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더 베스트 오브 에너미즈(The Best of Enemies)'의 한 장면. 
▲ 영화 '더 베스트 오브 에너미즈(The Best of Enemies)'의 한 장면. 

영화 <더 베스트 오브 에너미즈(The Best of Enemies), 2019>가 있다(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다). 1970년대 초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에서 있었던 실화를 담은 작품이다. 백인과 흑인이 공존하는 마을이 배경인데, 어느 날 흑인 초등학교에 화재가 발생해서 아이들을 근처의 백인 학교로 장기간 전학시켜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에 백인 학교 부모들은 일제히 반대에 나선다. 흑인 커뮤니티 대표인 시민권 운동가 앤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의회에 호소하지만 번번이 묵살당한다. 의회는 백인들로 구성되어 있고, 지역사회는 KKK단원들에게 장악되어 있다. 그 우두머리인 엘리스는 발달 장애 아들을 키우면서 주유소를 운영하고 있는데, 흑인들을 혐오하면서 어떤 교류도 거부한다. 생계가 어려우면서도 흑인들에게는 기름을 팔지 않을 정도로 백인 우월주의에 젖어 있는 인물이다. 

흑인들이 법원에 해결을 요구하자, 판사는 공청회를 통해 합의하도록 조치한다. 회의를 진행할 소통 전문가를 외부에서 초빙되고, 앤과 엘리스가 공동 의장으로 임명된다. 그렇게 해서 샤레뜨(charrette)라는 2주간의 공청회(community summit)를 열어 주민들이 모두 참가하게 된다. 처음에 양측은 서로에게 깊은 반감을 드러내며 대화를 거부하지만, 조정된 포맷에 맞춰 회의가 진행된다. 인상적인 장면이 하나 있다. 중간에 참가자들이 함께 식사해야 하는 시간이 있는데, 진행자는 2인용 테이블에 동석할 사람을 미리 지정한다. 반드시 백인과 흑인이 한 커플이 되도록 하고, 식사 중에는 회의의 이슈를 절대로 언급하지 않도록 지침을 준다.

공청회에서 진행자가 최선을 다해 양쪽의 의견을 조정하고 합의점을 찾아보려고 애쓰지만, 간극은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다. 그러던 어느 날 엘리스의 아들이 입원한 병원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아서 가족들이 고통받고 있다는 것을 앤이 알게 된다. 이에 앤은 병원에 찾아가 자신의 인맥을 동원해 문제를 해결해준다. 엘리스는 자신이 미워하던 흑인이 베풀어 준 호의에 큰 충격을 받고 마음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회의장 입구에 KKK 단원들이 만든 기념품이 파괴될 위험에 처한 모습을 앤이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었고, 엘리스가 그 장면을 우연히 목격하면서 폭력 대신 이해를 촉구하는 그녀의 진심을 느끼게 된다. 엘리스는 앤을 '적'이 아닌 '사람'으로 바라보기 시작한다.

2주간의 공청회가 끝나고 이제 최종 표결 시간이 되었다. 흑백 동수의 8명 대의원들이 공개 투표를 하게 되어 있는데, 여기에서 마지막 투표자인 엘리스가 예상을 뒤엎고 "증오는 이제 끝났다"는 취지의 연설과 함께 학교 통합 안건에 찬성표를 던진다. 그리고 KKK 회원카드까지 불에 태워버린다. 충격과 배신감에 사로잡힌 백인 이웃들은 그를 따돌리고 주유소 불매 운동에 들어갈 뿐 아니라 폭발물로 위협을 가하기도 한다. 손님이 없어서 생계가 막막해지고 언제 또 다시 테러를 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지내던 어느 날 앤이 엘리스를 찾아온다. 그리고 조금 후에 자동차들이 긴 행렬을 이뤄 주유소로 다가온다. 흑인들이 기름을 넣으러 들어오는 것이다. 영화는 그렇게 끝나는데, 마지막 부분에 앤과 엘리스의 실제 모습과 인터뷰가 나온다. 그들은 전국을 돌며 우정과 통합을 증언했다고 한다. 

영화의 제목을 다시 본다. 더 베스트 오브 에너미즈. 적대 관계에 있는 사람들일지라도 '최선'을 자각하고 표출하면 새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다. 거기에는 누구나 올바른 것에 대한 갈망과 지향을 지니고 있는 전제가 깔려 있다. 물론 정말로 '누구나'는 아닐 수 있다. 하지만 일단 그렇게 믿는 것이 좋다. 그런데 그 '최선'은 어떻게 드러나는가. 무엇이 그것을 일깨워 바깥으로 나오도록 하는가. 영화에서는 우선 서로를 경청할 수 있도록 세밀하게 설계된 공간, 대화가 이뤄지는 엄격한 룰과 그것을 이끌어주는 진행자가 있었다. 그 덕분에 당사자들이 감정의 악순환에 덜 휩쓸릴 수 있었다. '적(Enemy)'이었던 사람들이 대화 파트너로 변모하는 계기는 거기에서 생겨났다.

그러나 그것은 필요조건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충분조건은 무엇인가. 상대방과 자신이 인간으로서 공통점을 확인하면서 생겨나는 유대감이다. 앤과 엘리스는 상대방의 개인적 고통(아들의 병원 사건, 학교의 화재로 인한 교육의 차질)을 목격하며 변화가 시작되었다. 서로의 이야기를 듣고 공감 요소를 발견하는 과정에서 증오가 줄어들고 신뢰가 싹트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모두 상대방을 대화 상대가 아니라 적(敵)으로만 여겼지만, 회의가 거듭되면서 미세한 교류가 빌드업되어 결국 극적인 반전을 이끌어냈다.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고 꾸준하게 대화를 해나가다 보면 뜻밖의 전환점을 만날 수 있다. 전방위적으로 갈등과 대립이 중첩되고 걸핏하면 양극으로 치닫는 현대 사회에서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그러한 상호 인간화(humanization)의 장(場)이다. 
 

ⓒPixabay
ⓒPixabay

광장도 그러한 공간이 될 수 있을까. 미디어 아티스트 엄지효 씨의 고백에서 그 실마리를 찾아본다. 

 "자신과 의견이 다른 사람들과 접촉 면적을 줄인 것이 윤석열 세력이 커지게 했다. '우리는 안 맞는다는 생각, 나와 다른 소리를 하면 아예 안 보는 태도보다 이야기를 섞어 보고 인간 대 인간으로서 서로에게 보여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광장으로 향했다." 엄지효

(엄지효 저『이토록 평범한 내가 광장의 빛을 만들 때까지』中)  


국정농단이나 내란 같은 중대한 사태를 맞아 모이는 광장에서는 어쩔 수 없이 비슷한 생각을 지닌 사람들끼리 뭉치게 된다. 하지만 무엇에 반대하고 규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가려는 소망으로 만나는 광장이 열린다면 보다 다채로운 목소리들이 교차될 수 있을 것이다. 

'다양한 존재를 공정하게 포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민주주의의 본질이라고 지난번 헌법재판소의 탄핵 결정문은 밝혀주었다. 사랑의 수용력(캐파)을 키우면서 '우리'의 범위를 넓히고 싶다. 물론 내란 사범들은 그 죄를 철저하게 수사하고 엄중하게 처벌해야 한다. 하지만 계엄을 찬성하고 탄핵에 반대한 사람들을 모두 적대시해서는 안된다. 지지 정당이 다르지만 친구가 될 수 있고 공동체도 이룰 수 있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 그것을 창조하는 씨앗을 우리 안에 심고 가꿔가야 한다. 겉으로 드러나는 차이들을 사소하게 만들 수 있는 원대한 꿈, 어이없는 공격과 비난마저 품을 수 있는 너그러움을 키워가야 한다.
 

그는 원을 그려 나를 밖으로 밀어냈다.

나에게 온갖 비난을 퍼부으면서

그러나 나에게는

사랑과 극복할 수 있는 지혜가 있었다.

나는 더 큰 원을 그려 그를 안으로 초대했다.

 

(에드윈 마크햄 '원')

저작권자 © 라이프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