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기획] 서로의 말이 울타리가 아닌 그릇이 되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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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기획] 서로의 말이 울타리가 아닌 그릇이 되려면
  • 2022.01.05 13:00
  • by 이가람(사회적경제 연구자, 번역협동조합 조합원)
08:00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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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벽두부터 싱거울 수 있는 수수께끼로 글을 시작해 볼까 한다. 사람도 동물도 아닌 것이 머리도 있고, 꼬리도 있고, 높은 것도 있고, 낮은 것도 있는 것은? 다들 맞추셨을 것 같지만, 답은 말(言)이다. 말은 사람들 사이에 의미를 전달하는 강력한 수단이고, 이렇게 살아 있는 취급을 받기도 한다. 말의 뜻은 말 자체가 가리키는 직접적인 개념과의 연결로도 만들어지지만, 누가 어떤 사회적 환경 속에서 그 말을 쓰는가에 따라 덧씌워지는 사회적 의미도 포함한다. 

말이 의미를 담는다면, 어떤 말을 어떤 뜻으로 쓰느냐는 끊임없이 세계를 움직이는 일이기도 하다. 호혜적인 일상의 경제 실천을 "사회적경제"라고 묶어 부르기 시작한 것도, 그와 관련한 여러 개념을 번역하거나, 있는 그대로 쓰는 것도 사회적경제라는 개념이 사람들의 인식 속에 자리 잡아가는 과정의 일부일 것이다. 이러한 말의 용법을 고민하다 보면 문득, 우리가 사회적경제와 관련된 말을 새롭게 정의하고 쓰는 사이에 오히려 사회적경제 실천이 가질 수 있는 호랑이 같은 잠재성을 말의 울타리에 가두어 두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사회적경제가 무엇인가, 사회적기업가정신(social entrepreneurship)이 무엇인가, 거버넌스는 무엇인가 하는 식으로 익숙하지 않았던 무언가를 이해하려고 정의하는 과정에서 이미 익숙한 틀에 맞춰 사회적경제의 가능성과 잠재력을 오히려 좁게 정의하는 우를 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회적경제에서 쓰는 말들의 이 애매함은 어디에서 오는가

함께 사회적경제를 이야기하더라도 사람들마다 말을 하면서 그리는 사회적경제의 모습은 다 다른 것 같다. 사회적경제, 사회적 가치와 같은 말들을 하나로 정의하기가 어려운 것도 아마 그러한 주관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많은 경우, 이러한 주관성들이 모이면 말의 정확한 의미가 정의되지 않은 채 애매한 말이 굳어진다. 사회적경제에서 원래 이렇게 영어를 많이 쓰느냐고 나에게 물은 분이 있었다. 특히 소셜벤처를 비롯하여 시장 민감성이 높은 조직들에서는 소셜 임팩트, 인큐베이팅, 액셀러레이팅, 데모, 피칭 등의 말이 원어 그대로 굳어가는 것 같다. 사회적기업가정신, 사회적경제, 사회적기업 등 해외의 개념을 번역하기는 했지만 사실상 그 내용이 모호하게 채워져 있는 경우도 있다. 일상에 친숙한 언어의 자리를 외래어와 번역어가 대신 채우는 것은 이러한 애매함을 교묘하게 감추는 장치이거나, 아직까지 사회적경제의 개념들이 우리말로 완전히 들어오지 않았을 수 있다. 사회적경제는 일상의 접근을 강조하는데, 왜 모두에게 익숙하지는 않을 수 있는 외래어와 번역어가 빈번하게 쓰이는 것일까?  

'사회'라는 말의 불편함을 피하기

우선 떠올릴 수 있는 가능성은 '사회'를 입에 올리는 것에 대한 불편함을 '소셜(social)' 또는 '임팩트' 같은 영어로 완화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한국 사람들이 '사회'를 입에 올리기를 묘하게 불편해한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실제로 '사회'라는 단어를 들으면 자연스럽게 방어적으로 '반공'을 떠올리시는 어르신들도 있고, 젊은 사람들에게 '사회'는 딱히 잡히는 것은 없는데 나를 억누르는 어떤 힘 같은 불편함으로 다가가기도 하는 것 같다. 공동체라는 말은 많은 사람들이 "한 몸같이" 움직여야 할 것 같고, 규모가 커지면 커질수록 움직임이 둔해질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그렇다 보니 한편으로는 사회적경제와 사회주의의 연결성을 직접 연상시키는 것을 피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라는 단어의 무거운 이미지와 거리를 두려는 의도에서 "소셜(social)"이나 "임팩트(impact)" 같은 영단어들이 '사회'의 자리를 채우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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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 경험의 차이와 익숙한 것을 새롭게 바라보기

이미 우리의 언어생활에서는 여러모로 외래어의 비중이 크다. 젊은 층으로 갈수록 이러한 경향이 더 두드러진다. 사회적경제는 시민사회 운동의 전통과 많은 부분 맞닿아 있다. 그렇다 보니 사회적경제 선배 세대의 언어에서는 공동체, 연대, 사회변혁 등의 단어들이 낯설지 않다. 그에 비해 사회적경제 영역에서 주로 실무자로 일하면서 새롭게 활동하는 청년들의 사회적 환경은 공동체나 연대와 같은 단어들을 경험할 기회가 상대적으로 많지 않았다. '조'나 '집단' 같은 말보다는 '그룹', '팀'이라는 말을, '공동체'보다는 '커뮤니티'라는 말을 더 많이 접하는 환경에서 살아왔다. 공동체라고 하면 뭔가 어느 시골 마을에 가서 찾아야 할 것 같고, 커뮤니티라고 하면 아파트와 온라인을 떠올리게 되는 것 역시 이러한 환경의 차이와 연결되어 있다. 이런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쓰는 말이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다른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수 있다. 

한편으로는 커뮤니티, 로컬과 같은 새로운 말이 자리 잡는 과정은 기존에 친숙했던 개념을 한번 깨뜨리고, 익숙하게 여겼던 것들을 새롭게 바라볼 계기가 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우리에게 익숙한 '지역'은 공동체와 연고의 기반이 되지만, 지역을 '로컬'로 바라보면서 힙(hip)한 소비의 기반으로 재발견하는 경우들도 있다.   

한 세계의 경험을 우리의 일상과 연결하는 과정

전 세계적으로 사회적경제와 관련한 새로운 정보들이 빠르게 돌고 있고, 한국에도 빠르게 소개된다. 소비를 통해 자신의 신념이나 가치관을 표출하는 새롭게 등장하는 미닝아웃(meaning out), 가치소비와 같은 조어들이 생겨나기도 하고, 제로웨이스트(zero-waste), 전환운동(transition movement) 등 전 세계 차원의 운동도 한국에 퍼지는 속도가 빠르다. 이런 새로운 개념어들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말이 담고 있는 역사성과 사회성을 그대로 옮기기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귤이 회수를 건너 탱자가 될까 봐, 초기에는 원어를 있는 그대로 쓰는 경우도 나타난다. 일례로 커먼즈(commons)라는 단어에는 사실 이 말의 어원을 이루는 유럽의 역사 안에서 보통 사람들(commoner)로 불리던 사람들의 계급성과 관계가 다 담겨 있다. 그와는 전혀 다른 현대 한국 사회의 맥락에서 이 말의 의미를 정확히 담을 수 있는 말을 아직 찾지 못하다 보니, 맥락에 따라 어딘가에서는 공동자원으로, 다른 쪽에서는 공유지로 번역되고, 커먼즈/커머닝이라는 용어를 그냥 그대로 쓰기도 한다. 

이런 경우의 애매함은 오히려 실천을 통해 관련 활동과 개념의 지평이 확장되면 자연스럽게 우리말이 되는 방향으로 해결되는 것 같다. 원래는 이삭을 줍는다는 뜻인 스웨덴어 'plocka upp(pick up)'과 조깅(jogging)을 합친 단어인 플로깅(plogging)의 개념이 한국에서 활발해지면서 '줍기'와 '조깅'의 합성어인 '줍깅'으로 자리잡은 것이나, 리사이클링(recycling)과 업사이클링(upcycling) 실천이 확산되는 과정에서 '재활용'과 '새활용'이라는 한글 번역어가 생겨나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일 것이다. 일상 언어에서 익숙한 말들을 찾아 사회적경제의 용어들과 연결하는 일은 일상에 새로운 실천을 더욱 빠르고 친숙하게 스미게 만드는 방법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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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에는 힘이 있다-오해에서 이해로

서로가 같은 말을 쓰면서도 다른 의미를 상상하고, 다른 말을 애매하게 같은 자리에 쓰는 차이와 외면 속에 오해가 생겨난다면, 그 오해를 풀 수 있는 것도 결국 서로가 쓰는 말의 의미에 한 발 더 다가가려는 이해의 노력에서부터 시작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사회적경제의 말들이 번역으로 채워져야 한다면, 이건 분명 이중의 번역이다. 과거로부터 함께살이의 기억을 옮겨야 하고, 지금의 글로벌 사회에서 사회적경제 실천이 담고 있는 새로운 의미들도 한국 사회와 연결해야 한다. 어린 시절 생활했던 지역 공동체 경험을 바탕으로 사회적경제 활동을 하는 사람과, 커뮤니티, 로컬의 매력을 믿고 미닝아웃하는 사람 사이에는 넘지 못할 차이가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공통점도 있게 마련이다. 미닝아웃을 흔히 MZ세대의 특징으로 꼽지만, 한 푼을 쓰더라도 가치 있게 쓰고 싶은 마음에 세대가 따로 있을까? 

사회적경제 영역에서 쓰는 말이 서로 자기 세계의 경계를 나누는 울타리가 되는 말꼬리가 아니라, 대화를 열어갈 수 있는 머리말로 쓰이며 사회적경제의 새로운 실천을 담아내는 그릇으로 자리 잡아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내가 생각하는 의미와는 다른 사회적경제를 상상하는 사람과의 만남에서 누구의 답이 맞는지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그의 주관적 세계와 나의 주관적 세계 사이의 교집합을 넓혀갈 수 있다면, 만나야 힘이 되는 사회적경제의 힘도 더욱 커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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