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권은 팽창하고 지방은 비워지고 있다.
사람과 돈, 세금이 한 방향으로 몰리는 현실 속에서 "지역을 살린다"는 말은 종종 공허하게 들린다. 『지역을 살리는 아름다운 선택』은 이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다. 저자 이찬우 일본경제연구센터 특임연구원과 문진수 사회적금융연구원 원장은 일본의 고향납세(ふるさと納税)와 한국의 고향사랑기부제를 비교하며, 지역을 살리는 힘이 단순한 재정정책이 아니라 시민의 선택과 신뢰에서 비롯된다고 말한다.
세금을 지역으로 돌려보낸 실험, 일본의 고향납세
일본의 고향납세 제도는 2008년 시작된 이래 수차례 제도 보완을 거쳐 약 3조 엔 규모로 성장했다. 저자에 따르면 제도의 구조가 안정화되며 이 시장은 앞으로 더 확대될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이 제도의 핵심은 단순하다. 대도시에 사는 납세자가 자신이 지지하는 지방자치단체를 선택해 세금 일부를 기부하고, 지자체는 그 대가로 지역 특산품을 답례품으로 제공한다. 하지만 이 책이 보여주는 본질은 '기부'가 아니라 '관계'다. 지자체는 기부금의 수입과 사용 내역을 투명하게 공개하고, 기부자는 그 과정을 직접 확인한다. 그 결과 납세자와 지역 사이에 새로운 연결망, 이른바 '관계 인구'가 형성된다.
이 관계는 재정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기부금은 재해 복구, 고령자 대책, 탄소제로 프로젝트 등 지역이 직면한 문제 해결에 활용된다. 책은 제도의 지속 여부가 '예산'이 아니라 '참여'의 문제임을 강조하며, 고향납세를 통해 지역이 스스로 미래를 설계해 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물론 일본의 고향납세가 완벽한 제도는 아니다. 과열된 답례품 경쟁으로 지역 간 격차가 커졌고, 일부 법인 고향납세에서는 부정 사례도 있었다. 그럼에도 저자들은 이 제도의 본질을 '사람 중심'이라고 단언한다. 문제의 원인조차 '사람의 선택이 살아 있는 제도이기 때문에' 발생한다는 것이다.
저자들은 고향납세를 "납세자 주권의 실현"으로 설명한다. 세금이 국가의 권한이 아니라 시민의 의지라는 점에서 이 제도는 일본의 지방 재정을 넘어 시민 참여형 경제 실험으로 평가된다. 또한 2028년까지 연장된 법인 고향납세 제도는 기업이 지방창생사업에 직접 참여할 수 있게 한 구조로, 지자체가 어떤 지역 비전을 세우는가가 제도의 성패를 가른다.
한국의 고향사랑기부제, 제도는 있으나 주체가 없다
책은 이어서 한국의 고향사랑기부제를 분석한다. 표면적으로는 일본과 유사하지만, 한국의 제도는 철학과 운영 방식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한국의 경우 기부금의 세제 혜택에 대한 관심이 압도적이다. 2024년 기준 전체 기부자의 90% 이상이 10만 원 한도 내에서만 기부했다. 이는 제도의 동력이 '세금 공제'에 머물고 있음을 보여준다. 저자들은 "정책 의지가 낮고, 지자체 자율성이 거의 없다"고 진단한다.
운영 구조의 차이도 뚜렷하다. 일본은 다수의 민간 기관이 수천 개 지자체를 연결해 다양한 플랫폼 경쟁을 가능하게 하지만, 한국은 단 한 개의 공공기관이 243개 지자체를 일괄 관리한다. 그 결과 지역별 특색이나 창의적 접근이 제한되고, 민간 참여는 구조적으로 배제된다. 저자들은 이러한 한계를 "지자체 없는 제도"라고 요약한다. 즉, 정부는 제도를 만들었지만 지역이 스스로 설계할 여지를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고향사랑기부제 성과 목표는 '자주적으로 쓸 수 있는 재원을 모아 지역 소멸 방지를 위해 사용하는 것'이다. 궁극적인 목표 즉, 영향은 '지역을 살기 좋은 장소로 만드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성과 목표를 관리/평가하려면 지표(KPI)19가 필요한데, 정부가 기준을 제시한 적도 없고 고향사랑기부를 성과 지표와 연동해서 관리하는 지자체도 보이지 않는다. 제도가시행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고 모금 액수도 적어서 관리 지표가 필요치 않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지표를 세우고 관리하는 것과 아닌 것은 성과 측면에서 차이가 크다. '모인 대로 쓰는 것'과 '쓰임새와 목표 금액을 정하고 모금에 임하는 것'은 다른 결과를 만든다. (본문 중에서)
그럼에도 현장에서 변화를 만들어가는 사례들은 존재한다. 경기도 안성시는 지역 농산물을 활용한 답례품 구성으로 농가 소득과 로컬푸드 유통을 동시에 살렸고, 광주 동구는 청년 창업가의 로컬 브랜드 상품을 답례품으로 채택해 지역 내 스타트업을 지원했다. 경북 영덕군은 기부금을 아동 돌봄과 복지 사업에 투입하며 주민 체감도를 높였다. 세 지자체 모두 공통적으로 '기부를 통해 지역 문제를 직접 해결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행정과 주민이 함께 움직였다는 점에서 제도의 본래 취지를 되살린 사례로 평가된다.
고향납세로 큰 성과를 거두고 있는 일본 지자체들을 살펴보면 답례품 아이디어 제안, 개선 사항 건의 등 주민 참여율이 높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행정 인력 부족으로 발생하는 업무 공백을 주민이 자발적으로 메우고 있는 곳도 여럿 발견된다. 형식이 아니라 실질적인 민관 협치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뜻이다. 한국적 맥락에서 민관 협치는 '정부가 주도하고 민간이 따르는' 방식으로 전개될 가능성이 높다.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하다. 협치의 출발점은 신뢰와 믿음이다. 자치 역량을 믿지 못하면 주민자치를 실현할 수 없는 것처럼, 신뢰가 바탕이 되지 않으면 어떤 일도 성공하기 어렵다. (본문 중에서)
책은 제도의 한계를 짚는 데서 그치지 않고 구체적인 개선 방향을 제시한다. 핵심은 지자체 자율과 민관 협력, 그리고 제도의 사회적 신뢰 회복이다.
첫째, 각 지자체가 스스로 기본계획을 세워야 한다. 기부금 모집과 사용 목표를 명확히 설정하지 못하면 결국 제도는 단순한 모금 창구로 전락한다. 둘째, 세제 혜택 중심에서 벗어나 기부자와 지역이 직접 소통할 수 있는 구조가 필요하다. 셋째, 행정이 모든 것을 통제하려는 관행에서 벗어나 민간과 협동조합, 공익재단 등 다양한 주체가 지역경제의 실험에 참여할 수 있는 구조를 마련해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플랫폼 경쟁력을 갖춰야 한다. 민간 참여를 활성화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이 책은 "좋은 제도는 결국 좋은 사회적 상상력에서 나온다"고 말한다. 제도를 설계하는 법보다 그 제도를 믿고 함께 움직일 시민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지역을 살리는 아름다운 선택』은 정책 보고서처럼 시작하지만 결국 사람의 문제에 집중한다. 지방의 자치력은 예산이 아니라 신뢰에서 자란다. 고향납세가 일본 사회에서 15년 넘게 유지될 수 있었던 이유도 시민이 납세의 주체로서 참여했기 때문이다.
한국의 고향사랑기부제가 성공하려면 이 제도의 중심을 다시 사람에게 돌려줘야 한다. 세금의 흐름을 바꾸는 기술보다, 그 돈이 지역의 관계를 복원하는 통로가 되어야 한다. 결국 지역을 살리는 제도란, 사람이 제도를 믿고 움직이는 사회적 신뢰의 체계를 뜻한다.
"지역의 미래는 제도가 아니라 사람에게 달려 있다"
지방소멸의 시대, 이 단순한 문장이야말로 지금 우리가 붙잡아야 할 가장 현실적인 경제 전략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