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습기살균제 참사가 또 일어날 수 밖에 없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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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습기살균제 참사가 또 일어날 수 밖에 없는 이유
[라이프인ㆍ생명안전시민넷 공동기획_안전 칼럼] 김신범 (노동환경건강연구소 부소장) 산업안전보건법 전면개정에 담긴 물질안전보건자료 영업비밀 사전심사 제도의 의미
  • 2018.05.31 18:22
  • by 김신범(노동환경건강연구소 부소장)


물질안전보건자료는 화학물질을 사용하는 노동자들에게 화학물질의 유해성을 정확히 알려주고 안전한 사용법과 사고발생시의 대처법 등을 알려주는 자료이다. 화학물질 용기에 붙어있는 라벨이 핵심적 정보를 간단히 제공하는 것이라면 물질안전보건자료는 이를 보완하여 자세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 물질안전보건자료와 라벨은 노동자들의 생명과 건강을 지키는 소중한 도구가 아닐 수 없다. 노동자들만 이 자료를 사용하는 것은 아니다. 작업장 환경을 측정하거나 건강검진을 할 때에는 반드시 물질안전보건자료를 통해 물질을 확인하는 것이 원칙이다. 노동자의 건강을 보호하는 전문가들도 이 자료를 매우 소중히 여기며 사용한다.

그런데 만약 물질안전보건자료와 라벨에 좋은 정보들이 들어있지 않다면 어떨까? 라벨과 물질안전보건자료를 아무리 봐도 물질이 있고 무슨 독성이 있는지 알 수 없다면 말이다. 1997년 물질안전보건자료 제도가 도입된 이래 우리나라에서는 물질안전보건자료의 신뢰성에 대한 문제제기가 끊이지 않아왔다. 정보가 부실하거나 잘못된 것들이 많았다. 발암물질이 있는데도 발암성 표시가 되어 있지 않은 것들도 많다. 그리고 영업비밀이 너무 많아서 무슨 성분이 들어있는지 확인이 불가능한 제품도 잔뜩 있다. 안전보건공단에서 반도체 산업을 조사한 결과 66% 정도의 제품에 영업비밀이 사용되고 있다니 영업비밀이 얼마나 심각하게 남용되어왔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물질안전보건자료에 이렇게 큰 구멍이 뚫린 이유는 미국의 제도를 수입해왔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물질안전보건자료가 등장한 것은 1983년이다. 미국은 1970년대 말부터 알권리 운동의 황금기를 맞는다. 1980년 민주당 카터대통령이 노동조합의 청원을 받아 라벨에 물질 성분을 공개하도록 하고 비밀은 엄격하게 평가해서 진짜 비밀만 인정하는 법률을 추진했다. 하지만 카터대통령은 재선에 실패했고, 기업의 대변인을 자처한 레이건대통령이 등장하면서 카터대통령의 법률안은 폐지되었다. 미국의 노동조합과 시민사회는 크게 실망했지만, 포기하지 않고 연방이 아닌 주별로 알권리법을 제정하는 방향으로 전술을 변경한다. 뉴욕주, 메인주, 뉴저지주 등에서 강력한 알권리법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 때 다시 레이건대통령이 등장한다. 1983년에 연방법으로 물질안전보건자료 제도를 도입한 것이다. 대신 이 법률은 기업의 요청을 받아 만든 것이라 알권리법이 아니라 숨길권리법이라고 비판을 받게 된다. 라벨에 성분을 표기하는 것은 사라졌고, 영업비밀은 자유롭게 인정되었으며, 물질안전보건자료는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검증할 수 없었다. 미국에서는 연방과 주에 동일한 법률이 존재하면 연방법 우선의 원칙에 따라 주법이 무력화되는 원칙이 있다. 기업들은 레이건대통령에게 연방법을 제정하도록 하여 뉴욕, 메인, 뉴저지주에서 제정된 강력한 알권리법들을 무력화시킨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과 최순실이 국정농단을 하면서 기업으로부터 돈을 뜯어내고 규제를 엉망으로 만든 모습을 상상하면 될 듯하다. 어쨌든 이렇게 해서 미국의 물질안전보건자료 제도는 알권리를 실현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도구로 태어나게 되었고, 그 제도를 무비판적으로 수입한 우리나라에서도 영업비밀이 남발되고 부실한 물질안전보건자료의 유통이 제도적으로 보장되게 된 셈이다.

그런데 물질안전보건자료에 영업비밀이 남발되자 노동자의 건강과 안전을 보호하는 것 외에 또 다른 문제들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에 화학물질을 수출하는 해외 기업들이 이 부실한 제도를 적극 활용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자신의 나라에서는 영업비밀이 될 수 없는 정보를 영업비밀로 만든 다음, 법에서 정한 비밀 정보라서 줄 수 없다고 버텼다. 결국 우리나라 기업들은 화학물질을 사면서 무슨 물질이 들어있는지 정보를 알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그리고 관행처럼 굳어지기 시작했다. 우리나라 기업들은 최종 제품을 만들면서 자신이 사용하는 원료의 성분을 확인하지 않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다들 그게 당연한 일이고, 정보를 요구하면 외국기업들이 한국시장에 물건을 팔지 않는다며 오히려 벌벌 떨게 되었다. 결국 피해는 소비자들이 보게 되었다. 제품의 안전은커녕 성분조차 확인하지 않는 관행을 가진 나라에서 가습기살균제 참사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은 어쩌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고용노동부가 산업안전보건법 전면개정을 시도하면서 이 관행에 제동을 걸겠다고 나섰다. 유럽이나 캐나다처럼 물질안전보건자료 영업비밀을 사전에 심사하여 영업비밀로서의 가치가 있는 것만 인정하겠다는 것이다. 영업비밀 남용이 아니라 엄격한 심사를 통해 영업비밀을 최소화하겠다는 것이 고용노동부의 생각이다. 경총을 비롯한 기업들은 영업비밀 심사가 과도한 것이고 기업이 필요한 화학물질을 신속하게 공급받지 못하는 문제가 발생할 것이라고 엄포를 놓고 있다. 그러나 기업의 태도는 다시 말해 무슨 성분이 들어있는지도 확인하지 않고 계속 화학물질을 쉽게 공급받아 사용하겠다는 것으로, 국민에게 피해가 오건 말건 그건 자신들의 책임이 아니라는 주장을 펴는 것과 같다. 

만약 이번 기회를 놓쳐서 산업안전보건법에 물질안전보건자료 영업비밀 사전 심사제도가 빠지게 된다면, 우린 가습기살균제 참사를 또 다시 경험하게 될 것이다. 지금은 제품을 만들면서 자신이 사용하는 원료를 확인하는 것을 새로운 관행으로 필수적인 책임으로 만들어야 할 때이다. 노동자들에게 직업병과 사고가 발생하지 않도록 물질안전보건자료와 라벨의 신뢰성을 높이고 양질의 정보를 전달해야 할 때이다. 산업안전보건법 전면개정은 한국사회의 화학물질 안전이 확보되느냐 아니냐의 갈림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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