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이 사회문제 해결의 투자자가 되는 날, '2025 사회적가치투자대회'가 열린다. 희망제작소는 문제를 발견하고 해법을 설계하는 이들을 '소셜디자이너'라 부르며, 이 무대를 통해 그들의 도전을 시민과 함께 응원한다. 라이프인과 희망제작소는 대회에 참여하는 15명의 소셜디자이너를 만나, 각자의 실험이 품은 질문과 변화를 기록한다. '소셜디자IN'은 세상을 바꾸는 설계자들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 모두의 사회적 상상력을 깨우는 여정이다. [편집자 주]
눈 대신 코로 색을 고른다. 작은 팔레트 위에 올려진 크레용 형태의 물감을 하나씩 맡아본 시각장애인이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캔버스 위에 선을 긋는다. 라벤더 향은 보라색, 레몬 향은 노란색, 숲 향은 초록색이다. 후각으로 색을 기억하고, 머릿속에만 있던 이미지를 손끝으로 꺼내는 이 순간을 가능하게 만든 도구가 세계 최초 향기 나는 물감 '비프터 페인트'다. "눈도 안 보이는데 미술이 왜 필요하냐"는 질문 앞에서, (주)어나더데이는 이 물감으로 "누구나 예술을 할 수 있다"는 답을 내놓고 있다.
이 실험이 이루어지는 곳은 부산 북구 금곡동이다. 도시 외곽의 오래된 아파트 단지, 노인·장애인 복지관과 아동센터가 이어지는 동네 한가운데 어나더데이 사무실이 있다. 이곳에서 제품 개발, 테스트, 생산, 포장, 출하까지 거의 모든 과정이 이루어진다. 김지은 대표 혼자 시작한 회사는 지금 14명의 동료와 함께하는 7년 차 조직이 됐다. 장애 유형과 기능, 연령과 이해 정도에 따라 달라지는 40여 종의 문화예술 도구와 키트를 개발했고, 지난해 기준 누적 2천여 개 기관에 제공했다. 재구매율은 70% 이상. "도대체 뭘 위해 이렇게 열심히 할까?"라는 감탄 섞인 질문이 절로 나오는 숫자다.
어나더데이의 출발점은 사업 아이템이 아니라 '돌봄이 일상이던 가족의 경험'이다. 김 대표는 금곡동에서 중증 지적장애가 있는 고모, 할머니와 함께 자랐다. 자연스럽게 지역 복지시설과 연결된 환경에서, 그녀는 장애인이 어떤 프로그램을 받고 어떤 결과물을 들고 집에 오는지 가까이서 지켜봤다. 어느 날 고모가 복지관 프로그램에서 만든 음식을 들고 온 장면이 결정적이었다. 즐겁게 자랑하는 표정과 달리, 아주 얇은 플라스틱 통 안에는 모양이 망가진 김밥이 뒤섞여 있었다. "가족 입장에서 이 결과물을 받아들었을 때 어떤 기분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상자의 정서와 특성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채, 형식만 존재하는 프로그램의 한계가 선명하게 보였다.
김 대표는 그것을 특정 강사나 기관의 문제가 아니라 '콘텐츠 자체가 부족한 구조'에서 찾았다. 장애인·노년층·취약계층의 신체·정서적 특성을 전제로 설계된 문화예술 콘텐츠가 절대적으로 부족했고, 그 공백은 현장에서 그대로 드러났다. 반면, 김 대표는 고모와 함께 살아온 시간 속에서 어떤 배려와 설계가 필요한지 몸으로 알고 있었다. "내가 가진 감각과 경험을 바탕으로 직접 교육을 만들고 제공해보자." 그렇게 금곡동에서 작은 카페를 운영하며 아이들과 빵을 만들고, 아동센터에서 재능기부를 이어오던 삶은 '어나더데이'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
시각장애인을 위한 향기 나는 물감도 이런 문제의식에서 시작됐다. 사회적기업으로 전환한 초기, 어나더데이는 '앉은 자리에서 바로 예술 활동을 할 수 있는 키트'를 만들어 판매했지만 당시에는 비대면 교육 수요가 많지 않았다. 그러던 중 시각장애인 기관과 협업하면서 "어떤 프로그램을 원하나요?"라는 설문을 진행했고, 그 결과 '그림 그리기' 욕구가 높다는 점이 드러났다. "시각이 아닌 다른 감각을 통해 미술 활동을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은 그날 이후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어느 날 샴푸로 머리를 감다 눈을 감은 채 향을 맡는 순간, 직감했다. "향기로 색을 구분할 수 있다면, 시각장애인도 그림을 그릴 수 있지 않을까?" 처음에는 "어딘가에 이미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향기 나는 물감은 없었다. 공장에 찾아가 생산 가능 여부를 물었지만, "기존 방식과 다르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초기 비용도 현실적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결국 "목 마른 사람이 우물을 판다"는 심정으로 안료, 향 배합, 점도, 형태까지 하나씩 직접 실험하기 시작했다. 일본·미국·영국의 책을 찾아 읽고, 수백·수천 번의 실패를 견딘 끝에 3년 만에 지금의 크레용 형태 비프터 페인트가 완성됐다.
어나더데이가 금곡동에서 활동을 이어가는 이유는 명확하다. "가장 필요가 많은 지역이기 때문"이다. 부산 북구는 배드타운의 성격이 강하고 소득 수준도 그리 높지 않다. 노인·장애인 복지관과 아동센터가 많지만, 문화예술 프로그램은 늘 부족하다. 김 대표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이 동네에서 작은 카페를 열어 첫 사업을 시작했고, 동네 아이들이 아동센터에 다니는 모습을 보며 자연스럽게 연결됐다. 아이들에게 빵을 만들어주고, 함께 음료를 만들며 진행한 재능기부는 장기간 이어졌고, 그 과정에서 '내가 자란 환경과 비슷한 아이들'의 얼굴이 겹쳐졌다. 나중에야 예전에 자신을 담당했던 복지사가 현재 기관의 관장으로 다시 만난 인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과거의 시간과 현재의 일이 자연스럽게 이어진 것이다.
현장에서 부딪히며 얻은 경험은 어나더데이의 교육과 도구 설계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같은 '편마비' 진단을 받아도 사람마다 가능한 동작과 힘의 정도가 다르듯, 장애 유형은 이름만으로 규정할 수 없다. 어나더데이의 콘텐츠는 이런 차이를 전제로 설계된다. 김 대표는 "아무리 준비를 많이 해도 결국 현장에 가서 직접 보고 조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대부분의 프로그램에 직접 참여해 참여자의 반응을 살피고, 다음 제품과 커리큘럼에 반영한다.
공공·행정과의 협력은 아직 구조적인 한계가 크다. 김 대표는 "실험적인 일을 유연하게 추진하기엔 행정과의 조율이 느리고 까다로운 편"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지자체를 거치기보다 복지기관과 직접 연결해 대상자를 모집하고 프로그램을 실행하는 방식을 택해왔다. 사회적기업을 향한 시선 역시 여전히 "얼마나 싸게 해줄 수 있느냐", "무료로 제공이 가능하냐"에 머무를 때가 많다. 그럼에도 그녀는 참여 문턱을 낮추기 위해 필요할 때는 무상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그만큼 외부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공모사업과 지원제도를 적극적으로 찾는다. 예술경영지원센터 등과 협력해 시제품 제작, 프로그램 운영을 위한 재원을 마련하고, 국내에서 쌓은 사례를 바탕으로 일본 도쿄에서는 치매 어르신·시각장애인을 대상으로 무상 프로그램과 전시도 진행했다.
어나더데이가 만드는 임팩트는 숫자로도, 장면으로도 확인된다. 어나더데이의 콘텐츠를 사용한 누적 거래 기관은 약 2천여 곳, 재구매율은 70%가 넘는다. 취약계층의 97%가 여가 시간을 'TV·유튜브 시청'으로 보낸다는 현실에서, 장애인·다문화 가정·고령자에게 특화된 미술체험 키트와 교육은 단순 취미를 넘어 '삶의 활력소' 역할을 한다. 김 대표에게 가장 선명하게 남은 장면도 이 안에 있다. "국민학교 때 시력을 잃고, 평생 다시는 그림을 못 그릴 줄 알았다"며, 수업이 끝난 뒤 그의 손을 꼭 잡고 눈물을 흘리던 시각장애인 어르신. 그 손의 온도는 지금도 그를 움직이는 이유다.
그녀는 어나더데이를 "특정 그룹만을 위한 교육 회사"가 아니라, "모두를 위한 문화예술을 만들되, 구조적으로 소외되기 쉬운 이들에게 먼저 다가가는 회사"라고 정의한다. 그래서 어나더데이가 지향하는 미래 역시 분명하다. 장애인을 위한 문화예술학교를 세우는 것. 미술, 음악, 무용 등 다양한 예술 영역에서 장애인이 자신의 재능을 발견하고, 일상적으로 예술을 경험할 수 있는 학교다. 지금의 제품 개발, 강사 양성, 국내외 프로그램 운영은 모두 이 꿈을 향한 '기반 쌓기' 과정이다.
김 대표는 아이가 태어났을 때 스스로에게 약속했다. "네가 엄마 나이쯤 되었을 때, 왜 어나더데이 같은 일을 했는지 묻지 않는 세상을 만들겠다"라고. '취약계층·장애인을 위한 문화예술'이라는 말이 특별하게 들리지 않는 사회, 장애인의 예술 활동이 당연한 일상으로 자리 잡는 사회를 앞당기기 위해 오늘도 김지은 대표는 새로운 키트와 수업을 준비한다. 향기를 따라 그려지는 한 장의 그림처럼, 어나더데이가 만들어가는 작은 가능성들이 금곡동을 넘어 또 다른 도시, 또 다른 삶으로 번져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