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이면 고향이 떠오른다. 하지만 지금의 고향은 단지 그리움의 장소가 아니라, 여전히 누군가의 삶이 이어지고 있는 현실의 공간이다. 라이프인은 이번 명절을 맞아 [고향♡] 시리즈를 마련했다. 고향사랑기부제를 통해 지역의 변화를 이끌어낸 사람들과 현장을 찾아가, 마음이 모여 지역을 바꾸는 과정을 기록한다. 전남 영암의 소아청소년과, 광주 동구의 유기견 보호센터, 발달장애 청소년들의 E.T.야구단 이야기까지. 누군가의 '사랑'이 만든 지역의 기적을 전한다. [편집자주]

 

 

발달장애 청소년들에게 운동은 단순한 체육활동이 아니라 세상과 연결되는 창이다. 그러나 장애인 스포츠의 환경은 여전히 제한적이고, 꾸준히 이어가기도 쉽지 않다. 광주 동구의 E.T.야구단도 그런 한계를 마주했던 팀이었다. 2016년 창단 이후 지역 기업의 후원으로 운영되다 후원이 끊기면서 존속이 어려워졌다. 아이들의 유니폼은 해지고 장비는 낡았으며, 주말마다 겨우 훈련을 이어가던 시절이었다.

 

"후원금이 종료되면 야구단이 없어진다는 두려움이 부모들과 단원들 사이에 있었다" 광주동구장애인복지관 진철호 담당자는 그 시절을 이렇게 회상했다. 그러나 지난해, 상황은 바뀌었다. 고향사랑기부제 지정기금사업을 통해 E.T.야구단이 새로운 동력을 얻은 것이다. 2023년 7월, 고향사랑기부제 민간 플랫폼인 '위기브(WeGive)'를 통해 지정기부를 시작했다. 위기브가 제공한 지정기부 방식 덕분에 기부자가 구체적인 사업과 대상을 선택할 수 있게 되면서, 지역 현장에서 실질적인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기부금으로 유니폼과 장비를 새로 마련했고, 방학을 이용해 동·하계 훈련도 가능해져 이번 여름에는 여수로 전지훈련을 다녀왔다. 훈련 횟수도 늘었다. 진 담당자는 "이전에는 불가능했던 집중 훈련 덕분에 단기간에 실력과 자신감이 크게 늘었다"고 말했다.

▲ 지난 8월, 기아생기 3팀과 합동훈련을 진행했다. ⓒ광주광역시 동구 장애인복지관
▲ 지난 8월, 기아생기 3팀과 합동훈련을 진행했다. ⓒ광주광역시 동구 장애인복지관

 

E.T.야구단은 발달장애 정도에 따라 놀이형·기초형·경기형 세 개의 반으로 나뉘어 운영된다. 기부금 덕분에 코치를 한 명 더 영입해서 수준별 훈련이 가능해졌다. 선수들이 각자의 속도에 맞게 성장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변화는 단원들의 표정에서도 드러난다.

 

"아이들(선수들)이 토요일마다 먼저 일어나 유니폼을 입고 기다린다고 하더라"

진 담당자는 예전에는 참여율이 일정하지 않았는데, 이제는 대부분의 단원들이 빠짐없이 나온다며, 이 프로그램만큼은 계속돼야 한다는 부모들의 반응이 많다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광주광역시 동구 장애인복지관
ⓒ광주광역시 동구 장애인복지관

 

팀을 7년째 이끌고 있는 임방현 감독은 "올해로 창단 10년을 맞은 E.T.야구단은, 처음엔 놀이 형태였지만 지금은 야구다운 형태를 갖추고 있다"고 말했다. "아이들이 공을 치고 왜 1루를 뛰는지조차 모르는 선수들에게 계속 함께 뛰며 알려줬다"는 임 감독의 이야기는, 팀의 성장은 단순한 실력 향상을 넘어 '함께 하는 경험'의 결과라는 걸 느끼게 했다.

임 감독은 속도를 강요하지 않는다. 대신 반복과 칭찬, 기다림으로 지도한다. "몸이 마음처럼 따라주지 않지만, 조금만 나아져도 엄청나게 칭찬해준다"라며 꾸준한 훈련이 성과로 이어졌음을 설명했다. 2025년, E.T.야구단은 제3회 이만수배 발달장애인 티볼야구대회에서 결승전까지 세 경기 전승으로 우승했다. 창단 이후 첫 전국대회 우승이었다.

 

▲ 제3회 이만수배 발달장애인 티볼야구대회에서 우승한 E.T 야구단. ⓒ광주광역시 동구 장애인복지관
▲ 제3회 이만수배 발달장애인 티볼야구대회에서 우승한 E.T 야구단. ⓒ광주광역시 동구 장애인복지관


야구단의 운영은 여전히 광주 동구장애인복지관이 맡고 있지만, 이제는 지역이 함께 만들어가는 구조다. 임 감독은 "짧은 시간에 성장했다고 하지만, 훈련할 수 있었던 건 고향사랑기부제 덕분이다"라며, "실내 연습장은 좁지만 대기 중인 아이들이 많을 만큼 관심이 커졌다"고 말했다.

 

아이들의 변화를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서지원 선수의 아버지는 "유니폼과 장비가 좋아지니까 자긍심이 생겼다"며 "훈련이 늘고 복지도 좋아져서 아이들이 무척 좋아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 아이들은 다른 놀이문화가 많지 않다. 그래서 야구가 하나의 문화이고, 갈 수 있는 곳이다"고 했다. 기부 덕분에 아이들이 세상과 연결될 수 있는 경험을 하고 있다며 "앞으로 프로야구단 등과 연계해 직업으로 이어지는 길이 열리면 좋겠다"고 밝혔다. 

 

인터뷰에 응한 세 사람 모두, 앞으로의 방향을 ‘지속 가능한 구조’로 본다. 진철호 담당자는 외부 후원에 의존하지 않고 지역 주민의 참여로 운영되는 체계를, 임 감독은 광주 동구에서 시작해 전국으로 확산되는 장애인야구리그와 직업형 팀의 가능성을, 부모의 시각에서는 프로구단이나 기업과의 연계를 통한 자립의 길을 그렸다.

결국 세 사람이 그리고 있는 비전은 닮아 있다. 단기적으로는 훈련 인프라와 대회 운영을 안정화하고, 중기적으로는 타 지역 확산과 리그 창설을, 장기적으로는 장애인 스포츠가 '직업'으로 이어지는 모델을 만드는 것이다. 광주 동구의 고향사랑기부제가 이 변화를 실험할 제도적 기반이 되고 있다.

 

광주 동구의 E.T.야구단은 기부로 다시 일어섰고, 이제는 지역의 자랑이 되었다. 아이들은 더 이상 보호의 대상이 아니라 함께 뛰는 선수로 불린다. 고향사랑기부제가 세운 건 단순한 팀이 아니라, 서로를 믿고 응원하는 '또 하나의 가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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