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포포 매거진은 '엄마의 잠재력을 주목합니다'라는 슬로건으로 2019년에 창간한 매거진이다. 포포포 POPOPO는 connecting PeOple with POtential and POssibilities의 약자로 가능성, 그중에서도 엄마의 잠재력에 주목한다. 아직 조명되지 않은 누군가의 잠재력과 서사를 발굴하고 함께 연대해 나가는 여정을 지면으로 기록해 나가고 있다. 라이프인은 7개국 포포포 매거진 에디터의 글 연재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나는 공간과 친해 본 적이 없다. 처음으로 독립해서 원룸에 살 때, 나만의 공간을 만든답시고 좋아하는 그림엽서도 붙이고 해보았지만 여전히 그 공간에 애정을 갖지는 못했다. 그림엽서를 붙인 그 벽은 좋아했지만 그뿐이었다. 텅 비어 있는 커다란 하얀 벽에 조그마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내 취향들이 외로워 보였는지도 모르겠다. 매일 밤 눕는 침대마저도 아늑한 기분보다는 여행지 숙소 침대에서 자는 기분을 느끼곤 했다. 침대에 누워 잠들지 못한 채 뒤척였던 밤들이 가득했다.
부모님과 같이 살던 집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나는 늘 독립을 꿈꿨다. 나만의 공간이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나는 나만의 공간을 갖기 위해 늦게 자는 것을 선택했다. 모두가 잠든 시각의 고요가 바로 나만의 공간이었다.
나는 왜 마흔이 되도록 친해진 공간 하나 없는 걸까 생각하다 보니 내가 느린 사람이라서 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나는 한곳에서 오래 머무른 적이 없다. 중학교 때까지 일이 년에 한 번씩 이사를 했다. 친해지고 익숙해질 만하면 새로운 곳에 적응해야 했는데 나는 또 적응에 긴 시간이 필요한 사람이었다.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전학 때문에 긴장하고 심란해하던 감정들이 다시금 떠오른다. 그래서 한때는 고향을 가졌거나 어린 시절 한 동네에서 오래 지낸 사람들을 부러워했다. 내게는 공간에 얽힌 감정이 없었기 때문이다.
고등학교에 가서야 겨우 삼 년을 통째로 한 학교에 다녔다. 그러고 나서도 몇 번의 이사가 있었지만 내게는 더 이상 우리 동네, 우리 집은 중요하지 않았다. 공간에 정을 주는 법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프랑스에 온 지 십 년이 되었다. 대략 오 년 동안 나는 여행자 같은 삶을 살았다. 내 짐은 캐리어 두 개가 다였다. 가구가 모두 구비되어 있는 원룸이나 하숙집을 찾아 세 번의 이사를 했다. 그러다 님의 집에 정착해 이 년 반을 살다가 지금의 집에 이사 와서 산 지 사 년이 조금 넘었다. 아마 이 집에서는 오래 살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아이들이 각자의 방을 가지고 싶다고 아우성치기 전까지는 말이다.
여태껏 프랑스에는 우리 집이 없었다. 결혼을 하고도, 첫 아이를 낳고도, 내게 우리 집은 한국에 있는 부모님 댁이었다. 그러다 지금 사는 집으로 이사를 오고 둘째 아이를 낳고 나니 자연히 지금 사는 집이 우리 집이 되었다. 이제는 자연스럽게 친정집이라는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도 나는 이 집이나 동네나 내가 사는 나라에 애정을 가지지 못한다. 나는 한국에서도 프랑스에서도 이방인이다. 한국 사람도 프랑스 사람도 아닌 낀 사람이 된 기분인데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했다는 이 느낌은 꽤 이상하면서도 외롭다. 물론 나를 정의하는 것이 내가 사는 나라나 내가 태어난 나라일 필요는 없다. 국적, 성별, 가정에서 가진 이름, 사회에서 가진 이름 등을 다 지우고 그저 나로 존재하면 된다. 하지만 동시에 그 어디에도 소속감을 느낄 수 없다는 것은 슬프기도 하다. 삼십 년을 사귄 친구와 십 년 만에 만났는데 서로 영 어색하고 예전 같지 않다는 느낌을 받았을 때의 실망감이라고 하면 좋을까. 프랑스에 우리 집이 있다고 말하는 데 십 년이 걸렸으니 이 집에서 십 년을 살면 애정이 생기려나. 내가 선택해 만든 가족들이 함께 또는 따로 이야기를 만들어갈 이 집. 바로 우리 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