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협동조합학회가 지난 14일, 한양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에서 개최한 추계학술대회에서는 기본사회·주민자치와 협동조합의 역할을 다룬 1·2부 발표에 이어, 3부에서 협동조합 생태계의 구체적 문제들을 심층적으로 다룬 개별 연구 발표가 이어졌다. 사회적금융, 신협, 노동자협동조합, 소비자생활협동조합 등 서로 다른 분야의 연구가 소개됐지만, 발표들은 공통적으로 '개별 조직의 혁신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라는 문제의식을 공유했다. 협동조합의 지속 가능성을 위해서는 자금조달, 법제도, 지배구조, 조직 간 협력, 지역 기반의 공공성 등 생태계 전반을 다시 설계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3부는 변시연·손석조·전형수·손재현·황정환 연구자의 발표로 구성됐고, 각 발표마다 토론자가 의견을 더했다. 아래는 이날 발표된 다섯 개 연구의 핵심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첫 번째 발표자인 변시연(한양대 박사과정) 연구자는 '한국 사회적금융의 문제점과 발전 방향에 관한 이해관계자의 인식 분석' 연구를 통해 한국 사회적금융 체계의 구조적 문제를 입체적으로 드러냈다. 이 연구에서는 수요자와 중개기관의 인식 차이가 뚜렷하게 부각됐다. 수요자는 안정적인 자금 접근성, 지역 기반 금융, 공동체적 가치 실현을 주요 필요로 꼽았지만, 중개기관은 투자자 규범, 자금 운용 규제, 조달 구조와 같은 외부 압력에 더 크게 영향을 받는다고 응답했다. 변 연구자는 이러한 차이가 단순한 이해관계 대립이 아니라 한국 사회적금융이 '투자자-중개기관-수요자'라는 삼각 구조 안에서 서로 다른 압력을 받고 있는 현실을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연구는 사회적금융이 공급량 확대 중심의 정책에서 벗어나 구조 자체의 긴장을 완화하는 방향으로 전환되어야 한다는 결론으로 이어졌다.
토론에 나선 장지연 한국사회가치연대기금 사무총장은 "한국 사회적금융이 앞으로 수요자 관점을 중심으로 재구성되어야 한다"는 의견을 덧붙였다.
손석조 신협중앙회 본부장은 프랑스의 사회적금융협동조합 크레디 코페라티프(CC)와 윤리 금융기관 라 네프(La Nef)를 비교하며 한국 신협이 직면한 정체성 재정립 과제를 설명했다. 발표는 두 조직의 규모, 금융 규제 환경, 지배구조, 사회적 가치 실현 방식 등을 단계적으로 비교하면서 CC가 대규모 금융그룹(BPCE) 내에서 범용 금융기관으로 발전한 이유, 라 네프가 대출 목록 공개 등 '투명성'을 핵심 가치로 삼아 독립 윤리은행으로 성장한 배경을 분석했다. 손 본부장은 한국 신협 역시 사회적금융으로 확장하려면 상품 개선 차원을 넘어 "조직의 정체성·투명성·참여 구조 전반을 다시 점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상진 한국사회혁신금융 대표는 토론에서 "협동조합 금융기관이 사회적 가치를 금융적 도구로 실현하려면 시민 참여형 금융, 사회적투자금융협동조합 설립과 같은 구조적 실험이 필요하다"고 평가했다.
전형수 전 학회장은 'Karl Marx의 협동조합론에 대한 개념-이론적 고찰'을 발표하며, 노동자협동조합을 바라본 마르크스의 시각을 다시 설명했다. 마르크스는 노동자협동조합을 자본주의의 대안 체제라기보다 착취 구조를 넘어설 수 있는 '과도기적 실천 도구'로 인식했으며, 협동조합이 소수·고립될 경우 변질과 붕괴 위험이 크다고 경고했다. 전 전 학회장은 이 점을 현대 맥락에 연결해, 노동자협동조합이 안정적으로 작동하려면 개별 협동조합의 역량을 넘어 협동조합은행, 공공기금, 법제도, 교육 등 생태계 기반이 함께 구축되어야 한다는 결론을 제시했다.
토론자인 김활신 성공회대 연구교수는 몬드라곤 협동조합 그룹 사례를 언급하며 "노동자협동조합의 지속 가능성은 협동조합 간 연대와 금융·거버넌스 생태계 속에서 확보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우진교통 등 국내 전환 기업 사례도 소개하며, 노동자협동조합이 기업 민주화와 노동권 개선이라는 사회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는 점을 짚었다.
손재현 (한신대 박사과정)연구자는 이탈리아·프랑스·캐나다·퀘벡의 노동자 인수·전환 제도와 한국의 현실을 비교하며, 한국에서 노동자협동조합 전환이 정착되지 못하는 구조적 문제를 분석했다. 연구에 따르면 한국은 우선매수권 제도, 전환지원센터, 공공기금 등 노동자 인수·전환의 핵심 기반이 사실상 부재해 초기 인수 자본을 마련하기 어렵고, 법적 절차도 지원 장치 없이 노동자에게 과도한 부담을 지우는 구조다. 손재현 연구자는 노동자 인수·전환을 "노동자가 주체가 되는 기업 민주화의 경로"로 설명하며, 금융·법제·교육·지원체계를 아우르는 통합적 기반 마련을 강조했다.
배호영(중소기업중앙회 연구위원)은 토론에서 일본 노동자협동조합법, 해외 정책 사례를 언급하며, 노동자협동조합이 기업 승계와 지역 공공서비스에서 중요한 대안이 될 수 있다고 평가했다.
마지막 발표자인 황정환 (성공회대 박사과정)연구자는 '조직생태학 관점으로 분석한 한국 생협의 위기와 과제' 연구를 소개했다. 황 연구자는 최근 생협이 겪고 있는 조합원 감소, 생산 기반 약화, 온라인 시장 경쟁, 조직 정체성 약화 등의 현상을 조직생태학의 여섯 가지 개념을 활용해 분석했다. 발표는 생협의 위기를 개별 조직의 전략 실패가 아니라 '조직군 전체의 적합도 하락'으로 설명했다. 친환경 생산 기반 약화, 플랫폼 기업의 시장 진입, 운동성과 사업성의 균형 문제 등 생협을 둘러싼 환경 변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지만, 생협 내부의 혁신과 거버넌스 변화가 이에 적시에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진단이었다.
윤인정 서울시립대 박사과정 연구자는 토론에서 매출 구조 개방성, 운동성과 사업성의 균형, 외부 자원 확보 전략 등 현실적 대안 마련이 필요하다고 평가했다. 해외 사례처럼 조합원 중심 구조만 고수할 것이 아니라 일정 부분 개방적 판매 전략 등을 실험적으로 도입해볼 필요가 있다는 의견도 제시했다.
발표자들은 서로 다른 분야의 연구에서 '협동조합의 위기는 개별 조직의 문제를 넘어 생태계의 위기'라는 분석을 공유했다. 사회적금융·신협·노동자협동조합·생협 모두 자금조달·제도·거버넌스·조직 정체성·생산기반 등 구조적 요소에서 공통된 취약성을 드러내고 있으며, 이를 해결하려면 중앙‧지역‧현장 간 역할 재조정과 협동조합 간 연대 강화가 필수적이라는 결론이 자연스럽게 도출됐다.
이날 학회에서는 협동조합이 단순한 조직 형태를 넘어 사회경제 전환의 행위자로 자리 잡기 위해 어떤 생태계를 만들어야 하는지에 대한 깊이 있는 문제 제기를 남겼다. 협동조합의 미래를 위해 필요한 '구조적 전환' 논의는 이제 더욱 본격적인 단계로 접어들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