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포포 매거진은 '엄마의 잠재력을 주목합니다'라는 슬로건으로 2019년에 창간한 매거진이다. 포포포 POPOPO는 connecting PeOple with POtential and POssibilities의 약자로 가능성, 그중에서도 엄마의 잠재력에 주목한다. 아직 조명되지 않은 누군가의 잠재력과 서사를 발굴하고 함께 연대해 나가는 여정을 지면으로 기록해 나가고 있다. 라이프인은 7개국 포포포 매거진 에디터의 글 연재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모딜리아니. 그의 이름을 들으면 눈동자가 없는 얼굴에 긴 목을 한, 왠지 슬퍼 보이는 인물들이 떠오릅니다. 그리고는···. 생각나는 것이 별로 없지요.
사실 모딜리아니는 주류 미술사에서 많이 다뤄지지 않는 화가이기에 보통의 우리들이 그에 대해서 아는 바는 많지 않습니다. 이 그림을 보고도 그런 생각이 들지 모르겠어요. '이 사람, 길쭉한 여인의 누드만 그린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닌가 보네' 하고.
모딜리아니를 연구한 미술사학자 도리스 크리스토프(Doris Krystof)는 아메데오 모딜리아니라는 이름이 마치 소설 속에 등장하는 비극적인 인물에 맞게 고심해서 골라낸 이름처럼 슬픈 느낌을 준다고 했어요. 그의 삶이 워낙 비극적인 사랑, 가난, 인정받지 못한 천재성 같은 요소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그런 느낌을 떨쳐내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보헤미안의 기질을 타고난 그에게 도발적인 눈빛으로 다가온 아름다운 18세 소녀 잔 에뷔테른과의 사랑 이야기는 마치 영화를 보는 것 같아요. 더구나 3년간의 결혼생활 뒤 서른다섯의 모딜리아니가 죽자 이틀 뒤 남편의 뒤를 이어 투신했던 잔의 뱃속에 아기가 있었다니···. 천국에서도 자신의 모델이 되어 달라던 남편의 부탁 때문이었을까요?
잘생긴 외모와 재치 있는 말솜씨로 순식간에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던 그였지만 예술가로서는 지독히도 운이 없었습니다. 당시 예술계에 큰 충격을 주던 야수파와 입체파에 밀려서 그는 빛을 보지 못했고, 결국 알코올과 여자를 오가는 방탕한 생활에 빠지고 말았으니까요. 궁핍한 생활고를 겪으면서, 무너져 내려가는 남편을 바라보는 안타까움과 절망감을 얼마나 견디기 힘들었을까요? 어린 잔은 몰아치는 괴로움 속에서도 이를 묵묵히 지켜보며 기다렸지요.
그래도 잔과 함께하던 3년간 모딜리아니는 술도 줄이며 건강하게 살려고 노력했고 인생 최대의 많은 작품들을 쏟아냈습니다. 그중에는 임신한 아내의 모습을 담은 신혼의 단꿈을 그려낸 것들도 있어 행복했던 한때의 모습을 짐작하게끔 합니다.
지금 보는 그림의 제목은 <집시 엄마와 아기>예요. 회색빛과 청록빛이 어우러진, 다소 어두운 그림이지요. 한 여자가 모자 씌운 아기를 푸른색 포대기 안에 감싸 손깍지를 끼우고 단단히 팔에 안고 있어요. 벽에 어른거리는 그림자와 가파르게 화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기우는 벽의 선, 꼭 다문 입술에 무표정한 얼굴을 한 여인이 화면 전체에 음울한 분위기를 주도합니다. 이 그림을 처음 봤을 때 저는 마치 너무 지쳐서 무감각하게 육아에 임하고 있는 제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 순간적으로 움찔했어요. 작가의 첫아기가 이전해 11월 29일에 태어난 걸 고려한다면, 1919년 그린 이 그림 속의 아이랑 비슷하지 않을까? 아마도 아내 잔과 딸을 모델로 그린 것이 아닐지 추측해 봅니다.
이 그림은 아기를 감싸는 담요를 칠하던 검은색 붓으로 바로 이어서 엄마의 치마에 명암을 넣고 벽 뒤에 그림자를 표현한 게 아닐까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짧은 시간에 단번에 그려낸 그림 같아요. (실제로 그는 모델을 써서 작업할 때는 한 번에 그림을 완성했다고 해요. 여러 차례 모델료를 지불할 형편이 못 되었기 때문이지요.) 모딜리아니는 여인의 모습이나 파리의 거리에서 보이는 가난한 사람들의 모습을 즐겨 그렸습니다. 달걀 모양의 긴 얼굴과 가늘고 긴 목을 한, 무표정한 그림 속 인물들은 그만의 독특한 분위기를 풍겨냅니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불투명하고 탁한 무채색의 색채 사용도 한몫했겠지만요. 그가 죽기 1년 전에 그린 이 그림을 가리켜서 미술사가들은 화가가 그의 짧은 생애 동안 이뤄낸 표현주의 스타일로 평가하기도 합니다. 표현주의는 내면의 감정 상태를 표현하기 위해서 형태와 색채 등을 있는 그대로가 아닌 왜곡과 과장을 통해 묘사하기 때문이에요.
이 그림에서도 주조를 이루는 회색의 사용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집시 엄마의 암울한 심정을 반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엄마와 아기 뒤편의 벽, 엄마가 목에 두른 스카프, 아기를 감싼 손끝이며 치마에 이르기까지 온통 푸른빛이 감도는 회색이네요. 오늘 당장 아이를 어디에 뉠지, 무엇을 먹일 수 있을지 온갖 생각들로 그녀의 머릿속은 복잡하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실제로 불안정한 모딜리아니를 바라보는 잔의 마음 역시 비슷했겠지요.) 그러고 보니 가끔은 그저 멍하니 얼른 하루가 가면 좋겠다고 하는 저 자신이 한없이 부끄럽게 느껴집니다. 그래도 머물 만한 곳이 있고 네 식구 알콩달콩 나누며 함께할 수 있으니 그림 속 여인의 모습에 비하면 얼마나 호사스러운 상황인가 싶어서요.
같은 해 그려진 여느 엄마의 모습은 달라도 참 다릅니다. 구체적인 집안 풍경이 그려진 그림의 배경과 빛깔부터 세심하게 마무리한 붓 터치에 이르기까지 모든 게 다. 이 그림을 들여다보면 엄마와 아이의 모습에서 한없는 안정감이 전해지네요. 이렇게 두 그림을 번갈아 보면서 생각합니다.
그래도 이 순간을 함께 할 누군가가 있어서···, '그대가 나에게, 내가 그대에게' 있어서 우린 참 의미 있고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그래서 힘들고 지치는 순간들을 또 살아낼 힘이 난다는 것을, 우리에게 주어진 매일의 삶이 참 감사하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을요.
모딜리아니(Amedel Clemente Modigliani, 1884-1920)
1884년 이탈리아 토스카나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명문가 출신으로 시 번역과 서평으로 생계를 유지할 정도로 높은 지성과 교양의 소유자였다고 해요. 남편의 사업 실패로 집안 사정이 어려웠지만, 어머니 에우제니아는 아들의 재능을 눈여겨보았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폐결핵과 폐렴 등 지속적으로 병에 걸려 학교를 그만두고 요양하던 모딜리아니는 베네치아와 피렌체 미술학교에서 공부한 이후 파리에 가서 활동했으나 평단의 주목을 받지 못했습니다. 1917년 14세 연하의 화가 지망생 잔 에뷔테른을 만나 1918년엔 딸을 낳았으나, 1920년 결핵성 뇌막염으로 요절하게 됩니다. 둘 사이를 계속 인정하지 않던 보수적인 부르주아 가정인 잔의 가족은 10년이 지난 뒤에야 잔을 모딜리아니 곁에 묻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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