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먹거리, 탄소하나의 흥남을 바라보다(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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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먹거리, 탄소하나의 흥남을 바라보다(上)
지방이 아닌 지방, 특수경제지대의 원조 흥남
  • 2020.06.24 09:00
  • by 이찬우 (테이쿄대학 교수)

2020년 6월 한반도에 긴장감이 돌고 있다. 남한 정부는 원하지 않지만, 남북한 정부 간에 대립 구도가 다시 선명해지고 있다 이러한 시기에 북한을 제대로 아는 것이 더 중요해지고 있다(필자의 칼럼 [신냉전 하의 남북관계 새로운 과정을 시작하자]를 참조). 

북한의 진면목은 사실 평양보다는 지방에 있다. 그 지방들을 시간과 공간이라는 들실과 날실을 엮어보면 북한을 제대로 알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 이 연재의 목적이다. 이번에는 북한의 지방 중에서 좀 특이한 공업지구 흥남을 선택했다. 

석탄. 남한에서는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보일지도 모른다. 시커먼 돌덩어리 석탄을 캐내기 위해 탄광 막장을 인생 막장이라 부르며 폐병을 얻은 광부들의 이야기는 이제 할아버지나 아버지들의 옛이야기다. 세계적으로도 석탄은 지구온난화를 일으킨 주범이 된 지 오래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국내자원인 석탄을 공업의 쌀이라 부르며 지금도 생산실적이 전년대비 얼마나 늘었다는 것을 보도한다. 북한에서 석탄은 에너지 연료로 쓰이고 비료화학산업(주체비료), 제철산업(주체철), 섬유산업(주체섬유)의 원료로 쓰여 경제의 기둥이다. 더 나아가 갈탄에서 메탄올을 만들어 에틸렌 등 석유화학제품과 합성석유도 만드는 유기화학인 탄소하나화학공업이 있다(탄소하나화학공업에 대해서는 라이프인에 연재된 [북한경제와 협동하자⑤]남북경제협력의 역사와 미래(하) 참조).

탄소하나화학공업은 이산화탄소를 발생시키지 않아 북한에서 21세기의 먹거리로 생각하는 분야인데 흥남과 순천, 안주 등에서 공장 건설이 진행 중이다. 기술적으로는 21세기의 새로운 것은 아니다. 20세기 기술이다. 1991년 12월 [천리마] 잡지에 "탄소하나화학"에 대해 설명한 기사가 있는데 다음과 같다. 

"탄소하나화학이란 탄소원자가 1개로 된 물질인 일산화탄소나 메탄올 그리고 메탄과 같은 화합물로부터 여러 가지 화학제품들을 만들어내는 기술을 말한다. 공업적으로는 석탄이나 천연가스에서 일산화탄소와 수소가 혼합된 합성가스를 뽑아내고 이것을 여러 가지로 가공하여 에틸렌글리콜, 에탄올, 초산, 탄화수소 등 유기화학제품을 만들어내는 기술공정이다. 이런 유기화합물은 석유로 만들어 냈지만, 원유자원이 제한이 있다. 탄소하나화학이라는 용어가 생긴 것은 최근이지만, 연구 역사는 오래되었다. 이미 1913년 메탄올을 합성하여 공업화하였고, 그 이후 일산화탄소와 수소의 합성가스를 가지고 인조석유를 만들어 냈다. 이 부분은 1970년대 본격적으로 발전하였다. 원유로 얻어내던 아닐론을 비롯한 화학섬유와 합성고무, 폴리에틸렌수지 등을 석탄이나 천연가스에서 생산되고 있다"

2016년 5월, 조선노동당 제7차 당대회에서는 "석탄 가스화에 의한 탄소하나화학공업을 창설하자"는 정책이 제시되었고, 금년에 끝나는 국가경제발전 5개년 전략 (2016년~2020년)의 목표로 탄소하나화학공업에서 메탄올 30만 톤과 합성석유 15만 톤 생산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질소비료는 120만 톤 생산계획을 설정하였다. 2019년 12월 말의 당중앙위 전원회의에 이어 2020년 6월 7일에 열린 당정치국 회의에서도 탄소하나화학공업창설 문제와 비료생산 문제가 중요안건으로 논의되었다 하니 생산목표달성에 대한 대책논의였다고 보여진다. 

북한은 석탄에 목숨을 걸고 있다. 왜 그럴까. 석유가 없어서라는 대답은 좀 단순하다. 북한은 자신이 가진 것으로 모든 것을 만들려 하는 고집이 있다. 물론 100%는 아니더라도 말이다. 봉쇄에 살아남기 위해서다. 남과 북의 경제정책에서 결정적인 차이는 여기에 있다. 

이번 연재의 상편에서는 위에 소개한 [천리마] 잡지 기사에서 북측이 일부러 뺀 것으로 보이는, 1920-40년대의 흥남을 다루어보려 한다. 흥남에서는 수력발전을 배경으로 무연탄을 원료로 한 비료생산과 유기화학 제품 생산, 그리고 갈탄을 원료로 인조석유 생산이 당시 세계적인 규모로 이루어졌었다. 북한이 봉쇄에서 살아남는 경제정책으로 설정한 산업의 기원은 일본에 있었다는 역사의 아이러니가 있다. 

조선왕조를 일으킨 변방의 땅 함흥에서 일본 기업이 만든 특수공업지대 흥남 
:
"전기와 화학의 이상향"으로 불리다

바닷가에 있는 흥남은 함흥의 남쪽에 있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지명이 복흥리와 호남리여서 한 글자씩 따서 흥남이 되었다는 설도 있다. 행정상으로는 함흥시 흥남구역이다. 함흥 인구는 현재 약 80만 명으로 평양, 남포에 이어 3번째로 인구가 많다. 성천강이 흐르는 함흥평야가 있어 쌀농사로 먹고살 만한 지역이다. 함흥은 왕조 조선을 일으킨 변방의 땅이었다. 

▲ 함흥읍성과 남쪽의 본궁. 성곽도시 함흥은 성천강과 바다와 산으로 둘러싸인 방어요새이다.
▲ 함흥읍성과 남쪽의 본궁. 성곽도시 함흥은 성천강과 바다와 산으로 둘러싸인 방어요새이다.

함흥과 흥남 사이에는 본궁(本宮)이라고 있는데 조선의 개국 태조 이성계가 젊을 때 살던 집으로 태종 이방원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이성계 자신은 영흥에서 태어나 영흥에도 영흥 본궁이 있다). 이성계는 어린 시절 함흥 서쪽의 성천강과 북쪽의 반룡산에서 말달리기와 활쏘기를 익혔다고 하는데 쏜 화살이 10리를 날아 달리는 말을 명중시켰다는 전설도 있다. 이성계는 조선을 건국하여 왕이 된 후 함흥 본궁을 증축했고 상왕으로 물러나 말년을 여기서 지냈는데 형제의 난을 일으켜 왕이 된 이방원이 차사(差使)를 보내 환궁을 권유하면 죽이거나 가두었다는 이야기가 야사로 전해진다. 태종이 보낸 "함흥 차사"는 어디 갔다가 아무 소식도 없는 것을 일컫는 말로 지금도 남한에서 쓰이는 데, 북한에서는 잘 쓰이지 않는 것 같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일 남한정부가 평양에 특사를 보냈는데 돌아오지 못한다면 함흥차사라 해야 할까 평양 차사라 해야 할까. 본궁 건물은 지금은 함흥역사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 황초령과 마운령 신라진흥왕 순수비 실물이 여기에 전시되어있다고 한다. 가보고 싶은 곳이다.

▲ 함흥 본궁 ⓒ 위키피디아
▲ 함흥 본궁 ⓒ 위키피디아

성곽도시 함흥의 남쪽 바닷가가 공업지대 흥남으로 변화하기 시작한 것은 1920년대부터이다. 함경선이 원산에서 1914년 10월에 착공되어 함흥(1919년 12월 개통)을 지나 성진 청진을 거쳐 두만강변 회령까지 약630킬로가 전부 개통된 것이 1928년 9월이었다. 바닷가 땅 흥남에 일본기업의 대규모 공업지대가 들어서면서 식민지 조선의 경제는 타율적 산업자본주의로 질적인 변화를 겪게 된다.

▲ 일제시대 함흥역 엽서 사진. 북선(함경도)에서 제일 큰 역으로 설명하고 있음
▲ 일제시대 함흥역 엽서 사진. 북선(함경도)에서 제일 큰 역으로 설명하고 있음

함경선이 완공되면서 한반도에 X자형의 철도 기간선망이 형성되었다. 함경선은 만주 철도와 연결되어 한반도와 만주를 연결하는 동부 간선망이 되고 경제적으로 중국동북지역과 함경도와 일본을 잇는 식민지경제의 동맥으로 되었다. 당시 일본은 함경도지역을 북선(北鮮)으로 평안도지역을 서선(西鮮)으로 불렀다. 함경도지역은 지형적인 조건으로 경제개발이 상대적으로 뒤처진 지역이었는데 함경선 건설은 이 지역에 일대 변화를 일으켰다. 함경도지역의 철도건설을 적극 추진한 이는 1924년에 조선총독부 철도국장으로 부임한 오무라 타쿠이치(大村卓一)였다. "조선철도 12년 계획"을 수립하여 지체되던 함경선 건설을 서두르고 두만강변의 도문선, 혜산선, 동해선을 새로 추진하였다. 동북아정세에 밝았던 오무라는 후에 만주철도주식회사(만철) 총재까지 하는데 동해안의 후쿠이현 출신으로 홋카이도의 "Boys be Ambitious!"로 유명한 삿포로농학교의 공과(공학부)를 졸업한 기독교신자이기도 했다. 출신이 동해안 지역이기도 해서인지 동해지역인 함경도지역의 철도건설에 특히 관심을 두고 만주-함경도-일본을 직접 연결하는 육해로 교통망 건설, 즉 일본-조선-만주의 경제권통합으로 이어지는 철도 인프라 건설에 정력을 쏟았다. 

▲ 조선철도 12년 계획도 (1927년 8월 현재) ⓒ 鮮交会[조선교통사]1986년 부록
▲ 조선철도 12년 계획도 (1927년 8월 현재) ⓒ 鮮交会[조선교통사]1986년 부록

함경선 철도건설과정에서 중요하게 두 가지가 발견된다. 하나는 석탄과 무산의 철광산, 단천의 마그네사이트를 비롯한 광물자원이 풍부하다는 것이 확인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지형을 역이용하여 동해안의 급경사를 이용한 수력발전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조선총독부는 1920년대 이후 30년대 중반까지 기존의 군사우선 정책(무단통치)을 바꾸어 산업진흥, 철도망촉진, 항만개축, 치산치수(治山治水)를 4대 사업으로 하는 경제개발을 통해 산업자본주의화를 하겠다는 정책을 추진했다. 1차세계대전 이후 제국주의 국제 질서가 안정된 상태여서 경제가 중심이 된 시기였다. 이를 기회로 본 일본의 기업이 한반도에 본격적으로 투자하기 시작했다. 

조선총독부의 변화한 식민지 정책을 기회로 삼아 도전한 기업가 중에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북한에서 지금까지도 그 이름이 잘 알려져 있는 노구찌 시타가우(野口遵)였다. 사실 노구찌 이전에는 한반도 조선에 대해 관심을 가진 일본인이란 대륙낭인, 정치가, 군인, 금융인, 상인, 실업자들 정도였다. 제조업계는 큰 관심을 갖지 않았었다. 조선에 전기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노구찌는 그런 면에서 색다른 인물이었다. 그는 조선에서 전기를 만들기로 작정했다. 

노구찌는 동해안의 일본도시 가나자와(金沢)에서 사무라이계급 출신으로 1873년에 태어나 본인 당대에 스미토모(住友) 재벌 규모의 기업을 일군 기업가였다. 그는 제국대학(현 동경대학) 공과대학 전기공학과에서 전기화학을 전공하였으며 1908년에 당시 유망분야였던 카바이드를 생산하는 일본질소비료주식회사(이하 일본질소)를 세워 성공하였다. 그는 카바이드를 원료로 석회질소와 아세틸렌을 만들고 나아가 질소비료와 초산, 합성고무, 화약을 비롯한 각종 화학제품을 생산하는 석탄화학산업의 선봉이었다. 

석탄화학은 대량의 전기를 필요로 하는 산업이었기에 값싸게 수력 전기를 생산할 수 있고 석탄 산지이면서 일본에 가까운 함경도지역이 제격이었다. 진출지역을 선정할 때 원산과 흥남 사이에서 전력과 석탄을 공급받는 편리성을 기준으로 흥남을 선택했다고 한다. 노구찌의 흥남 투자를 자금 면에서 지원한 곳은 미츠비시(三菱) 재벌이었다. 노구찌의 일본질소는 1927년 5월에 흥남에 조선질소비료주식회사(1941년에 일본질소에 통합)를 설립하고 흥남 비료공장을 건설하면서 석탄화학사업을 개시하였다. 공업단지를 넘어서 흥남 여학교 등 학교, 병원, 상점, 행정기관까지 갖춘 도시(읍)를 건설했다. 사실상의 특수경제지대였고 흥남읍 초대읍장은 다름아닌 노구찌였다. 

노구찌가 흥남을 중심으로 전개한 전력과 석탄화학공업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부전강, 장진강, 허천강 유역변경식 전력 개발

개마고원에서 압록강 수계인 부전강을 높이 80m, 길이 400m 댐으로 가두어 동해 쪽으로 3km 수로 터널을 뚫어 높은 낙차를 이용해 발전기 4개로 발전하는 유역변경식 발전을 한반도에서 처음 개발했다. 1926년에 조선수전(水電)주식회사가 설립되어 1929년에 준공한 제1호 발전소가 흥남에 송전을 시작했다. 1932년까지 4호기가 모두 장착되어 20만키로와트(kW) 발전능력을 가졌다. 흥남은 한반도 전체 전력사용량의 절반 이상을 썼다고 한다. 

부전강 제1발전소의 설비는 유럽제에 의존했다. 수압관은 폴란드의 페럼, 수차는 독일의 포이트, 발전기는 지멘스 것이었다. 폴란드는 제철분야에서 선진기술을 갖고 있었고 독일의 포이트와 지멘스는 지금도 유명한 기업이다. 일본은 부전강 제2호 발전소 건설 때부터 국산 수차와 발전기를 채용했다. 이어 장진장 발전소를 1933-38년, 허천강 발전소를 1937-44년에 건설하였다. 부전강 2호 발전소 이후 대부분 일본제 수차와 발전기로 건설된 덕에 1945년에 소련군이 들어와 기계장비를 뜯어갈 때 피해를 면하고 전력생산을 계속할 수 있었다. 소련군은 북한지역에 설치된 독일제와 미국제 설비를 뜯어갔다. 

▲ 유역변경식 부전강 제1호 수력발전소. 이 1호발전소 설비는 독일제였기 때문에 소련군이 뜯어갔다. ⓒ 한국수력원자력
▲ 유역변경식 부전강 제1호 수력발전소. 이 1호발전소 설비는 독일제였기 때문에 소련군이 뜯어갔다. ⓒ 한국수력원자력
▲ 구글어스로 본 부전강 발전소 제1호발전소 자리는 해체되어 주택이 들어섰고 옆의 제2호 발전소가 가동하고 있다.
▲ 구글어스로 본 부전강 발전소 제1호발전소 자리는 해체되어 주택이 들어섰고 옆의 제2호 발전소가 가동하고 있다.

전력개발과 함께 함경도 지역의 지하자원 개발이 본격 추진되었다. 무산, 단천, 아오지 등의 광산개발로 청진과 성진 등은 금속 제철공업단지를 형성하게 되었다. 

한편 수력발전소는 인공호수를 만들게 되는데 결국 그 지역에 살던 농민들의 토지를 강제수용하는 것이어서 장진 마을의 주민들은 토지 불매동맹을 결성해서 대항했지만, 총독부의 강압에 토지를 내주었다. 그렇게 해서 생긴 장진호는 장진군청까지 수몰시켰고 후에 6.25전쟁 때 유명한 장진호 전투의 무대가 되었다.
댐을 만들어 전력을 생산하는 수력발전의 전설은 노구찌가 만들었고, 북한은 지금도 단천발전소, 원산군민발전소 등 대규모 수력발전소를 노구찌가 건설한 방식으로 건설하고 있다. 수력발전소 댐 건설이 환경에 미치는 영향은 고려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있다.

② 흥남항 건설

조선질소비료회사가 1927년에 흥남에 들어서면서 이 회사의 전용항으로 흥남항 부두가 건설되었다. 1927년부터 1932년까지 공사로 4개의 안벽과 방파제가 생겼고 연간 150만 톤 화물을 처리할 수 있게 되었다. 

③ 석탄에서 비료와 화약 생산

1929년에 조업을 개시한 조선질소비료 흥남비료공장에서는 전기분해, 암모니아합성, 유안제조, 석회질소비료 등의 공정이 있었는데 능력이 일본을 능가했다. 전기분해 설비는 세계 1위, 암모니아합성 설비는 세계 3위 규모였다. 황산, 유안, 화약, 카바이드 생산은 일본 1위였다.

흥남비료공장 옆에 조선질소화약 흥남공장을 1935년에 세워 광산용과 군용 화약생산을 했는데 군용은 1944년에 600톤 생산 규모였다. 당시 식민지 조선에서 민간기업이 화약을 제조하는 것은 금지되어있었지만 노구찌는 예외였다. 정상(政商)이라 할 수 있는 노구찌는 1944년 1월 72세로 사망했다.

흥남비료공장의 종업원 8천명(그 중에 조선인 5천 명)을 포함하여 45,000명의 노동자가 흥남의 조선질소 산하 기업들에 있었고 흥남의 인구가 20만 명인 상태에서 1945년에 일본이 패망했다. 일본은 군과 함경도정부 지시를 통해 각 공장들을 소련에 주기보다는 폭파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일보질소의 전무이자 흥남비료공장의 공장장 시라이시 무네키(白石宗城)는 일본인이 계속 운전을 담당할 수 있다는 것과 전쟁배상의 대상으로 될 수 있다는 판단으로 폭파지시를 따르지 않았다. "공장은 조선을 위해서도 일본을 위해서도 남겨놓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하여 흥남비료공장은 파괴를 면하고 생산을 계속했다. 잔류했던 일본인 기술자들은 1954년에 일본으로 귀국하였다. 

그 결과로 흥남의 화약은 1945년 이후 중국 만주에서 국공내전 시기에 모택동의 중국공산당 군대를 지원하는 강력한 후방기지 역할을 하였다. 흥남공장이 파괴된 것은 6.25전쟁 시기 미군의 폭격 때문이었는데 미군도 화약공장 등 파괴 대상 시설만 파괴하고 상당 부분의 설비는 온존했다. 석유가 지천인 미국은 흥남의 석탄화학에 대해서는 그다지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관심은 흥남에서 제국시대 일본이 핵 개발을 추진했는가 하는 의혹에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석탄화학산업은 피해를 덜 입고 산업생산을 할 수 있는 물리적 토대가 잔존했다. 북한은 이 기반 위에서 석탄화학산업을 기둥 산업으로 유지했다.

▲ 흥남비료공장과 흥남항부두 ⓒ 위키피디아
▲ 흥남비료공장과 흥남항부두 ⓒ 위키피디아

④ 염산, 알칼리 등 유기화학 공업

흥남비료공장에서 본궁 방면에 본궁 공장을 설립했는데 여기서 소금을 전기분해하여 염산, 가성소다를 생산했고 유산을 생산했다. 한편 만주에 풍부한 콩을 원료로 수소를 활용하여 마가린을 제조하는 사업도 추진하지만, 콩단백에서 추출되는 감칠맛을 내는 글루탐산 함량이 적어 사업을 포기했다. 

⑤ 석탄(갈탄)액화 석유와 메탄올 생산(탄소하나화학공업의 원류)

석탄액화는 노구찌가 사활을 걸고 추진한 사업이었다. 무연탄에서 석유로 전환된 일본군 연료 조달을 위해 함경북도에 무진장한 갈탄을 가지고 사업화했다. 1932년에 함경북도 영안(현 명간군)에 갈탄건류공장을 세워 저온타르를 생산하고 이를 액화하여 중유 휘발유 등 인조석유를 얻었다. 생산능력은 연간 5만 톤이었다. 일본 제1의 규모였다. 일본 정부는 1936년에 "인조석유진흥계획요강"을 책정해서 지원했다. 노구찌는 영안 인조석유공장을 1940년에 갈탄 산지인 아오지로 이전해서 탄전에서 직접 석탄액화를 추진하였다. 그런데 아오지 갈탄은 수분과 회분이 많아 생산되는 석유액화의 품질은 좋지 않았다. 

1943년에 해군의 명령으로 노구찌는 아오지에서 갈탄 가스화를 통해 메탄올(CH4O)을 생산하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물을 전기분해하여 수소를 얻기 위해 대량의 전기를 사용하는 것보다 갈탄에서 낮은 비용으로 수소를 얻어낼 수 있는 기술이 이때 실용화하였다. 아오지에 연산 1.6만 톤의 메탄올 생산공장이 건설되었다. 이 메탄올로 생산한 항공연료는 태평양전쟁 시 일본해군 가미가제특공대의 전투기 연료로 공급되었다. 

흥남비료공장에서도 갈탄을 활용한 가스법수소 제조가 추진되었다. 설비는 영국제를 수입하여 일본의 코크스탄과 함경도의 갈탄을 활용할 수 있게 개량했다.

노구찌가 추진한 메탄올 생산공정이 현재 북한이 추진하는 탄소하나화학공업의 원류이다. 탄소하나는 C1을 의미하지만 사실 중요한 것은 탄소보다는 갈탄에서 수소를 값싸게 추출하는 것이다. 물을 전기분해하고 석탄에서 카바이드를 만드는 과정에서 대규모 전기를 소비하는 기존의 카바이드 석탄화학과는 전혀 다른 석탄 가스화 방식으로 원하는 제품들을 얻을 수 있다는 점이 강점이었다. 갈탄에서 추출한 수소는 비료의 원료로 유기화학과 합성석유의 원료로 쓰였다. 그래서 탄소하나공업을 일본에서는 "수소산업"이라고 부른다. 일본질소의 갈탄 활용 메탄올 및 합성석유 생산 기술은 이후 가와사키중공업의 수소기술로 이어졌다. 

그런데 아오지 공장은 소련군에 의해 포사격을 받아 파괴된다. 소련은 일본의 인조석유나 메탄올 생산기술에 대해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한다. 이 파괴로 인해 북한이 탄소하나화학공업을 만드는 데 시간이 걸렸다.  

⑤ 정어리 어유에서 비누와 화약 생산

동해안을 북상하는 정어리 떼가 대규모로 들어오는 것이 확인된 것이 1923년이었다. 이후로 함경도 어항은 세계 최대의 정어리 어유 생산지가 되었다. 청진은 동아시아 최대의 어항으로 발전하여 정어리 어유를 생산하는 공업이 크게 일어났다. 1936년의 어유 생산량은 11.4만 톤에 달에 일본을 훨씬 넘어섰다. 북청에서는 정어리 통조림 공장이 들어섰는데 선박으로 미국, 시베리아철도로 독일에도 수출하였다. 흥남에서 잡은 정어리에서 어유(魚油)를 생산하는 조선질소 흥남유지(油脂)공장이 1931년에 설립되었다. 어유에 수소를 첨가해서 글리세린을 만들고 이를 원료로 비누와 양초, 다이나마이트 화약을 생산하였다. 1939년에 흥남에서 생산한 글리세린 생산량은 3000톤이었다. 흥남 비누는 중국과 일본에 수출되었다. 그런데 동해의 정어리는 1942년이 되어 동해에서 사라졌다. 대규모로 다시 돌아온 것은 1975년 이후 1980년대였다. 다시 90년대에 사라졌던 정어리는 2010년대에 다시 돌아왔다.

흥남의 조선사람들 : 이상한 "이상향"에서 새 세상을 꿈꾼 사람들

이상으로 식민지 시대 흥남에서 노구찌의 일본질소가 행한 전력과 석탄화학산업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당시에 일본은 흥남을 "전기와 화학의 이상향"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상향은 한편으로는 이상한 곳이었다. 큰 문제는 환경파괴와 노동자의 인권 문제였다. 

석탄화학산업의 제일 큰 문제는 유기화학 제조과정에서 나오는 폐기물의 처리인데, 폐기물이 생명체에 미치는 피해를 알지도 못했던 시대에 흥남공장은 화학 폐기물을 대기와 바다로 자유로이 방출했다. 굴뚝에서 뿜어나오는 연기는 발전의 상징이던 시대가 오래도록 이어졌다. 그러나 흥남 일대에서는 원인을 알 수 없는 질환이 나오기 시작했다. 1932년에 소설가 이북명은 본인의 흥남공장 노동 체험을 바탕으로 쓴 신문(조선일보) 연재소설 "질소비료공장"(2회 연재하다 검열로 중단)에서 주인공 한문길이 팔이 잘리고 가스에 중독되는 열악한 환경을 사실로 썼다. 일본에서는 1950년대에 일본질소를 이어받은 신일본질소의 규슈 미나마타(水俣) 공장이 있던 미나마타시에서 바다로 흘려 보낸 폐기물 (메틸수은 화합물)이 1950년대에 메틸수은중독증인 미나마타병이라는 공해병으로 문제를 일으킨 것은 너무나도 유명한 이야기다. 

흥남은 원산과 마찬가지로 사회주의계열 노동자들이 "적색노조" 건설 운동을 하는 중심지역이었다. 함흥 출신으로 영화배우였던 주인규는 흥남비료공장에서 적색노조 운동을 하여 구속되기도 했다. 주인규는 나운규가 만든 영화 "아리랑"(1926)에서 연기를 잘해 명성을 얻었는데 그의 가장 절친한 친구는 영화배우 강홍식으로 한국의 영화배우 최민수의 외할아버지다. 그 후 흥남질소공장에 노동자로 취업하여 적색노조 활동을 하던 주인규는 영화를 만들려고 공장을 그만두고 함흥에 영화사를 세워 해고노동자들을 그린 “딱한 사람들”이라는 영화를 제작하였다. 그러나 영화개봉 전인 1932년 6월에 흥남적색노조 주모자로 지목되어 체포되어 징역 3년을 살았다. 해방 후 주인규는 북한에서 영화동맹위원장이 되는 등 활동을 하였으나 6.25전쟁후 남로당계로 몰려 탄압받고 1956년에 종파주의자로 체포 구속되어 수감 중 자살하였다. 해방 후 흥남은 원산보다 소위 “지방주의”가 더 강했다는데 노동자 수의 규모가 훨씬 많고 그것도 조선질소(일본질소)라는 한 기업그룹의 노동자들이어서 결속력이 더 셌다고 한다. 해방 전후 국내파 공산주의 운동의 강력한 기반이 흥남 노동자들이었다. 

함흥 출신에 흥남비료공장과 관련된 인물로 기억되어야 할 사람은 기독교계의 김교신 선생이다. 김교신은 1901년 함흥에서 태어나 함흥농업학교를 졸업하였다. 1919년에 일본으로 유학하여 동경고등사범학교(지금의 츠쿠바대학) 지리·박물과를 졸업하였다. 도쿄유학 시에 평화주의와 무교회(無教会)주의를 주창하던 기독교 사상가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의 사상에 영향을 받고 생애를 무교회 기독교인으로 살았다. 그의 가장 절친한 친구는 일본 유학시에 만난 동갑내기 함석헌이었다. 신체가 건장하고 튼튼했던 김교신은 일본유학 후 서울에서 양정고보(養正高普) 등에서 교사로 일하면서 마라톤 영웅 손기정을 지도한 바 있다. 함석헌 등과 함께 "성서조선"이라는 잡지를 창간하여 민족주의적인 "김치냄새 나는 기독교" 사상을 전파하였는데 1942년에 성서조선에 실은 “조와(弔蛙 얼어죽은 개구리를 애도한다라는 뜻)” 필화사건으로 구속되고 성서조선은 폐간 당하였다. 1943년에 출소한 후 김교신은 일본의 패망을 예상하고 살아남아 해방 후를 준비하기 위해 고향 함흥으로 돌아가 1944년 7월에 흥남질소비료공장의 주택관리계장으로 들어갔다. 입사 전에 김교신은 친구 함석헌이 낙향해 있던 신의주 옆 용천으로 찾아가 함께 흥남에서 노동자 조직사업을 하자고 권유하였다고 한다. 함석헌은 농사짓고 부모를 모셔야 한다고 흥남 동행을 하지 않았는데 그것이 두 사람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김교신은 흥남 노동자들의 건강을 위해 위생관리에 애쓰고 유치원을 세웠고 헌병의 감시를 무릅쓰고 야학을 열어 한글을 가르쳤다. 그러나 1945년 흥남에 퍼진 발진티푸스 전염병에 걸린 노동자들을 돌보다 자신도 감염되어 해방을 보지 못하고 4월에 사망하였다. 김교신의 민족주의적 기독교 사상은 후에 작가 조정래에게 영향을 주어 그가 쓴 아리랑의 인물 고서완과 태백산맥의 인물 서민영이 김교신의 사상을 이야기하는 장면이 나온다. 

기술은 국가와 민족을 넘나든다

자본과 기술은 이익을 쫓아 국가와 민족을 넘나드는 것이 본질이다. 일본이 행한 식민지 산업개발에 대해서는 두 가지 상반된 평가가 있다. 하나는 일본 기업이 한반도의 자연과 노동에 대해 "지속 가능하지 않은" 일방적 수탈을 행하였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본주의 논리에 따른 투자를 행하였다는 것이다. 

필자는 "어떤 현상이든 0이거나 100인 경우는 없다"고 본다. 경제현상에 대한 해석을 자본, 노동, 자연, 국가, 국민 등 어느 입장에서 하는가에 따라 취사선택과 분석이 달라지지만, 전체의 이익에 맞는 것이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고 본다.

흥남은 지방이 아닌 지방, 특수공업지대였다. 1920년대 후반부터 노구찌 시타가우의 일본질소비료주식회사가 조선총독부와 일본군의 협력을 얻어 수력전기와 석탄, 석회석, 정어리 등 함경도의 부존자원을 활용하여 한반도 최대의 특수공업지대로 만든 도시이다. 민간기업이 그 영역을 넘어 도시를 행정적으로도 통치한 특수공업지대가 흥남이었다. 그 방식은 기술적으로는 사회주의 국유기업이 주민의 생활까지 책임지는 형태와 유사했다. 북한의 연합기업소도 유사한 형태이다. 

북한에서는 노구찌를 언급할 때 "노구찌 놈"이라고 표현을 많이 한다. 그 노구찌놈이 조성한 흥남석탄화학공업지구는 해방 75년이 지나는 지금도 북한의 경제의 기반이다. 기술도 노구찌의 기술이 이어지고 이를 바탕으로 탄소하나화학이 발전하고 있다. 북한은 석탄화학 기술을 개선하기 위해 일본의 발전한 기술을 재일동포 과학자들을 통해 흡수했다. 

자본과 기술은 누가 무엇을 위해 쓰는가에 따라 모습이 달라진다. 

해방 후 북한은 흥남을 어떻게 다루었는가, 흥남 사람들은 어떻게 성장했는가를 다음 편에서 다루고자 한다. 

참조 

칼럼 [신냉전하의 남북관계 새로운 과정을 시작하자] 2020.6.23

연재 [북한경제와 협동하자⑤]남북경제협력의 역사와 미래(하) 2018.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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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찬우 (테이쿄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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