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낳으면 1억!" 저출생을 '문제'로 정의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출산지원금을 준다는 정부와 기업의 정책을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다. 아이를 양육하는 부담을 줄이겠다며 아이 돌봄을 확대하려는 다양한 노력도 있다. 그러나 지난해 기록한 우리나라 합계출산율은 관련 통계 작성 이래 최저 수치인 0.72명. 앞선 정책들의 효과가 유의미해 보이진 않는다.
결혼과 출산이 당연한 인생의 경로로 여겨지던 시대는 진작 지나갔고, 청년들은 결혼을 기피하고 출산을 선택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정말로 저출생 현상을 해결하고 싶다면 그 이유를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 한국 사회가 경제 성장과 발전을 금과옥조처럼 여기면서 뒤로 미뤄두었던 것들이 무엇인지 살펴보고,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24일 서울 중구 대한상공회의소 국제회의장에서 열린 '제15회 아시아미래포럼'은 '저출생 축소사회,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이라는 주제로, 저출생 현상을 사회·문화·경제 구조의 문제로 바라보며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모색했다.
■ 저출생 위기 아닌 '저출생 현상', 젠더 관점에서 구조적 문제 살펴야
첫 번째 기조발제에서 김현미 연세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는 우리 사회 재생산 구조의 위기를 야기한 원인을 분석하고 가부장적 사회 구조, 신자유주의 경제 체제, 민주주의 가치의 훼손 등을 극복하기 위한 방안을 이야기했다.
김 교수는 우리가 기존에 갖고 있던 민주주의-인구 변동-경제 발전이라는 3중 구조, 즉 경제 발전으로 인한 혜택이 민주주의를 통해 재분배될 것이라고 믿었던 신념 체계가 와해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리고 그 이유를 가부장제와 신자유주의의 결합에서 찾으며, 현 저출생 현상을 야기하는 구조적 문제를 젠더 관점에서 분석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구체적 통계를 들어 한국 여성들이 노동시장에서 겪는 성차별 문제를 드러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가장 큰 성별 임금 격차, 남성 고용률보다 15% 이상 낮은 여성 고용률, 12년째 OECD 회원국 중 최하위를 기록한 '유리천장' 지수, 높은 모성 페널티(출산한 여성이 일터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불이익을 의미) 수준, 악조건에서 여성을 고위직에 발탁하고 실패의 책임을 지도록 하는 '유리 낭떠러지'(유리절벽), 페미니즘 사상검증 등. 특히 김 교수는 최근 몇 년간 여성혐오 기제로 쓰이고 있는 이른바 '집게손가락 논란'(특정 손 모양이 남성을 비하하는 의도를 담고 있다는 주장) 등을 강력히 비판하며 "이런 이유로 해고되는 여성이 한두 명만 생겨도 여성들에게 엄청난 심리적 압박감을 준다"고 말했다.
또한 정부가 저출생을 심각한 문제라고 말하면서도 정치인과 기업들의 노골적인 여성혐오를 묵인하고, 일터와 고용주의 변화 없이 여성들에게 일과 가정의 양립을 주문하는 이중적 태도를 지적했다. 뿐만 아니라 김 교수는 "청년 남성들이 (청년 세대가 겪는 어려움에 책임이 있는) 기득권 남성에게 저항하는 대신 동료 시민인 여성을 괴롭히는 방식으로 폭력을 자행하고 있고, 딥페이크 같은 기술 매개 성폭력이 급증하는 데 기업은 방관하고 있다"고 성토했다.
김 교수는 이러한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공동체적 해법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현재의 저출생 현상은 "인구 위기가 아니다"며 "실제 위기는 사회적 재생산의 위기다. 사회가 건강하게 재생산되려면 태어난 인구가 사회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다양한 소셜 서비스가 제공돼야 한다"고 설명했다. 김 교수가 말하는 사회적 재생산이란 사람을 출산하고 사회적 존재로 만드는 모든 과정을 의미하는바, 건강한 사회적 재생산을 이루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가 나를 돌보고 있다'고 체험적으로 느낄 수 있는 보편적 복지와 돌봄이 필요하다.
아울러 김 교수는 공동체적 해법을 찾기 위한 민주주의 발전 방향을 이야기하며, 모두가 스스로를 노동자, 돌봄 수행자, 참여적 시민이라는 3중의 다중적 위치를 가진 존재로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또한 "여성들의 모욕과 폭력 경험을 모른 척하고, 많은 남성들이 겪는 불안정 고용 속 삶의 위기를 모른 척한다면 저출생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와 같은 분석과 진단을 바탕으로 김 교수는 노동-돌봄-참여적 시민 모델을 제시했으며, 구체적으로는 ▲국가와 기업의 책임 강조 및 예측 가능한 사회적 돌봄 제공 ▲성평등, 다양성, 협력의 가치, 지역 다양성 보존 등에 대한 교육 ▲모든 일터에 성평등, 돌봄 존중 정책 도입 ▲생태 중심 전환을 통해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제공된 자연 자원의 독점 방지 등을 제안했으며, 이를 실현하기 위해 정부와 기업이 제 역할을 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출생률 제고, 사회·경제·문화 구조적 변화 없이는 불가능
이어 미국의 경제학자이자 미국 매사추세츠대학교 명예교수인 낸시 폴브레 교수(前 세계여성경제학회 회장)가 '경쟁, 연대, 그리고 돌봄: 한국의 인구 유지 수준 회복을 위한 길'이라는 주제로, 자본주의 시장에서 불평등하고 불균형한 발전 양상이 나타난 원인을 짚은 뒤 이를 바탕으로 한국 정부에 전하는 정책적 시사점을 이야기했다.
우선 폴브레 교수는 과도한 사적 재화의 추구, 협력을 통한 공유재 유지 및 관리의 실패에서 현 사회가 당면한 문제의 원인을 찾았다. 또한 공유재를 유지하기 위한 '협력'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민주적 권위가 중요하나, 그동안 사회에 만연했던 권위란 가부장적 권위였다는 점을 꼬집었다.
폴브레 교수는 이처럼 가부장제를 중심으로 한 자본주의 제도 때문에 "여성은 종속적 존재가 되고 결과물의 분배가 불균형하게 이루어졌다"고 비판했다. 여성에 대한 차별, 유급 고용에서 여성의 배제, 여성에게 가중된 가족 돌봄 부담 등의 문제가 발생했고 그 안에서 자본주의는 가정이 창출한 노동력을 보상하지 않고 이용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부모가 된다는 것은 경제적 기여보다 개인의 선택으로 치부됐고 선택에 치부되는 비용은 증가"하며 출생률은 하락했다.
이에 폴브레 교수는 가족 돌봄의 가치를 고려하지 않는 현 자본주의 구조와 불공정한 복지 국가의 문제를 지적하며 "미래의 노동 인구를 출산하는 부모 세대는 보상을 받지 못하고 정부는 자녀 양육에 따른 비용 이상으로 혜택을 사회화했다"고 분석했다.
폴브레 교수는 이와 같은 분석으로 기반으로 정책 제안을 남겼다. 그는 비용 측면에서 "가정의 자녀 양육비 변화 대비 출생률 변화를 추적해야 한다"며 "이 계산을 하기 위해서는 한국 가정이 자녀를 성인으로 양육하는 데 드는 현금지출, 노동을 하지 못하면서 발생하는 잠재적 소득 손실, 여가 시간의 손실 등에 관한 정확한 추정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또한 돌봄의 문제와 낮은 육아휴직 이용률 등 문화적 요인을 지적하고, 돌봄 노동자의 처우 개선 및 이민 친화적 사회로의 전환 등을 이야기했으며, 가부장적 구조의 틀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출생률 제고를 위한 다른 정책적 시도들이 효과 있을 것이라고 제언했다.
발제 이후 '젠더 불평등과 저출생: 뒤얽힌 실타래를 풀 해법은 어디에 있을까'라는 주제로 패널 토의를 진행하며, 저출생 현상을 야기한 사회 구조적 문제와 해법에 관한 논의를 이어 갔다.
윤자영 충남대학교 경제학 교수는 노동시장 성 불평등과 출생률 하락의 관계를 짚었는데, 정부와 기업이 공공재 생산을 외면함으로써 여성이 노동시장에 참여하더라도 독립적이고 온전한 생계를 영위하지 못하게 만들고 여성이 무상의 돌봄 노동을 하고 경제적 불이익을 떠안게 했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렇기에 윤 교수는 "일터를 바꾸는 것이 중요하다"며 ▲돌봄 존중 정책 활성화 및 돌봄 수행 노동자에 대한 차별 금지 ▲일-가정 양립 정책의 특권화(정규직 등 고용이 안정된 노동자만 활용 가능) 해소 ▲노동 시간 단축 ▲노동 시간 유연화를 위한 기업의 책임 강화 ▲일-가정 양립 정책 보편화 등을 이야기한 뒤 "성장과 진보를 재정의하지 않는다면 돌봄과 지원도 결국 경제 성장, 일자리 확장에 그칠 것"이라고 말했다.
송다영 인천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前 서울시 여성가족실장)는 정부가 시행해 온 저출생 대책의 내용과 한계를 살펴본 뒤 △'기울어진 운동장'(공정한 경쟁이 불가능한 상황)에 대한 성인지적 관점 부재 △강력한 생산주의 사회 구조 및 장시간 노동 △성차별 구조 재생산 등을 지적했다.
이어 "사회는 생산과 재생산이라는 양 날개로 날아가는데 우리나라는 생산중심적, 유급노동중심적 사고만을 해 왔다"며 "개인이 삶의 주권을 온전히 갖고 여가도 누릴 수 있어야 아이도 낳지 않을까. 그리고 남자만 유급 노동을 수행하는 중심적 사람으로 보는 인식을 바꾸고, 일도 돌봄도 평등하게 하는 사회 구조를 만들어 내는 것이 더 좋은 사회로 나아가는 기본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여성학자인 백경흔 박사는 성평등한 아동 돌봄 제도가 필요하다는 점을 짚었다. 그는 한국 사회에 공적 아동 돌봄이 충분하지 않다고 꼬집으며 "여전히 워킹맘이 취업하는 일은 나쁜 엄마가 되는 죄책감을 극복해야 하는 윤리적 문제가 되고 (공적 돌봄 체계 미흡 등으로) 워킹맘의 자녀는 질 낮은 돌봄을 받아야 한다"며 "아동 돌봄의 전문성이 무엇인지 재규정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아동 돌봄 일자리를 재정립해야 하며, 아동 관점의 돌봄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계층 문제를 지적하며 "계층 연대를 통해 아동 돌봄 제도 변화를 위한 정치적 세력화가 필요하다"고 말했고, "아동 돌봄의 문제는 성평등과 아동의 안녕을 중심에 두어야 한다"는 점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
마지막으로 최혜지 서울여자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참여연대 사회복지위원회 위원장)는 돌봄 중심의 복지 국가(돌봄 복지 국가)로의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며, 돌봄 복지 국가로 전환하는 여정에서 우리 사회는 어느 지점에 있는지를 살펴봤다.
최 교수는 "모든 사람이 모두의 돌봄에 대해 책임이 있다. 이렇게 상호 의존과 관계의 공정에 기반한 돌봄 개념이 복지 국가 틀 안으로 들어올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또한 '배제'를 형성하는 돌봄 제도, 시장의존적 돌봄 정책 확장, 여성화되고 고연령화된 돌봄 노동 등의 문제를 지적했으며, 성평등 관점에서 복지 정책 재점검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아울러 점과 돌봄을 할 권리와 받을 권리를 포괄하는 '기본권으로서 돌봄'(돌봄권)이 돌봄 복지 국가의 핵심이라고 설명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