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포포 매거진은 '엄마의 잠재력을 주목합니다'라는 슬로건으로 2019년에 창간한 매거진이다. 포포포 POPOPO는 connecting PeOple with POtential and POssibilities의 약자로 가능성, 그중에서도 엄마의 잠재력에 주목한다. 아직 조명되지 않은 누군가의 잠재력과 서사를 발굴하고 함께 연대해 나가는 여정을 지면으로 기록해 나가고 있다. 라이프인은 7개국 포포포 매거진 에디터의 글 연재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1.
"타지에서 외부인으로 사는 건 너무 춥고 외로운 일인 거 같아"
프랑스에 정착한 첫겨울에 사귄 한국인 친구가 내게 이런 말을 했어. 그녀는 결혼하고 프랑스에 정착해 사는 전문직 여성이야. 나는 그녀의 말에 전혀 동의 할 수가 없었어! 왜냐하면 파리의 겨울은 서울의 겨울보다 따뜻했으며 (파리의 겨울 기온은 영하로 잘 내려가지 않는다. 내가 경량 패딩을 입고 겨울을 보냈을 정도) 외로움은 한국에서도 존재했고 어디를 가든 마찬가지일 거란 생각 때문이었지.
'춥고 외롭다니 내 이야기는 절대로 아니다'
며칠 뒤 그녀는 그동안 쌓은 경력을 모두 포기하고 다시 한국으로 가게 되었다고 소식을 전해 왔어.
가벼운 마음으로 프랑스로의 이주를 결심한 즐거운 파리지앵의 삶 또한 한 달이 채 되기 전에 끝나게 되었어. 이제 현실이 우리 집 대문을 두드리며 찾아왔기 때문이야.
나는 마치 아이가 된 것처럼 모든 문제를 남편에 의지해 처리했고 비자를 받기 위해 프랑스어 테스트와 인터뷰, 심지어 신체검사와 시민교육을 받으러 며칠을 여기저기 불려 다녀야 했어. 남편 역시 새로 발령받은 팀에 적응해야 했고 내가 아이를 낳을 병원을 급하게 알아봐야 했으며 내 사소한 일들마저 따라다니면서 나를 돌봐야만 했어. 마치 어린 딸이 하나 더 생긴 것처럼.
그때쯤에는 이미 낯선 곳에 대한 불안감, 의사소통의 부재로 안게 된 자격지심이라는 몹쓸 것들이 내 속에서 스멀스멀 고개를 쳐올리기 시작했을 즘이야. 나는 마치 어디에도 속하지 못해 골목 구석을 찾아 도망 다니는 길고양이가 된 것처럼 늘 신경을 곤두세우며 지냈어. 어느샌가 당당하던 내 모습은 점점 작아져 개미보다도 목소리가 작아질 지경에 이르렀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둘째가 태어나고 며칠 뒤에 코로나가 유럽을 뒤덮기 시작했어. 우리는 둘째 아이의 탄생을 축하할 새도 없이 모두 두 달 동안 집 밖으로 나가지 못했지. 정부에서 그 기간의 자가 격리를 지시했기 때문이야. 우리 집은 방 두 개짜리 파리 근교에 작은 아파트였는데 이곳이 두 살 난 남자아이와 막 태어난 갓난쟁이 딸, 두 어른이 갈 수 있는 공간의 전부였어.
타지에서 외부인으로 사는 건 너무 춥고 외로운 일이라는 말을 했던 그 친구의 말을 그제야 이해하게 되었어. 프랑스에서 만난 한국인들은 이렇게 말해. 이곳의 겨울은 소위 말해 '뼈가 시린 추위'의 계절이라고.
나는 꿈을 꾸기 시작했어. 내가 태어난 곳, 내가 어린 시절 어린 강아지와 구르며 뛰어놀던 작은 뒷산이 있는 곳, 매일 아침 늦잠 자는 나를 깨우던 우리 엄마가 있는 따뜻한 곳.
꿈에서 마저 그리운 내가 온 곳으로 돌아가는 꿈 말이야.
2.
온 곳으로 돌아가는 길과 돌아갈 수 없는 길
누구에게나 그리운 온 곳이 있을 거야. 누군가에게는 청춘일 것이고 또 누군가에게는 따뜻한 어머니의 자궁 속 태초의 장소였을 지도. 너의 가장 돌아가고 싶은 그리운 온 곳은 어디야? 나의 온 곳을 천천히 돌아보며 사랑하는 이와 함께 보낸 그곳이 가장 그리운 내 온 곳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어. 뼈 시리게 추운 이 그리움은 내가 한국으로 돌아간다고 없어지는 게 아니었던 거야. 내가 그리워하는 온 곳은 과거 속 사랑하는 이들이 있는 곳.
이제 그곳으로 돌아가는 길은 추억으로나마 아름답게 그 기억을 간직하는 것일 뿐, 다시는 그때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지.
현재는 언젠가 과거가 되고 지금 내가 있는 이곳이 미래의 나에게는 그리운 온 곳이 될 거야. 시간은 흘러가 버리기에 더 소중한 게 아닐까? 앞으로 나의 온 곳을 평범하지만 평화로운 행복으로 차곡차곡 쌓아 만들어 보려고 해. 할머니가 된 내가 꿈에서 마저 그리워할 만한 곳으로.
이제부터 나의 온 곳은 그곳이 어디든 나와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야.
3.
오 년 만에 내린 첫눈.
눈은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야만 생기는 기상 현상이야. 눈이 오는 날이면 유독 날씨가 따뜻해진 듯한 느낌을 받아 본 적 있어? 잠시 바쁜 일상에서 한 발짝 물러나 눈 속에 가만히 서 있다 보면 이상하리만치 따뜻한 기분이 드는데 그것은 내가 살면서 느낀 감각과 감정 중 가장 모순적이지.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분명 눈에는 사람을 따뜻하게 하는 힘이 있어.
파리의 겨울은 앞서 말했듯이 영하로 잘 내려가지 않아. 눈 오는 거리의 풍경보다는 비 오는 풍경이 더 익숙하지. 그런 이곳에 얼마 전, 이례적인 폭설이 내렸어.
올해의 첫눈이자 내가 파리에 온 지 오 년 만에 만난 마음이 따뜻해지는 눈. 파리에 살면서 앞으로 언제 다시 보게 될지 모르는 귀한 눈이야. 눈 속에 조용히 서 있으니 나는 정말 행복한 사람이구나 싶더라. 그리 특별한 것 없는 평범한 눈이자 너무도 귀한 눈이 마치 나 자신처럼 느껴졌거든. 나는 정말 평범하지만, 우리 엄마에게는 하나뿐인 귀한 딸이자 아이들에게는 하나뿐인 귀한 엄마니까.
누군가에게 넌 오늘의 눈처럼 귀하고 세상의 전부인 소중한 사람이라고
그러니 너 자신을 더 사랑하고 아껴주라고 올해의 첫눈이 가르쳐 주었어.
나는 이제 이곳에서의 겨울이 춥고 외롭지만은 않아. 오늘은 내가 살면서 두고두고 그리워할 나의 온 곳이 될 거라는 것을 이제는 알기 때문이야.
드디어 오 년 만에 나에게도 첫눈이 내렸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