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개봉한 영화 〈바다 호랑이〉는 세월호 참사 후 바다에 뛰어들어 실종자들의 유해를 수습한 민간 잠수사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고故 김관홍 잠수사를 모델로 설정된 주인공 나경수는 침몰한 선체 내부에서 시신을 찾아 끌어 앉고 올라오는 일을 무리하게 한 결과 심각한 잠수병으로 고통받는다. 게다가 희생당한 학생들이 등장하는 악몽에 시달려 매일 밤 수면제와 술에 기댄다. 그러던 어느 날 어이없는 소식을 접한다. 함께 구조 활동을 하던 잠수사 한 명이 목숨을 잃은 사고가 난 적이 있는데, 법원이 민간 잠수사 대표였던 류창대에게 그 책임을 전가하면서 과실 치사 혐의로 기소했다는 것이다. 긴급 사태에 뒷짐 지고 있던 국가를 대신해 바다에 몸을 던졌건만 상을 주기는커녕 범죄자로 취급하는 상황에 환멸과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나경수는 류창대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증인석에 선다. 그 자리에서 그는 구조 과정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낱낱이 끄집어낼 수밖에 없었다. 그 처절한 장면을 이 영화에서는 연극 무대 같은 세트장에서 푸른 조명과 배우의 몸짓만으로 재현한다.
이 작품의 백미는 〈당신은 결코 혼자 걷지 않으리You'll Never Walk Alone〉라는 제목의 주제가다. "폭풍우가 몰아쳐도, 황금빛 하늘이 보이지 않아도, 희망을 품고 걸어가라. 당신은 결코 혼자가 아니다"라는 가사가 담긴 이 노래는 1945년 미국 뮤지컬 〈회전목마〉에 삽입되었다가 1960년대 영국 프리미어리그 축구팀 리버풀 FC의 응원가로 채택되었다. 그리고 1989년 힐즈버러 경기장에서 일어난 압사 사고의 희생자들을 기릴 때 추모곡으로 불리면서 널리 알려졌다. 영화 속에서 주인공의 변호사는 리버풀의 열성 팬으로, 사고의 진상이 은폐되다가 유가족들의 끈질긴 노력으로 27년 만에 경찰의 과실이 인정된 사실을 나경수에게 알려준다. 이 곡은 잠수사들 사이의 끈끈한 유대와 그들을 위해 온전히 헌신하는 변호사의 마음을 상징한다. 또, 이 노래를 즐겨 부르며 뮤지컬 배우를 꿈꾸던 한 여학생이 세월호에 갇혀 희생되었는데, 그 어머니와 주인공을 연결하는 모티프가 되기도 한다.
"당신은 결코 혼자가 아니다" 이 한마디가 절실한 사람들이 있다. 살다 보면 누구나 뜻밖의 사고나 중한 질병 같은 불행한 일을 당할 수 있는데, 그런 고통의 늪에 빠지면 다른 사람들과 단절되기 쉽다. 비통함과 우울 가득한 마음의 감옥에 갇혀버린다. 세월호나 이태원 참사나 가습기 살균제 사건 같은 사회적 재난의 경우 책임을 회피하는 국가 권력과 대기업 앞에서 무력감에 시달려야 한다. 게다가 유가족을 비난하고 조롱하는 목소리까지 들려오면 속절없이 무너지고 인간에 대한 환멸로 치가 떨릴 것이다. 누구도 자신의 절규에 귀 기울여주지 않는 듯한 상황, 아무리 외쳐도 싸늘한 무관심의 벽에 막혀버리는 세상에서 고통은 가중될 수밖에 없다.
전통사회에는 이웃의 고통을 나누고 위로하는 문화적 장치들이 있었다. 주로 종교가 그 역할을 담당했는데, 굿이 대표적이다. 굿의 핵심 덕목 가운데 하나가 해원상생解冤相生이다. 가슴에 맺힌 응어리를 풀고 갈등을 치유하면서 삶의 애환을 나누는 것이다. 거기에는 종교적 요소와 놀이적 요소가 함께 들어 있어서 모여든 사람들이 하나로 어우러질 수 있었다. 말하자면 치유와 사회 통합을 동시에 꾀하는 마을 축제였다. 한을 달래고 흥을 돋우는 가운데 이웃이 하나가 되고, 차별받고 억눌린 사람들의 설움도 해소되고 승화된다. 무속의 미덕은 평화로운 세상을 향한 열린 유대, 고통을 딛고 일어서 더 큰 존재로 나아가는 신명이다. 제주에서는 4.3의 국가 폭력 피해에 대해서도 '무교'(한국의 무속신앙을 타 종교와 대등한 종교 현상으로 인식할 때 사용하는 명칭)가 손을 내밀었다.
언제부터인가 굿은 그러한 정신이 쇠퇴하고 개인의 복福과 행운만 갈구하는 푸닥거리로 변질되었다. 무당들도 클라이언트의 고통에 온전히 동참하기보다는 외형적 엑스터시를 흉내 내면서 이득을 취하고 혹세무민하려는 이들이 늘어났다. 천지인의 조화와 회복을 꾀하지 않고 사적 욕망을 추구하는 폐쇄 회로에 갇힐 때 무속은 음흉한 미신과 사교邪敎가 된다. 거기에 더해 윤석열 정권에서는 권력에 대한 무한 집착이 결합되어 공공 영역을 망가뜨리는 데 가담했다. 아무개 법사들이 국정을 좌지우지하고 대통령 후보가 손바닥에 '王'자를 새기고 토론회에 나왔던 장면은 주술에 휘둘린 정치의 자화상이었다.
종교로서의 굿을 회복해야 한다. 핵심은 공동체와 치유다. 고립무원의 지경에 놓여 있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는 지금, '곁이 되어줄' 이웃들을 곳곳에 불러모아야 한다. 억울하게 고통받는 이들이 몸부림칠 때, 함께 울어주는 자리를 넓게 펼쳐야 한다. 다행히 그런 위로와 치유의 소중한 전승은 면면히 이어져왔다. 예를 들어, 1987년 이한열 열사 영결식에서 서울대학교 이애주 교수가 살풀이춤을 추며 그의 죽음을 애도한 바 있다. 그리고 세월호 참사 당시 전남 진도에서는 전통 굿인 진도씻김굿을 통해 304명 희생자의 넋을 달래며 유족과 국민의 슬픔을 나누었고, 이후 여러 장소에서 진혼鎭魂과 위로의 의례가 되풀이되었다.
"More than Sad – 단순히 슬픈 것 이상인 상태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간" 교육부의 산하 기관인 학생건강지원센터에서 내놓은 애도 교육 매뉴얼의 제목이다. 청소년기에 뜻밖의 사별을 겪을 때, 그 비통함을 다루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그런데 그동안 학교는 책임을 방기했을 뿐 아니라 애도의 기회마저 박탈하기도 했다. 나의 친구는 고등학교 3학년 때 급우가 자살했는데 담임 교사가 입시 준비에 전념할 때라면서 그 사건을 언급조차 하지 못하도록 단속했다고 한다. 졸업 후에는 동창생들과 관계가 모두 끊어졌다고 한다. 흘려보내지 못한 슬픔이 응어리가 되어 마음의 벽이 된 것이 아닐까. 그렇듯 억눌린 감정이 정화되지 않은 채 떠돌다보면 세상을 파괴하는 에너지로 결집되기도 한다. 애도의 인지상정을 거세시키는 것은 그래서 위험하다.
굿 마당이 곳곳에서 펼쳐져야 한다. 물론 전통적인 의례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 연민compassion이 일어나고 공감이 꽃피우는 자리는 다양한 문화 형식으로 실현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마음의 움직임이다. 삶과 죽음의 간극을 넘나드는 영혼의 날개다. 영화 〈바다 호랑이〉의 원작 소설인 김탁환 작가의 《거짓말이다》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딱 한 번, 제가 던진 질문들이 맹골수도 그 바다를 부표처럼 둥둥 떠다니는 꿈을 꿨습니다. 엄청 많았습니다. 제 꿈에 찾아든 꽃들은 모두 질문으로 만든 꽃이었습니다. 사람은 죽어도 질문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질문이 사라지지 않는 한, 그 사람은 완전히 죽은 것이 아닐 겁니다."
이태원 참사 3주기가 돌아온다. 케데헌 덕분에 한국인의 자부심이 올라가고 서울 곳곳에 수많은 관광객이 붐비지만, 이 도시에서 어이없게 생을 마감한 넋들은 아직도 제대로 위로받지 못하고 있다. 유가족들의 비통함과 억울함은 풀리지 않았다. 사악한 힘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는 혼문(魂紋)을 누가 드리워줄 것인가. 사소한 존재를 원대한 우주로 연결하는 데몬 헌트릭스의 노래는 어디에서 들려오는가. 타인의 고통에 새겨진 물음표를 가슴에 품으면서 우리는 보다 높은 세계로 나아갈 수 있다. 상처와 아픔을 돌보는 몸짓에 동참하면서 우리는 스스로와도 화해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