쨍하게 햇빛이 비치는가 싶더니 부슬부슬 내리는 비에 초가을 운치가 더해진다. 저 산이 지리산인가? 무채색 고층 건물이 익숙한 눈에 초록빛 산골 풍경을 담으며 굽이굽이 산길을 따라 지리산자락에 자리한 남원 산내면으로 향했다.
고즈넉하고 호젓한, 산골 동네에 흔하게 붙일 법한 수식어가 어울리는 마을. 그러나 그 안을 들여다보면 각자의 속도와 모양으로 삶을 꾸려 가는 지역 주민들이 보이고, 많은 이들이 금과옥조처럼 여기는 '도시에서의 삶'을 떠나 다른 삶의 방식을 선택한 청년들이 보이며, 남원 시내에서도 30~40분을 더 달려야 도착하는 외진 마을을 기꺼이 찾는 사람들이 보인다. 또 산내면에 대해 찾아보다 보면 마을 인구 중 25% 이상이 귀농·귀촌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1998년 실상사 귀농학교가 문을 연 이후 꾸준히 귀농·귀촌 인구가 유입됐다고 한다), 매년 비영리 영역에 종사하거나 관심 있는 사람들을 위한 행사가 열려 적지 않은 외지인이 방문하는 지역이라는 점을 듣게 된다.
아니, 이런 복잡한 설명은 필요 없을지도 모른다. 그저 정겹다. 자연이 주는 정취와 사람들의 온기가 조화롭게 어우러져 정겨운 마을이다. 평범해 보이는 산골 마을이 가진 이 활력은 어디에서 비롯하는 것일까.
임현택 지리산이음 이사장을 만난 장소는 작은변화베이스캠프 들썩이었다. "늘 일상적으로 들썩들썩한 공간이 됐으면 좋겠다"는 지리산이음 활동가들의 마음을 담아 이름 붙인 공간. 임 이사장은 이곳을 거점 삼아 마을을, 지리산 일대를 사람들로 들썩이게 만들고 있었다.
"이 마을에 귀촌한 3명의 시민사회 활동가가 마을 주민들과 협력해서 마을카페(카페 토닥)를 만들었다. 그러면서 우리가 가진 생각과 우리가 하는 여러 가지 일들이 이 지리산으로 연결되면 어떨지 생각하며 사람들을 만났다. 이후에는 마을 사람이나 지리산 사람들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대안을 고민하고 시민사회 활동, 공익 활동을 하고 있는 사람들도 함께할 수 있는 활동을 고민했다. 사람들이 연결되고 교류하며 새로운 변화를 같이 꿈꾸고 이야기할 수 있는 곳이 지리산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상상을 했다."
지리산이음의 조직 명에 '이음'이 들어간 이유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이음이란 사람들을 '잇는다'는 의미도 되고 다른(異) 목소리(音)를 연결한다는 뜻도 된다. 특정한 의제로 사람들을 모으기 보다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서로 자신의 이야기를 전하고 그 목소리와 뜻이 연결되도록 하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 나와 '다른' 의견을 '틀린' 의견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강해진 작금의 사회에서 지리산이음은 사람들이 자유롭고 안전하게 의견을 나눌 수 있는 공간을 넓혀 가고자 한다. 그래서 임 이사장을 비롯해 조아신(본명 조양호) 전 이사장, 오관영 전 이사장 등 지리산이음의 활동가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마을을 중심으로, 또 지리산권을 중심으로, 그리고 지리산권과 전국을 연결하며 활동한다.
지리산포럼 역시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자유롭게 교류할 수 있는 '축제형 포럼'을 표방한다. 지리산포럼은 지난 2015년, 사람들이 가진 변화에 대한 열망, 변화를 위한 아이디어, 작은 변화를 위한 노력을 함께 터놓고 나누자는 취지로 시작한 이래 1년에 한 번씩 사람들이 모이고 서로를 환대하는 장(場)을 열고 있다.
올해로 10회째를 맞은 지리산포럼에서는 어떤 이야기들이 오갈지 궁금했다. 그리고 지리산이음이 만들어 가는 변화에 관해 듣고 싶었다. 이에 '지리산포럼 2024'가 열리던 날, 작은변화베이스캠프 들썩을 찾아 임 이사장을 직접 만났다.
지리산포럼이 10회를 맞았다. 특별한 소회가 있는가.
그냥 하던 대로 하다 보니 벌써 10년이나 했네, 이런 느낌이다. 10회라는 사실을 인식하긴 했는데, 꼭 10회를 부각해야 하나 싶었다. 그래서 특별하게 이벤트를 준비하진 않았다. 10년이라는 기간보다 우리와 뜻을 같이 하는 조직들이 다양해졌단 사실이 더 큰 의미가 있고, 그것이 우리의 큰 자산이라 하겠다.
이번 행사 타이틀이 '새로운 바람을 잇다'여서 10회를 맞아 새로운 변화를 준비하겠다는 의미를 담았나 싶었는데, 아니었나 보다.(웃음)
특정한 하나의 이슈를 가지고 진행하는 포럼이 아니다 보니까 행사 이름은 언제나 조금 두루뭉술하게 짓는다.(웃음) 연초에 포럼을 계획하며 우리 사회는 어떻게 변화해야 할지, 특히 현재 시민사회가 어려운 시기를 겪고 있는데 지금의 어려움을 어떻게 바꿔 가야 할지 고민했다. 그리고 이러한 맥락 안에서 사람들을 연결하기 위해 필요한 상상은 무엇일지를 고심했다. 중간지원조직이 없어지고 정책 지원이 끊기고. 소셜섹터에 있는 사람들이 일을 그만둘 수밖에 없는 여러 가지 상황들이 생겼다. 객관적으로 힘든 시기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가 혼자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새롭게 연결되고 그 연결 자체가 새로운 바람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말하자면, 현 사회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일이 무엇일지 고민하면서 정한 행사 명이다.
올해부터 마을 사람들이 도슨트가 되어 마을 길을 안내해 주는 프로그램이나 마을 사람들과 만나 산내 지역에서 살아가는 이야기를 듣는 프로그램이 마련됐는데.
늘 고민했던 점이 있다. 우리가 포럼을 열면 100여 명 이상이 마을에 오고, 이분들이 우리와 연결된 인근 식당이나 민박들을 활용한다. 또, 포럼에 오는 분들 대개가 마을 이야기를 궁금해하고 살펴보려고 한다. 이런 분들은 마을을 구경하고 산이나 절에 가기도 한다. 그러니 민박 주인이나 식당 주인, 마을 주민들 모두 '마을에 무슨 행사가 열리나 보더라'고 물으며 어떤 행사인지 궁금해했다.
그래서 주민들도 지리산포럼에 참여할 수 있도록, 그리고 행사를 마을이 함께 준비할 수 있는 분위기가 되도록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외부 사람들도 마을을 가까이에서 느끼고, 마을 사람들도 외부 사람들에게 더 친근하게 다가설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하고 싶어서 이런 프로그램들을 넣어 봤다. 또, 마을 안에 지리산이음 후원 회원이 50여 명 정도 있다. 마을 주민들과 함께하는 프로그램은 후원 회원들의 참여를 이끌어내는 과정이기도 하다.
올해 초 신임 이사장으로 취임하면서 남긴 인사말을 보면 '작은 변화'를 굉장히 강조한다. 기후위기, 민주주의 위기, 불평등 문제와 같이 현 사회가 당면한 큰 위기 앞에 작은 실천 행동들이 때로는 무력하게 느껴지기 쉬운데, 작은 변화가 가진 힘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2018년도에 아름다운재단과 협력하여 '지리산 작은변화지원센터'라는 지원 조직을 만들었다(임 이사장은 해당 센터의 센터장을 맡고 있다. -편집자 주-). 공익 활동이나 시민사회 활동이 활발하지 않고 그런 활동을 지원하는 조직이 존재하지 않는 지역에서, 6년 정도 작은 변화를 지원하는 실험을 했다. 그러면서 느낀 점은 작은 변화들이 모이고 모여서 큰 변화를 만든다는 사실이다. 하루아침에 큰 변화가 만들어지진 않는다. 특히 정치적인 변화를 만들고 기득권층을 움직이는 일은 작은 변화들이 하나씩 만들어져야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언급한 기후위기, 민주주의 위기, 차별, 불평등과 같은 문제들은 지역에서도 똑같이 나타난다. 그런 사회 문제들을 그냥 방치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대안을 연구하고, 마을과 지역 단위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을 찾고, 이웃 간에 서로 돕는 분위기를 만들어 내려고 한다. 작은 변화는 하나의 작은 변화로 존재하기보다 서로 연결되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의미가 커지고 더 큰 변화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확장'이라고도 설명할 수 있겠다. 자신이 관심 있는 의제를 갖고 활동하다 보면 다른 의제로 활동하는 사람을 만나고, 그러면서 활동의 영역이 연결되고 서로의 활동이 가진 힘이 커지는 것 아닐까.
지난해 말에 '지리산 활동가 대회'를 개최했다. 그때도 이곳에 100명 정도가 모였다. 지리산권 활동가만 100명이 모인 것이다. 신기하지 않나. 보통은 모이자고 해도 남원 활동가들, 함양 활동가들, 이렇게 지역별로 모였다. 이번에 '지리산 활동가들 한번 모여 보자!' 이런 마음으로 추진해 봤는데 신선하고 재미있었다. 여러 영역에서 활동하는 분들이 와서 자기가 하는 일을 소개하고 다양한 시각으로 우리가 당면한 문제를 바라보고 서로를 응원할 수 있는 기회였다. 이때도 각지에서 점점이 일어나는 활동들을 연결했을 때 어떤 시너지 효과가 발생하는지 느낄 수 있었다.
작은 변화들이 연결되려면 작은 변화를 실천하는 과정에서 지치지 않아야 할 텐데, 어떻게 하면 지치지 않고 활동을 이어 갈 수 있을까?
내가 가진 고민이 나의 고민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나눌 수 있으면 좋겠다. 동질감을 느끼고 해결 방법을 함께 찾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같이 모일 기회를 한 번이라도 더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일례로 2년에 걸쳐서 비영리 생태계 종사자들이 모이는 캠프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도 했다. 캠프 참가자들이 서로 활동 경험을 나누는데, 대부분 힘들고 어려운 부분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했다. 그렇게 고민을 공유하면서 내가 혼자 외롭게 활동하고 있지 않고 주변에 동료들이 있다는 심적 지지를 얻을 수 있다. 지리산이음도 이런 자리를 많이 마련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계속 '연결'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사실 연결이나 관계, 신뢰 같은 요소들은 수치로 가시화할 수 있는 성과는 아니지 않나. 그럼에도 지역에 이런 자산이 쌓여야 변화가 만들어질 텐데, 이렇게 눈에 보이지 않는 자산이 쌓여 변화를 만든 실제 사례가 있다면?
하동에 '오! 하동'이라는 주민신문이 있다.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해당 내용을 주민들에게 어떻게 알릴 수 있을지 지역 안에서 고민하던 시기였다. 그때 우리는 마을 미디어를 어떻게 설립할 수 있는지, 마을 미디어의 역할은 무엇인지 학습하는 기회를 제공하고 설립을 지원했다.
또, 동네 예산 공부 모임을 만들어서 주민들과 함께 군 예산을 보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군청과 군 교육청에서 같은 부지에 도서관을 설립하려고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결국 도서관은 행정이 원하는 대로 건립됐지만 모임을 함께했던 사람들은 해산하지 않고 우리가 원하는 형태의 도서관을 운영하기도 하고, 지역 생협을 조직하기 위해 모이기도 하고, 민주시민 교육 모임을 만들기도 했다. 지리산에 케이블카를 건설하거나 도로를 만들려고 하는 움직임에 대응하면서 지리산을 지속 가능하게 보존하는 데 뜻을 모아 네트워크를 만들기도 했다. 결국 건물을 건립하는 것 같은 물리적 성과보다 사람들이 이슈에 대응하는 대안적인 활동들이 곳곳에서 만들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다.
추상적인 질문일 수도 있겠으나 지리산이음이 생각하는 '연결'은 어떤 모습인가?
지리산이음과 어떤 조직을 연결한다, 지리산이음과 어떤 사람을 연결한다는 식의 직접적 연결을 이야기하기보다 연결의 허브 역할을 하려고 한다. 우리를 통해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지속 가능한 연결을 만들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그리는 상(像)이다. '연결'을 연결해 주는 역할을 하고 싶달까.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다면?
비영리 영역 종사자들에게서 한 번쯤 지리산포럼에 가 보고 싶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그래서 변화를 만드는 사람, 변화를 지향하는 활동하는 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연결된 조직이 지리산이음이었으면 좋겠다는 상상을 한다. 시민사회, 공익 섹터, 비영리 섹터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한 번쯤 지리산포럼에 와 보고, 한 번쯤 지리산이음을 만나고, 꾸준히 지리산이음의 활동에 관한 소식을 받아본다면 의미 있지 않겠는가.
그리고 어떤 시도를 했을 때, 시도가 성공하든 실패하든 그러한 경험들을 토대로 다시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게 된다. 그렇기에 활동가들이 새로운 시도를 주저하지 않길 바라고, 우리 안에서도 '이런 시도를 해 보면 재미있을 것 같다, 이런 활동을 사람들이 고민하던데 우리가 프로그램으로 만들어 볼까?' 이런 이야기를 끊임없이 한다. 그래서 지리산포럼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여러 사람들을 연결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새롭고 다양하게 구상하고 있다. 또, 외부에 있는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그런 시도들을 할 수 있게끔 만들려고 한다. 공간 이름처럼 들썩들썩한 공간이 됐으면 좋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