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2024년 기준으로 수출 총액 세계 6위인 경제 대국이다. 이런 나라에 비상계엄-탄핵-현직 대통령 구속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사태가 벌어졌다. 한국만 그런 것이 아니다. 미국에서는 트럼프가 4년 공백을 딛고 재집권에 성공했다. 유럽의 여러 나라, 특히 프랑스에서 극단적 우파 포퓰리스트 정당들의 상승세가 무섭다. '집권 1보 직전'이다.
한국도 포퓰리즘이 뿌리내릴 수 있는 토양이 쌓이고 있다. 민주주의의 근본이 흔들리고 있다. 어떻게 해야 하나?
■ 포퓰리즘의 실체
1. 포퓰리즘(Populism)이란?
포퓰리즘이 무엇을 뜻하는지 학자마다 생각이 다르다. 이질적인 정치 현상에다 가리지 않고 포퓰리즘이라는 이름을 붙이기 때문에 정확하게 개념을 규정하기가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대세에 가깝다. 그렇지만 인민에 대한 호소(Appeal to the people), 곧 '인민주권의 회복'과 반 엘리트주의(Anti-elite), 곧 지배 세력에 대한 불신이 포퓰리즘의 본질을 구성한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포퓰리즘의 본질에 더 다가가기 위해서는 세 가지 개념을 구분하는 것이 필요하다. 우선 Popularism은 글자 그대로 '대중영합주의'라고 부를 수 있다. 그 반대편에서 포퓰리즘을 '민중주의'라고 부르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들은 포퓰리즘을 Populist democracy(인민 민주주의, 곧 직접 민주주의의 확대를 추구하는 급진 민주주의)와 동격에 놓는다. 이 글이 문제 삼는 포퓰리즘은 Populist democracy를 표방하나 그 실체는 Popularism에 가깝다.
포퓰리즘이라는 용어의 남용을 막기 위해서는 '인민주권의 회복'을 내세우지만 표피적·감성 자극적 정치 전술에 의존하는 정치 행태에 한정해서 포퓰리즘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 필요하다. '인민주권 회복론'이라는 기본 명제와 5개 하위 명제(보통 사람들에 대한 낭만적 미화, 엘리트에 대한 적개심 고취, 현상 타파 주장, 대의민주주의에 대한 불신, 계급 연합), '감성 자극적 단순 정치'라는 기본 명제와 3가지 하위 명제(가부장적 지도자 중심주의, 선동 정치, 체제 개혁의 한계)를 1-10 스케일로 계량한 뒤, 적어도 7 이상의 점수를 얻은 정치인들만 포퓰리스트라고 부를 것을 제안한다. 그 이하 점수를 받은 사람들은 포퓰리스트 성향을 띠고 있다고 구분하는 것이 좋겠다.
2. 포퓰리즘의 유형
일반적으로는 1870년대 러시아의 나로드니키(Narodniki) 운동과 1890년대 미국의 인민당(People's Party)을 포퓰리즘 현상의 원조로 지목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대중영합형 포퓰리즘'은 1940년대 아르헨티나의 후안 페론 등 라틴 아메리카 정치권에서 많이 발견된다. 좌파 포퓰리즘도 있다. 기득권을 해체하고 기층 민중의 이익을 구현한다는 점에서 '진정한 민주주의의 유일한 형태'라고 자부한다.
이 글은 서부 유럽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강경 우파 포퓰리즘을 주목한다. 이들은 2001년 9.11 테러, 2008년 국제 금융위기, 2015년 유럽 난민 위기 등 중대한 위기를 틈타 정치권 주변부에서 중심부로 상승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 프랑스의 포퓰리즘
1. 국민전선(Front national)의 돌풍
1972년 창당된 포퓰리스트 정당인 국민전선은 2018년 국민연합(Rassemblement national)으로 이름을 바꾼 뒤 프랑스 제1야당 자리를 굳히고 있다.
2주 전 세상을 떠난 장 마리 르펜(Jean-Marie Le Pen)은 1972년 국민전선을 만든 뒤 대통령선거에 5번 출마했다. 1974년에는 득표율이 0.74%에 불과했지만 1988년 선거에서는 14.4%, 1995년 선거에서는 15%를 득표하는 등 무섭게 치고 올랐다. 2002년 선거 때는 1차 투표에서 17%를 득표, 결선 투표에 진출하는 대이변을 일으켰다. 자크 시라크(Jacques Chirac) 당시 프랑스 대통령이 20%로 1위, 사회당 후보가 16%로 3위였다. 프랑스 선거법에 따라 1, 2위 두 사람이 2차 투표에서 재대결했고 시라크 전 대통령이 82.2% 득표율로 대승을 거두었다. 프랑스의 좌-우 모든 정파가 포퓰리스트 정당의 집권을 막기 위해 대동단결한 결과였다. 시라크 전 대통령을 지지한 유권자의 71%는 '르펜을 저지하기 위해' 투표했다.
르펜이 대중적 인기를 누리게 된 결정적인 변수는 아무래도 외국인 배척, 반 유대주의 등 배타적 민족주의였다. 그는 홀로코스트를 부인하는 등 혐오 발언을 거듭하면서 '공화국의 악마'라는 악명을 얻었다.
2012년 그의 딸 마린 르펜(Marine Le Pen)이 국민전선의 새 지도자가 됐다. 마린 르펜은 2015년 아버지를 당에서 축출하고 당명도 국민연합으로 변경하는 등 당의 색깔을 전면적으로 바꾸었다. 좌파도 아니고 우파도 아닌 '프랑스 애국주의'가 국민연합의 핵심 기치다(평등주의 사회적 보호와 경제적 민족주의에 바탕을 둔 사회적 포퓰리즘으로 규정하는 학자도 있다). 이를 바탕으로 극우 정당이 아니라 수권 가능한 주류 정당으로 발돋움하고 있다.
마린 르펜은 2012년 대통령선거에서 17.9% 득표율로 3위를 차지했다. 2017년 대통령선거에서는 21.3%를 얻어 결선 투표에 진출했으나 33.9%에 그쳐 중도연합의 에마뉘엘 마크롱 현 프랑스 대통령에게 패배했다. 2022년 대통령선거에서도 23.2%의 득표율을 획득하여 두 번 연속 결선에 올랐고 2차 투표에서 41.5%의 표를 얻었으나, 다시 한번 마크롱 대통령에게 졌다. 그러나 마린 르펜의 선전으로 우파 포퓰리스트 정당의 후보자가 프랑스 대통령이 되는 일이 현실로 다가왔다.
그 후 그는 당무를 20대 기수 조르당 바르델라(Jordan Bardella)에게 넘겨주었다. 국민연합은 젊은 대표를 앞세워 2024 유럽의회 선거에서 31.4% 득표율로 압도적 1위를 차지했다. 이에 마크롱 대통령은 하원을 해산하고 조기 선거에 나섰다. 국민연합은 사전 여론조사에서 제1당을 차지할 것으로 예측됐지만 기성 정당들의 방해로 제1야당 자리에 만족해야 했다.
2. 포퓰리스트 정당의 성과와 한계
국민연합은 놀랍게도 모든 계층으로부터 골고루 지지를 받고 있다. 2022년 조사에 따르면 전통적 '집토끼'인 노동자(54% 이상)와 중하위 화이트칼라(40%)는 물론 기술직, 중간 전문직(29%), 경영자, 전문직(20%), 연금 생활자(29%), 25세 이하 청년층(25%)의 지지를 확보하고 있다.
그 비결은 무엇일까. 아무래도 경제적 소외자들의 반 엘리트 감정이 폭발하면서 '문화적 정체성' 이슈에 예민하게 반응한 결과라는 분석이 유력하다. 2024년 하원 선거에서 국민연합을 지지한 사람들은 이민 문제(77%), 생활비 고통(67%), 법과 질서 확립 필요성(40%)에 크게 공감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국민연합이 수권정당이 될 수 있을지 근본적인 의구심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무엇보다 생산적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반 이민 등 반대(Anti) 세일즈로 일관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포퓰리즘 특유의 장밋빛 약속을 남발하다가 현실적 한계에 부딪히면 공약들을 수정, 철회하는 일이 잦다. 혐오와 배제의 정치(Toxic politics)로 대중의 지지를 끌어모을 수는 있으나 그 '종기'를 터뜨리고 다음 단계로 나아갈 전망이 보이지 않는다.
3. 프랑스 민주주의의 위기
프랑스에서도 무능하고 부패한 정치인들에 대한 대중의 분노가 비등하다. "민주주의는 기본적으로 위에서부터 썩기 시작한다"는 말이 틀리지 않음을 보여준다.
이런 상황에서 정파를 가리지 않고 포퓰리즘 흉내 내기에 급급하다(2022년 프랑스 대통령선거 결선 투표에서는 주류 정당들의 반 포퓰리즘 연합전선도 붕괴했다). 중도파 마크롱 대통령부터 국민연합의 반 이민 정서에 편승하고 있다. 정통 우파(공화주의자들)도 국민연합의 문화적 보호주의 노선을 본뜨려 한다. 심지어 좌파 정당까지 반 유대주의와 '인민 vs 엘리트' 2분법 전술 등 포퓰리즘 정책을 모방하고 있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면서 프랑스 사회 전체가 강경 우경화되고 있다. '정상적 주류 정당'의 면모를 보여주고 싶은 국민연합으로서는 불감청고소원이랄까.
국민연합이 프랑스 정치의 중심에 서게 될 때 어떤 일이 벌어질까. 2022년 조사(Kanar survey)에 따르면 프랑스 국민의 46%는 마린 르펜을 '애국적 우파 지도자'로, 50%는 '민주주의에 위험한 인물'로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국민연합의 실제 모습은 훨씬 더 반민주적이다.
포퓰리즘 정당은 자신만이 국민의 진정한 대변자라고 치장하면서 반대파를 국민의 적이라고 매도한다. 이런 적대적 이분법이 심화하면 다원주의가 살 수 없다. 나아가 '국민의 뜻'을 내세워 법치주의마저 위협한다. 포퓰리즘은 전통적으로 '법 위에 국민'을 표방하고 있다. 법치주의가 인민주권 원리를 침해한다면서 중대 사안을 국민투표로 최종 결정할 것을 강변한다. 국민연합은 이민법을 밀어붙이면서 프랑스 헌법재판소에 국민의 뜻을 순종하라고 강박했다.
다원주의와 법치주의가 없으면 개인의 권리와 자유는 보장되지 못한다. '참된 민주주의'를 캐치프레이즈로 내건 포퓰리스트 국민연합이 실제로는 반민주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프랑스 민주주의에 대한 실망이 확산하면서 프랑스가 이미 포퓰리즘의 노예라는 말까지 나오는 상황이다.
■ 한국 민주주의에 대한 고민
1. 포퓰리즘의 자양분
한국에 뚜렷하게 포퓰리스트 정당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한국에서도 포퓰리즘이 똬리를 틀 수 있는 토양이 쌓이고 있다. 경제적 양극화로 고통받는 사람이 많은데 믿을 만한 정치 엘리트는 보이지 않는다. 유력 정치인들에 대한 비호감이 위험 수위를 넘었다. 결정적으로 한국 사회도 문명사적 위기에서 예외가 아니다. 자기주장과 이익을 정당화하는 관점주의가 삶의 잣대가 되는 세상이고, 사회관계망서비스(SNS)와 인공지능(AI)이 확증편향을 부채질하고 있다. 이런 불안한 조짐이 중첩되다 보면 한국에서도 포퓰리즘이 기승을 부릴 수 있다.
2. 포퓰리즘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포퓰리스트 선동가들은 진짜 민주주의를 실현하겠다고 약속한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과 실제 정치 행태는 이율배반적이다. 지금까지 포퓰리즘을 민주사회의 병적 현상으로 치부하는 '병리론'(그림 1)이 대세였지만, 최근에는 현실 민주주의의 결핍 또는 한계가 포퓰리즘을 불러일으킨다는 '도전론'(그림 2)이 떠오르고 있다. 포퓰리즘은 민주주의를 따라다니는 '그림자'라든가 포퓰리즘을 민주주의 내부의 건강하지 못한 '주변부'라고 보는 견해가 그런 것이다.
이 글도 민주주의 안에 있는 태생적 취약점이 포퓰리즘을 잉태한다는 생각에서 '주변부론'의 손을 들어준다. 이 관점에서 2025년 1월 현재 한국 정치를 진단해 본다.
▲ '국민'의 이름으로 반대파 겁박
윤석열은 0.7% 차이 승자임에도 권력을 독점하려 했다. 이것이 그의 몰락을 초래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다수파라고 도덕적 정당성을 독점할 수는 없다. 아테네 민주주의가 보여주듯이, 다수파 역시 이기적 당파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포퓰리스트들의 문제가 여기에 있다. 그들은 자신을 국민의 대변자라고 부르면서 반대편을 '비(非)국민'으로 규정하고 겁박한다. 국민-비국민의 2분법 적대 정치는 민주주의의 근간인 다원주의를 질식시킨다.
2025년 탄핵정국에서 다수파는 물론 소수파까지 국민의 이름으로 권력 다툼을 미화하고 있다. 오만할 뿐 아니라 교활하다. "자살하지 않은 민주주의는 없다"(John Adams)라는 말이 그냥 나온 것이 아니다.
▲ 법치주의 무력화
포퓰리스트들은 '국민의 뜻'이 최고결정권을 가져야 한다면서 법의 지배를 민주주의의 장애물로 인식한다. 그러나 법은 민주주의의 폭주를 예방해 주는 안전판이고 '제도적 올가미'이다. 아테네가 경험했듯이, 국민이 법 위에 군림하면 비자유주의적 껍데기 민주주의(Illiberal democracy)로 전락하게 된다.
한국 정파들이 너나없이 법치주의를 들먹이나 법을 존중할 생각은 없다. 법을 이용해 권력 야망을 달성하려는 속셈이 훤히 보인다. 헌법재판소를 압박하고 법관을 물리적으로 위협하는 반민주적 작태는 엄중하게 처벌해야 한다.
루소는 다수의지와 일반의지를 구분했다. 다수의지가 당파적 이기심에 기반하는 것이라면 일반의지는 공동체의 궁극적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다. 다수결은 소수파의 저항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일반의지를 찾는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현 상태로서는 법관의 전문적 숙고에 기댈 수밖에 없다. 다시 한번 법치주의는 민주주의의 생명줄이나 마찬가지이다(물론 법관이 파당에 휘둘리지 않는 양심이 전제돼야 한다. "정의가 강자의 이익"이 되는 사회에서는 법치주의 자체가 조롱거리일 수밖에 없다). 법치주의를 능멸하는 포퓰리즘이 반민주적인 이유이다.
▲ 참된 민주주의
포퓰리스트들은 자유주의를 지배 이데올로기라고 배척한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요체는 평등이다. 평등에서 자유가 나온다. 따라서 민주주의와 자유주의는 한 몸이다. 평등사회에서는 모두가 주인이다. 주인이 자기 공동체를 염려하지 않으면 누가 하겠는가. 그래서 공화주의 없는 민주주의는 생각할 수 없다. 민주와 자유와 공화는 함께 존재할 수밖에 없다. 자유와 다원주의를 억압하는 포퓰리즘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3. 어떻게 할 것인가
▲ 성찰하는 민주시민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서구 선진국' 시민들이 어떻게 포퓰리스트들에게 표를 던지는가? 그들은 포퓰리즘 정당이 정말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일까?
결국 인민의 깨어 있는 의식이 포퓰리즘에 휩쓸리지 않는 관건이다. 턱없이 높은 수준을 기대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시민들이 자유를 향유하되 (…) 자유와 책임감 사이의 미묘한 관계를 예민하게 파악"(Crozier)할 정도이면 된다.
▲ 권력 분산 개헌
깜냥이 되지 않는 개인이 무한권력을 행사할 때 비극은 피할 수 없다. 평등한 민주사회에서는 특히 그렇다. 2025년의 비극을 기화로 반드시 권력분산형 개헌을 이뤄내야 한다.
▲ 기득권 정당 거부
케케묵은 기득권 양당 구도를 혁파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유권자의 투표 혁명이 요구된다. 투표용지에 기득권 정당뿐이라면 투표를 거부하자. '투표 의무'라는 프레임은 자칫 기득권 제도의 고착에 악용될 수 있다. 사표(死票)가 두려워 기득권 정당을 찍었던 관행도 혁파하자. 사표가 모이면 새로운 정치세력이 등장할 수 있다. 거듭 민주시민의 깨어 있는 의식이 필요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