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한 제주 이야기] 바람을 연습하기
상태바
[소소한 제주 이야기] 바람을 연습하기
  • 2019.02.18 09:58
  • by 최윤정

두 달 정도 제주 남쪽 대평리에 산 적이 있다. 높지 않은 산자락을 구비구비 넘어가야 만날 수 있는 고즈넉한 마을이다. 나는 바다를 정면으로 볼 수 있는 4층의 분리형 원룸을 구했는데, 첫날 밤을 보내고선 어안이 벙벙했다. 밤새 방 주변을 돌아치는 바람소리와 기세에 방이 아니라 바다에 떠있는 배 안에서 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찬찬히 살펴보니 집 앞으로는 모두 높이가 낮은 집들이거나 밭이었고, 방 일부를 제외하고는 집의 모든 면이 외벽이었다. 게다가 마을 전체가 땅은 편평하고 집들은 낮고 건물은 높아도 4층 정도였다. 막히는 곳 없이 바람이 본성대로 자유로이 흐를 수 있는 지형이었다. 아주 순도 높은 바람들이었다.

 

당시에는 별다른 일 없이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았다. 집에서 뒹굴며 귀로는 바람 소리를 듣고 눈으로는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와 전선 등을 보다가 이상한 연습에 빠져들었다. 나무, 전선, 도로표지판, 빨래 등의 흔들리는 정도와 바람소리를 가지고 풍속을 맞춰보는 연습이었다. (사람이 할 일이 없으면 이런 소일도 만들어낸다.) 정밀한 풍속계를 구비하고 싶은 욕심이 들었지만 그것까지는 과하다 싶어 스마트폰 날씨 앱의 풍속을 기준으로 연습했다. 2주쯤 지나니 어렵지 않게 풍속을 맞추게 되었고 틀린다 해도 1m/s의 편차였다.

 

박수기정에서 바라본 대평리 마을. 기세 좋은 바람을 경험할 수 있었다.

 

급기야 혼자 연습하는 것을 넘어 집에 방문하는 친구들에게 “지금의 바람소리, 흔들림, 기세라면 아마 7m/s 일거야” 라고 말하곤 스마트폰 날씨 앱의 풍속을 확인해보라고 했다. 대체로 맞았고, 친구들은 풍속 수치가 맞은 것에 놀라고 내가 그런 쓸데없는 연습을 하고 있다는 것에 두 번 놀랐다. 물론 한심해하기도 했다. 이 시기에 나는 바람을 연습하고 바람에 관한 몸의 감각을 조금 단련했다. 이후에는 제주 시내 레지던스 아파트에 살았는데 이 시기에는 번번히 풍속을 틀렸다. 워낙 건물이 많아 바람의 왜곡이 심했던 것이다. 바람이 제 풍속보다 꺾이고 깎이고 늘거나 줄었다. 순도 높은 바람을 제주시내 건물숲에서는 느끼기 어려웠고 나의 약소한 기술도 곧 퇴화되었다.

 

이렇게 한때 바람의 경험치를 쌓고 그에 대한 감각을 예민하게 키우던 시간이 자연에 대한 감수성을 머리가 아닌 몸으로 기르는 데 도움을 주었다. 대평리에 오기 전에도 바람이야 늘 있었겠지만, 한 번도 바람에 집중하거나 바람에 내 오감을 모두 연결시킨 적이 없었다. 인생에 바람이 없던 날들은 거의 없었을 텐데 나는 바람이 마치 없는 것처럼 살았다.

 

자연이 위대하다고 하면서도 우리는 대개 그 존재감을 잘 느끼지 못한다. 자연의 여러 모양새에 무감각하거나 자연과 연결된 문제에 밝지 못하다. 도시생활로 대변되는 현대사회에서는 건물들과 대중교통 속에 있는 시간이 대부분이다. 이렇다 할 자연의 존재감을 느끼기 어렵고 그래서 자연에 대한 감각은 무뎌지고 무뎌진다. 비, 눈, 미세먼지 등 건물들과 대중교통을 오가는 사이에 대처가 필요한 사안에만 관심을 둔다. 사실 그건 자연에 대한 전 감각적인 경험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바람의 세기, 비의 굵기, 눈의 종류, 햇살의 색깔에 집중하기엔 우리는 많이 바쁘다.

 

왜곡 없는 순수한 바람을 일상적으로 만났던 경험, 시선의 방해 없이 지평선을 길게 마주했던 경험, 일출과 일몰을 보는데 시간과 공을 들였던 경험들. 그런 경험들이 쌓이고 쌓이면 나 같은 수 십 년 서울내기도 자연에 대한 감각을, 자연을 두고 펼치는 생태적 상상력을,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직관을 얻게 될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어쩌면 이런 감각, 상상력, 직관은 자연에 가깝게 살았던 사람에게는 천부적으로 주어질 거라고 여겼다.

 

그런데 그것도 아닌가 보다. 서울에서 내내 살다가 이제 입도 5년 차가 된 친구는 제2공항 부지인 성산읍 150만 평이 시멘트로 덮일 것을 생각하면 눈 앞이 아찔하고 가슴이 답답하다고 했다. 친구는 공항으로 인해 깎일 오름, 매립될 동굴, 쫓겨날 동식물의 아우성이 보이고 들리는 감각을 가졌다. 제주에서 태어나 고등학교까지 마친 제주도지사는 생태적 상상력과 개발정책의 긴장 사이에서 150만 평의 공항 개발을 지지했다. 그는 2018년 제주 관광객수보다 3배가 넘는 4500만 공항 수요를 예측하기 때문이다. 어떤 미래가 보이고 어떤 소리가 들리는 지는 각자의 몫일 테지만, 어떤 미래의 풍경과 소리를 선택할 것인지는 우리의 몫이다. 나는 아마도 대평리의 그 바람들을 겪지 못했다면, 미래의 비행기 이착륙 바람들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영주산에서 바라본 제2공항 부지인 성산읍 일대. 앞으로 성산은 어떻게 변할까.

 

 

최윤정
제주에서 1년간 집중적으로 올레길과 오름으로 소일을 했다. 많이 걷고 많이 오르면 몸과 마음의 군살과 기름기가 쏙 빠져 가뿐하고 담백한 삶을 영위하게 될 줄 알았다. 그럴 줄 알았다. 지금은 아예 제주로 입도하여 일하며 놀며 제멋대로 산지 3년 차에 접어 들고 있다.

 

 

라이프인 열린인터뷰 독점기사는 후원독자만 볼 수 있습니다.
후원독자분들은 로그인을 하시면 독점기사를 바로 볼 수 있습니다.

후원독자가 아닌 분들은 이번 기회에 라이프인에 후원을 해보세요.
독립언론을 함께 만드는 자부심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중요기사
인기기사
  • (07317)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영등포로62길 1, 1층
  • 제호 : 라이프인
  • 법인명 : 라이프인 사회적협동조합
  • 사업자등록번호 : 544-82-00132
  • 대표자 : 김찬호
  • 대표메일 : lifein7070@gmail.com
  • 대표전화 : 070-4705-7070
  • 팩스 : 070-4705-7077
  • 등록번호 : 서울 아 04445
  • 등록일 : 2017-04-03
  • 발행일 : 2017-04-24
  • 발행인 : 김찬호
  • 편집인 : 이진백
  • 청소년보호책임자 : 송소연
  • 라이프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라이프인. All rights reserved.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