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학교 조병희 명예교수는 오랜 시간 지역사회 건강과 보건소의 역할을 연구해왔다. 그는 저서 『젊게 늙는 사회』에서 초고령 사회의 건강 문제를 개인의 질병에 국한하지 않고, 사회적 차원에서 통합적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건강은 생물학적 현상인 동시에 사회적 현상이며, 질병 치료 중심에서 벗어나 예방과 건강증진 중심으로 시스템을 개편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우리는 질병을 치료하는 것에 집중해왔지만, 예방과 건강한 삶을 위한 구조적인 변화가 절실하다. 이는 개인의 노력만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사회가 함께 건강한 환경을 조성하고 정책적으로 뒷받침해야 한다.
지역사회 네트워크와 보건소의 연결, 새로운 가능성
보건소는 지역 건강을 책임지는 중요한 기관이지만, 현실적으로 건강증진 사업의 상당수가 임시직을 통해 운영되고 있어 효율성이 낮다. 이에 조 교수는 지역사회 내 수많은 조직과 보건소를 효과적으로 연결할 방법을 연구했다.
"서울의 한 구에서만 70~80개의 네트워크 조직이 있었다. 이들이 어떻게 협력하는지를 분석했는데, 대부분의 큰 사업은 연계해서 이루어지지만, 의사회, 치과의사회, 한의사회 같은 의료 단체들은 지역사회와 연결고리가 없었다. 이런 단절이 가장 큰 문제였다"
그는 지역 약사가 지역사회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경우가 드물다고 지적했다. 영국에서는 의사들이 지역사회 주민을 이해하는 교육을 정규 과정으로 배우는데, 한국에서는 그런 접근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의료인이 단순히 치료만 하는 게 아니라 지역사회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구조가 만들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건강한 노화, 개인의 노력만으로 가능한가?
우리 사회는 빠르게 고령화되고 있으며, 단순한 노화보다 '노쇠'가 더 큰 문제라고 조 교수는 설명한다. 그는 "한국은 서구 사회가 수백 년에 걸쳐 경험한 노령화를 단 몇십 년 만에 겪고 있다. 문제는 수명이 늘어난 만큼 노쇠한 상태로 보내는 시간도 길어지고 있다는 점"이라고 지적했다. 과거에는 은퇴 후 10년 정도 노쇠를 거쳐 사망하는 패턴이었지만, 지금은 건강하지 않은 상태로 20년을 살아야 하는 경우도 많다는 게 문제이다.
하지만 노쇠를 늦추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가공식품과 자극적인 미디어 소비를 줄이고, 신체 활동과 사회적 교류를 늘리는 것이다. 조 교수는 이를 '건강 노화'라고 정의하며, 단순한 이론이 아니라 정책적으로도 반영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개인의 건강 문제, 사회적 책임과 연결돼
보건학에서는 건강을 개인의 책임으로만 볼 것인지, 사회적 요인으로 분석할 것인지 두 가지 관점이 있다. 조 교수는 두 가지가 함께 작용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미국의 보건학자 John H. Knowles는 '너무 많은 자유가 미국인을 병들게 했다'고 했다. 과식, 과속, 과한 오락과 스트레스가 건강을 해치는 주요 요인이라는 의미다.
또한 멕시코 사례를 예로 들며, 20년 사이에 멕시코가 비만율 1위 국가가 된 배경을 설명했다. 미국과의 FTA 체결로 값싼 가공식품이 대량 유입됐고, 저소득층이 패스트푸드에 쉽게 노출되면서 비만율이 급증했다는 것이다. 건강한 생활을 선택하는 것이 개인의 노력만으로 해결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이런 사회적 구조에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는 다른 문제로 한국의 의료비 지출 구조에 관한 의견을 전했다. 그는 현재 한국은 ‘노인이 될수록 의료비 지출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구조’라며 특히, 사망 전 1~2년 동안 인생 의료비의 절반 이상이 사용된다고 설명했다.
"건강하지 못한 상태로 오랫동안 노쇠하게 살면 의료비 부담이 커질 수밖에 없다. 더 큰 문제는 노인이 쓰는 의료비의 상당 부분이 생명 연장에는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결국 이는 경제적 문제이자, 우리가 죽음을 어떻게 준비할 것인지에 대한 철학적 문제이기도 하다"
조 교수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건강보험 보장률을 높이고 실손보험 같은 개별적 대응이 아닌 공적 의료 지출을 확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현재 유럽 선진국에서는 공적 의료비가 전체의 85%를 차지하지만, 한국은 약 60% 수준이다. 이 차이가 의료비 부담의 차이로 이어진다.
치료 중심에서 예방 중심으로, 그러나 시스템은 부족
현재 한국의 의료 시스템은 철저히 치료 중심적이다. 하지만 예방이 중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문제는 예방에 대한 보상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조 교수는 건강검진 시스템은 잘 갖춰져 있지만, 검진에서 문제가 발견된 후에는 결국 개인이 알아서 해결해야 하는 점도 개선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의사는 질병 치료의 전문가이지 건강증진 전문가가 아니라는 점”이 문제라며, 이에 대한 대안으로 조 교수는 '보건교육사' 같은 건강증진 전문가들의 역할을 강조했다. 보건교육사는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인증하는 전문가이지만, 정작 이들이 일할 자리는 많지 않다.
"미국의 한 기업에서는 물리치료사를 사무실에 두고 직원들의 어깨 마사지를 해준다. 아픈 사람만 치료하는 게 아니라, 아프지 않은 사람의 건강을 관리하는 시스템이 필요하다"라고 이야기하며 의사는 질병 치료 전문가로 남고, 예방은 예방 전문가가 담당하는 체계가 마련되어야 한다는 걸 재차 강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