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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성형 AI를 넘어, 산업 대전환의 시작점

오늘날 우리는 100년에 한 번 찾아올 법한 기술 문명 전환의 출발점에 서 있다. AI는 단순한 기술을 넘어 산업 생태계 전반을 재편하는 핵심 수단이자 매개체로 부상하고 있다. AI 산업은 데이터센터, 에너지, 반도체라는 강력한 인프라를 기반으로 발전하며, 생성형 AI 모델을 출발점으로 멀티모달 모델, 단계적 추론, 에이전트 AI, 그리고 피지컬 AI로 진화하고 있다. 이러한 기술들은 제조, 헬스케어, 금융, 에너지, 물류, 국방 등 실물경제 전반에 걸쳐 파급 효과를 확산시키고 있다.

특히 주목할 점은 AI가 단순한 자동화를 넘어서, 소비자 데이터를 반영한 맞춤형 생산 시스템으로까지 진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조선업에 AI 기반 디지털 트윈 기술이 접목되면, 설계부터 생산, 물류에 이르는 전 과정의 시간과 비용을 획기적으로 단축할 수 있다. 이는 기존 산업 구조에서 핵심 역량이 '사람' 중심에서 '데이터'와 '알고리즘' 중심으로 이동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구조적 변화 속에서 AI 기술의 중심축은 빠르게 이동하고 있다. 생성형 AI 시장은 불과 2년 반 만에 미국과 중국 중심의 경쟁 구도로 정리되었으며, 이제는 추론형 고성능 칩, 에이전트 AI, 피지컬 AI로 기술의 무게중심이 옮겨가고 있다. 엔비디아, 화웨이, 샤오미, 샤오펑 등 글로벌 기술기업들이 추론형 칩 설계에 본격적으로 착수했으며, 이 분야의 주도권은 향후 1~2년 내 판가름 날 것으로 보인다. 동시에 AI 비서 역할을 하는 에이전트 AI와, 자율주행차, 물류로봇, 휴머노이드 등 피지컬 AI 기술은 점점 더 인간의 일상과 산업 현장 속으로 깊숙이 들어오고 있다.

AI는 더 이상 기술자만의 문제가 아니다. 기술을 넘어, 그것이 어떤 산업에 어떻게 접목될 수 있는지, 그리고 어떤 국가 전략과 연계될 수 있는지를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지금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AI는 단순한 소프트웨어 진화가 아니라, 산업 지형과 경제 패권을 근본적으로 재편할 수 있는 ‘구조적 대전환’의 축이다. 따라서 AI의 방향성과 파급력을 깊이 이해하고, 산업 전략과 국가 전략 차원에서 대응하는 통합적 전략이 절실하다.

한국의 기회: 응용 AI 중심의 산업 전략

AI 패권 경쟁에서 한국은 생성형 AI 모델 개발이나 추론형 고성능 칩 설계와 같은 기반기술 분야에서는 후발주자에 머물러 있다. 하지만 한국이 진정한 경쟁력을 발휘할 수 있는 영역은 이러한 기술을 실제 산업에 적용하는 '응용(Applied) AI' 분야이다. 이미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제조 역량과 산업 인프라를 갖춘 조선, 방위산업, 전력 인프라, 헬스케어, 물류 등의 분야가 그 무대다.

대표적으로 조선 산업은 AI 기술과 디지털 트윈 기술을 결합함으로써 설계, 생산, 물류까지 전 공정의 효율화를 이룰 수 있다. 공기(工期) 단축과 생산성 향상을 통해 수익성을 높이는 것은 물론, 글로벌 발주 경쟁에서 속도와 품질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있게 된다. 특히 군함, 잠수함 등 해양 방산 분야에서는 AI 기반 시뮬레이션과 자동화를 통해 고도화된 무기체계의 생산과 운용이 가능해져, 세계 방위시장에서의 입지를 더욱 강화할 수 있다.

또한 HBM(High Bandwidth Memory)은 현재 데이터센터 인프라의 핵심 요소로, AI 연산을 위한 GPU와 짝을 이루어 AI 생태계 전반을 뒷받침하는 기반 기술로 자리잡고 있다. 한국은 이 부문에서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를 중심으로 세계 시장 점유율 1위를 지키고 있으며, 향후 PIM(Processing-in-Memory), PNM(Processing-near-Memory) 등 차세대 메모리 기술로의 진화 가능성 또한 높다. 이처럼 한국은 일부 핵심 분야에서 여전히 세계를 선도하고 있으며, 이러한 기술적 강점을 바탕으로 AI 응용 산업을 확대해나갈 충분한 토대를 갖추고 있다.

결국 한국이 AI 시대에 생존하고 번영하기 위해서는, 기반기술 경쟁이 아니라 응용기술을 중심으로 기존 산업을 고도화하고, 기술을 통해 실질적인 산업성과를 만들어내는 전략이 필요하다. 특히 우리가 강점을 가진 전통 산업과 AI를 효과적으로 융합할 수 있다면, 글로벌 경쟁에서 독자적인 생태계와 수출 기반을 구축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

AI가 로봇, 자율주행, 스마트 제조 등 물리적 영역으로 진입하면서, 핵심 경쟁력은 다시 '제조업 생태계'로 수렴되고 있다. 이점에서 이 점에서 중국은 효과적인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국가에서 보조금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여 다수 기업을 만들고, 내수 시장에서 치열하게 경쟁시킨다. 그 과정에서 혁신이 일어나고, 도태되는 기업은 구조조정되거나 흡수 합병되면서 독과점체계를 형성한다. 이를 통해 대량생산체계를 갖추고 압도적인 원가경쟁력을 토대로 글로벌 시장에 진출하여 빠르게 시장을 점유한다. 태양광, 2차전지, 전기차 시장이 그러했으며, 이제는 로봇까지 장악해가고 있다. 

한국은 철강, 석유화학, 2차전지 등에서 이미 중국 제조 생태계에 밀리고 있다. 그러나 방위산업과 조선 분야는 아직도 선두권에 있으며, AI 융합을 통해 이 격차를 더욱 벌릴 수 있는 전략적 기회가 있다.
 

▲ AI컴퓨팅 인프라 확충을 통한 국가 AI역량 강화 방안. ⓒ국가인공지능위원회
▲ AI컴퓨팅 인프라 확충을 통한 국가 AI역량 강화 방안. ⓒ국가인공지능위원회

한국이 집중해야 할 4대 전략 분야

앞으로 한국이 AI 시대에 국가적 경쟁력을 유지하고 확대하기 위해서는 네 가지 핵심 분야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첫 번째는 HBM을 중심으로 한 AI 메모리 시장이다. 한국은 이미 HBM 시장에서 세계적 기술력을 확보하고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PIM(Processing-in-Memory)이나 PNM(Processing-near-Memory) 같은 차세대 메모리 기술 개발에 선도적으로 나설 수 있다. 데이터센터 확장과 고성능 AI 연산 수요가 지속되는 상황에서, HBM 기술의 진화는 단순한 부품 공급을 넘어 AI 인프라의 주도권을 좌우할 수 있는 영역이 될 것이다.

두 번째는 파운드리 경쟁력의 회복이다. 삼성전자가 한때 TSMC를 추격하며 파운드리 시장에서 세계 2위의 위치에 있었지만, 최근 몇 년간 기술력에서 큰 격차를 벌이며 경쟁에서 뒤처지고 있다. 이는 국가적인 위기로 볼 수 있으며, 단순히 기업의 문제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반도체는 AI뿐 아니라 모든 디지털 산업의 기반이기 때문에, 파운드리 기술의 회복은 곧 국가 산업의 재건과 직결된다. 따라서 국가 차원의 R&D 투자와 기술 인력 육성, 공급망 안정화 등 입체적인 정책 대응이 필요하다.

세 번째 전략 분야는 조선과 방위산업이다. 한국은 조선업 세계 1위, 방산 수출 세계 10위권의 강국으로, 이미 강력한 산업 인프라를 보유하고 있다. 여기에 AI를 접목하면 생산성과 효율성에서 비약적인 도약이 가능하다. 특히 디지털 트윈 기술을 활용한 설계 최적화, 공정 자동화, 용접 로봇과 시뮬레이션 시스템의 융합 등은 공기 단축과 비용 절감 효과를 가져온다. 글로벌 방위 수요가 확대되고 있는 지금, 한국은 AI 기술을 무기체계에 접목해 차세대 디펜스 산업의 주도권을 노릴 수 있는 최적의 시점에 있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는 AI 인재 및 스타트업 생태계에 대한 국가적 육성이다. 한국은 여전히 창의적인 응용기술 스타트업이 부족하며, 인재의 대기업 집중, R&D 처우 문제, 규제 장벽 등 다양한 장애물이 존재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R&D 인력에 대한 파격적 처우 개선, 세제 지원, 주거 안정과 같은 인재 유인책과 함께, 실패를 용인하고 도전정신을 장려하는 스타트업 문화를 조성해야 한다. 중국과 미국이 AI 패권을 놓고 국가 주도로 생태계를 조성하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 역시 공공의 리더십 아래 민간의 역량이 결집될 수 있도록 제도적 기반을 조속히 마련해야 한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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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진영 속 우리의 대안과 역할

AI 기술을 중심으로 재편되는 글로벌 산업 질서 속에서, 한국은 보다 현실적이고 전략적인 생존 해법을 찾아야 한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실은, 중국과의 기술 전면전은 이미 수치상으로도 쉽지 않다는 점이다. 제조업 생태계, 원가 경쟁력, 대규모 국가지원 체계 등에서 중국은 이미 압도적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이 선택할 수 있는 실질적인 대안은 자유 진영 중심의 공급망과 산업 질서에 깊이 편입하는 것이다.

특히 미국은 창의적 플랫폼 개발, 고성능 칩 설계, 글로벌 서비스를 장악하고 있지만, 실물 제조 기반이 약하다는 구조적 한계를 안고 있다. 반면 한국은 탄탄한 제조업 기반을 보유하고 있으며, 고도화된 공정 능력과 생산 기술을 갖추고 있다. 이러한 상호 보완적 구조는 한국이 미국과의 전략적 협력을 통해 제3의 경쟁 축으로 자리 잡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2차전지 산업이다. 한국은 북미 및 유럽 시장에 공급망을 구축함으로써, 중국과의 경쟁을 피해 글로벌 입지를 확보하고 있다. 이 모델은 향후 조선, 방산, 헬스케어 등 다양한 분야로 확장될 수 있다.

궁극적으로 기술의 미래는 단일 기술의 성능에 달린 것이 아니라, 인프라와 응용, 그리고 인간의 직관적 판단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가에 달려 있다. AI는 방대한 데이터를 연결하고 추론하는 데 탁월하지만, 창의적 사고와 윤리적 결정이라는 본질적 기능은 인간에게 남아 있다. 우리는 인간과 AI가 상호 보완적인 관계를 통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도록 유도해야 한다.

이제 한국은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우리는 더 이상 기초기술 1등을 꿈꾸기보다는, 응용기술을 중심으로 시장의 실질적 문제를 해결하며 세계 시장에서 2등 전략을 택해야 할 시점이다. 특히 우리가 강점을 가진 분야에 AI를 결합하여 고도화하고, 미국을 비롯한 우방국들과 공급망 및 산업 전략을 공유함으로써, 우리의 생존력과 영향력을 동시에 키워야 한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산업 정책의 전환, 인재 유입을 위한 과감한 투자, 그리고 스타트업 생태계에 대한 실질적 지원이다. AI 시대의 새로운 질서 속에서, 한국은 제조와 기술 응용의 교차점에서 세계에 반드시 필요한 국가로 거듭날 수 있다.

AI는 방대한 데이터를 연결하고 추론하는 데 강점이 있지만, 창의적 사고와 윤리적 판단은 인간의 고유 영역이다. AI와 인간이 상호 보완적인 역할을 수행할 때, 기술은 산업을 혁신하고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 수 있다.

우리는 세계 경제 체급으로 치면 12체급 수준의 중진국이다. 이 위치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기반기술 1등이 아니라, 응용기술로 세계 시장에서 2등 전략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것이다. 그 전략이야말로 대한민국의 AI 시대 생존과 번영을 가능케 할 것이다.

※ 이 글은 3월 26일 수요세미나에서 박권호 바이오파트너스 대표의 발제를 정리한 것이다. 
 

▲ 2025년 수요세미나 커리큘럼. 
▲ 2025년 수요세미나 커리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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