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난소에서만 '부부'로서 존재하게 된 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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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난소에서만 '부부'로서 존재하게 된 연인
  • 2022.10.07 12:45
  • by 고두환 (재)피스윈즈코리아 상임이사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발발한 전쟁이 7개월 넘게 지속되고 있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난민들이 겪는 고통 또한 커지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재)피스윈즈코리아는 전쟁 초기부터 우크라이나 인접국인 몰도바에서 피난소를 운영하며 난민들을 위한 지원을 다각도로 펼치고 있다. 피스윈즈코리아 긴급구호팀은 지난 9월 28일 다시 몰도바 피난소 현장으로 떠났다. 우리는 난민들과 어떻게 연대할 수 있을까? 고두환 피스윈즈코리아 상임이사가 피난소에 머무는 아냐-바딤 부부의 이야기를 통해, 난민들이 당면한 현실을 알리고 그들을 향한 관심과 연대의 필요성을 전한다. [편집자 주]

 

▲ 아냐와 바딤. 두 사람은 지난 2월 결혼식을 올리고 부부의 연을 맺었다. ⓒ피스윈즈코리아
▲ 아냐와 바딤. 두 사람은 지난 2월 결혼식을 올리고 부부의 연을 맺었다. ⓒ피스윈즈코리아

우크라이나인 아냐(24), 카자흐스탄인 바딤(24)은 채팅으로 만나 4년 간 열애한 끝에 결혼하기로 마음먹습니다.

2022년 2월 18일, 우크라이나에서 첫 번째 결혼식을 치릅니다. 처가 식구들은 먼 타국의 사위가 채팅창을 타고 날아왔다는 사실이 탐탁치 않았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만난 바딤은 믿음직스럽고 성실한 청년이었습니다. 도시계획을 전공하고, 건설현장 관리자로 일하는 그는 딸의 미래를 축복하기에 충분했습니다.

2022년 2월 25일, 카자흐스탄에서 두 번째 결혼식을 치르기 위해 출국 준비를 하던 아냐와 바딤은 개전을 겪습니다. 결혼식을 치른 뒤 일주일만입니다.

이들은 우크라이나에서도 카자흐스탄에서도 혼인 서류가 처리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우크라이나 국적의 아냐는 난민 지위를 얻어 몇몇 국가로 피난을 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딤의 나라 카자흐스탄으로는 갈 수 없었습니다. 

카자흐스탄 국적의 바딤은 무비자로 갈 수 있는 나라가 한정돼 있습니다. 그는 아냐와 함께 갈 수 있는 나라는 거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둘은 추호도 헤어질 생각이 없습니다. 그래서 키이우에 신혼집을 마련하고, 전쟁의 한복판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합니다.

2022년 5월 어느 날, 아냐와 바딤은 잊힐 만하면 들리던 폭격 소리가 심상치 않음을 느낍니다. 집채만 한 헬리콥터가 집 주변을 폭격하기 시작합니다. 삶과 죽음조차 생각할 겨를 없이 사지육신이 떨리고 얼어붙었습니다. 그 길로 걷고 또 걸어서 도착한 곳이 몰도바에 위치한 피스윈즈코리아 우크라이나 난민 피난소였습니다.

정신없이 도착했지만, 다행히 몰도바는 부부가 합법적으로 머물 수 있는 나라였습니다. 여전히 법적으로 부부 관계를 증명할 순 없습니다. 죽고 못 사는 부부 사이라고 해도 증명할 서류 한 장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현실이 아이러니합니다. 난민이 되고 피난소에 오면 최소한의 생존이 보장됩니다. 그러나 사회적 활동은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말 그대로 '생명연장' 정도의 상태가 됩니다.

▲ 피스윈즈코리아가 몰도바에서 운영하는 우크라이나 난민 피난소. 아냐-바딤 부부에게 해당 피난소는 전쟁을 피하면서도 함께 지낼 수 있는 공간이다. ⓒ피스윈즈코리아
▲ 피스윈즈코리아가 몰도바에서 운영하는 우크라이나 난민 피난소. 아냐-바딤 부부에게 해당 피난소는 전쟁을 피하면서도 함께 지낼 수 있는 공간이다. ⓒ피스윈즈코리아

그런 와중에 부부는 할 수 있는 일들을 찾기 시작합니다. 아냐는 네일아트를 합니다. 그는 피난소에 도착한 뒤 난민들에게 네일아트를 해주기 시작했습니다. 여성과 아이들이 대부분인 피난소에 화장품이나 장난감이 보급되면 분위기가 삽시간에 바뀌곤 합니다. 네일아트는 그것과 비교가 안 될 만큼 난민들의 일상에 소소한 재미를 주었습니다.

바딤은 피난소에 관리할 일이 많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게 됩니다. 물자보급소, 진료소, 쉘터 등 수천 명의 생존과 직결된 일들은 개량적으로 관리돼야 했습니다. 바딤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어느 순간 스태프들 사이에 섞여서 그 일을 묵묵히 하고 있었습니다. 피스윈즈코리아 피난소는 키시나우시(市)와 양해각서를 체결하여 우크라이나 난민을 고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바딤을 고용했습니다. 그는 피스윈즈코리아 피난소에서 없어서는 안 될 관리자가 되었습니다.

ⓒ피스윈즈코리아
ⓒ피스윈즈코리아

아냐와 바딤은 아이를 갖고 싶지만, 그럴 수 없습니다.
아냐와 바딤은 미래를 계획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습니다.
아냐와 바딤은 전쟁이 길어질 것이라고 본능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중입니다.

"전쟁 전과 후, 가장 큰 차이가 무엇입니까?" 아냐에게 물었습니다.
"원하는 때에 부모형제를 볼 수 있었는데, 지금은 그러지 못합니다."

"당장 필요한 것이 있습니까?" 바딤에게 물었습니다.
"없습니다."

"앞으로 계획이 있습니까?" 바딤에게 다시 물었습니다.
"종전 때까지, (피스윈즈코리아) 피난소가 그대로 유지됐으면 좋겠습니다. 이 안에서만 부부 관계가 유지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바딤은 난민입니까? 아냐만 난민으로 볼 수 있습니까?

단순 무식하게 해결하려 들었던 저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아냐가 카자흐스탄에 입국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해 봤습니다. 하지만 아냐의 가족들은 모두 키이우에 있습니다. 전쟁 직전 18세가 갓 넘은 동생은 징집되어 복무 중이고, 아들 걱정에 아냐의 부모는 키이우에 남았습니다. 이곳에서 우크라이나 내부에 있는 부모형제와 연락하며,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무엇인가를 하고 있는 아냐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방법을 찾아도 이들은 떠날 수 없습니다.

며칠 전부터, 키이우에 사는 모든 이들은 손에 요오드를 지니고 있습니다. 러시아의 핵 공격이 현실로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가족들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순간적으로 울컥하는 아냐와 이를 안쓰럽게 바라보는 바딤을 보면서 인간과 사회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봅니다.

피스윈즈코리아 피난소는 여전히 2,000세대 10,000명가량의 우크라이나 난민들을 위해 생존물자를 공급합니다. 아냐와 바딤처럼 어디에도 발붙일 수 없는 86명의 난민들이 쉘터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피난소를 통해 전 세계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연결'이 이들이 살아가는 힘이자, 유일한 희망인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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