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오딧세이, 소크라테스와 플라톤②] 소크라테스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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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오딧세이, 소크라테스와 플라톤②] 소크라테스의 죽음
  • 2022.03.18 09:00
  • by 김종걸(한양대 국제학대학원 교수)
12:07
▲ 소크라테스. ⓒ게티이미지
▲ 소크라테스. ⓒ게티이미지

■ 신이 아테네에 보낸 쇠파리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서양철학의 시작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망과 부활이 기독교의 시작이었듯, 소크라테스의 독배는 서양철학사에 있어서 십자가의 사건에 필적한다. 그는 평생을 철학자로 살았고, 철학자임을 자랑스러워했다. 매일 아고라의 시장바닥에서 사람들의 무지를 일깨워주고, 그것만이 신이 자신에게 부여한 책무라고 굳게 믿었다. 그의 대화법은 독특했다. 스스로 무지자(無知者)로 칭했으며 상대방의 의견을 집요하게 물었다. 그와 대화를 계속하다 보면 어느샌가 상대방은 스스로가 말한 것을 부정하게 된다. 결국은 자신의 무지를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그는 아테네인들의 '역린'을 건드린 사람이었다. 지식인과 권력층만이 아니라 일반인까지 포함하여 아테네인들의 허위를 그처럼 적나라하게 드러낸 사람은 없었다. 자신의 무지와 탐욕이 폭로되는 모욕감은 진리가 주는 투명한 빛 보다는 언제나 강렬했다. 그래서 그는 많은 사람에게 미움을 받았다. 

소크라테스의 재판기록인 『변론』(천병희 번역, 『플라톤전집(1권)』)은 그가 미움을 받게 되는 경위를 잘 설명한다. 다음은 소크라테스의 설명이다. 
어느 날 소크라테스의 친구인 카이레폰은 델포이 신전에서 소크라테스보다 더 지혜로운 사람이 있냐고 물었다. 신관은 없다는 신탁을 전해줬다. 소크라테스는 이 말을 듣고, 정말일까 궁금했다. 그래서 누구라도 지혜롭다는 소문만 있으면 두루 찾아다녔다. 가장 먼저 만난 것은 지혜롭다고 소문난 유명 정치인이었다. 그들은 장황하게 떠들었으나 전혀 지혜롭지 않았다. 결함이 많을뿐더러 오히려 보통 사람보다 더욱 사리 분별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다음으로는 시인들을 만났다. 그들 또한 화려한 언변을 늘어놓았으나 실제로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조차 잘 모르는 것 같았다. 오히려 일반 사람들이 그 시인의 작품을 시인보다 더 잘 설명하는 것 같았다. 훌륭하다는 장인들도 만나 보았다. 그들은 자신의 일에 대해서는 많은 것을 알고 있었으나, 가장 중요한 다른 일에서도 자신이 지혜롭다고 주장하는 허풍쟁이였다. 나중에 소크라테스를 고소한 사람, 즉 아나토스는 기술자와 정치인을, 류콘은 변론가들을, 멜레토스는 작가를 대표하는 사람들이었다. 

그의 매서운 지적은 소위 '지도층'에만 한정되지 않았다. 무지를 폭로하는 그의 말의 칼날은 아테네의 일반인들에게도 향해 있었다. 그는 아테네인들이 타락했다고 말했다. 부와 명예와 명성은 되도록 많이 얻으려고 안달하면서도 지혜와 진리에 대해서는 관심조차 없다고 일갈했다. 처음에 아테네 사람들은 그를 조롱했었다. 아테네 법정에 기소한 사람 중 하나였던 아리스토파네스는 그의 희곡(『구름』)에서 소크라테스를 "해먹에 들어가 이리저리 흔들며 자기는 공중을 거닐고 있다고 주장하는" 허황된 사람으로 묘사했다. 사형집행 24년 전의 이야기였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그 어떠한 조롱에도 굴하지 않았다. 자신은 아테네라는 "혈통은 좋지만 좀 굼뜬 말"을 위해, 신께서 아테네로 보낸 등에(쇠파리)이며, 아무리 가난하고 힘들더라도 신이 자신에게 준 사명이기에 멈추지 않겠다고 말했다. 사람들이 자신을 바보 취급하며 발길질을 해도 그는 묵묵히 참으면서 주변 사람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당나귀가 발길로 나를 쳤다고 해서 당나귀를 고소할 수 있겠는가?"(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 『유명한 철학자들의 생애와 사상』, 「소크라테스」 편). 참으로 의연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단순한 조롱의 대상이라면 그를 사형시킬 이유가 없었다. 소크라테스는 점차 아테네의 위협으로 다가온 것은 많은 젊은이가 소크라테스를 따랐기 때문이었다.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나 젊은이들은 기성세대의 권위에 대항하며 그들의 허위가 드러나는 쾌감에 열광한다. 그들은 소크라테스를 흉내 내기 시작했다. 이들에게 모욕당한 어른들은 "소크라테스라는 가장 무서운 괴질이 젊은이들을 타락시킨다"라고 소리 질렀다. 이제는 단순히 조롱만으로 끝날 존재가 아니었다. 

■ 침묵을 거부한 대가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법정으로 끌려갔다. "하늘에 있는 것들을 사색하고 지하에 있는 것을 탐구하며, 사론(邪論)을 정론(正論)으로 만든다"라는 이유로 제1차로 고소당하고, "젊은이들을 타락시키고, 나라가 인정하는 신 대신 다른 새로운 신들을 믿는다"라는 이유로 제2차 고소가 이어졌다. 

그는 모든 혐의를 부정했다. 이 모든 게 자신이 사람들의 무지를 깨우쳐주고 다녀 생긴 '미움'의 결과라고 항변했다. 자신은 무신론자가 아니며, 젊은이들에게 신의 교훈을 말하는데 어찌 무신론자일 수 있느냐고 주장했다. 그리고 연속해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 "인간에 관한 일은 있다고 믿으면서 인간은 없다고 믿는 사람이 있을까요?", "말(馬)은 없다고 믿으면서 말들에 관한 일들이 있다고 믿는 사람이 있을까요?"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는 혐의에 대해서도 그는 강하게 반발했다. 애초부터 그는 선생이라고 스스로 칭한 적이 없었다. 따라서 수업료를 받은 적도 없었다. 그냥 젊은이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대화를 나누었던 것에 불과했다. 그래서 만약 문제가 생긴다면 자신에게 넌지시 일러주면 그만이지 이렇게 일흔이나 되는 노인을 재판정에 끌어낼 일은 아니라고 강하게 반발했다. 
그러나 아테네 501인 법정은 281:220으로 그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애초부터 '신성모독죄'란 아테네 시민이 불편해하는 사람을 옥죄는 편리한 구실에 불과했다. 220명이 소크라테스를 무죄라고 생각했다는 것은 그가 죽을죄는 아니라는 점을 증명한다. 당시의 그리스 법정은 1차로 유죄 여부만 판단하고, 2차 회의를 거쳐 형량을 결정한다. 따라서 유죄판결이 난 후에 2차 변론을 통해서 피고인들은 배심원들에게 선처를 부탁한다. 때때로는 어린 자식들을 데리고 나와 그들의 동정심에 호소하는 수도 있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하는 사람들은 법치국가 아테네의 '치욕'이며, 신성한 법정을 모독하는 행위라고 강하게 말했다. 그는 법정을 철학적 논쟁의 장으로 변화시키고 아테네인들의 무지를 비판했다. 아테네는 자신에게 오히려 상을 주어야 한다고 말하며, 자신이 죽는다면 곤란한 것은 자신이 아니라 죄를 짓게 되는 아테네 사람들일 것이라고 협박했다. 

그는 마지막 타협점으로 벌금형을 제안했다. 자신은 가난하므로 은화 1므나 정도라면 어떻게 해보겠다고 말했다. 법정 모독으로까지 이어질 만한 액수였다. 이에 화들짝 놀란 플라톤과 크리톤은 30므나의 벌금과 그 보증을 약속했다. 그러나 벌금형은 애초부터 아테네가 원한 바가 아니었다. 이 노인이 기소된 이유는 그의 입을 막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당당히 이렇게 말했다. "아테나이인 여러분, 나는 여러분을 좋아하고 사랑하지만, 여러분보다는 신에게 복종할 것입니다. 내가 숨을 쉬고 그럴 능력이 있는 한 나는 철학에 종사하는 일도, 여러분에게 조언하는 일도,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여느 때처럼 지적하는 일도 그만두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추방당하는 것조차도 거부했다. 외국으로 나간들 똑같이 젊은이들과 대화를 나눌 것이며, "젊은이들의 아버지와 친척들이 나서서 자신을 내쫓을 것"이 뻔하기 때문이었다. 이제 그에게 남은 형벌은 사형밖에 없었다. 사형이 선고된 후 그는 아테네인들에게 좀 더 훌륭한 사람이 되어 달라고 당부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제 떠날 시간이 되었습니다. 나는 죽으러 가고, 여러분은 살러 갈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중에서 어느 쪽이 더 나은 운명을 향해 가는지는 신 말고는 모릅니다."
 

▲ 자크 루이 다비드의 ‘소크라테스의 죽음’.
▲ 자크 루이 다비드의 ‘소크라테스의 죽음’.

■ 의연한 죽음의 순간

『변론』은 한 지식인의 굴하지 않는 신념을 재판기록의 형식으로 기록한 불후의 명작이다. 사형 전전날의 기록, 사형 당일의 기록은 플라톤의 『크리톤』과 『파이돈』이라는 저작으로 이어진다(천병희 번역, 『플라톤전집(1권)』). 
아테네의 법정은 보통 하루에 모든 절차가 끝난다. 사형집행 또한 그날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재판 날은 아폴론을 기리기 위한 축제의 시작 날이었다. 아테네는 아폴론의 고향인 델로스섬으로 축하 사절을 보내는 것이 관례였다. 그리고 그 배가 다시 아테네로 돌아오기까지는 사형집행과 같은 부정한 일은 금지되어 있었다. 소크라테스는 얼마간의 말미를 얻을 수 있었다. 

소크라테스 사형집행 전전날의 일이었다. 죽마고우인 크리톤은 감옥으로 찾아와 델로스섬에서 배가 출발하여 오늘 도착할 것이며, 그러면 내일 사형이 집행될 것이라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결국은 하루 더 있게 되었으나, 어찌했던 크리톤은 탈옥하라고 강하게 권유했다. 도망을 위해 뇌물로 많을 돈을 가지고 왔고, 친구들도 대기 중이며, 타국에서 받아줄 사람들도 많다고 설득했다. 제발 어린 자식들을 위해서라도 목숨만은 부지하라고 호소했다. 이 모든 말에 소크라테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곤 자신의 탈옥이 가지는 의미에 대해 또다시 철학적 대화를 이어갔다. 

그가 탈옥을 거부한 첫 번째 논거는 악을 악으로 갚으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이 생각은 소크라테스의 가장 기본적인 생각 중 하나다. 그는 "앙갚음하려고 불의를 저질러서도 안 되고, 남에게 어떤 해를 입었던 남을 해코지해서도 안 된다"라고 크리톤을 설득했다. 두 번째 논거는 소크라테스의 재판이 지극히 합법적 절차에 의해서 이루어졌기 때문이었다. 아테네 법정에서의 501인 배심원은 공정한 뽑기에 의해 선발된다. 소크라테스는 합법적 절차에 의해 제대로 변론이 보장되는 가운데 사형선고를 받았으며 그 법을 지키지 않을 명분이 그는 없었다. 만약 아테네가 싫었으면 애초부터 외국으로 떠났으면 그만이었다. 그럴 권리가 충분한데도 그는 항상 아테네에 머물렀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에 참전한 것 이외에는 여행으로조차 아테네를 떠난 적이 없었다. 그런 그가 지금 도망간다면 그야말로 웃음거리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그는 크리톤에게 당부했다. "그만두게나, 크리톤. 그리고 법률이 권하는 대로 하세. 신께서 우리를 그쪽으로 인도하시니까."

죽는 날 또한 소크라테스의 의연함은 더욱 찬란했다. 그날은 새벽부터 많은 친구와 제자들이 모여들었다. 울고 있는 부인과 어린 아들들을 아침나절 밖으로 내보내고 소크라테스는 제자 및 친구들과 함께 석양 무렵까지 길고 긴 철학적 대화를 이어갔다. 죽는 날이었으니 대화의 주제는 '죽음'이었다. 그는 철학자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행복이라고 말했다. 신들과 철학의 선현들을 만나는 행복한 여정이며, 철학으로 단련된 자신의 영혼은 저승에서 크게 복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모두에게 덕과 지혜를 쌓기 위해 노력해 달라고 당부했다. 

해가 저물 무렵 소크라테스는 주저하지 않고 독약을 마셨고 그의 몸은 천천히 마비되어 갔다. 그의 마지막 말은 이랬다. "크리톤, 우리는 아스클레피오스(고대 그리스의 의술의 신)에게 수탉 한 마리를 빚지고 있네. 잊지 말고 그분에게 빚진 것을 꼭 갚도록 하게." 이승에서 자신의 역할을 다한 철학자의 소박한 당부의 말이었다. 파이돈은 그의 마지막 순간을 이렇게 기록한다.
     "(크리톤) 그 밖에 달리 할 말이 있는지 살펴보게!" 
     "그분(소크라테스)께서는 이 물음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으나, 잠시 뒤 몸을 부르르 떠셨어요. 그 사람이 그분을 덮은 것을 걷자 그분의 두 눈 이 멈추어 있었어요. 그래서 그것을 본 크리톤께서 그분의 입을 다물게 해주고는 두 눈을 감겨드렸어요. 에케크라테스, 우리 친구는 그렇게 최후를 맞이했어요. 그분께서는 우리가 겪어본 우리 시대 인물 가운데 가장 훌륭하고 가장 지혜로우며 가장 정의로운 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거예요." 

소크라테스의 재판과 죽음은 세상의 개혁을 꿈꾸는 모든 이들의 심금을 울리는 명장면이었다. 자기의 생각이 하늘의 뜻과 이어졌다고 믿고, 그 신념이 가져다주는 고난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담담히 죽음을 맞는 모습. 보통 사람인 우리에게는 언감생심 따라가기 높은 경지이다. 그러나 그 발자취의 한쪽 끝이라도 부여잡으려는 까닭은 이 세상에서 지식인의 비루함이 풍겨내는 악취가 너무나 크기 때문일 것이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전체 목차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살았던 시대
2. 소크라테스의 죽음
3. 플라톤의 이상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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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걸(한양대 국제학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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