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 in 한국] 스미스와 피케티 그리고 남겨진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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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 in 한국] 스미스와 피케티 그리고 남겨진 과제
스미스와 피케티 그리고 남겨진 과제 : 수요세미나 겨울 특강을 마치며
  • 2024.02.20 10:00
  • by 김종걸(한양대 국제학대학원 교수)
ⓒ한양대학교 국제학대학원 글로벌사회적경제학과
ⓒ한양대학교 국제학대학원 글로벌사회적경제학과

1. 애덤 스미스를 위한 변명

현재 전 세계에는 8억 명의 사람들이 굶주린다. 5세 미만 어린이 1억 5,500만 명이 만성 영양실조 상태에 있다. 18억 명의 사람들이 오염된 식수를 사용하며, 40%의 인구가 물 부족에 고통받는다. 8억 3,300만 명이 도시빈민가(슬럼)에 살며, 6,900만 명의 5세 미만 어린이들이 충분히 고칠 수 있는 병인데도 사망한다.

▲ 애덤스미스의 동상.
▲ 애덤스미스의 동상.

이 극심한 가난이 애덤 스미스(1723~1790) 때문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다. 시장만능주의의 폐해다. 그러나 무척 억울한 일이다. 스미스가 경제학자 이전에 도덕철학자임을 기억하자. 그의 『국부론』의 주제는 '윤택한 경제'를 실현하기 위한 연구였다. 그 전에 쓴 『도덕감정론』의 주제는 '덕성의 경제', 즉 땀 흘려 노력한 자가 부자가 되는 경제다. 그리고 이 2가지 목표는 자유시장 경제를 통해서 가능하다는 것이 스미스의 생각이었다.

그는 경제가 발전할수록 빈부격차는 줄어들고 노동자들의 생활은 개선된다고 믿었다. 노동력의 재생산(출생)보다 자본의 축적이 더욱 빠르다. 그래서 자본이윤율은 하락하고, 임금은 상승하기 때문이다. 또 하나 그가 의거했던 논법이 '낙수효과'였다. 부자에게 집중된 부는 소비(사치품이든 생활용품이든 간에)를 통해 하층민에게 이전된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틀린 말이었다. 부자의 소득은 화폐 혹은 투자자산으로 축적되기에 다 소비할 이유가 없다. 마찬가지로 기술 발전, 노동자 탄압, 제국주의적 팽창 등으로 이윤율 하락은 얼마든지 막을 수 있다. 

그는 국가의 번영이란 평균적 부의 증가만이 아니라, 최하층 노동자들의 생활개선에 있다고 확신했다. 노동자들이 "그런대로 잘 먹고, 잘 입고, 좋은 집에서 살 수 있어야 공평하다"라고 강조했다. 잘못된 예측은 그가 자본주의 문제 본격화 이전에 살았던 사람으로서의 시대적 한계를 반영한다. 그의 원래 의도를 파악하고, 현대적으로 계승하는 것,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일 것이다.
 

2. 토마 피케티의 『21세기 자본』

▲ 토마 피케티의 『21세기 자본』
▲ 토마 피케티의 『21세기 자본』

지난 몇 년간 빈곤과 불평등이 이야기되는 곳에는 항상 토마 피케티(1971~현재)가 거론되어왔다. 그의 『21세기 자본』은 전문 서적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았던 100만 부를 훌쩍 넘어 수백만 부가 팔렸다. 

그는 왜 주목받았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장기경제 데이터를 1800년대 초반부터 정비하고, '평등은 평등 지향적인 정책의 결과'라는 단순한 메시지를 강력한 증거로 증명했기 때문이다.

피케티가 말하고 싶은 것은 현재는 빈부격차를 강화하는 방식으로 세상이 움직인다는 것이다. 저성장과 자본에 대한 세금 감면은 양극화를 더욱 크게 한다. 느리게 성장하는 사회에는 새로운 기회가 제한되며, 과거의 부가 계속 유지되는 경향이 강하다. 

그의 사용지표로 설명하자면 이렇다. 현재는 자본소득분배율(α), 즉 자본가에게 상대적으로 분배되는 몫이 더욱 커지고 있다. 이 현상은 높은 자본수익률(r), 높은 저축률(s), 높은 자본/소득 비율(β), 낮은 경제성장률(g)의 결과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던지게 된다. 만약 시장이 잘 작동된다면 부의 불평등은 과연 해소될까? 많은 진보적 경제학자들은 부의 불평등의 원인은 '불공정한 시장'에 있다고 생각했다. 조지프 스티글리츠(1943~현재)의 『불평등의 대가』와 같은 책의 논법이다. 이에 대해 피케티는 부정적이다. 

"내 이론에서 양극화의 주된 요인인 연평균 자본수익률>경제성장률(r>g)이라는 부등식은 시장의 불완전성하고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사실 그 반대다. 자본시장이 완전할수록 r이 g보다 커질 가능성은 크다." 

빈부격차 해소란 애덤 스미스의 자유시장으로 해결할 수 없다. 그렇다고 마르크스적인 혁명으로 해결해서도 안 된다. 

앞으로 인구절벽 등으로 경제성장률(g)은 장기적으로 하락할 것이다. 그러나 자본수익률과 저축률은 자본 과세 및 불평등 완화로 충분히 관리할 수 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선언한다. "부의 분배의 역사는 언제나 매우 정치적인 것이며, 순전히 경제적인 메커니즘으로 환원될 수는 없다." 정부가 의지가 있다면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는 것이다. 
 

3. '자유와 공정의 사상' 세미나를 돌아보며

이제 우리는 물어보게 된다. 왜 가난한 사람을 보듬어야 할까? 이번 겨울 세미나를 통해서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필자는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첫째, 너무나 당연한 일이며 그것이 인간 본성에 부합한다. 

애덤 스미스는 『도덕감정론』에서 연민과 동정심은 심지어 '무도한 폭도와 가장 냉혹한 범죄자들'에게서도 일부 발견되는, 인간의 천성이라고 강조한다. 존 스튜어트 밀(1806~1873)의 말도 힘이 된다. 그의 『공리주의』에서 가장 아름다운 구절이 있다면, "인간을 불행하게 하는 것은 자기만 아는 이기심과 지적 교양의 부족"이라는 표현이다. 자유로워야 하나 타인의 행복을 자기 행복으로도 느낄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만이 행복해질 수 있다. 그것이 인간존재의 속성이다.

둘째, 생존권은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권리다.  

강력한 국가의 지배를 말했던 토마스 홉스(1588~1679)도 『리바이어던』에서 국가가 개인의 생존권을 위협한다면 언제든지 거부하고 도망가라고 권유한다. 그러나 근대 민주주의자는 도망가지 않는다. 그 권리를 보장하지 않는 정부라면 언제든지 전복해도 된다. 존 로크(1632~1704)의 『통치에 관한 두 번째 논고』, 장 자크 루소(1712~1778)의 『사회계약론』이 가르쳐준 내용이다. 

셋째,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는 것이 '정의(옳은 것)'다.  

이 이야기를 할 때 나는 존 롤스(1921~2002)가 『정의론』에서 전개한 '무지의 베일' 논증 방식을 좋아한다. 내가 부자이든 머리 좋은 사람이든 사전에 정보가 없는 상태에서 (무지의 베일을 쓰고) 한번 생각해 보자. 나 또한 지극히 불행해질 수 있다. 이때 그 비참함 속에서 구원의 손길을 기대하는 것은 당연하다. 삶의 불행은 누구에게나 불현듯 찾아올 수 있다. 그 운명의 장난은 막을 수 없다. 인간의 불행의 가능성을 줄이는 것, 그것이 국가와 사회와 개인이 할 일이며 정의로운 나라의 조건이다.

넷째, 가난과 민주주의는 서로 배치된다. 

이것은 아주 오래된 문제의식이었다. 극도의 빈부격차 속에서 가난한 자들을 선동하는 포퓰리즘(참주정치)은 플라톤(기원전 428~347)의 『국가』를 관통하는 최대 고민이었다. 우리는 극도의 양극화가 가져왔던 민주주의의 실패를 많이 발견한다.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독재, 일본의 천황제 파시즘은, 1929년 대공황으로 혼란 속에서, 대다수 빈민의 압도적인 지지로 실행되었다. 

현재의 거대한 빈부격차도 민주주의를 근본부터 위협한다. 스티븐 레비스키와 대니얼 지블랫은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라는 책에서 오늘날 민주주의 붕괴는 다름 아닌 투표장에서 일어나고 있다고 일갈한다. 군인의 쿠데타가 아니라 선출된 지도자의 손으로 이루어지는 참주정치의 현대판 부활이다. 이것을 막기 위해서도 극도의 가난과 불평등은 시정되어져야 한다. 
 

4. 2024년 상반기 세미나의 과제

그러나 현실의 빈부격차를 옹호하는 사고체계는 너무나도 강고하다. 세상의 엘리트들은 불평등이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강변한다. 그들은 애초부터 존 롤스의 '무지의 베일'을 쓸 의향이 없다. 애덤 스미스가 강조하는 '동감 능력'도 부족하다. 주변에서 한 번도 가난한 자를 본 적이 없기에 그 처참함을 가슴으로 이해하지 못한다. 그런 면에서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라는 마르크스의 역사적 유물론은 일정 정도 타당하다.

앞으로 사회의 각종 문제는 각기 구체적으로 사고해야 한다. 원리주의에서 벗어나 절충주의적인 현실적 해법도출도 중요하다. 그러나 아무리 절충주의라도 관통하는 기본원칙은 있다. 

첫째, 가난한 자를 보듬어야 한다는 '담론'에서 밀려서는 곤란하다. 

최악은 '가난은 당신 탓'이라는 논법이다. 낮은 임금은 낮은 생산성의 결과이며, 기여를 한 만큼 가져가는 것이 공평하다. 그러나 틀린 말이다. 우리 주변에는 기여보다 훨씬 더 많이 가져가는 사람들 천지다. 설령 기여가 없더라도 가난한 자를 보듬어야 하는 것은 수많은 선배 사상가들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생각이었다.  

둘째, 똑똑한 복지를 만들어야 한다. 

우리의 가장 큰 고민은 누진세 등을 걷어야 한다는 점이 아니다. 가난한 사람을 위해 부자의 세금을 써야 한다는 논리는 그래도 많은 사람이 인정한다. 정작 어려운 것은 돈을 걷는 것이 아니라 쓰는 방법이다. 관료주의적 형식주의, 강고한 복지 이익집단, 타인 의존증의 염려 등 복지지출의 '암초'는 사방에 깔려 있다. 심각히 고민할 주제다. 

셋째, 모든 정책은 개인 혹은 조직의 능력 증진에 초점이 맞추어야 한다. 

일부 엘리트, 혹은 잘 나가는 재벌기업의 노력으로 나라가 잘살게 될 것이라는 생각은 아주 외눈박이 사고방식이다. 존 스튜어트 밀이 『자유론』에서 말한 '나를 나답게' 하는 개별성은 엘리트만을 위한 권고문이 아니다. 이 땅에는 수많은 청년 백수, 경력단절 여성, 장애인, 고령자 등이 산다. 이들 모두가 자기 삶의 주인이 되게 하라! 자조 노력을 통해 자존감과 자긍심을 회복에 주력하라! 누구도 버림받지 않는 사회를 만들어가는 것이 필요하다.

넷째, 점진적 변화를 추구하고 과격한 개혁을 거부해야 한다. 

개혁은 할 수 있을 때 해야 한다는 오만한 행동은 정치공학적 독선을 드러낼 뿐이다. 필자보다 수십 배 더 개혁에 대한 열정이 뜨거웠을 애덤 스미스는 개혁에 대한 자기 확신이 강한 사람을 '한 체제에 매몰된 사람(man of system)'이라고 불렀다. 인간사 최악의 무질서는 언제나 이런 조급한 확신범에 의해 생겨난다. 겸손하고 과격하지 않아야 한다. 

세상을 바꾸는 길에는 명확한 이념, 정책, 세력이 필요하다. 이번 겨울 세미나는 이념을 고민하기 위한 과정이었다. 올 상반기 주제는 '지속가능성을 위한 정책과 행동'이다. 정책과 세력이 구체화 되는 좋은 세미나가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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