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포포 매거진은 '엄마의 잠재력을 주목합니다'라는 슬로건으로 2019년에 창간한 매거진이다. 포포포 POPOPO는 connecting PeOple with POtential and POssibilities의 약자로 가능성, 그중에서도 엄마의 잠재력에 주목한다. 아직 조명되지 않은 누군가의 잠재력과 서사를 발굴하고 함께 연대해 나가는 여정을 지면으로 기록해 나가고 있다. 라이프인은 7개국 포포포 매거진 에디터의 글 연재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에스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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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학교 가는 길은 호두나무와 상수리나무로 우거져있다. 차를 타고 가는 숲길은 봄에는 연둣빛 잎을 보여주고, 여름에는 푸른 숲으로 하늘을 가린다. 가을엔 점점 옅어지는 낙엽의 색. 겨울엔 눈꽃이 핀 눈 터널을 지나는 것 같다. 계절은 돌고 돌아 눈부시게 아름다운 초록빛을 띠던 나무들이 점점 색이 바래져 가고, 가을의 노란빛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그렇다. 드디어 오고야 말았다. 빛바랜 가을빛이 들기 시작하고 쓸쓸한 마음이 연기 피어오르듯 스멀스멀 올라왔다. 목덜미로 뼈 시린 습한 추위가 느껴진다. 하루아침에 꿈꾸다 깬 것처럼 가을이 갑자기 왔다. 아, 여름이 갔구나. 집은 썰렁한 냉기가 돌고, 한 발 내딛으면 차가운 바닥에 슬리퍼를 절로 찾게 되는 계절. 오래된 집은 바닥 난방이 되지 않아 가을과 겨울 사이에 계절이 제일 춥게 느껴진다.

난방을 틀기엔 이르고, 틀지 않기엔 춥다. 그러니 아이들 입에서도 "엄마 추워요" 소리가 절로 나온다. 몸도 마음도 웅크려지는 그 계절이다. 프라하는 상수리나무로 사계절이 이루어져 있다. 요즘은 여름이 조금 길어진 것 같기도 하지만, 겨울의 존재감에 비할 순 없다. 무엇보다 겨울의 존재감이 확실하다 보니, 가을부터 겨울 준비를 하게 된다. 프라하의 겨울에는 습기 가득한 찬바람이 살을 엘듯하고 변화무쌍한 날씨에 대부분의 날이 어둑어둑하다. 눈부신 여름이 끝나고 도저히 가눌 수 없는 우울을 보여주는 진짜 프라하의 본모습이다. 춥고, 어두워서 내력이 강하지 않으면 버틸 수 없는 외력을 보여준다. 날씨가 사람에게 끼치는 영향을 엄청나구나 절로 느껴진다.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한다.

정원에는 상수리나무로 떨어지고, 사과나무에서 사과가 떨어졌다. 길에는 도토리가 나뒹군다. 슈퍼에는 땅콩, 호두가 나오고 무화과가 나왔다. 쌀쌀하고 쓸쓸한 건 체코 사람들도 매 마찬가지인지 레스토랑에는 polevku:뽈레브꾸(스프)가 오늘의 메뉴에 나온다. 어쩐지 한국인은 이런 때 팔팔 끓는 뚝배기의 국밥 정도는 먹어야 하는 건 아닌가 싶다. 아무리 청승을 떨어도 내 안의 아저씨는 국밥을 부르짖는다. 원초적으로 속을 데우는 불씨 같은 국밥이 먹고 싶다. 그런데 프라하에서 국밥을 먹으려면 원정을 떠나야 하니, 아이들과 호박축제에 가서 호박을 파고, 아쉬운 대로 호박 수프를 사 먹었다. 여기 호박수프는 한국식 호박죽 같은 느낌이 아니라 양파와 호박을 볶고 파프리카 가루와 향신료를 넣은 약간 자극적인 맛이다. 그래서 파슬리나, 호박 씨앗 토핑과 잘 어울리고 빵을 찍어 먹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든다. 그래도 새알과 팥이 들어간 한국식 호박죽이 먹고 싶다. 부드럽고 달콤한 한국식 호박죽. 축축하고 추운 날씨에 의자에 걸터앉아 호박 수프를 떠먹으니 몸과 마음이 조금 녹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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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프라하에는 어린이 행사들이 많이 열린다. 가을에는 어린이가 계절을 체험할 수 있고 온 가족이 함께할 수 있는 행사가 주를 이룬다. 동네에서 가까운 행사에 가면 약속하지 않아도 학교 친구들을 우연히 만나서 놀 수 있다. 첫째는 같은 반 친구를 만나서 같이 호박 파기를 했고, 둘째는 유치원에서 친한 친구를 우연히 만났다. 여기서 여자아이들은 축제나 생일 파티가 되면 페이스 페인팅을 꼭 하고 싶어 하는데, 우리 집 둘째도 당연히 하고 싶다 졸라대어서 긴 줄을 서 있다가, 본인이 원했던 연둣빛 페이스 페인팅을 하게 되었다. 같은 반 친구가 페이스 페인팅 받는 것까지 야무지게 기다리고 둘이 손잡고 거니는 것을 보면서. 추워질수록 사람 온기로 버텨야 하는구나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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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에 열리는 축제는 호박축제 말고도 사과주스를 만드는 축제가 있다. 사실 축제라기보단 동네 행사에 가깝다. 공공 과수원에서 사과를 직접 따고, 전통방식으로 사과주스를 만드는 작은 축제다. 사과 따는 도구로 사과를 따고, 사과를 썰고 즙을 짠다. 체코 사람들은 이런 활동을 하면서 계절을 보내는 것 같다. 사과즙을 내는 과정을 가족들이 모두 함께한다. 나는 사과를 따본 적도 그걸로 사과주스를 만들어 본 적도 없는지라 체코인 엄마·아빠가 이 과정을 능숙하게 해내는 것이 신기해서 넋 놓고 지켜보았다. 여기 엄마·아빠들은 자기가 어렸을 때 가족들과 해본 것을 자기 아이들과 또 해보는 게 아닐까? 자기가 아는 행복을 아이에게 알려주는 것처럼 보였다. 저런 걸 유산이라 부르는 거겠지? 우리는 잃고 잊어버린 쓸모없고 행복한 것. 나무통에 잘게 자른 사과를 넣고 뚝딱뚝딱 조립하더니 맷돌처럼 빙글빙글 돌리면 나무통의 구멍으로 사과즙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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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즙을 낼 때 아이들을 우르르 달려 나와 주위를 빙 둘러 사과즙이 나오는 모습을 구경하고 또 작은 손으로 떨어진 사과를 줍고 한입 베어 물기도 한다. 엄마는 사과를 잘게 자르고, 아빠는 잘게 자른 사과를 통에 넣고 즙을 낸다. 사과즙을 내고 남은 사과 찌꺼기를 수레에 담고 정리하는 과정까지 모두 가족이 함께한다. 우리는 엄두가 나지 않아서 다른 가족들이 작업에 몰두하는 것을 구경만 하다가 사과를 몇 개 따서 바구니에 넣어선 달랑달랑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참 부럽다. 사과즙을 낼 때 나는 사과향기와 사과즙을 짜고 남은 사과 찌꺼기의 질감을 아이들은 평생 기억할 것 같다. 그렇게 한 병, 두 병 가득 짜서 가방에 넣던 가족들. 이 모든 것들이 따스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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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유럽의 겨울은 갑자기 온다. 그래서 가을 준비가 곧 겨울 준비다. 두꺼운 옷을 꺼내두고, 아이들의 털모자와 털장갑을 세탁해 두고, 겨울 부츠를 꺼내둔다. 레인 슈트를 꺼내두고, 미리 세탁해 둔다. 가을의 옷장에는 사계절 옷이 다 걸려있다. 아이들은 이맘때 여름옷 위에 긴소매 옷을 덧입고 겉옷까지 입고 등교를 하고 일상생활 중에는 반소매로 생활한다. 아침에는 춥고 낮에는 조금 기온이 올라갔다가 해가 지면 또 춥다. 실내와 외부의 기온 차가 큰 만큼 얇은 옷을 덧입는 식으로 간절기를 보낸다. 이 같은 날씨에는 비도 자주 오지만, 쌀쌀한 날씨에 아이들 야외활동을 위해서 레인 슈트와 레인부츠가 사용된다. 그리고 겨울이 오면 윈터슈트(스키복)과 내피가 있는 방수 장화와 털장갑과 털모자가 필요하다. 집은 한국처럼 바닥난방이 되어있질 않아서 포근한 느낌이 하나도 없어 이렇게 쌀쌀해지는 날씨가 되면 털양말과 집에서 입을 외투(?)를 미리 챙겨놔야 한다.

나는 두툼한 초록빛을 띠던 된 발목까지 내려오는 가운을 입는데, 이 정도는 입어야 추위를 이겨내고 집안일을 할 수 있다. 아이들은 내복과 털조끼와 털양말을 입고 지낸다. 이러다 보니 샤워가 큰 저항이 되고 안으로 몸도 마음도 말려든다. 주인아저씨와 라디에이터를 점검하고 난방텐트를 치고, 온수 매트, 전기 매트를 깔고 솜이불을 꺼내놓으면 준비 완료. 더 추워지기 전에 해야 할 일이 많다. 틈나면 체코의 숲을 거닐고, 아이들과 공원에 가는데, 산책하며 체코 숲 곳곳에 난 버섯을 살펴보고 먹을 수 있는지 검색도 해보면서 웃으며 보냈다. 그러다 산책하다 만난 체코 할머니께 버섯을 먹어도 되는지 물어보다 나이를 여쭈었더니 80살이라고, 젊음의 비결이 뭐냐 물으니 "맥주랑 와인!" 이라며 호탕하게 웃으신다. 날씨가 쌀쌀해질수록 따뜻함과 유머를 잊지 않는 체코 사람들. 함께 터진 웃음 속에서 입김이 뿜어져 나온다. 사람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하고 비장하게 겨울 준비하던 마음에 맥이 풀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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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위와 계절에 지지 않도록 부지런히 용기와 행복을 채워둬야 한다. 나와 아이들의 빛이 이 계절에 압도되지 않도록, 아주 꺼지지 않도록 작은 촛불처럼 지켜내리라 다짐한다. 해외에서 주말부부를 하는 이상, 여기서 처음부터 끝까지 책임질 사람이 나뿐이라는 것. 그런 나를 믿고 있는 아이들. 고생했다, 잘하고 있다고 말해주고 싶다. 그럴수록 아이들을 껴안고 사랑의 말을 건넨다. 추위에 지지 않도록, 회색 하늘에 짓눌리지 않도록 말이다. 쉽게 지치지 않도록 나를 응원하는 작은 방법들이 있는데, 잠들기 전에 설거지를 깨끗이 해놓는 것이다.

더 열심히 뒷사람의 문을 잡아주고, 아침 인사를 하고 눈이 마주치면 미소를 짓는다. "어떻게 지내?"라고 묻고 짧은 근황을 나눈다. 되도록 자주 아이들 친구를 초대하고 주방에서 따뜻한 팬케이크를 만들어 내어준다. 힘이 생기면 점심을 초대하기도 하고 마음의 빗장을 의도적으로 반 틈 열어둔다. 어디에 살더라도, 행복은 누구와 유대관계를 맺느냐에 달려있다. 그 안에서 나를 지키는 방법을 배워간다. 가족과 친구, 사람과 사람을 통해 감정이 생기고, 인생의 희로애락을 느끼며 내면의 따뜻함을 유지한다. 나에게는 남편과 아이들과 친구들. 이방인으로서 이곳에서 사람들을 만나면서 결합하지 못하는 틈 사이로 바람이 슝- 불면 처음 느껴보는 외딴 감정에 마음 가눌 길이 없었지만, 우리는 서로 지탱하고 뿌리내릴 수 있다고 확신한다. 헛된 꿈처럼 사라지는 가을에는 진짜만이 남으니까 말이다.

여름의 가면을 벗고 한껏 우울을 발산하는 프라하처럼. 가을에는 해가 7시에 뜨고 6시에 진다. 해가 점점 짧아져 밤이 길어지고, 일교차에 아이들도 쉬이 피로해하고 잠이 많아진다. 찬바람이 불어도 나가서 뛰노는 생활은 그대로니, 에너지가 더 빨리 닳는가 보다. 해가 더 짧아져 5시부터 캄캄해지는 때가 오면, 혹독하고 긴 겨울을 통과하는 중일 거다. 긴 밤, 고독이 약속된 시간에 우리가 이 시간을 버티는 방법은 밥을 짓고 따뜻한 국물을 먹고 서로 보듬고 안는 방법밖에는 없는 것 같다. 봄에는 부활절을 지내고 여름엔 수영을, 가을엔 호박수프를 만들고, 겨울엔 벽난로 앞에서 봄여름 가을의 추억을 뜯어먹으며 아이들과 낙엽 속에 숨은 무당벌레처럼 붙어 지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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