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포포 매거진은 '엄마의 잠재력을 주목합니다'라는 슬로건으로 2019년에 창간한 매거진이다. 포포포 POPOPO는 connecting PeOple with POtential and POssibilities의 약자로 가능성, 그중에서도 엄마의 잠재력에 주목한다. 아직 조명되지 않은 누군가의 잠재력과 서사를 발굴하고 함께 연대해 나가는 여정을 지면으로 기록해 나가고 있다. 라이프인은 7개국 포포포 매거진 에디터의 글 연재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어, 나 지금 좀 행복한 것 같은데?
홀로 식탁에 앉아 거실 창을 바라보며 문득 생각했다. 두 팔에 닿는 식탁 상판의 시원하고 가슬가슬한 촉감이 좋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좋았고, '뽁뽁뽁뽁' 하고 들리는 보이지 않는 어느 새소리가 참 좋았다. 아무도 없는 집, 서서히 제빛을 찾아가기 시작하는 아침의 햇살이 반갑고 따스하다.
왜 행복하지?
아이가 등교한 직후, 식탁 위에는 미처 다 치우지 못한 아침 식사의 흔적이 가득했고, 세탁기를 돌려야 할 빨래와 함께해야만 하는 여러 일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왜인지 진짜 행복하다. 아니 비단 지금 이 순간뿐 아니라 어쩐지 요즘 대부분의 시간이 대체로 행복했다.
아, 나 요즘 정말 만나고 싶은 사람만 만나고 있구나.
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그 사람 일을 겪고 나서 네가 좀 단단해진 것 같아"
이사 집들이 차 지인들을 초대했던 날 아이의 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낸 한 언니가 가만히 내 얼굴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그 사람'이란, 한때 먹은 음식을 다 게워 내게 할 정도로 엄청난 스트레스를 주었던 한 학부모로, 이미 몇 해 전 사이가 틀어진 사람이자 내 멋대로 정리한 학부모 인간관계론의 큰 골자를 세우는 데 크게 기여한 존재이기도 하다.
1. 학부모와는 아주 천천히 신중하게 관계를 진전시킨다. 친하지 않아 어색하고 심지어 홀로 있게 되어도 괜찮다.
2. '안녕하세요', '고맙습니다', '죄송합니다' 기본 예의 3종 세트를 제대로 수행하지 않는 사람과는 거리를 둔다.
3. 항상 다른 학부모를 험담하는 사람은 아무리 나에게 잘해 주어도 거리를 둔다.
아이의 유치원 시절 운 좋게도 동네 아이 친구 엄마들과 마치 또 하나의 가족처럼 잘 지내다가 이사 후 초등학교 입학과 함께 인연을 맺게 된 첫 학부모가 바로 그 사람이었다. 관계가 진전될수록 가치관이 크게 다른 점이 피부로 느껴졌고, 작은 문제라도 생기면 벽에 대고 말하는 듯 말이 전혀 통하지 않았던 그 학부모를 끝내 최대한 예의 바른 태도로 떠나보내며 당시에는 정말 힘들었지만 덕분에 배운 점이 참 많았다.
지나고 보니 이 또한 고마운 추억이지만 솔직히 여전히 머리가 띵해질 정도로 매운 기억이다. 회사 생활을 하며 어지간히 센 사람은 다 겪어봤다 내심 자부했던 나였는데 알고 보니 철모르는 하룻강아지 같은 생각이었다. 그 사람 덕분에 사람 무서운 줄 제대로 알게 되었다.
몇 달 전 새로 이사 온 동네에서는 학부모들과 아주 천천히 희박한 관계를 이어가는 중이다. 친근히 다가오는 사람이 있으면 감사한 마음으로 만나지만 버선발로 달려가 관계의 그물에 뛰어드는 대신 향이 좋은 차를 우리는 마음가짐으로 인연의 실을 잣는다.
가족과의 시간을 제외하고 나면 대체로 혼자 지내며 때때로 학창 시절 친구들과 대학 동기들을 만나 편안하면서도 즐거운 시간을 갖는 요즘, 나의 행복은 관계의 질에 크게 좌우된다는 사실을 새삼 새로이 배워가는 중이다. 나쁜 인연을 이어가는 것보다는 차라리 약간 외로운 것이 훨씬 더 행복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