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경제와 협동하자⑪] 북한의 교통인프라(도로, 철도 항만)의 현황과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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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경제와 협동하자⑪] 북한의 교통인프라(도로, 철도 항만)의 현황과 과제
  • 2018.11.20 19:10
  • by 일본 테이쿄대학 이찬우교수
25:04

북한의 교통인프라가 낙후되어있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상식이 되었다. 금년 4월 27일 판문점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에서 북한의 김정은 위원장이 문재인대통령에게 “오시면 솔직히 걱정스러운 것이 우리 교통이 불비해서 불편을 드릴 것 같다. 평창 올림픽에 갔다 온 분들이 말하는데 평창 고속열차가 다 좋다고 하더라. 남측의 이런 환경에 있다가 북에 오면 참으로 민망스러울 수 있겠다”고, 그래서 “비행기로 오시면 잘 마중하겠다”고 말한 것으로, 북한 최고지도자도 인정한 상식이다. 물론 그래서 9월에 문재인대통령이 비행기로 평양을 방문했기 때문에 또 그 비행기로 백두산까지 갈 수 있게 되었다는 복선도 있었지만 말이다.

남한에서 시원하게 뻗은 고속도로, 빠른 고속전철과 고속통신시스템, 그리고 세계와 이어진 항만과 공항은 개방경제하의 경제발전을 밑받침하는 힘이다. 북한도 교통 인프라를 개발하는데 힘을 넣어왔지만 자립경제노선으로 그 주력은 전력과 철도운수였다. 도로운수는 자동차에 석유가 필요하기에 석탄과 전력을 주요 에너지원으로 하는 북한으로서는 석유를 소비하는 도로 정비에 재정을 투입하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주민의 원거리 이동이 통제되는 상황에서 도로정비는 치안과 국방의 관점에서 이로운 것도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전통적으로 한반도는 외침을 빈번히 받은 터라 외국군대가 마음놓고 달릴 도로를 정비해 놓을 이유가 없었다는 점도 도로가 낙후하게 된데 한몫을 했다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철도는? 전기자동차를 개발하면? 앞으로 한반도에 신의주-부산간 고속철도와 전기자동차나 수소연료전지 자동차가 질주하고 북한의 항만과 남한 항만에 배들이 줄을 잇는 풍경을 상상하면서 북한의 교통인프라의 현황과 전망을 살펴본다.

도로인프라 현황
북한의 도로는 고속도로나 1급 도로의 일부를 빼놓고는 비포장이 대부분이라, 지방에 가본 사람은 안다. 덜컹거리는 승용차안에서 얼마나 천정에 머리를 박아야하는지. 그런 지방에서 살다가 수도 평양에 올라와 본 사람들의 심정은 어떠하랴. 지상의 낙원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테다. 여기서는 북한에선 나름 정비를 했다는 나선경제특구의 도로를 소개하고자 한다.

필자는 2017년에 두만강변의 나선시를 방문해서 이순신 장군이 무관 초임시절 두만강하구에서 조산만호 벼슬살이하면서 녹둔도에서 여진인들을 물리친 승전비를 보러 찾아간 적이 있다. 아래의 지도와 사진에 표시를 하였는데 북한의 원정리세관을 나와 ①도로에서 선봉구역을 거쳐 나진으로 가는 길은 콘크리트 포장도로이다. 도중에 ②번 두만강쪽 지방도로로 굽어들어면 비포장도로이고 예전 경흥(慶興)땅이었던 사회리(四会里)가 나오는데 여기에 적지(赤池)라는 곳이 있다. 

이곳이 조선왕조를 세운 태조 이성계의 할아버지인 도조(度祖 ?~1342년) 고향이 이곳이다. 도조와 얽힌 이야기가 있다. 도조가 젊었을 때 어느날 꿈을 꾸었는데 흰 용이 나타나서 “나는 이 연못에 사는 흰 용인데 검은 용이 와서 연못을 뺏으려 하니 도와주시오. 당신은 활을 잘 쏘니 검은 용을 쏘아 주시오”라고 말했다. 다음날 연못에 가보니 과연 검은 용과 흰 용인 엉켜 서로 싸우고 있어 도조가 활을 쏘려 했지만 어느 쪽이 검은 용인지 분간을 할 수 없었다. 그날 밤 꿈에 흰 용이 다시 나타나서 “왜 활을 쏘지 않았소. 이번에는 실수 없이 잘 쏘시오 먼저 오는 쪽이 흰 용이고 나중에 오는 쪽이 검은 용이오”하고 사라졌다. 과연 다음 날도 두 용이 싸우고 있어 알려준 대로 활을 쏘았더니 검은 용은 피를 흘리고 사라졌다. 그 피로 호수가 붉게 되어 이름이 적지(赤池)로 되었다. 흰 용은 감사의 표시로 손자가 왕이 될 것이라는 예언을 했다고 한다. 용비어천가 제22장에도 나오는데 “黑龍이 ᄒᆞᆫ 사래 주거 白龍ᄋᆞᆯ 살아내시니 子孫之慶ᄋᆞᆯ 神物이 ᄉᆞᆯㅸ·니”(검은 용이 한 살에 죽어 흰 용을 살려 내시니, 장차 자손에게 있을 복을 용이 도조에게 사뢰니)이다. 이 적지는 해방후 북한 주민들이 농지확보를 위해 매립하였기 때문에 더이상 호수가 아니다. 이곳에는 조선왕조시대 이후 일제말까지 적지당(赤池堂)이 있었고 높이 2m 정도의 석비가 거북등 위에 있었다한다. 적지 이야기와 석비 존재를 당지의 안내인에게 물어보았는데 모른다 하였다. 마을을 방문하는 것은 사전허가가 필요한 일이었기에 포기하였는데 그 후 나선에서 나와 중국 연길에 있는 연변조선족자치주박물관을 들렀을 때 우연히 그 석비의 탁본을 만날 수 있었다. 한문으로 된 탁본 [경흥부적지기적비명 慶興府赤池紀蹟碑銘]에 위 이야기가 적혀있었다.

비포장도로로 빠져 사회리 마을길을 통과하는 데 이야기가 옆으로 샜다. 이왕 샌 김에 한마디 더 하면, 이 사회리 지역은 일제강점시대에는 적지의 동쪽 두만강변(함림산지구)에 일본군 제19사단(나남사단)의 국경경비혼성부대가 주둔하였고, 보병과 포병중대가 두만강 건너 하산지구에 주둔한 쏘련군을 감시하는 임무를 맡았다고 한다. 1938년에 두만강 건너 장고봉 고지를 놓고 일본군과 쏘련군이 전투를 벌린 [장고봉 사건] 때 이곳 사회리에서 쏘련군에게 포격을 했다가. 쏘련군이  전투기까지 동원해 사회리를 폭격하여 쑥대밭이 된 적도 있다한다. 러일전쟁에서 이기고 시베리아출병도 했던 일본군이 이로부터 쏘련군을 두려워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사회리와 홍의리를 지나 ③의 만포(晩浦) 호수에서 웅상항으로 가는 비포장 고개길에서 좌회전하여 굴포리로 들어가면 북한에서 고속도로를 제외하고는 직선도로로 제일 길다는 ④번 비포장도로를 만난다. 북한주민들이 맨손으로 번듯하게 토지정리하면서 일군 직선도로로 두만강철도역까지 뻗어있다. 동쪽으로는 북한에서 호수로는 제일 넓다는 번포(藩浦:서번포, 동번포)호수가 있다. 사회리에서 두만강역으로 바로 빠지는 지방도로도 있지만 사전신고로 받은 통행증이 있어야 통과할 수 있는 검문소가 있어 먼거리를 돌았는데 그 덕분에 북한의 소위 농촌 시골의 모습과 천혜의 풍경을 만끽할 수 있었다. 웅상항쪽 해안은 해운대에 버금가는 모래사장이다. 굴포리의 해안가는 자연 해송림으로 정말 다시한번 도시락 싸들고 소풍오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다. 도로가 잘 정비된 것만이 능사는 아니며, 그 땅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정취를 보호하고 소통하게 하는 도로라면 충분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도 덜컹거리는 승용차안에서 해보았다. 두만강역에서 서번포 호수를 끼고 두만강 하구쪽으로 가면 언덕배기 산이 나오는데 이 언덕이 조산(造山)이다. 이순신 장군의 초임벼슬인 조산만호의 조산이다. 이 언덕에 승전비가 있고, 승전대 건물이 있어 식당등으로 운영되고 있다. 필자가 갔던 이 길은 앞으로 언젠가 꼭 중국-북한-러시아를 연계하는 3국 관광코스의 필수 방문 코스가 될 것으로 생각한다.

북한의 도로 (자료 - 필자 촬영)

북한의 도로망은 서해축(개성-신의주, 약400km), 동해축(고성-회령, 약900km), 동서연결축(남포-평양-원산, 약220km), 북부내륙축(평양-초산-혜산-무산), 동서국경축(신의주-고무산, 약800km) 등 5개 축으로 나뉜다. 도로수송거리는 자동차 연료 등을 감안하여 30km 이내 단거리 수송이 원칙이었지만 지금은 100km 이동도 인정되고 있다고 한다. 지방의 시장이 활성화됨에 따라 상인들의 물품 수송이 트럭, 버스 등에 주로 의지하게 되어 도로 수송이 활발해졌다고 한다. 이에 필요한 연료공급 시장도 존재하게 되어 장거리 수송도 가능하게 되었다. 현재 소비재 수송의 대부분은 트럭 등이 맡고 있다. 정부가 도로수송을 장려하지 않고 철도 우선 정책을 유지하고 있지만 실태상 도로 수송이 이전보다 크게 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만큼 도로정비 즉 포장에 대한 요구가 높지만 도로포장율이 낮은 것이 문제이다. 2001년 통계이긴 하지만 자동차 교통이 가능한 도로 총연장이 23,963km인데 이중 포장도로가 8%에 불과하다. 도로폭은 콘크리트 포장인 고속도로를 제외하고 대부분 2차선이며 주행속도는 시속 50km이상을 내기가 곤란하다.

북한의 도로망(자료 - 각종자료로부터 필자 작성)

철도인프라 현황
북한지역은 산악지대가 험준하고 주민이 살지 않는 지역이 많아 철도를 놓기에는 사실 어려운 지역이다. 그래도 북한은 [주철종도(主鉄従道)]라 해서 일제강점기에 건설된 철도를 교통인프라의 중심으로 삼았다. 그 결과 화물의 경우 철도가 90%를 수송하며, 여객수송도 철도운수 비율은 62%에 달한다고 한다(통일부 북한정보포털에서 인용). 철도망은 평양을 중심으로 서부노선, 동부노선, 북부노선, 동서연결노선으로 구성되어있는데 철도총연장 길이는 5,226km(2016년, 남한은 3,918km)이다. 현재 철도를 통해 중국과 연결되는 루트로는 신의주-단동, 남양-도문이외에 만포-집안 루트가 있다. 이곳의 세관은 1급세관으로 제3국인의 통과도 가능하다. 러시아와 연결되는 루트는 두만강―하산 루트 한곳(표준궤-광궤 혼합선으로 1951년 개통)이다. 

북한의 도로망(자료 - 각종자료로부터 필자 작성)

북한철도의 기반은 일제 강점기에 건설된 철도이므로 이에 대해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한일합방이후 조선 총독부는 일본중앙정부로부터 예산을 얻어 군사상, 정치 및 경제상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철도를 대대적으로 건설하였다. 북한지역에서는 한일합방 전에 건설된 경의선(1905년 완공)과 함께, 경원선, 함경선, 평원선, 만포선이 일제시대에 새로이 형성된 5대 철도노선이며 동해선이 한반도동해안을 수직으로 연결하는 구상으로 추진되다가 북한지역에서만 완공된 상태로 일본의 패전과 함께 중지되었다. 기타 사설철도회사가 광산 및 삼림개발에 필요한 단거리 철도노선을 건설하였다. 일제가 한반도에 건설한 철도의 총연장은 6,497km인데 그 중 북한지역에 4,009km 남한지역에 2,448km가 건설되어 북한지역이 인구가 적음에도 불구하고 군사적, 산업적 필요에 따라 철도망이 더 조밀하게 구성되었다. 현재 북한철도총연장의 77%가 일제시대 건설된 노선이다. 당시 철도 건설을 위해 철교와 레일 등에 필요한 철강의 대부분은 일본의 야하타(八幡)제철소, 일본교량, 이시카와지마(石川島)조선 등이 조달하였다.침목은 백두산 낙엽송을 주로 사용하였다한다.

일제시대 한반도의 철도는 국철의 경우 중국과 같은 표준궤 (1,435mm)로 건설되었다. 중국과는 국경인 압록강에 철교 3개 지점, 즉 신의주(943m, 1911년 준공), 청수(667m, 1939년 준공), 만포(587m, 1939년 준공) 에서, 그리고 두만강에 철교 3개 지점, 즉 삼봉(1927년 준공, 1934년 표준궤 개축), 남양(1933년 준공), 훈춘(1934년 준공, 1939년 표준궤 철교 신설) 에서 연결되었다. 신의주를 통해 경의선은 만주의 요녕지역으로 이어지고, 만포를 통해 만포선은 길림지역으로 연결되며, 삼봉, 남양, 훈춘을 통해 함경선 및 도문선은 만주와 한반도를 군사, 경제적으로 잇는 간선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일제강점시대 일본의 관점에서 보면 북한지역의 철도는 지역내 자원개발 및 수송, 만주와의 군사 및 경제적 연결, 동해안의 항구를 통한 만주~북한지역~일본의 직접 연결을 위해 구상되고 건설되었다고 할 수 있다. 신경(장춘)-청진 직통열차는 1934년 3월에 개통되었으며, 웅기(지금의 선봉)-나진간 철도는 당시 만주와 한반도를 통틀어 최장(3,850m)의 터널공사를 포함한 난공사 끝에 1935년 11월에 개통되어 만철 북선선(상삼봉-남양-웅기-나진)으로서 만철이 직접 경영하는 만주-나진 철도노선이 되었다.

1945년 8월 쏘련이 일본에 대한 선전포고와 함께 청진과 나진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면서 북한에 상륙하고 일본군이 후퇴하면서 청진-나남간의 철도노선을 파괴하였다. 일본 패전 직후인 8월 23일에 경원선이 38도선부근에서 차단되고, 경의선도 26일 이후 사리원 이남의 열차운행이 금지되었다. 북한지역의 철도운행을 관할하고 있던 평양지방철도국과 함흥지방철도국은 쏘련군의 관리하에 들어갔다가 신설된 지방인민위원회에 접수되고 후에 평양에 조선임시인민정부가 수립되면서 교통국의 관할이 되었다.

도표 조선철도 약도 (1945년 8월 15일 현재)(자료 - 선교회(鮮交會) 편저, [조선교통사],1986년)

북한은 철도를 전기화하는데 힘을 기울였기 때문에 전기화율이 80%로 매우 높다. 자급자족할 수 있는 석탄과 수력발전으로 전력을 생산할 수 있으니 1970년후반부터 전기기관차를 생산하고 정책적으로 철도운수를 4대선행부문(전력, 석탄, 금속, 철도운수)의 하나로 정하고 우선적인 재정투입을 해왔다. 그러나 노선의 97%가 단선이고 전기공급이 안되면 구식 석탄증기기관차나 디젤엔진기관차에 의존할 수 밖에 없게 된다. 문제는 전기다.

철로의 문제점으로 지적되는 것은 다음으로 레일의 중량문제이다. 북한에는 기본인 표준궤 철길(궤폭 1,435mm) 이외에 넓은궤(광궤) 철길(동1,520mm), 좁은궤(협궤) 철길(동762mm)이 일부지역에 사용되고 있는데, 표준궤 레일은60kg/m, 50kg/m, 38kg/m의 강철궤를 사용하고 좁은궤 레일은18kg/m의 강철궤를 사용한다고 한다. 문제는 레일이 황해제철소에서 생산하는 북한제, 중국 및 러시아의 중고제품, 일제강점기에 부설된 레일이 함께 사용되고 있고, 그 품질에 기술적 문제가 있어, 시속50km 이상 속력으로 달리면 마찰열과 침목 문제(부식된 목재침목) 등으로 탈선할 염려도 있다고 한다. 따라서 현대적인 중량레일(60kg/m이상)로 새로 교체하는 것이 큰 과제라고 한다.

이상과 같은 이유로 북한철도의 운행속도는 매우 느린데, 평양-신의주 노선의 경우 표정속도가 시속 60.3km로 소요시간은 5-6시간이면 충분할 거리지만 실제로는 최소 12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또한 기관차의 성능도 문제이다. 북한의 기관차는 김종태전기기관차연합기업소가 제작하는데 모델은 체코가 제공한 구형 모델이다. 신형기관차의 개발이 과제이다. 평양지하철에 대해서는 김정은위원장의 지시로 2015년에 신형지하전동차를 개발한 바 있다.

2011년에 평안남도 안주시에서 촬영된 모습(https://namu.wiki/w/북한의 철도 환경)
북한 김종태전기기관차연합기업소가 2015년에 생산한 지하전동차(사진출처 - 통일뉴스)

항만인프라 현황
한반도의 지형특성상 동해안측에는 놓은 산맥과 깊은 수심의 바다가 이어져 있고, 서해안측에는 평야가 많고 얕은 수심의 바다가 이어져 항만의 수심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항상 준설이 필요한 환경으로 되어있다. 북한의 무역항으로는 서해안 3항(남포, 해주, 송림)과 동해안에 6항(원산, 흥남, 단천, 청진, 나진, 선봉)이 있다. 이들 항만개발은 모두 일제강점시대에 이루어졌거나 기초건설이 추진되었다. 

북한의 9대 무역항(자료 - 한국산업은행 [북한의 산업] 2015를 참조로 필자가 추가 정리)

북한 항만의 기초는 일제강점시대에 이루어진 것으로 그 상황을 간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일제는 한일합방이후 주요항만으로서 진남포(현재의 남포), 원산, 청진항 등을 정비하고 1930년대 이후에는 나진, 성진, 해주, 다사도항(신의주) 등을 건설하였다. 그리고 제2차세계대전시기인 1940년대초에는 동해안의 항만이 동만주 중계화물 수송, 무산철광석의 일본 수송을 위해 중요성이 높아지면서 나진, 청진, 성진, 원산 등 기존 항만이외에도 단천, 원산북항 등에 대한 항만건설을 진행하였다.

이 중에 대표적인 항만의 현황은 다음과 같았다.

(1) 평안북도 다사도항
신의주의 외항기능항으로서 1926년부터 개발되었다. 1939년에 개항장으로 지정되고 신의주와 다사도를 잇는 철도가 같은해 7월에 개통되었다. 소다사도 쪽으로 약 2km의 제방을 내어 안벽을 건설하고 하역용 크레인을 설치하는 공사를 진행하는 도중에 패전으로 중단되었다. 해방후 북한은 1980년대부터 다사도-철산반도 지역을 대계도간척지로 하여 농지개발을 진행하고 2002년에 다사도를 포함하는 대계도지역과 신의주지역을 합쳐서 신의주경제특구로 지정한 바 있다. 

(2) 평안남도 진남포항
1897년에 개항장으로 지정되고 러일전쟁을 거치면서 일본에 의해 군용항으로서 확충되었다. 평양과 연결되는 평남선이 1910년 개통되어 경의선과 연결됨으로써 무역항으로써 중심적인 역할을 하게되었다. 1936년 총독부의 항만개축 계획에서는 연간 약 100만톤 처리능력을 목표로 안벽공사를 시작하였으나 완공을 하기전에 패전으로 중단되었다. 

(3) 황해도 해주항
1940년에 개항장으로 되었다. 해주만에 싸여 있어 방파제는 없다. 만의 지형으로 간조시 적당한 물흐름이 생겨 서해안에서는 드물게 준설의 필요가 없었다. 조선시멘트회사 전용의 3개 안벽이 있었고, 수심 7.3m의 안벽을 건설 중에 패전을 맞았다. 

(4) 함경북도 나진항 
러일전쟁당시 일본해군이 정박한 적이 있고 1918년 일본군이 시베리아 출병시에 나진항을 이용한 적이 있다. 본격적인 개발은 일본정부가 1932년에 만주 신경(장춘)~도문간의 경도선의 최종착역을 나진으로 결정하면서부터이다. 만철이 1933년 4월에 도문선(도문~웅기) 철도를 웅기에서 나진까지 15.2km를 연장하는 공사와 함께, 나진항 건설공사를 시작하였다. 1935년 11월 제1부두의 완성과 함께 만주국 도문세관사무소 등을 갖추고 나진항은 개항장으로 되었다. 이로부터 만철이 직접 경영하는 나진항은 만주직통열차를 통해 북한지역 동북부에서 중국 동만주지역과 일본을 연결하는 주요한 상업항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1938년까지 7-8000천톤 급의 선박 12척이 동시에 접안할 수 있는 3개의 부두와 방파제, 창고, 도로 및 화물야적장이 건설되었다. 나진항은 1938년의 시점에서 300만톤 화물처리능력을 갖춘 항만이 되었다. 장기적으로는 900만톤의 항만처리능력을 보유하는 계획이 있었지만, 공업지대 개발이 부진한 채로 패전을 맞았다. 나진항의 주요화물은 중국중계화물이었고, 당시 “방은 갖추어져있지 않은데 현관만은 훌륭하다”고 놀림을 받았다고 한다. 

1935년의 나진항(사진자료 - 항만협회 [항만] 제13권 12호, 1935년)

(5) 함경북도 청진항, 청진서항
러일전쟁 전까지는 작은 어촌에 불과하였으나 전쟁으로 일본군의 물자양륙지로서 중시되었고 1908년에 개항장으로 지정되었다. 1916-17년에 청진-회령간 철도가 개통되고 1928년까지 함경선이 완전 개통되면서 청진은 만주~북한지역~일본을 잇는 중요 물류기지의 기능을 하게 되었다. 청진항은 급경사로 수심이 깊어 방파제의 선단은 수심 30m에 이른다. 1934년 5월에 일본과 만주국 사이에 [두만강 국경을 통과하는 열차직통운전 및 세관수속에 관한 일만협정]이 제정되어 만주국 도문세관이 청진항에 설치되어 중계화물수송이 개시되었다. 

청진항의 주요 화물은 만주의 콩, 어유 등의 수출이었다. 한 예로 만철이 직영하는 나진항과 만철이 시설을 무료로 사용하는 청진항과 웅기항을 통한 만주의 콩 수출은 1935년의 6만톤 (만주 전수출량의 3%)에서 1937년에 436만톤 (만주 전수출량의 22%)로 증가하였다.

1938년 이후 청진공업지대의 전용항만으로서 청진서항(일본제철 공업항)이 수성천 오른쪽에 새로이 개발되었는데 수성평야 금속공업기지의 항만으로서 그리고 약 100km 후방에 미쯔비시광업이 소유하는 무산철광산의 철광석 반출기지로 사용되었다. 1940년에 시간당 600톤 능력의 철광석 적입시설이 완성되었고 무산철광을 이용한 제철공장인 일본제철청진제철소, 미쯔비시제강소 등이 건설되었다.

(6) 함경남도 원산항, 원산북항
영흥만의 남쪽에서 북쪽으로 갈마반도가 돌출하여 있고 섬들이 있어 파도를 자연적으로 차단해주는 천혜의 양항이다. 조선왕조시대인 1880년에 개항되었다. 1914년 경원선개통과 함경선 연장에 따라 물자집산이 확대되면서 원산항의 역할이 중요해졌다. 1939년에 화물처리량이 85만톤에 달하였다. 1936년부터 연간 150만톤의 화물처리능력을 목표로 안벽과 방파제 건설계획이 수립되어 1941년에 방파제 건설을 위한 매립공사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완공을 하지 못하고 패전으로 중단되었다. 원산북항은 원산항에서 북쪽으로 10km에 있는 항으로 무연탄을 일본으로 수송하기 위해 조선무연탄회사의 전용항으로서 1943년에 완공되었다. 

(7) 함경남도 흥남항
1930년 부전강 수력발전소 준공과 이 전력을 이용한 조선질소비료회사가 흥남에 들어서면서 이 회사의 전용항이 되었다. 1927년에 공사가 시작되어 1932년에 4개의 안벽과 방파제로 연간 150만톤의 화물처리능력을 갖추었다. 1940년에 흥남항을 일반개항장으로 지정하고 연간 400만톤의 처리능력을 갖는 대종합항 건설계획이 입안되었으나 설계 착수단계에서 패전으로 중단되었다. 

(8) 함경남도 단천항
마그네사이트 (내화벽돌의 원료) 등 지하자원을 일본에 수송하게 위해 계획된 항만이다. 미쯔비시광업과 우베(宇部)요업 등이 공동출자하여 남대천 하류에 1939년부터 건설을 시작하였다. 항만의 양측에서 방파제를 건설하고 광석운반용 철도인입시설을 건설하는 중에 패전을 맞았다.

일제강점기의 항만건설은 위에서 보듯이 패전시까지 진행형이 많았다. 1945년 8월 쏘련군 폭격기가 나진항과 청진항에 대해 폭격을 가해 청진항의 안벽 4개소가 대파되었다. 나진항도 피해를 입었다. 기타 북한 항만의 시설 파괴는 6.25전쟁시에 일어났다.

북한은 1950-60년대에 6.25전쟁으로 파괴된 흥남, 청진, 나진항을 복구했고 이후 해주, 송림, 원산항 등을 정비했다. 1970-80년대에 북한정부는 쏘련의 지원을 받아 남포항 컨테너부두 건설등 부두 확장을 하고, 남포갑문 공사를 벌였다. 남포항은 지속적으로 정비를 진행한 유일한 항만이다. 2000년대 이후로는 2012년에 단천항을 마그네사이트 수출항으로 정비하여 준공하고 2014년에 나진항의 3호부두를 러시아의 투자를 받아 러시아화물(석탄) 50년간 전용부두로 정비하였다. 그 외에는 사실상 신규투자를 하지 못해서 항만이 노후화되었다.

교통인프라의 과제
이상으로 북한의 경제인프라 중 교통부문으로 도로, 철도, 항만인프라 현황을 살펴보았다. 북한의 교통인프라 개선문제는 경제부흥을 위해 긴급한 과제하고 할 수 있다. 이 과제는 남북협력과 국제협력을 통해 추진하는 것이 현실성 있는 방안이라고 생각된다. 

도로는 포장과 확충이라는 당면한 과제와 함께, 도로운수를 위한 연료로서 석유, 가스, 전기 등을 확보하는 것이 급하다. 그동안 석유부족으로 도로수송에 힘을 넣지 않고 자립경제의 틀에서 석탄과 전력을 중심으로 하였던 방침을 그대로 이어간다하더라도 전력생산을 높이고 향후 탄소하나 화학산업을 발전시켜 갈탄에서 가솔린을 생산하거나 전기자동차나 수소자동차 등을 개발하는 방안이 과제이다.

철도는 전반적으로 레일, 침목, 전기화 시설 보수, 기관차 개량, 화차 개량 등 시설근대화가 필요하다. 전기화율이 높아도 전기공급이 없다는 쓸모 없다. 전력공급을 높이는 데 힘을 쏟아야 한다. 그리고 중국, 러시아, 남한을 포함한 국제철도노선을 연계하여 유라시아철도로 이어지는 구상을 위해서도 우선 남북간에 철도분야 협력, 시스템 개선, 인재육성이 시급하다. 신의주-평양-서울-부산/목포의 철도 연결을 고속철도로 개선하여 한반도 종심축에서 철도의 기능을 강화하는 방안을 남북협력의 우선순위로 놓아야할 것으로 생각된다.

항만정비는 국제무역을 확대하는 것으로 필요성이 높아진다. 서해와 동해로 갈라진 해안선을 가진 북한으로서 한반도 전체를 대상으로 항만을 연계하는 협력이 필요하다. 항만의 위치로 볼 때, 서해안의 남포항과 해주항은 인천항과 같은 수도권 지원항으로서 역할을 가지고 또한 남북협력, 대중국, 아시아 무역거점항으로 개발할 필요가 있다.

동해안의 나진항과 청진항은 한반도와 대륙 그리고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를 연결하는 무역거점항으로 개발할 필요가 있다. 나진항은 러시아와 혼합궤로 연결되어 있으므로 러시아와 남한의 부산항을 시야에 두고 물류거점으로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청진항은 중국과 철도로 연결되어 중국의 화물중계항으로서 기능해온 역할을 더 확대시킬 필요가 있다. 또한 단천항은 지하자원의 수출항으로서, 원산항은 국제관광과 물류거점항으로 개발하는 것이 필요하다. 특히 원산항은 평양과 평원선으로 연결되므로 평원선을 고속철도화하여 평양-원산-일본 니이가타항 과 같은 국제여객교류 및 산업연계망으로 발전시키는 것도 바람직하다.

북한의 교통인프라 개선에는 돈이 많이 들어간다. 남한 정부는 다른 어떤 협력사업보다 경제사업에서 인프라부문 정비에 재정을 투입하고 북한정부, 국제사회와 협력해서 한반도의 종단 및 횡단 축의 균형적 발전을 위한 투자를 실현해야한다.

이는 더불어 사는 민족경제가 원하는 일이고 경제가 정부투자를 통해 활성화되는 몇 안남은 사례가 될 것이며, 그리고 한반도 통일의 시작이다.

*다음편 기획연재[북한경제와 협동하자]는 '경제인프라 (전력)의 현황과 과제'가 주제로 다뤄질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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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테이쿄대학 이찬우교수
일본 테이쿄대학 이찬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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