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국제시장'의 한 장면.
▲ 영화 '국제시장'의 한 장면.

"그 과정에서 네가 이해할 수 없었던 한 가지 일은, 입관을 마친 뒤 약식으로 치르는 짧은 추도식에서 유족들이 애국가를 부른다는 것이었다. 관 위에 태극기를 반듯이 펴고 친친 끈으로 묶어놓는 것도 이상했다. 군인들이 죽인 사람들에게 왜 애국가를 불러주는 걸까. 왜 태극기로 관을 감싸는 걸까. 마치 나라가 그들을 죽인 게 아니라는 듯이." (한강 <소년이 온다> 중에서)

영화 <국제시장>에는 덕수(황정민)와 영자(김윤진)가 부부싸움을 하다가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매일 저녁 전국민이 국기 하강식에 동참해야 했던 때가 있었다. 영화관에서도 상영 전에 애국가가 나오면 관객들은 일동 기립해야 했다. 그런 관행은 문민 정권이 들어서면서 사라졌다. 하지만 프로야구 경기에서 심포지엄에 이르기까지 많은 행사장에서는 지금도 국민의례를 행한다. 지극히 형식적이라고 모두 느끼지만, 폐지를 감히 실행하거나 주장하지 못한다. '반국가적인' 세력으로 낙인찍히면서 정치적인 공격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한 가지 단순하고 기본적인 질문을 던져본다. 태극기는 무엇을 상징하는가? 한국인은 그것을 보면서 어떤 것을 연상하는가? 한강 작가는 질문한다. 국가가 국민을 학살했는데 그 추도식에서 어떻게 애국가를 부르고 국기로 시신을 감쌀 수 있는가? 이 상황을 설명하려면 그 복잡한 코드를 독해해야 한다. 

 우선 태극기가 만들어져서 사용되어온 역사를 살펴보자. 태극기는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에서 최초로 사용되었으며, 이듬해에 대한제국의 정식 국기로 제안되어 고종에 의해 공포되었다. 제정된 시기를 기준으로 하면 세계에서 상위 15% 안에 들어가는 것으로, 꽤 일찍 만들어진 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범주에 들어오는 국기들은 근대국가가 건국되거나 왕조에서 공화국으로 체제가 전환되는 과정에서 제작된 것이다. 

그런데 그 후에 우여곡절이 시작된다. 1910년 국권을 빠앗은 일제는 태극기의 사용을 금지했다. 하지만 1919년 3.1 독립만세운동에서 태극기가 거대한 물결을 이루었다. 1893년 태극기가 제정된 이후 20년 가까운 시간 동안 일반인들을 그것을 별로 접하지 못했고, 식민지가 된 이후에는 아예 자취를 감추다시피 했다. 3.1 운동이 시작될 무렵에도 그것은 친숙한 상징이 아니었다. 그래서 시위에 참가한 군중은 처음 몇 일 동안은 붉은 수건을 흔들거나 머리에 두르거나 완장처럼 팔에 감고 행진했다. 그러다가 일주일쯤 지나서 태극기가 등장하여 순식간에 전국에 퍼져나갔다. 그리고 같은 해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면서 태극기는 명실상부한 국기로서 자리 잡아 광복 이전까지 한국 독립운동의 상징으로 기능하였다. 

대한제국이라는 입헌군주제의 상징으로 만들어진 태극기는 식민지 시기에 접어들어 숨어 있다가 3.1운동을 통해 민주공화국의 상징으로 거듭난 셈이다. 대한민국의 탄생 경로는 세계사적으로 매우 특이하다고 할 수 있다. 20세기의 신생 독립 국가들은 대부분 식민지배에서 해방된 이후에 민족 국가(nation state)를 수립했다. 그 이전에는 여러 민족집단 (ethnic group)으로 살아오다가 제국에 의해 강제로 통합되어 식민지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에 비해 우리는 오래전부터 고도의 중앙집권 국가를 이루고 있다가 통째로 식민화되었고, 식민지 시기에 민족 국가의 주체성을 자각하여 임시정부를 세우고 독립운동을 벌이다가 해방을 맞이하였다. 우리는 이런 과정을 당연하게 여기지만, 세계사적으로 볼 때 매우 이례적이다.

문제는 해방 이후의 역사다. 1945년 광복과 함께 태극기는 국기로서의 기능을 회복하였고,  대한민국 제1공화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공식적인 위상을 갖게 되었다. 북한에서도 광복 후 1948년 7월까지 태극기를 공식적으로 사용했지만, 태극기의 문양이 미신적이라 유물론적 관점에 어긋난다면서 '인공기(人共旗)'를 새로 제정하였다, 그리고 태극기는 남한의 상징으로 쓰인다는 이유로 사용이 금지되었고, 자동적으로 태극기는 남한만의 국기가 되었다. 말하자면 식민 통치에도 살아남았을 뿐 아니라 새로운 시대의 표상으로 업그레이드된 태극기가 분단으로 인해 이념과 체제의 굴레에 갇혀버린 셈이다. 

이제 태극기 안에 담겨 있는 코드를 분해해보자. 그것은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을 거치면서 새롭게 형성된 민족 정체성의 그릇이었다. 따라서 거기에는 <반일>이라는 정서가 담길 수밖에 없다. 그런데 1948년 수립된 이승만 정부는 대통령이 독립운동가였음에도 친일파들과 손을 잡았고 반민특위도 무력을 동원해 해산시켰다. 미국이 남한을 동북아의 공산화를 저지하는 보루로 삼으면서 일제 강점기의 경찰이나 관료들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이제 중요한 것은 민족이 아니라 이데올로기가 되었고, <반공>이 한국 우파의 정체성으로 자리 잡았다. 다른 나라들의 경우 우파의 존립 근거는 민족이다. 반면에 한국의 우파에게 민족은 불편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다. 그 정체성은 북한과 공유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주 거칠게 말하자면, 한국의 보수세력은 태극기에 담겨 있던 <반일>의 색채를 <반공>으로 대체하려 해왔다. 12.3 계엄의 명분으로 ‘반국가 세력’의 척결을 내세웠는데, 만일 '반민족 세력'이라고 했다면? 전혀 다른 메시지가 되었을 것이다. '국가'와 '민족' 모두 'nation'의 번역어지만, 우리에게는 사뭇 다른 뉘앙스로 다가온다. 언제부터인가 반국가 세력과 반민족 세력은 전혀 다를 뿐 아니라, 아예 정반대에 있는 집단처럼 여겨졌다.

태극기 집회에 성조기가 등장하는 현상을 이러한 맥락에서 풀이할 수 있을 듯하다. 그들은 태극기에 담긴 <반일>의 코드를 <반공>으로 덮어 씌우고 싶어한다. 성조기는 태극기에 담긴 3.1정신과 민족의 기의를 소거하는 기표로 작동한다. 그것은 ‘자유 진영’에 소속되어 있고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아이콘으로 활용되는 것이다. 식민지 권력과 미군정의 사생아로 탄생한 한국의 극우는 미국을 영적 수호자처럼 떠받들면서 민족 정체성을 애써 축소시키고 낡은 냉전 논리를 확대하려 한다. 20세기 한국사의 음울한 잔재다.

다행히 태극기는 '태극기 부대'의 전유물이 아니다. 이른바 진보 진영의 집회에서도 태극기가 등장한다. 최근에는 한쪽 모서리가 불에 탄 '진관사 태극기'를 뱃지로 공유한다. 거기에 담긴 코드는 <반일>이나 <반공>이 아니다. 1919년 임시정부가 지향했던 <민주공화국>이다. 임시정부 수립의 바탕이 된 3.1정신이다. 선언문에서는 독립의 의의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인류가 가진 양심의 발로에 뿌리박은 세계 개조의 큰 기회와 시운에 맞추어 함께 나아가기 위하여 이 문제를 내세워 일으킴이니, 이는 하늘의 지시이며 시대의 큰 추세이며, 전 인류 공동 생존권의 정당한 발동이기에, 천하의 어떤 힘이라도 이를 막고 억누르지 못할 것이다." '인류가 가진 양심'은 역사의 결정적 장면들에서 의연히 발로되었고, 광주 민주화 운동은 또 하나의 독립 선언이었다. 그 희생자들의 시신을 감쌌던 태극기는 인간 존엄의 표상이었다. 
 

▲ '진관사 태극기'. 2009년 서울시 은평구 진관사의 부속건물인 칠성각을 해체복원하는 과정에서 내부 불단 안쪽 벽체에서 발견된 태극기로, 3.1만세운동이 일어나고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된 1919년 즈음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일장기 위에 태극과 4괘의 형상을 먹으로 덧칠해 항일(抗日) 의지를 극대화한 점이 특징이다.
▲ '진관사 태극기'. 2009년 서울시 은평구 진관사의 부속건물인 칠성각을 해체·복원하는 과정에서 내부 불단 안쪽 벽체에서 발견된 태극기로, 3.1만세운동이 일어나고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된 1919년 즈음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일장기 위에 태극과 4괘의 형상을 먹으로 덧칠해 항일(抗日) 의지를 극대화한 점이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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