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이면 고향이 떠오른다. 하지만 지금의 고향은 단지 그리움의 장소가 아니라, 여전히 누군가의 삶이 이어지고 있는 현실의 공간이다. 라이프인은 이번 명절을 맞아 [고향♡] 시리즈를 마련했다. 고향사랑기부제를 통해 지역의 변화를 이끌어낸 사람들과 현장을 찾아가, 마음이 모여 지역을 바꾸는 과정을 기록한다. 전남 영암의 소아청소년과, 광주 동구의 유기견 보호센터, 발달장애 청소년들의 E.T.야구단 이야기까지. 누군가의 '사랑'이 만든 지역의 기적을 전한다. [편집자주]
수도권에서 멀어질수록 병원이 사라지고, 아이가 줄수록 소아청소년과의 불빛이 꺼지고 있다. 최근 5년 사이 전국 의원 수는 늘었지만, 소아청소년과만은 오히려 줄었다. 지방 중에는 소아청소년과 전문의가 단 한 명도 없는 지역도 적지 않다. 전공의 충원율은 13.4%에 불과해, 필수 의료의 뿌리라 할 수 있는 일차의료가 흔들리고 있다. 진료받을 곳이 없어 아이를 키우기 불안하고, 그 불안이 젊은 세대를 떠나게 만든다. 의료의 부재가 인구 감소를 부르고, 인구 감소가 다시 의료 공백을 낳는 악순환의 고리가 곳곳에서 이어지고 있다.
그런 가운데, 전국에서 모인 고향사랑기부금이 그 고리를 끊은 지역이 있다. 전남 영암군이다. 20년 넘게 사라졌던 소아청소년과가 기부로 다시 문을 열었고, 그 뒤에는 군민과 출향민의 마음, 그리고 보건소 공무원들의 집념이 있었다. 이번 인터뷰는 영암군보건소 김소희 주무관을 통해, '기부가 어떻게 의료의 공백을 메우고 지역의 생명선을 되살렸는가'를 짚어본다.
서울에서도 소아청소년과 전문의를 구하기 어렵다는 요즘, 인구 5만의 농촌 지역에서 새로운 전문의를 모시는 일은 불가능에 가까운 도전이었다. 그러나 영암군보건소는 그 불가능을 현실로 바꿨다. 보건소에서 소아청소년과 운영을 담당하는 김소희 주무관은 "당시에는 단순히 공고를 내고 기다릴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우리는 직접 발로 뛰었다"라고 말했다. 직원들은 전국의 전문의 커뮤니티에 영암의 상황을 알리고, 추천받은 의사들을 직접 찾아가 진료 공백의 현실을 설명했다.
"전방위적인 노력 끝에, 저희의 비전에 공감해주신 훌륭한 전문의 선생님을 마침내 모셔올 수 있었다. 기부금을 마련해준 분들과 영암군의 강력한 의지도 중요했지만, 그 뜻을 실현할 의료진을 확보하는 데 보건소가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는 점에 큰 자부심을 느낀다"
행정의 집념이 종이 위에서만 움직이지 않았기에, 20년간 비어 있던 진료실에 지난해 다시 불이 켜졌다. 영암의 하루는 그날 이후 달라졌다. 아이의 열이 오르면 부모들은 더 이상 왕복 두 시간을 달려 광주나 목포로 가지 않는다. 가까운 곳에 믿고 맡길 '우리 아이 주치의'가 생겼기 때문이다.
김 주무관은 진료실에서 있었던 일을 하나 떠올렸다. 진료 중 한 아이의 귀에서 '진주종'이라는 종양이 조기에 발견되었다. 자칫 늦었다면 청력 손상을 피할 수 없었지만, 대학병원과의 즉각적인 연계로 아이는 치료를 받고 청력을 온전히 지킬 수 있었다. 그녀는 "저희 의료진과 공무원들 모두는 단순한 진료를 넘어 한 아이의 미래를 지켜냈다는 사실에 큰 보람과 사명감을 느꼈다"고 회상한다. 단순한 진료가 아니라 한 아이의 인생을 바꾼 사건이었다.
한 아이 어머니는 소아청소년과 덕에 '마음 놓인다'는 편지를 보냈다. 김 주무관은 "그 한 줄에 지난 20년의 불안과 지금의 안심이 모두 담겨 있다"라고 말했다. 그 문장처럼, 영암의 소아청소년과는 이제 부모들에게 '마음의 안전망'이 되었다.
변화는 수치로도 드러난다. 개원 1년 만에 누적 진료 인원은 2,268명에 달한다. 이는 영암군 전체 소아청소년의 3분의 1이 이용한 셈이다. 하루 평균 10여 명의 아이들이 꾸준히 진료를 받고 있다. 행정의 노력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수치다. 지역 주민의 신뢰가 실제 의료 이용으로 이어졌다는 뜻이다.
이 모든 변화의 중심에는 고향사랑기부제가 있었다. 김 주무관은 "고향사랑기부금은 단순히 재정의 일부를 보탠 수준이 아니라, 이 사업의 시작과 끝, 그 자체였다. 특히 영암군은 전국 최초로 의료분야에 고향사랑기부제 지정 기부를 통해 소아청소년과를 개설하는 기적을 만들었다"고 단호히 전한다.
영암군은 지난해 12억 원의 기부금을 모았고, 그중 4억 원이 소아청소년과 개설에 투입됐다. 전문의와 간호 인력의 인건비, 의료 장비 구입, 진료실 개보수까지 모든 비용이 기부금으로 충당됐다. 다시 말해, 이 진료실은 행정 예산이 아니라 '고향을 향한 마음'으로 세워진 셈이다.
그러나 김 주무관은 이 성과를 단순한 복원이 아니라 '지속 가능한 의료 모델의 실험'으로 본다. 20년 전 민간 병원이 철수했던 이유는 수익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달라야 했기에 단발성 개원이 아니라 지역사회 안에서 꾸준히 이용되는 진료실을 만들어야 했다. 보건소에서는 지역의 모든 어린이집, 유치원, 초등학교를 직접 방문해 진료 정보를 알렸다. 가정통신문과 알림장을 통해 부모들에게 소식을 전했고, 지역 온라인 커뮤니티에도 꾸준히 안내했다. 진료 환경도 개선해 아이들이 무서워하지 않도록 대기실을 아늑하게 꾸미고, 대기 시간을 줄였다.
이런 세심한 노력이 입소문으로 이어졌다. "한 번 방문하신 부모님이 다시 찾을 수 있어야 지속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지속가능성이 핵심이었다. 그것은 단순히 예산의 문제가 아니라 신뢰의 문제로, 이용률이 곧 의료의 생명력이라는 사실에 집중했다.
지금 영암군의 소아청소년과는 안정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하지만 김 주무관은 다음 단계를 내다본다. "이제 민간 의료기관이 들어올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됐다. 공공이 마중물이 되고, 민간이 이어받아야 지역 의료가 자립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영암의 실험은 단순히 하나의 소아청소년과를 되살린 일이 아니다. 고향사랑기부제를 통해 주민의 마음이 행정과 결합해 지역 의료의 지속 가능성을 증명한 사례다. 보건소의 진료실 한켠에 걸린 "마음 놓인다"는 문장은, 이제 한 가정의 편지를 넘어 지역 전체의 안도감이 되었다.
김 주무관은 마지막으로 "우리가 다시 켠 이 불빛이 오래도록 꺼지지 않길 바란다. 아이 울음소리가 끊기지 않는 고향, 그게 우리의 꿈이다"라고 전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