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레생협은 민중교역 20주년을 맞아 '연대, 호혜, 상상 It's 민중교역'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올해 민중교역에 대한 다채로운 행사를 선보인다. 민중교역은 생산자와 소비자의 연대를 시작으로 생산자들의 자립을 지원하기 위한 매개 또는 문제의 해결 방안으로서의 교역을 뜻한다.

지난 25일에는 두레생협연합회 메인홀에서 '연대, 호혜, 상상' 중 마지막 키워드인 '상상'을 주제로, 민중교역의 확장 가능성을 확인해 보는 '환대와 상상 패널 토크'를 개최했다. 

이번 패널 토크는 두레생협이 추구하는 민중교역('사람과 사람간의 연대')이 바다 건너 멀리 있는 게 아닌, 또 '소비자-생산자'로 정의되는 것을 넘어,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에서도 '민중교역의 가치'를 느낄 수 있음을 함께 이야기 나누고 싶어 기획된 것으로 우리 사회와 공동체에서 민중교역의 관점을 어떻게 넓혀갈 수 있는지 새로운 민중교역을 상상해 볼 수 있는 자리다. 
 

▲ (왼쪽부터) 팔레스타인에서 온 나리만루미, 필리핀에서 온 크리스탈 파라스, 고은주 울림두레돌봄사회적협동조합 이사장.
▲ (왼쪽부터) 팔레스타인에서 온 나리만루미, 필리핀에서 온 크리스탈 파라스, 고은주 울림두레돌봄사회적협동조합 이사장.

외향묘사를 포함한 자기소개로 시작한 이날 행사는 100여 명의 관객이 참여한 가운데 두 명의 해외 초대손님과 내국인 두 명을 초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첫 번째 이야기 손님으로 나온 나루만루미는 팔레스타인의 베들레햄시에서 자치 공무원이었으나 한국에 도시행정학을 공부하러 왔다. 현재는 박사 과정을 공부하고 있다. 나루만루미는 가자 지역의 현재 상황을 전하며, 팔레스타인의 인권과 안전 그리고 평화, 문화유산으로서 올리브 나무의 중요성에 관해 1시간가량 소개했다.

성스러운 땅에서 죽음의 땅으로···. 우리가 원하는 것은 '평화'

팔레스타인은 중동에 자리 잡고 있고 서역으로 가는 관문으로 주요 종교들이 시작한 성스러운 땅이기도 하다. 비록 소수였지만 유대인은 현재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땅에서 계속 살고 있었다. 1880년대 팔레스타인의 유대인 인구는 3%에 불과했다. 그들은 정치에 관심도 없었고 근대 유대인 국가를 세울 뜻도 없었다. 그런데 19세기 말 동유럽에서 시오니스트 운동이 일어났고 시오니스트들은 '유대인 국가'를 세우길 원했다. 그들은 하나님이 팔레스타인 땅을 유대인에게 약속하셨다고 주장했고 자신들의 주장을 현실화하기 위해 팔레스타인 땅을 사들여 유대인 촌(정착촌)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런 정착촌은 급속하게 증가해 1950년에는 214개의 정착촌에 67,550명의 유대인이 거주했다. 정착촌을 통해 동유럽 유대인들은 당시 팔레스타인을 점령하고 있던 영국의 협조로 팔레스타인을 식민화하기 시작했고 유대인 국가 건설의 토대를 마련했다. 다른 한편 동유럽에서의 반유대주의로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유입이 늘어났고 1922~35년 사이 유대인 인구는 9%에서 27%로 급증했다. 이후 UN은 유대인 정착촌을 인정해 1947년 분리계획에서 전체 팔레스타인 땅의 55%를 이스라엘에 분할시켰다. 그 결과 이스라엘 영토는 주요 해안지역은 물론 팔레스타인인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주요 도시를 둘러싸고 형성됐다. 팔레스타인인들은 주요 농업지역과 해안을 빼앗겼고 팔레스타인 지역들은 서로 단절되고 고립되는 형국이 됐다. 팔레스타인은 분리계획에 저항했지만 곧 전쟁이 일어났고 결국 패해 땅을 잃었다.

지난해 10월 7일 이스라엘과 하마스 간 전쟁이 발발했다. 2014년 7월 가자지구 분쟁 이후 9년 만에 발발한 이스라엘-하마스 간 전면전이다. 나루만루미는 지난해 전쟁이 갑자기 시작된 것이 아니고 10여 년 전부터 이스라엘과의 전쟁이 계속됐다며 팔레스타인 국민이 바라는 것은 '평화'다. 이러한 사실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 첫 번째 이야기 손님으로 나온 나루만루미(팔레스타인).
▲ 첫 번째 이야기 손님으로 나온 나루만루미(팔레스타인).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쫓아내고 땅을 차지하기 위해선 그들 삶의 근간을 이루는 올리브 나무를 뽑아내는 게 가장 빠른 방법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10월과 11월은 가장 빛나는 계절로 풍요의 올리브 수확철이다. 그렇기에 매년 10월이 되면 가족들이 모여 떠들썩하게 올리브 열매를 딴다. 배고픈 과수원 노동자들과 함께 넉넉히 음식을 나눠 먹는 즐거움도 있다.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땅에서, 수백 년 된 올리브 나무를 가꾸며 삶을 살아온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올리브란 '영혼'과 '정신'의 상징과도 같다. 올리브 나무는 민화나 전통적 그림에도 등장하며, 모든 음식에서도 빠지지 않는다. 또 팔레스타인이 착용하는 전통스카프(카피예) 문양도 올리브 나무에서 나온 것이다. 실제로도 올리브 나무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존재 뿌리를 이룬다. 서안 지구와 가자 지구의 거의 절반의 면적(48%)에 올리브 나무 1,000만 그루가 심겨 있다. 올리브 나무는 팔레스타인 전체 과일 생산의 70%를 차지하며, 전체 농업 소득의 25%에 기여한다. 경제의 주요 품목으로 수십만 가구가 올리브 생산에 경제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또한 팔레스타인인들이 심는 나무의 85%는 올리브 나무이다. 올리브, 오일, 피클, 비누 등 팔레스타인의 두 번째 수출 품목이기도 하다. '집안에 올리브 나무가 있으면 굶어 죽지 않는다'는 오랜 속담이 예증하듯, 수천 년부터 지금까지 올리브 나무와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그렇게 더불어 공생하며 살아온 것이다.

올리브 나무는 짧게는 수백 년, 길게는 2000년까지 산다. 가물고 척박한 땅에서도 질긴 생명력으로 버텨낸다. 베들레헴의 알 왈라자 마을에는 수령이 무려 4000년으로 추정되는 올리브 나무도 있다. 1948년 이스라엘이 점령하기 훨씬 이전부터 대부분의 올리브 나무는 그렇게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함께 땅을 지켜왔다.

식민 지배자 이스라엘의 눈에 당연히 올리브 나무는 들보처럼 성가신 존재였다. 1967년 전쟁 이래 지금까지 200만 그루의 올리브 나무가 파괴됐다. 작년 한 해에만 10만 그루가 잘려져 나갔다. 그 덕에 수만 명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생계를 잃었다. 

올리브 나무는 심고 기르는데 굉장히 어렵다. 올리브 나무는 성장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고, 처음에 심으면 많은 물을 부어줘야 한다. 한 그루를 심었을 때 1,000컵에 해당하는 물을 부어줘야만 잘 성장할 수 있는데 지금처럼 지역에 물이 부족한 상황에서는 많은 올리브 나무를 심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에 불과하다.  

나루만루미는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올리브 나무는 유산이기도 하다. 100년, 200년이 지나야만 올리브 열매를 맺을 만큼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려야 수확할 수 있는 나무이기 때문에 물려받는다는 것의 의미는 앞으로 보존하고 잘 자랄 수 있도록 역할을 얻는다는 차원에서 단순한 나무가 아니다"라며 "그런 나무를 잘라내는 것은 우리의 역사마저 파괴하는 것과 같다"라고 말했다. 
 

두 번째 연사로 나선 크리스탈 파라스는 필리핀에서 한국으로 온 노동자로 한국에 23살에 건너와 24년째 거주하고 있다. 한국의 공장에서 8년 정도 일을 했었고 지금은 아이돌봄, 가사 노동을 하고 있다.

크리스탈은 필리핀 해외 이주노동 특히 한국에 찾아온 등록 및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의 삶에 관해 이야기했다.  

크리스탈은 본인이 공장에서 일한 경험을 토대로 미등록(불법취업자) 상태에서의 근무환경 어려움을 소개했다. 

"공장에서 일할 때는 일주일에 6일을 일했었고 하루에 11시간을 일하며 나쁜 말들을 들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에 2만 3천 원을 받았다. 지치고 병이 들어 일을 하지 못한 날에는 페널티로 일당의 2배를 뱉어 내야 했다. 그런 생활을 양말자수공장을 다니면서 했다. 공장에서 일은 고된 노동이 가장 힘들었다. 11시간을 쉬지 않고 해야 해서 아침에 일어나면 다리가 붇고 발이 마비가 된 것 같아 너무 아팠다. 그때를 생각하면 너무 고통스럽다." 

현재 한국의 이주노동자 신분은 크게 '연수생'과 소위 '불법체류자'로 구분되는데, 사실상 어느 쪽이나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1990년대 중반부터 이주노동자들을 지원해 온 시민사회단체들을 중심으로 이주노동자들의 인권문제가 꾸준히 사회적인 문제로 제기되어 왔지만, 아직도 근본적인 해결책은 시행되지 않고 '현대판 노예제도'라 불리는 산업연수제도도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한국에서의 체류 기간이 초과된 이주민들을 '불법 체류자'라고 부르는 데 이것은 그들을 불법적인 존재로 낙인찍어 혐오를 조장하는 것이기에 '미등록 이주민'이라고 불러야 한다. 이주노동자는 단순히 '인력'이 되어 우리 사회의 노동력 빈칸을 메우러 오는 것이 아니다. 함께 살아가는 중요한 존재로서 미등록 이주민들이 보장받아야 할 제도적 보호와 권리에 대해 함께 고민이 필요하다.

처음에는 관광비자로 들어왔다가 미등록 상태가 된 크리스탈은 최근 한국에서 태어난 7살 아들의 보호자(미혼모)로서 비자를 받을 수 있었다. 아이가 성년이 될 때(18세) 비자가 만료되며, 아이는 한국에 남아있을 수 있지만 본인은 떠나야 한다. 크리스탈은 아이를 키우면서 유방암 치료도 받아야 했다. 아이가 8개월 되었을 때(2018년) 처음 유방암 진단을 받았을 때는 서울의료원에서 90% 비용 감면을 받았고 아이 분유나 기저귀 지원도 받았다. 5년 뒤에 서울의료원을 찾아갔을 때는 90% 할인을 받을 수 없다는 통보를 받았고 의료비를 위해 주변사람의 모금을 해야 했다. 어려움을 마주할 때 이주인권센터나 교회, 필리핀 커뮤니티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지금은 수술한 지 7개월이 되었으며 아직 회복 중인 기간이다. 

"나쁜 고용주는 이익을 취하기 위해 취약성(미등록 이주민)을 가지고 한국인과 다른 대우를 하였고, 좋은 고용주는 동등한 입장으로 대해 주셨다"라며 나쁜 고용주와 좋은 고용주의 차이를 '신뢰'와 '인권 보장'으로 설명한 크리스탈은 "한국에 많은 미등록 이주민 분들이 있고 이들도 아플 수 있다. 병원비가 너무 많이 나오므로 한국 정부에서 그런 부분에 대해서 고려를 해주면 좋을 것 같다. 이들도 건강보험에 들 수 있게끔 해준다면 의료비 부담을 덜면서 함께 생활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라고 작은 바람을 전했다.
 

마지막 초대손님에는 고은주 울림두레돌봄사회적협동조합 이사장이 참석했다. 고은주 이사장은 두레생협과의 만남 그리고 지금 운영하는 울림두레돌봄센터(방문요양기관) 사업과 활동에 관해 이야기했다.  

조합원으로 시작해 조직과 교육을 담당하는 실무자로서 일을 하다 돌봄사회적협동조합의 일을 지금까지 6년째 하고 있다는 고은주 이사장은 "사람과 자연, 환경, 지구와 함께 공존하는 것. 이것이 생협이 지향하는 가치인데 그것이 가장 잘 표현된 것 중 하나가 민중교역이었던 것 같다"라며 "돌봄은 그것의 본질로 관계, 신뢰 등 생협의 가치와 돌봄이 맞닿아 있다"라고 설명했다.   

고 이사장은 "돌봄노동의 현실이나 젠더의 불평등에 관해서 이야기할 때는 답이 안 보인다는 생각도 들고 열악하다는 말로 표현하기도 어려운 실정인 것 같다"라며 "돌봄은 누구에게 책임을 전가한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이웃들과 서로 돌보는 과정이 없으면 누구나 구매해야 하는 것이다. 모두에게 필요하고 또 언젠가는 우리 모두에게 닥칠 일이다. 우리가 이루어온 공동체 안에서 서로 돌볼 수 있는 관계를 만들어가는 것이 특정한 어떤 사람들에게, 특히나 취약하고 약한 사람들에게 돌봄을 떠맡기지 않을 수 있을 것 같다"라고 말했다.

그는 우리는 소비자생협이므로 가장 잘하는 것은 소비(구매)하는 것이다. 2009년인가 제주 창고에 많은 귤을 소비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한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추운 한겨울에 귤 소비 촉진을 해결해 나가기 위한 활동과 감동을 잊을 수 없다. 단협과 단협의 문제가 아닌 프로젝트 문제 해결을 위해 함께 걱정하고 소비라는 행동으로 실현한 모습이 두레생협과 함께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추억이라고 소개했다.  

20년간 진행해 온 민중교역 운동을 보면서 다시 한번 생협을 돌아보았으면 좋겠다는 고 이사장은 "50년이 되어야 비로소 열매를 맺는 올리브 나무처럼 두레생협도 지역에 튼튼한 뿌리가 내려졌으면 좋겠다. 두레생협이 지역에서 조합원을 만나고 지역의 다양한 사람들과 관계를 맺어 왔던 방식들이 다른 과제로 펼쳐 나가면 좋겠다"라며 "미래를 생각하는 장으로서의 공간이 생협이었으면 좋겠다"라고 강조했다.  

그는 "두레생협의 모임들을 세대에 맞게 하는 것이 필요한데 그것이 안 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여전히 먹거리 중심의 모임이 많이 있고 세대가 바뀌는데도 그것을 넘어가지 못하고 있다"라며 "나의 건강에 관한 고민, 내 죽음에 관한 고민,아이 돌봄에 대한 고민을 조합원들과 함께 나누는 그런 모임을 시작하시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생협이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장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말로 토크를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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