연필, 샤프연필). 식료품. 공업필수품(탁상시계) 등 각 품목의 생산협동조합이 1950년대에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서비스부문에서는 신의주인민생활편의협동조합이 수리소, 재봉소, 목욕탕, 이발소, 사진관, 소 운반 등을 담당했다. 신의주 시민들의 협동조합 활동이 활발히 일어났다. 생산협동조합의 기술 수준을 높이기 위해 조합원들이 고등기술학교에서 수업을 들을 수 있는 제도도 만들어졌다.

▲ (왼쪽) 신의주유리제품생산협동조합원들이 파손된 유리로 가정용 전등갓 씌우개, 부인용 핸드백, 무대 의상용 장식품 등을 생산 (노동신문 1957년 2월 14일) (오른쪽) 건면을 생산하는 신의주5.1식료품생산협동조합 조합원들 (노동신문 1959년 3월 24일)
▲ (왼쪽) 신의주유리제품생산협동조합원들이 파손된 유리로 가정용 전등갓 씌우개, 부인용 핸드백, 무대 의상용 장식품 등을 생산 (노동신문 1957년 2월 14일) (오른쪽) 건면을 생산하는 신의주5.1식료품생산협동조합 조합원들 (노동신문 1959년 3월 24일)
▲ (왼쪽) 만년필을 생산하는 신의주특수고무생산협동조합 (노동신문 1959년 9월6일) (오른쪽) 식용유를 생산하는 신의주압강식료품생산협동조합 (노동신문 1961년 6월 2일)
▲ (왼쪽) 만년필을 생산하는 신의주특수고무생산협동조합 (노동신문 1959년 9월6일) (오른쪽) 식용유를 생산하는 신의주압강식료품생산협동조합 (노동신문 1961년 6월 2일)

그리고 <신의주펄프공장 생활필수품직장>처럼 각 국영공장에서도 생활필수품을 생산하는 라인이 설치되어, 노동자 가족들이 참여하여 공장의 폐설물을 활용한 생활필수품(문방구, 가정용구 등)을 자체로 생산하는 체계도 생겼다. 1960년에는 신의주 시내의 가정부인들이 <가내작업반>을 조직하여 신의주의 각 공장, 수산사업소, 생산협동조합으로부터 원료, 반제품을 조달하여 일용품을 자체로 생산하여 직매점에 공급하는 체계도 생겼다. 

이렇듯 신의주 시민들의 "피플 파워"는 사회주의체제 하에서 나타난 현상이지만 정부가 시켜서 한 것이라기보다는 시민 스스로 "살기 위해" 노력해서 한 일이었다. 그 한 실례가 "나팔식 부뚜막"을 고안한 신의주시 관문동 24반의 가정주부 김옥숙 씨였다. 

▲ "나팔식 부뚜막"과 김옥숙 씨 (노동신문 1961년 12월16일, 1962년 2월 2일)
▲ "나팔식 부뚜막"과 김옥숙 씨 (노동신문 1961년 12월16일, 1962년 2월 2일)

김옥숙 씨는 부뚜막을 개조하여 석탄불이 잘 피게 하는 창안을 하였다. 이렇게 하면 한 가정에서 1년에 2~4톤씩 때던 석탄을 1톤으로 줄이면서도 밥을 더 빨리 짓고 온돌을 따뜻이 덥힐 수 있게 되었다. 가루탄을 구멍탄으로 만들고 탄통을 나팔식으로 만들고 탄통 옆에 공기통을 두 개 만드는 방식이었다. 부뚜막 밑의 폐열이 이 공기통을 통해 구들로 들어가 방을 더 따뜻하게 해주었다. 부뚜막 뜯어고치기를 53번 한 결과였다. 그녀는 매일 같이 동네 인민반을 찾아 다니며 석탄 절약의 의의와 "나팔식 부뚜막"의 우수성을 선전하고 1개 반에 한두 개씩 시범적으로 만들어 보였다. 그녀가 직접 뜯어고쳐 준 집의 부뚜막만 해도 150세대가 넘었다. 그녀의 창안은 신문을 통하여 널리 전국 각지에 알려졌다. 평범한 가정부인인 그녀는 1962년에 과학지식보급협회 평양시 위원회에서 개최한 경험 발표회에서 열렬한 박수를 받았다. 김옥숙 씨가 창안한 "나팔식 부뚜막"은 후에 기술자들의 협력으로 "낙원식 부뚜막" 등 더 개량된 형태로 발전하여 전국에 퍼졌다. 

사회주의 북한에서 신의주 시민 개개인들의 열성과 협동 정신을 바탕으로 한 "피플 파워"가 신의주를 폐허에서 다시 일어서게 한 기초력이었다. 


※ 다음 호 "새롭고 의로운 땅"으로 다시 서는 신의주를 바라보다 (下-2)는 신의주의 1980년대까지 모습을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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