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은 인간에게 가장 크고 궁극적인 질문이다. 과연 죽음은 삶의 끝, 모든 것의 소멸인가? 혹은 새로운 시작일까. 김범석 서울대학교 암병원 종양내과 교수는 '죽음은 직선이 아니다'에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 나선다. 20년 넘게 암 환자들을 치료해 온 그는 의사이자 한 인간으로서 삶과 죽음, 그리고 암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을 보여준다.
17살, 폐암으로 아버지를 잃은 경험은 그의 삶에 깊은 상흔을 남겼다. '죽음'이라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은 그를 의사의 길로 이끌었고, 응급실, 암 병동, 소록도 등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의료 현장은 그의 탐구를 위한 거대한 실험실이 되었다.
이 책은 단순한 의학 서적이 아니다. 저자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탐험하며 얻은 통찰을 섬세하고 다양한 시선으로 그려낸다. 특히 죽음을 '상전이' 현상으로 비유한 점이 흥미롭다. 물이 끓는점에 도달하는 순간 기체로 변하듯, 우리 몸 또한 어느 순간 임계점을 넘어서면 삶에서 죽음으로 넘어간다는 것이다. 죽음은 예측 가능한 것이 아니며, 삶과 죽음의 경계는 생각보다 훨씬 미묘하고 가깝다.
액체가 기체로 바뀌는 순간은 불현듯 찾아온다. 99도까지는 아무 일 없던 물이 100도가 되는 순간 갑자기 끓어오르며 수증기가 된다. 99도까지 올라가는 동안 1도, 1도 쌓여가는 징조는 100도가 되어야 변화로 이어진다. 그 지점이 임계점이다. 죽음도 그랬다.
모든 죽음은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죽음은 직선적이지 않다. 임계점을 넘어서면 몸은 한순간에 꺾인다. 임계점을 넘어서는 순간, 몸은 순식간에 변한다. 이쪽은 생生, 저쪽은 사死. 마지막 바이털이 끊어지는 순간까지도 그랬다. [본문 중에서]
책에서는 암을 '변형된 자아'라고 정의한다. 암세포는 우리 몸의 일부이지만, 동시에 통제를 벗어나 무한히 증식하며 개체의 죽음을 초래하는 아이러니한 존재다. '나'이면서 동시에 '내가 아닌 것'과 같은 이중성을 가진 암세포는 면역 체계를 교란하고 치료를 어렵게 만든다.
암 정복을 위한 인류의 투쟁, 그리고 새로운 패러다임
인류는 오랜 시간 동안 암을 정복하기 위해 싸워왔다. 고대 이집트의 파피루스 기록에서도 암에 대한 내용이 발견될 정도로, 암은 인류 역사와 함께해 온 질병이다. 하지만 암세포는 교활하게 진화하며 살아남는 법을 터득했고, 인류는 아직 암과의 싸움에서 완벽한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초기의 암 치료는 수술, 방사선 치료, 항암 화학 요법 등 '재래식 무기'에 의존했다. '독으로 암을 죽인다'는 항암 치료 개념은 암 정복에 대한 희망을 불어넣었지만, 동시에 심각한 부작용을 야기했다. 세포 독성 항암제는 정상 세포까지 무차별적으로 공격하여 환자에게 극심한 고통을 안겨주었다.
이후 분자 표적 항암제, 면역 관문 억제제 등 새로운 치료법들이 개발되면서 암 치료의 패러다임은 계속해서 변화해 왔다. 하지만 암세포는 진화를 거듭하며 내성을 키워왔고, 인류는 여전히 암과의 싸움에서 고전하고 있다.
저자는 암세포를 완전히 제거하는 것만이 답은 아니라고 말한다. 암세포의 성장을 억제하고 균형을 유지하며 공존하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다.
적응과 공존: 암 치료의 새로운 길
그리고 '적응 요법'이라는 새로운 치료법을 제시한다. 암세포를 완전히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 수준으로 유지하면서 공존하는 방법이다. 암세포를 완전히 사멸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암세포의 성장을 억제하고 균형을 유지하는 전략이 더 효과적일 수 있다.
적응 요법은 종양을 최대한 줄이는 것이 아니라 일정 수준까지만 줄이도록 치료제 용량을 조절한다. 항암 치료에 반응하는 암세포를 일부 남겨둬 내성 있는 세포의 성장을 억제하는 전략이다. 어느 정도 암세포가 죽으면 치료를 멈췄다가 다시 늘어나면 적정하게 약을 쓰는 방식으로 암을 안정화하는 것이다.
적응 요법의 목표는 암세포를 최대한 많이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종양세포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다. 이론적으로는 부작용이 적고 장기적인 독성도 낮다. 암을 사멸시키지 못할 바에야 암이 더는 번식하지 못하도록 근근이 억제하면서 어느 정도 암과의 공존을 허용하는 전략이다. (중략) 어찌보면 암과의 타협이라고도 할 수 있다. 암 때문에 불편하지 않는다면, 마음에 들지 않는 상대이지만 암과 같이 살아보겠다는 전략이다. [본문 중에서]
하지만 이러한 적응 요법은 아직까지 표준 치료법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치료법이 대중화하려면 대규모 3상 임상시험을 통해 효과를 검증해야 하지만, "이런 연구에는 아무도 대규모 연구비를 지원하지 않기 때문에 임상시험으로 입증하기 어렵다"라는 설명이다. 그래서 4기 암에 독한 항암제를 쓰다가 심각한 부작용을 겪는 경우는 많지만, 암과의 공존을 택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죽음을 이해하고 삶을 받아들이다
'죽음은 직선이 아니다'는 암과의 투쟁, 생명의 탄생과 진화, 그리고 죽음에 대한 통찰을 통해 우리 존재의 근원을 탐구하고, 삶의 가치와 의미를 되돌아보게 한다. 특히 암 환자들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고 남은 삶을 의미있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저자의 따뜻한 시선이 돋보인다. 그는 암 환자들에게 삶의 질을 유지하면서 암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제시한다.
이 책은 의학적 분석과 인문학적 성찰이 어우러져 있다. 특히 암을 '변형된 자아'로 바라보는 독창적인 관점과, 암과 공존하며 삶의 가치를 재발견해야 한다는 메시지는 감동을 준다. 다만, 암 치료에 대한 전문적인 내용이 일반 독자들에게는 다소 어렵게 느껴질 수 있다는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 부분을 극복하고 곱씹어 읽는다면, 암 환자뿐 아니라 삶과 죽음에 관해 고민하는 모든 사람에게 깊은 울림을 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