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 시절에 두 차례 병원에 입원했던 적이 있다. 6인실에서 열흘 정도 머물렀는데, 요즘의 입원실과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휴대폰이 없었던 시절이었던 데다가 방안에 텔레비전이 없었기 때문에 환자 및 보호자들 사이에 많은 대화가 자연스럽게 오갔다. 지금 어디가 아픈지,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 이야기하면서 마음을 나눌 수 있었다. 상부상조의 손길도 오갔는데, 나의 병문안을 왔던 교회 친구들이 옆 병상의 환자를 위해 헌혈해주기도 했다. 말하자면 입원실은 서로의 손을 잡아주고 격려하면서 회복의 힘을 키우는 공간이었다.
인터뷰를 위해 괴산의 한 요양병원을 방문했을 때, 오래전의 그 기억이 문득 떠올랐다. 환자들은 모두 1인실을 사용하지만 대부분 시간을 다른 환우들과 함께 보내며 기력을 충전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항암이라는 경험을 공유하면서 동병상련으로 각별한 정(情)을 나누는 공동체가 거기에 있었다. 투병 과정에 수반되는 신체적 괴로움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사회적인 소외감을 누구보다도 잘 알기에 상대방의 처지를 깊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의사는 병에 대해서는 잘 알아도 환자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는 말이 있다. 어느 외과 의사가 막상 자신이 병에 걸려 처음 수술대에 올랐을 때 그동안 막연하게 짐작했던 환자의 심경을 처음으로 체감했다고 한다. 의사와 환자 사이의 거리는 그만큼 먼 것이다. 그 요양병원에서는 그 간극을 힐러들이 메워준다. 자신이 암 생존자로서 그동안의 투병 경험을 토대로 '후배' 암 환자의 곁을 정성껏 지켜준다. 극도의 고통과 절망에 무너지지 않고 건강을 되찾아가는 환우는 존재 그 자체로 희망이 된다. 자신에게 일어난 치유의 기적이 상대방에게서도 일어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않고 도움의 손길을 건네는 그 순수함은 재생의 원천이 되는 듯하다.
식당에서 여러 환자를 마주하면서 나는 깜짝 놀랐다. 암투병을 하고 있다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안색이 좋았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건강해 보이는 분들이 많았고, 아직 질환에 힘겨워하는 듯한 분들도 표정은 대체로 밝았다. 비결은 무엇일까? 암 치료에 최적화된 식단, 쾌적한 공간 디자인, 사방을 둘러싼 생태 환경, 의료진의 정성 어린 케어, 면역력을 높이기 위해 설계된 다채로운 프로그램 등이 어우러져서 생명의 힘을 북돋아주는 것이리라. 거기에 더해 환우들 사이에 맺어지는 우애가 회복의 결정적인 지렛대가 되고 있다고 본다. 사회생활을 하면서는 대개 자신의 약점을 감추게 되지만, 이곳에서는 연약함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온전히 수용해준다. 그래서 모두가 귀인(貴人)들이다.
생면부지의 타인들이 소중한 인연을 맺으면서, 생애의 궤도 수정도 이뤄지기도 한다. 내가 인터뷰한 두 분의 말씀에서 그런 고백이 나왔다. 생존이나 성공을 위해 전력투구하느라 피폐해진 심신을 돌아보고, 무엇이 정말로 중요한지를 깨달으며 인생의 새로운 가치와 비전을 찾았다는 것이다. 다른 환우들을 보살피면서 자기 안에 숨어 있던 놀라운 사랑의 능력도 발견할 수 있었다고 한다. 타인의 행복을 위해 헌신하는 열정은 지병을 다스리는 에너지로도 틀림없이 작용한다.
이곳 요양병원은 단지 질병을 치료하는 시설이 아니다. 자신의 소중함과 타인의 고마움을 깨닫고 더 나은 삶을 함께 창조해가는 장소다. 그 서로 돌봄과 환대의 미덕은 환자들끼리만 나누기에는 너무 보배로운 선물이다. 아직 건강한 사람들이 이곳에 찾아와 투병하는 분들의 경험을 접한다면 삶에 대한 이해의 폭과 깊이를 더할 수 있지 않을까. 여러 가지 포맷으로 대화의 마당을 디자인해보면 좋겠다. 인생 후반부의 밑그림을 그리기가 어려운 초고령 사회에서 전환의 기술을 익히는 교실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곳에서 축적하고 있는 치유의 사례들은 21세기가 요구하는 대안적 생활양식을 빚어가는 재료가 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