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경제와 협동하자⑬] 북한의 대외경제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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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경제와 협동하자⑬] 북한의 대외경제 :일본
  • 2018.12.04 17:49
  • by 일본 테이쿄대학 이찬우교수
30:08

북한에게 일본과 관계개선을 통해 들어올 [보상금]은 줄곧 “눈앞에 있는, 하지만 그림의 떡”이었다. 그 이유가 일본이 북한과 국교를 맺으려하지 않았기 때문은 아니다. 일본의 입장은 북한과 수교하더라도 한-일 방식, 즉 경제협력방식으로 보상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원칙이었고, 그것도 일본이 요구하는 것을 북한이 다 들어준 다음에나 가능하다는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일본정부는 미일동맹을 헌법보다 중시하는 것 처럼 미국을 배려해왔다.

사실 북한과 일본 사이에는 1960년대부터 2006년까지 정경분리 원칙에 따른 무역관계가 있었고, 1990년대 이후로는 국교정상화교섭도 있어왔다. 하지만 결정적인 국면에서 북한의 핵문제를 제기하는 미국의 입장에 막히거나 일본의 국내정치상황 등으로 성사되지 못하였다. 북한과 일본은 2002년에 평양에서 정상회담을 통해 경제협력방식의 과거청산이라는 구체적인 합의까지 이루었으나 뒤이은 북미간 2차 핵위기 발생과 일본 국내의 납치문제 정치화로 인해 북일간의 관계개선을 이루어내지 못하였다. 일본정부가 2006년 10월에 북한의 핵실험에 대한 대항조치로 북한 국적선의 입항금지, 북한으로부터의 모든 수입금지, 북한국적자 입국금지 등의 경제제제 조치를 취한 후, 2009년 6월 18일에는 북한에 대한 전면적인 수출금지조치를 실시하면서 이후 지금까지 북일무역은 제로가 된 상태이다.

2006년 2월 북경에서 북일 정부간 교섭

일본정부는 아직 북한에 [돈을 낼 여건]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고 보는 것 같다. 북한이 핵, 미사일을 완전히 포기하고 “일본인 납치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그 여건이란 것이다. 여건이 풀리면 정말 북일수교하고 과거청산을 할까? 1980년대까지는 그런 여건이었지만 그 때는 일본이 냉전체제로부터 최대로 이익을 얻고있었기 때문에 북한과 정치적 관계개선을 추구할 이유가 없었다.

앞으로는 어떨까? 인도양-동남아-태평양을 잇는 [자유롭게 열린 인도-태평양 전략]으로 중국을 견제하려는 아베 수상과 트럼프 대통령이 합의한 아시아 전략은 있다. 또 일본은 중국과는 경제협력, 러시아와는 경제협력-북방영토문제 해결이라는 양자간 협력 전략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한반도를 포함한 동북아지역을 포괄하는 지역전략은 잘 보이지 않는다. 북한이 걸림돌이지 파트너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북한으로부터 얻을 이익이 별로 없다는 생각이 일본 정계와 경제계에는 있는 것 같다.

정말 그럴까? 북일간에 서로 뒤틀린 관계를 정상화하게 되면 북한은 물론이요 일본으로서도 얻을 이익이 많다. 과거청산으로부터 얻을 이익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영역의 가치가 있다. 더불어 돈으로 환산할 수 있는 새로운 경제적 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 동북아 경제가 연계하여 발전하는데는 일본과 한국의 협력도 필요하고 북한과 일본의 관계 정상화도 필요하다. 한반도의 입장만 아니라 일본의 입장에서도 한반도-일본의 경제연계는 [대두하는 중국]을 견제하면서 협력하는 균형의 추로 작용할 수 있다. 필자는 일본이 동북아지역에 대해 전략적 접근을 할 시기가 왔다고 본다.

북한과 일본의 경제관계 역사
일본이 한반도를 식민지로 강점했던 것은 정치적 욕구 뿐아니라 경제적 욕구도 있었기 때문이다. 19세기말, 일본의 근대화를 위해 대단히 중요한 경제자원 4가지가 일본에 부족했고 한반도에는 있어서 일본식 표현으로 하자면 [목구멍에서 손이 나올 정도] 였다. 그 자원은 ①쌀, ②무연탄, ③철광, ④금이었다. 일본에서 농촌인구의 도시이동으로 식량생산이 줄어들어 도시노동자의 임금을 억제해야할 필요에서 한반도로부터 자포니카계 쌀을 가져와야할 필요성이 컸다. 무연탄은 왜 필요했나. 아직 석유의 시대가 도래하기 전에 경제적으로는 도시철도 연료로서, 군사적으로는 해군 군함의 연료로서 대량으로 필요했으나 일본에선 큐슈 정도에서 무연탄이 나와 절대적인 공급이 부족했다. 

반면에 조선왕조는 당대에 유수한 무연탄 수출국이었다. [평양탄]으로 불린 북한지역의 무연탄은 품질도 좋았다. 1905년 러일전쟁시 일본해군이 쓰시마 해전에서 러시아함대를 격파한 이유중에 큰 이유는 영국이 제공한 일본함대 군함이 무연탄을 연료로 사용해 연기가 안나고 높은 열원으로 엔진속도가 빨라 이동이 신속한데 비해, 러시아함대는 유연탄을 사용해 연기가 보이고 속도가 느려, 일본함대의 기동접근전에 당했다는 설이 있을 정도다. 일본이 한일합방후 제일 먼저 세운 건물이 평양에 지은 일본해군 무연탄 연료창고였다.

근대무기와 산업기계 생산에 필수적인 철은 옛날 삼국시대부터 가야국에서 일본으로 수출한 터라 일본인의 의식 속에 한반도는 철기문화를 보내준 곳이다. 북한지역의 철광산은 당대 아시아 최대의 철광산 지역이었다. 금은 더 말할나위가 없다. 일본은 청일전쟁에 이기고 중국에서 받은 전쟁 배상금을 영국 금화 파운드 기준으로 3800만 파운드(금 280톤)을 받아내 1897년부터 금본위제로 이행하였다. 통화발행량 증가를 위해서는 금이 많이 필요했고 그 금은 한반도에 많았다.

그래서 일본제국은 한반도를 삼켰고 만주로 들어가 만주국을 세워 일본을 위한 동아시아경제통합을 진행했다. 일본은 한반도에서 특히 북한지역에 전력망과 철도망, 항만을 정비하면서 싼 전력과 싼 노동력, 싼 토지를 이용해 산업단지를 만들고 군수공업의 병참기지로 활용했다. 흥남에 석탄을 원료로 한 화약공장이 있었고, 두만강변 아오지에는 석탄(갈탄)에서 석유를 뽑아내는 당시 세계최고 수준의 인조석유 제조공장이 있었다. 아오지탄광을 강제노역의 장소로만 이해하는 분들에겐 의외의 사실이다.

한반도가 해방되고 남북분단 상황에서 [6.25전쟁]이 휴전상태로 끝난(?) 후 일본은 더이상 쌀과 금을 한반도에서 가져오지 않아도 되었다. 일본쌀은 생산성 향상과 대체재인 수입밀가루 증가로 수요감소/공급증가로 자급자족이 가능하게 되었고, 금은 미국경제 지배 질서인 브래튼우즈 체제에서 금-달러 본위제로 된 상태라 달러가 곧 금이었다. 무연탄은 석유로 대체되고 철광은 호주나 브라질 등에서 값싸게 대량으로 수입할 수 있어 태평양 연안의 항만지역이 더 발전하게 되었고 한반도를 바라보는 동해연안지역의 일본지방도시들은 쇠퇴해갔다. 그래도 무연탄은 일부 제철소의 연료로 필요했고 기타 광산물, 금속, 수산물 등 1차산품을 북한에서 수입하는 것이 경제적 이익이 된다는 수요가 있었다.

북한도 식민지시대 일본이 남겨놓은 설비를 복구하거나 개보수하기 위해서, 그리고 새로운 설비투자를 위해 일본제 기계설비를 들여오고자 하는 경제적 수요가 있었다. 이렇게 양국간에 있었던 경제적 요인 때문에 국교가 없는 가운데에도 일본무역상사들에 의해 북일간 무역이 중국을 통한 간접무역 방식으로 개척되었다. 1956년 3월에는 일본의 무역업체들이 [일조무역회]를 결성하였다. 이후 일조무역회는 일본국내의 대북무역업계의 대표단체로서 1993년에 해산 (동아시아무역연구회에 통합)될 때까지 북일무역 실무의 중심적인 존재로 되었다.

1960년 7월에 등장한 일본 자민당의 이케다 내각은 사회주의권과의 교류를 [정경분리]의 원칙으로 실시하게 되었다. 남한의 이승만정권 붕괴라는 요인도 작용하여, 북일간 무역을 직접무역으로 전환할 수 있었다. 일본의 주요한 수출품은 기계류, 강재, 화학품 등 중화학공업제품의 비중이 컸고, 북한의 수출품은 철광석, 무연탄 등 광산물이 중심이었다. 북한의 무산철광석은 1963년 36,000톤을 시험수출한 후 1964년 35만톤, 1965년 42만톤이 일본에 수출되었다.

1970년대에 들어 미국과 중국의 관계개선 등 [동서데탕트]라는 새로운 정세하에 일본도 중국과 국교를 정상화하여 북일관계도 개선될 수 있는 환경이 도래하였다. 일본정부는 한일정기각료회의(1971년 7월)에서 “앞으로는 북한과의 사이에 인적교류도 단계적으로 활발히 해갈 것”이라고 북한과의 교류추진을 한국정부에게 전달하였다. 북한도 서방자본주의권과의 무역을 확대하여 특히 자본재의 수입확대를 본격화하였다. 이 시기부터 일본에서는 대기업도 북한과의 무역에 적극 참여하였는데, 일본 대기업들이 사회주의권과의 무역을 위해 별도로 설립한 무역상사로서 마루베니 계열의 와코교역(和光交易), 스미토모 계열의 다이카무역(大華貿易), 미츠비시 계열의 메이와산업(明和産業), 이토츄 계열의 신에츠통상(新越通商), 미츠이 계열의 싱와물산(新和物産) 등이 북한과의 무역에도 참여하였다. 또한 동해상사(1961년 설립), 경화상사(1966년 설립), 조선특산물판매주식회사(1969년 설립)등 재일조선총련계 무역회사들도 북한과의 무역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970년대 전반기에 발생한 제1차 세계석유위기 이후의 세계경제 불황에도, 북한은 기계, 설비, 플랜트 등의 수입을 대폭 늘렸는데 북한의 주요 수출품인 비철금속의 국제가격이 폭락하자 수입과 수출의 균형이 깨지면서, 북한의 외화사정이 극도로 악화되었다. 1974년부터 북한의 무역결제가 지연되었고 북한과의 무역에 참여했던 많은 중소규모 무역상사가 지불지연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이에 따라 1974년 12월에 일본수출입은행은 수출융자 제공을 거부하고 통상산업성은 수출보험업무를 중단하였다.

1977년 3월에는 일본에 「일조무역결제협의회」가 구성되어 채무문제에 관한 일본무역업계의 공동 대응이 시작되었다. 북한은 1983년 6월까지 원금의 일부인 0.9억 서독마르크(약 100억엔)과 금리를 합쳐 약 300억엔을 상환한 것을 마지막으로 일본에 대한 채무변제를 중지하였다. 1983년 7월 현재의 북한의 일본에 대한 미결제채무원금은 약 6.1억 서독마르크였다(2001년에 약 3억유로로 변환). 1986년 9월 일본 무역회사들은 북한으로부터 받지 못하고 있던 수출대금에 대한 수출보험을 정부에 구상 요청하여 무역보험공사가 약 300억엔을 해당기업에 지불하였다. 해당기업들은 북한으로부터 채권을 회수하여 보험당국에 갚아야할 의무를 지니게 되었다. 이후 일본기업의 북한과의 무역에 대한 관심은 희소해지고, 재일조선상공인계 무역상사의 대북 무역이 북일무역의 중심으로 되었다. 참고로 2018년 현재 일본의 대북 무역채권액은 지연금리를 포함하면 8억유로를 넘는다(이자에 대한 이자는 불포함).

1980년대와 90년대 중반까지 북한의 심각한 외화부족은 여전하였지만 일본산 기계설비에 대한 북한의 수요가 있고, 북한산 농수산물(송이버섯, 조개류 등) 수출이 증가하고 위탁가공무역이라는 새로운 무역형태가 등장했다. 일본의 대북 수출품은 기계류 수출이 1986년 이후 대폭 감소한 대신 섬유제품의 위탁가공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1990중반에 들어서는 북한 경제가 자원공급부족, 외화부족, 식량부족 등 경제위기에 빠져들게 되면서 북일무역도 퇴조하게 되었다. 1999년이후 북한경제가 회복국면에 들어서면서 2000년 전후로 북일무역이 일시 증가하였으나 그 이후 급감하면서 2005년은 2000년 무역액의 절반이하로 줄어들었다. 2006년 이후의 북일무역관계는 무역제재하에 대일 수출이 중단되고 2009년 6월부터는 대북수출이 중단되었다.

2002년5월 평양국제전람회에 참가한 일본기업 (사진: 동아시아무역연구회 제공)

북일간의 무역품목을 보면, 북한은 2006년까지 주로 수산물 알루미늄괴 아연괴 선철 등의 금속제품, 무연탄 마그네시아크링커 모래 천연흑연 등 광물, 전기기기와 방직용 섬유제품의 임가공, 송이버섯 및 약용식물 등 농산물을 일본에 수출하였다. 일본은 주로 버스·승용차·트럭 자건거 등 수송기기, 섬유제품 및 전기기기의 임가공원료, 내연기관 에어콘 냉장고 건설기계 등 기계류, 플라스틱 고무제품, 화학공업제품, 기타 구두 담배 냉동소고기 위스키 등 소비제품을 북한에 수출하였다.

 

북일무역의 추이 (자료 - 일본재무성 통관통계)

 

북한의 대일수출 품목별 추이 (단위:백만엔)(자료 - 일본재무성 통관통계)

 

일본의 대북수출 품목별 추이 (단위:백만엔) (자료 - 일본재무성 통관통계)

 

우여곡절의 북일 국교정상화 교섭
미쏘간의 대립으로 점철된 냉전시대의 끝을 알리는 시작이 [88 서울올림픽]이었다는 것은 기묘한 운명이었다. 남한 국내적으로는 군사정권이 스포츠를 정치에 이용하려는 의도가 있었지만, 국제적으로는 동서진영이 1976년 이후 12년만에 올림픽에서 다시 만났다. “벽을 넘어서”를 주제로한 스포츠대회로서 크게 성공하였고 당시 노태우정부는 [북방정책]을 추진하여 사회주의국가들과 국교를 정상화하는 새로운 정책을 적극 추진할 수 있었다. 이렇게 냉전이 해체되어가는 국제환경 변화에 대해 일본정부도 적극적으로 반응하기 시작하였다. 

1989년 1월 자민당정권의 다케시다 내각은 “우리나라의 한반도정책에 대하여”라는 신정책을 발표하고 북한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이 정책의 내용은 “북한을 적대하는 정책을 갖고 있지 않다”, “한일조약 제3조의 <한국은 유일합법정부>는 북한지역에 해당되지 않는다(白紙이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곧이어 3월 30일 다케시다 수상은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북한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정식 호칭하면서 “과거의 관계에 대해 깊은 반성과 유감의 뜻을 표명하고 싶다. 이러한 입장에서 관계개선을 추진해가고 싶다”고 표명하였다. 다케시다 수상의 입장은 북한을 방문한 일본사회당을 통해 바로 북한에 전달되었다. 이어서 1990년 9월 자민당의 가네마루 신과 사회당의 타나베 마코토를 공동단장으로 한 자민당과 사회당 공동방북단이 평양에서 조선노동당과 3당공동선언을 함으로써 91년 이후 북일 정부간 국교정상화교섭이 이루어지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 3당공동선언에서는 북일간에 국교정상화와 조선총독부 통치시대의 보상과 함께 “남북분단후 45년간에 대한 보상”도 약속하였다.

북한 일본교섭의 첫 계기가 되었던 3당공동선언(자료출처- MBC)

북일간의 정부간 국교정상화 교섭은 다음과 같이 전개되었다.

1) 제1시기(1991년-2000년) : 국교정상화 회담 시기
이 시기 북일간에는 예비회담과 총11차례의 본회담(1991-92년 8차례, 2000년 3차례)을 진행하였는데 이 시기의 교섭에서 양측의 입장을 거의 다 알 수 있게 되었다. 교섭에서 나타난 쟁점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 북한은 과거청산을 위해서는 일본의 사죄와 보상이 근본적인 것으로 주장하면서도, 북한의 관할권을 한반도 절반으로 한정하고 국교정상화를 먼저 이루자는 적극성을 보였다. 또한 처음에 제기하였던 “교전관계에 따른 배상” 또는 “전후 45년간의 손실에 대한 보상” 등의 주장을 거두고, “가해국으로서의 보상”으로 정리하였다. 또한 북한은 일본이 요구한 남북대화 진전,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 핵보장조치 협정체결 등의 전제조건을 1992년 1월까지 달성하였다.

② 일본은 “보상”에는 응하지 않고 1965년 한일조약과 마찬가지로 [재산청구권]으로 처리하자는 주장을 바꾸지 않았으며, 국교정상화를 먼저하자는 북한의 제안을 거부하고 [핵문제 해결]을 국교정상화의 전제조건으로 내걸었다.

③ 1993년초 미국이 북한 핵개발의혹을 제기하고 북한은 3월에 핵확산방지조약(NPT) 탈퇴를 선언하면서 제1차 핵위기가 발생하였다. 북한은 외교정책의 중심을 북미관계로 옮겼고 북일국교정상화교섭도 중단되었다.

④ 일본정계도 자민당 장기집권이 끝나고 1993년 8월에 야당연합내각이 들어섰다가 1994년 6월에 자민당-사회당 연립내각이 성립하는 등 정계개편의 소용돌이가 몰아쳤다. 1995년 8월 15일에 자-사 연립내각의 무라야마 수상(사회당)이 전후 50년 기념담화를 발표하여, “국책을 잘못하여 전쟁의 길을 걸어 국민을 존망의 위기에 빠뜨리고, 식민지지배와 침략으로 많은 나라들, 특히 아시아각국의 사람들에게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안겼다”면서, “다시금 통절한 반성의 뜻을 표하며 진심으로 오와비(お詫び:사과, 사죄)의 마음을 표명”한다는 [반성과 사죄]를 표명한 것은 그 후 북-일 정부간 교섭의 중요한 근거로 되었다. 1995년에 일본은 50만톤의 쌀을 북한에 지원하고 북일국교정상화교섭 재개의 분위기를 만들었다.

⑤ 그러나 1996년 1월에 다시 자민당 단독내각으로 돌아온 일본정부는 4월의 [미일안보공동선언], 1997년 9월의 [미일방위협력지침] 개정, 1999년 5월의 [주변사태안전확보법]  제정 등을 통해 미일동맹을 축으로 하는 방위력강화의 길을 걷는다.

⑥ 한편으로 1999년 3월 20일에 일본의 오부치 수상이 “북한이 우리의 우려와 불안의 해소에 건설적으로 응할 용의가 있다면, 인도지원과 국교정상화를 향한 건설적인 대응을 할 용의가 있다”고 언급하였다. 이에 대해 북한도 8월에 대일관계에 관한 [정부성명]을 발표하고 “일본이 과거청산을 통한 선린관계 수립의 방향으로 나아간다면 이에 즐거이 응할 것”이라는 입장을 보였다.

1999년 일본 국회의원 방북단, 북한 수교교섭 재개 공동성명 발표 (자료출처- MBC)

⑦ 2000년에 재개된 국교정상화 회담에서 북한은 전쟁배상과 전후보상 요구 대신에 일본의 공식문서에 의한 사죄와 식민지지배 보상을 요구하였다. 일본은 1995년 무라야마 수상의 [반성과 사죄]에 근거한 대북한 사죄와 [경제협력방식]에 의한 과거청산과 경제협력을 제시하였다. 북한과 일본 쌍방의 쟁점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2000년 북일 쌍방의 쟁점 (자료 - 필자 작성)

2) 제2시기(2002년-04년) : 북일정상회담에서 합의
2002년 9월 북일정상회담에서 당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일본인납치의혹을 인정하고 사과하였으며, 평양공동선언을 통해 북일간에 “청구권 상호포기, 국교정상화후에 무상자금협력등 경제협력” 방식의 국교정상화 합의가 이루어졌다. 일본은 [일괄해결, 경제협력 방식]으로 합의하였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일본외무성의 해석에 따르면, “1945년 8월 15일 이전에 발생한 사유에 근거한 양국 및 그 국민 모두의 재산 및 청구권을 상호 포기”하고, 이에 따라 소위 종군위안부, 강제연행 등의 문제를 포함하여 식민지지배에 기인하는 금전지불을 포함하는 모든 청구는 법적으로 완전하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으로 함과 동시에 이에 병행하여 일본이 북한에 대하여 경제협력을 실행하는 것을 말한다”고 되어있다. 그러나 북한은 일본측이 해석하고 있는 [일괄해결]에 합의하였다는 것을 부정하였다.

북한정부는 북일정상회담에서 일본인납치의혹을 인정하고 생존해있는 납치피해자를 일본으로 귀국시키는 조치를 취하였지만 일본에서는 요코다 메구미 등 납치피해자의 사망을 인정하지 않았고 납치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지 않고는 국교정상화를 추진할 수 없다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게다가 2002년말 북한과 미국 사이에 핵개발에 대한 긴장이 고조되고 2003년 1월에 북한이 NPT탈퇴선언이라는 강수를 두는 2차핵위기가 발생하여 북일간의 국교정상화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1993년상황의 재판이었다. 북일관계의 파행 과정에는 반드시 미국이 개입했다는 것이 역사 속의 사실이다.

정상 회담을 마치고 악수하는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와 북한의 김정일 국방 위원장(자료출처- 산케이 신문, 2002 년 9 월 17 일)

3) 제3시기(2006년-08년) : 북일 양자간 협상 지속, 북한의 핵실험과 일본의 제재
2006년 2월에 북경에서 제1회 북일포괄병행회의가 개최되었다. 포괄병행회의란 ①납치문제 등 현안사항에 관한 협의, ②핵문제, 미사일문제등 안전보장에 관한 협의, ③국교정상화 교섭 등 3개 협의를 포괄적으로 병행하여 논의한다는 것이었다. 북한은 과거청산이 경제협력만으로 처리되는 것에 대한 문제제기로서 문화재 반환과 보상, 개인에 대한 인적 물적 보상(개인청구권, 보상권)을 요구하였다. 일본은 납치문제와 안전보장상의 문제를 최우선 해결과제로 한다는 입장에 변함이 없었다. 

2007년부터는 북일국교정상화 교섭이 6자회담 틀내에 설치된 [북일국교정상화를 위한 작업부회]에서도 이루어지게 되었다.  2007년에 열린 두 번의 작업부회에서는 북한이 경제협력 이외의 보상을 제기하였으며, 일본은 [일괄해결, 경제협력 방식]으로 과거청산이 완전하고 최종적으로 해결된다는 입장에 변함이 없었다. [경제협력 방식]에 대한 북한과 일본의 견해차이가 분명해졌다.

그러나 2006년 북한의 1차 핵실험에 대해 일본이 독자적인 경제제재를 가하면서 북일무역이 중단된 상황을 바꾸지 못하고 국교정상화교섭은 다시 중단되었다.

2006-08년 북일 쌍방의 쟁점(자료 - 필자 작성)

4) 제4시기(2009년-12년) : 일본민주당 집권시기 (양국의 기본입장차이 확인)
일본에서 2009년 9월에 들어선 민주당정부는 아시아중시정책을 추진하는 것으로해서 북한과도 교섭을 추진할 것으로 기대를 모았으나, 오키나와 미군기지 문제, 후쿠시마 원전사고 문제 등에 휘말려 결국 2012년말에 자민당으로 정권을 다시 넘겨줄때까지 북한과의 교섭을 거의 하지 못하였다. 2012년 8월에 북일 적십자회담을 통해 북한에 있는 일본인 유골, 묘지 확인 및 참배를 위한 일본인방문을 합의한 것과, 11월에 제1차 북일 정부간 협의 (몽골 울란바토르)을 개최하여 평양선언의 원점으로 돌아가지는 것에 합의한 것이 전부였다. 

북한과 일본의 적십자회담(자료출처- KBS)

5) 제5시기(2014년-현재) : 북일간 직접협상 재개(스톡홀름 합의)와 실패
2012년 12월에 정권을 되찾은 자민당의 아베 수상은 납치문제 해결을 자신의 임기내에 해결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2014년 3월-7월에 북경, 스톡홀름에서 세차례의 북일 정부간협의가 열렸는데 북한은 납치피해자를 포함한 모든 일본인에 관한 조사를 포괄적 전면적으로 실시하여 최종적으로 해결할 의사를 표명하였고, 일본은 이에 대응하여 일본이 독자적으로 취하고 있는 대북제재조치를 해제할 의사를 표명(유엔안보리의 제제조치는 제외)하였다.

여기서 합의가 이루어졌는데 북한은 일본인문제에 대한 특별조사위원회를 설립하여 생존자가 발견되면 일본에 귀국시키겠다고 약속하였고, 일본은 국교정상화와 관계개선에 임한다고 약속하였다. 일본정부는 인적왕래규제, 인도적 목적의 북한국적선박입항금지를 포함한 일본의 대북독자제재의 일부를 해제하였다. 스톡홀름 합의의 실현과정에서 일본정부는 납치 피해자 조사를 최우선으로 요구한 데 반해, 북한은 납북자, 일본인 유골, 잔류 일본인 및 일본인 배우자 등 포괄적 조사실시를 주장하여 조사위 설립 이후부터 쌍방간 입장 차이가 있었다. 이후 북한은 2016년 1월에 4차 핵실험을 단행하였고 일본도 제재를 다시 강화하였다. 이에 따라 북한은 2월 12일 일본인 납치피해자 재조사를 전면적으로 중단하고 특별조사위원회 해체한다고 발표하였다. 이후 현재까지 북한과 일본의 정부간 공식교섭은 중단된 상태에 있다. 

일본의 대북한 경제협력 논의의 본질
일본정부는 1991년의 제1차 수교회담 시기부터 경제협력방식의 국교정상화 입장을 고수하였고 2002년의 북일평양공동선언에서 양측이 해석은 다르지만 전체적으로는 경제협력방식에 합의하였다. 

여기서 일본의 대북한 경제협력방식의 국교정상화 정책에 대해 1965년 남한과의 수교에 비추어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① 일본은 대한민국이 한반도전체를 관할하는 오직 하나의 합법정부라고 인정한 바 없다. 한국과 마찰 없이 북한과 수교할 수 있는 공간을 남겨두었다. 

 ② 한국에 대하여 전쟁배상 또는 보상을 하지 않은 것은 국제법상으로 그렇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며 북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접근하였다.

먼저, 일본은 한국이 한반도 유일의 합법정부라고 인정한 바 없다는 점인데, 이는 어떻게 된 것인가? 당연하다. 한국이 국제법상 한반도전체를 관할하는 유일의 합법정부라면 북일수교는 불가능하다. 한국은 국제법상 한반도 남쪽의 유일정부이고 북한 한반도 북쪽의 유일정부로서 함께 유엔에 동시가입하였다.

둘째로, 한국과의 수교에서 전쟁배상 또는 보상을 하지 않는 것은 1951년 9월 18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일본국과 연합국간에 서명한 평화조약(이하,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에 그렇게 되어있기 때문이었다. 이 조약에서 코리아(Korea)는 연합국의 성원이 아니었으므로 동 조약의 체결 대상국에 해당되지 않지만, 조약의 수혜국으로서 “일본이 코리아의 독립을 승인하고 코리아에 대한 일체의 권리와 청구권을 포기”<제2조(a)>하는 조치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동 조약의 제21조 별도 규정에 따라, 코리아는 대일청구권 중에서 전쟁으로 인한 배상청구권은 해당이 없고 경제상의 [재산청구권]만을 보장받도록 하고 구체적인 내용은 코리아와 일본이 별도 교섭을 통해 해결하도록 되었다. 코리아의 재산청구권이란 일본정부 및 국민에 대해 코리아측이 소유하고 있는 재산(채권 포함)을 돌려 받기 위한 청구권이다.

1950년대 이후 한일간의 청구권협상은 이를 근거로 하고 있다. 한편, 중국은 전쟁배상청구권에 대한 권리를 보장받았으나, 중화민국(대만)이 일본과 수교(1952년)하면서 배상청구권을 포기하였고, 중화인민공화국(중국)도 1972년 중일공동성명(1972.9.29)을 통해 일본에 대한 전쟁배상청구를 포기한다고 선언하였다.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을 조인한 49개국 중 동남아시아의 미얀마, 필리핀, 인도네시아, 남베트남 등 4개국은 일본에 배상청구권을 요구하여 배상금을 받았다.

한국과 일본은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을 한일수교조약의 전문에 명기하고 이에 따라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해결과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을 체결하였다. “재산청구권” 명칭이 “재산 및 청구권”으로 된 것은 [보상]의 함의를 갖도록 한 정치적 수사였다. 이 협정에서 일본은 재산청구권 해결에 근거한 경제협력의 형태로 무상자금 3억달러 유상자금 2억달러의 정부간 경제협력과, 민간상업차관 3억달러를 제공함으로써, 한일간의 청구권문제가 “완전하고 최종적으로 해결되었음”을 확인하였다. 일본의 해석은 한일 양국이 상호 재산청구권을 포기하고 일본이 경제협력을 실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공식용어는 [경제협력]이었다. 한국의 해석은 일본이 청구권을 포기하였고 한국이 가진 청구권을 5억으로 설정하고 이를 받았기 때문에 [청구권자금]이었다.

일본이 한국에 제공한 무상자금 3억 달러는 현금이 아니라 이 금액에 상당하는 일본의 생산물과 일본인의 용역을 협정발효일로부터 10년간(1966-75년)에 걸쳐 무상으로 제공하는 것이었다. 유상자금 2억 달러는 10년간에 걸쳐 일본의 산업시설과 기계류 등을 공공차관으로 7년 거치 13년 분할상환 연리 3.5%로 제공하는 것이었다.

한일국교정상화에 따른 일본의 대한국 경제협력의 내용(1966-75년)(자료 - 경제기획원 [청구권자금백서] 1976년, 재무부 [한국외자도입30년사]1993년 )

원래는 1962년 3월 한일 외무장관 회담에서 당시 최덕신 외무장관이 배상청구권 명목으로 8억달러를 요구하였다. 이에 대해 일본측 고사카 젠타로 외상은 재산청구권자금으로 2,500만달러를 제시하였다. 이후 미국측의 중개로 한국측은 배상청구권을 포기하고 일본은 경제협력자금을 상향조정하면서 동년 11월 12일 김종필-오히라 외상 메모(무상 3억달러, 유상 2억달러, 민간차관 1억달러 이상으로 양국 정상에게 건의한다)로 합의를 보았다. 최덕신 외무장관은 1963년 3월 경질되었다. 배상청구권을 주장했던 최덕신은 이후 1977년에 부인과 함께 미국에 망명, 86년에 북한으로 건너가 89년에 사망하였다. 그의 부인이 유미영씨(2016년 사망)로 2000년 8월에 천도교 청우당 중앙위원장을 하면서 북한 이산가족 방문단 단장 자격으로 서울을 방문하여 자녀와 상봉한 바 있다.

이와 같은 배경을 가진 한일기본조약에서 양국 정부는 개인의 청구권이 포함되는 것으로 합의하였다. 한국정부는 한국민간인의 대일청구권을 포함하여 대일청구권을 제기하였고 청구권자금 사용용도에도 민간인 보상 항목을 넣고 대상도 규정하여 1971년부터 개인보상 신고를 접수하여 75년부터 보상지급을 실시하였다. 76년 4월까지 약 8만건에  90.8억원을 지급하였다. 그런데 사용용도항목에 징용후 해방전 사망자에 대한 유족 보상은 있어도 징용피해자 본인에 대한 보상 항목은 없었다. 종군위안부도 없었다. 일본정부는 한국정부과 경제협력으로 모든 청구권문제가 완전히 최종적으로 해결되는 국제법상의 조약을 맺은 것이고 당시의 한국정부도 동의한 바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한일간의 수교조약은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규정에 근거한 것이었는데,  문제는 식민지지배로 인한 개인들의 청구권과 손해보상을 국가간 조약으로 대체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 남았다. 불법적 식민지지배에 의한 개인의 민사적 손해보상권(정신적 피해에 대한 위자료)은 존재한다는 것이 2018년에 한국 대법원이 내린 판결의 핵심이다. 일본정부는 식민지 지배의 국제법적 합법성을 주장하고 있으므로 한국 대법원의 판결을 받아들일 수 없는 입장이다.

일본은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에 근거한 청구권 처리방식을 북한에 대해서도 그대로 적용하려는 입장이다. 이에 대해 북한은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자체를 인정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전쟁에 대한 배상과 불법적 식민지 지배에 대한 보상을 요구해 왔다. 북일평양공동선언의 내용에 대한 해석에서 양측의 입장이 다른 것도 이러한 때문이다.

북한에 대한 수교자금규모에 대해서 일본정부가 구체적인 수치를 제시하였다는 정보는 없지만, 북한이 200억달러를 제시했다는 말도 있는데 대체로 50억달러에서 100억달러 사이의 규모로 판단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왔다(미국의회조사국 보고서, 2000년 6월). 2000년 10월에 도쿄신문은 북일수교자금으로 약 90억달러(당시 기준 1조엔)를 정부가 검토하고 있다고 보도한 바 있다(2000.10.26). 그 내용으로는 무상공여 50억달러, 유상차관 30억달러 대북채권 상계 10억달러로 되어있다.

북일국교정상화 이후의 경제협력의 전망
북일간의 국교정상화에 따른 경제협력의 세부적인 방안에 대해 일본정부가 제시한 것은 없다. 일본의 과거 경제협력경험에 비추어보면, ①인도적 지원분야, ②산업생산 정상화 분야, ③산업인프라 개발협력 분야, ④인재육성 분야, ⑤생활기반시설 및 환경협력 분야 등이 제시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북일 경제협력의 주요 분야 (자료 - 필자 작성)

이상으로 북한과 일본간의 식민지시대로부터 현재까지의 경제관계와 국교정상화교섭시의 경제문제 입장과 수교후의 경제협력 전망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물론, 과거역사의 청산이 경제협력으로 치환되는 것에 대해서는 북한도 경제협력만으로 등치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고, 강제연행문제, 위안부 문제, 재일동포 법적지위 문제, 문화재 반환문제 등 인도적 문제에 대한 해결이 별도의 차원에서 논의되어야 한다.

북한으로서는 일본과의 수교를 활용하여 동북아지역 범위의 경제개발계획 청사진을 그려야할 것이며, 일본도 북일간 그리고 동북아지역에서 경제협력을 추진하는 전략에 대해 구체적인 청사진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다음편 기획연재[북한경제와 협동하자]는 '북한의 대외경제- 중국'이 주제로 다뤄질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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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테이쿄대학 이찬우교수
일본 테이쿄대학 이찬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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