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이 사회문제 해결의 투자자가 되는 날, '2025 사회적가치투자대회'가 열린다. 희망제작소는 문제를 발견하고 해법을 설계하는 이들을 '소셜디자이너'라 부르며, 이 무대를 통해 그들의 도전을 시민과 함께 응원한다. 라이프인과 희망제작소는 대회에 참여하는 15명의 소셜디자이너를 만나, 각자의 실험이 품은 질문과 변화를 기록한다. '소셜디자IN'은 세상을 바꾸는 설계자들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 모두의 사회적 상상력을 깨우는 여정이다. [편집자 주]

 

대전 유성구 어은동의 '사회실험공간 나선지대' 문을 열면, 이곳이 왜 '나선지대'인지 금세 이해된다. 제로웨이스트샵, 생태책방, 메이커 스페이스가 샵인샵으로 모여 있고, 한쪽에서는 플라스틱을 분쇄하는 소리가 들린다. 누군가는 고장 난 전자제품을 고치고, 다른 누군가는 손에 쥔 플라스틱 병뚜껑이 곧 제품의 재료가 된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닫는다.

나선지대는 '재작소'의 네 번째 공간으로, 이곳을 설계하고 이끄는 사람은 재작소 조미림 대표다. 그녀는 "만드는 경험이 복원되면 사람과 자원, 지역의 관계가 다시 연결된다"는 믿음으로 지난 5년간 대전에서 조용한 변화를 쌓아왔다.

 

조 대표가 처음 문제를 정의한 지점은 '관계의 단절'이었다. 생산과 소비가 완전히 분리되면서 사람들은 물건의 가치와 과정을 잃어버렸고, 이는 무감각한 소비문화와 자원 낭비, 환경오염으로 이어졌다. '끊어진 관계를 다시 잇기 위해, 사람들이 직접 원료를 수집하고 분류하고 만들고 고쳐보는 경험을 설계한다'는 의도대로, 재작소의 핵심 미션은 수동적 소비자를 '의식 있는 생산자이자 현명한 소비자'로 전환시키는 것에 있다. 이 미션을 구현하는 공간이 바로 '사회실험공간 나선지대'다.

 

나선지대의 활동은 크게 세 흐름으로 이어진다. 첫째, '자원순환 소재 정류장'이다. 시민들이 소형 플라스틱이나 고장 난 제품을 직접 들고 와 함께 분류하고 가공하는 캠페인을 상시 운영한다. 여기서 만들어진 재생 원료는 이후 메이커 활동의 기반이 된다. 둘째, '자가 제작·수리 프로그램'이다. 업사이클링 워크숍과 생활 수리 프로그램 '수선스런사람들'을 정기적으로 여며, 누구나 재료를 활용해 제품을 만들거나 고쳐보는 경험을 쌓는다. 셋째, 편집숍 '은영상점' 운영이다. 시민들이 만든 결과물을 온·오프라인에서 판매해 활동의 지속성을 확보하고, 참여자에게는 창작물에 대한 시장의 반응을 직접 확인할 기회를 제공한다.

 

▲ 나선지대에서 프로그램 참가자들이 플라스틱 병뚜껑을 분류하고 있다. ⓒ희망제작소
▲ 나선지대에서 프로그램 참가자들이 플라스틱 병뚜껑을 분류하고 있다. ⓒ희망제작소

 

이 구조는 단순한 체험 프로그램을 넘어, 개인의 삶에 '만드는 힘'을 회복시키는 실험이다. 조 대표는 인터뷰에서 "디자인이든 목공이든 수리든, 스스로 제조 능력을 익히는 경험은 '나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효능감을 만든다"고 말한다. 능동성·문제 해결력·자기 신뢰를 다시 쌓는 과정이 곧 재작소가 말하는 메이커 정신이다. 재작소가 활동하는 대전 유성구를 '팹시티(FabCity)'로 만들고 싶다는 바람도 같은 맥락이다. 지역에서 필요한 것을 지역에서 생산하고, 감당 가능한 만큼 쓰고, 다시 순환시키는 도시. 조 대표는 "대전시의 자급자족률이 50% 이상 된다고 상상해 보라"며 "도시에도 자생력이 생긴다"고 말한다.

 

재작소가 만들어낸 지역적·환경적 성과도 구체적이다. 2025년 기준 약 80회의 워크숍과 커뮤니티 프로그램에 600명이 참여해 지역의 사회적 자본이 확장됐다. 플라스틱 약 3,000kg을 수거·자원화했고, 폐자원을 활용한 15종의 신규 상품을 판매해 참여자 10명 내외가 경제적 자립 기반을 마련했다. 연간 2,000여 명이 방문하며 지역 상권 활성화에도 기여했다. 특히 시민이 직접 원료 수집–분류–제작까지 이어가는 '소셜 사이클 플랫폼' 방식은 대전에서 안정적으로 작동하는 순환 생태계를 만드는 기반이 되고 있다.

ⓒ희망제작소
ⓒ희망제작소

 

그 시작점은 만들기 활동 자체가 아니었다. 조 대표는 오랜 시간 장애인 의수 제작 교육, 국민해결2018 프로젝트 등에 참여하며 "당사자가 직접 만들기를 통해 더 나은 결과물을 만든다"는 장면을 체감했다. 그녀는 "우리가 가진 능력으로 일상의 문제, 동네의 문제, 사회의 문제까지 해결해 보자"는 방향을 세우며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안정적인 커뮤니티 기반이 비교적 부족하다 느꼈던 대전에서, 메이커 활동을 중심으로 한 커뮤니티를 직접 만들었다.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머물고 교류하는 방식은 결국 샵인샵 형태의 지금의 나선지대로 자리 잡았다.

 

▲조미림 대표. ⓒ희망제작소
▲조미림 대표. ⓒ희망제작소

조 대표의 지역성은 강하다. 그는 "대전은 너무 많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도시"라고 말하며 "중도의 삶과 잘 맞는 곳"이라고 표현한다. 재작소 동료들 역시 대부분 대전에 오래 뿌리내린 사람들이다. 이들은 유성구에서 청년마을 '여기랑'을 운영하고, 청년 자립 프로그램을 설계하며, 게스트하우스 '유유자립' 등 다양한 실험을 이어왔다. 배리어프리 도시를 위한 경사로 제작·보급, 리빙랩 기반의 접근성 향상 프로젝트 등도 지역을 바꾸는 실천으로 연결됐다.

그녀가 재작소의 일을 '실험'이라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지역에서 새로운 일을 시도하는 것은 늘 불확실하고 때로는 비가 새는 공간을 옮겨 다니는 과정이 반복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 과정을 '삶을 꾸리는 도시를 위한 실험'으로 받아들인다. "지역에서는 버티기가 중요하다"는 동네 책방 사장님의 말에 깊이 공감하며, "우둔해 보일 수 있지만 쉽게 포기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이유다. 3~4년 전 활동했던 프로젝트를 보고 이제야 참여하고 싶다는 시민이 찾아온 장면은, 시간이 걸려도 변화가 결국 도달한다는 확신을 준다.

 

재작소는 앞으로 로봇팔과 3D 프린팅을 접목한 순환 제작 자동화 기술을 고도화해 더 많은 자원순환 실험을 이어갈 계획이다. 지역 기반 모델을 표준화해 타 지역 확산을 준비하고, 온라인 교육과 커뮤니티 플랫폼을 통해 '만드는 경험'을 전국으로 확장하려는 구상도 담고 있다. 궁극적으로는 생산과 소비의 경계가 흐려지고, 시민이 일상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는 도시. 조미림 대표는 그 실현 가능성을 지금의 나선지대에서 매일 확인한다. 

 

"관계가 다시 이어진 순간의 변화는 생각보다 훨씬 강합니다." 이 말로 나선지대의 오늘을 설명한다. 그리고 이는 곧 대전에서 시작된 조용한 실험이 어떻게 도시를 바꾸고 있는지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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