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오딧세이, 공자와 맹자②] 공자와 맹자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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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오딧세이, 공자와 맹자②] 공자와 맹자의 삶
  • 2022.01.19 15:00
  • by 김종걸(한양대 국제학대학원 교수)
10:54

■ 춘추전국시대의 이상주의자

공자(기원전  551-479)는 춘추(春秋)시대, 맹자는 전국(戰國)시대 사람이다. 춘추전국시대는 중국의 고대왕조 주나라의 후반부에 해당된다. 중국역사에서 요(堯)·순(舜)·우(禹)왕의 시대는 아직은 신화의 영역이다. 그러나 탕(湯)왕의 상(商)나라가 존재했다는 것은 갑골문 발견과 도읍지 은허(殷墟)의 발굴로 확실해졌다. 기원전 1046년 상나라 주(紂) 임금의 폭정을 물리치고 새로운 주(周)나라를 건설한 무왕(그의 아버지 문왕), 그리고 무왕의 동생으로서 중국고대의 봉건제를 완성한 주공은 공자나 맹자가 꿈에서도 잊지 못했던 이상향의 주군들이었다. 

주나라는 크게 서주(西周, 기원전 1027-771)와 동주(東周, 기원전 770-256)로 나뉜다. 동주시대는 다시 춘추(기원전 770-481)와 전국(기원전 480-221) 시대로 구분된다. 수십 개였던 나라는 7개로 줄어들고 그것은 다시 진시황(秦始皇)에 의해 하나로 통일되어 갔다. 이 약육강식의 시대를 살아남는 방법은 자강(부국강병)과 외교(합종연횡)의 책략이었다. 이런 시절에도 공자와 맹자는 오로지 덕치만을 주장했다. 한가한 이야기였으며 그 누구도 상대해주지 않았다.  

■ 공자의 삶

ⓒPixabay
ⓒPixabay

공자는 노(魯)나라 사람이었다. 노나라는 주나라 건국의 주역이었던 주공(周公)의 영지였으나, 공자가 살던 시기에는 삼환(三桓)씨(계씨, 숙씨, 맹씨)의 지배로 국정이 어지러웠다. 공자는 명문가 출신이 아니었다. 사마천 『사기』의 <공자세가>에는 숙량흘(叔梁紇)이 안씨의 딸과 야합(野合)하여 태어난 아들이라고 전한다. 사생아였으며, 아버지의 무덤조차 몰랐다. 제대로 된 교육을 받았다는 기록도 없다. 공자 스스로 나는 빈천했기 때문에 천한 일도 많이 안다고 젊은 날을 회상했다(자한:6).

그러나 30대 초반에는 최고의 예법전문가로 이름을 날렸다. 행정가로서도 꽤 능력이 있었다. 젊어서 계씨 집안 창고관리의 말단직책을 맡고 있었으나, 나중에는 나라의 건설담당 책임자(司空), 법무부장관(大司寇), 수상(宰相)대리로 쾌속 승진했다. "공자가 정치에 참여하고 정사를 시작한 지 석 달이 되자 양과 돼지를 파는 사람들이 값을 속이지 않았고, 남녀가 길을 갈 때 떨어져 갔으며, 길에 물건이 떨어져도 주어가지 않았다"고 사마천은 『사기』에서 전한다.   

▲ 성적도(聖籍圖) - 공자(孔子, 魯 기원전 551~기원전 479 )의 행적을 그림으로 나타낸 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
▲ 성적도(聖籍圖) - 공자(孔子, 魯 기원전 551~기원전 479 )의 행적을 그림으로 나타낸 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

그러나 그의 정치는 55세에 막을 내렸다. 이후 그는 무려 14년간이나 제·위·진·조·송·채·섭·초 등의 많은 나라의 제후를 찾아가 도덕정치를 역설했다. 도로와 숙소가 제대로 정비되지 않은 당시 상황에서 천하주유의 고생은 말도 못 했다. 『사기』에 나오는 '상갓집 개'라는 표현은 여행에 지친 공자의 모습을 아주 잘 나타낸다. 고생 속에서도 원하는 바를 이룰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는 나이 68세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고 73세 사망할 때까지 중국의 고대학문을 완성해 갔다. 중국의 육경(六經), 즉 『시』, 『서』, 『역』, 『예』, 『악』, 『춘추』는 공자가 과거의 학문을 선별하고 정리해서 후세에 넘겨준 것이었다.

■ 맹자의 삶

맹자 초상화.
▲ 맹자 초상화.

맹자(기원전 372-289)는 공자보다 180여 년 뒷사람이었다. 노나라에서 갈라져 나온 추(騶)나라 사람이었으며, 공자의 영향력이 강한 곳에서 자랐다.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의 제자에게서 학문을 배웠다고 전해지나(『사기』 맹자·순경열전), 그 선생이 많은 영향을 미친 것 같지는 않다. 맹자는 공자의 도를 사숙(私淑)했다고 말한다. 스스로 배웠다는 것이다(이루하:115). 

맹자 또한 40세가 넘어 천하를 주유했고 많은 군주를 만났다. 그는 굳건한 기상의 사람이었다. 말이 직설적이었으며 자존심이 무척 강했다. 한 제자가 "한자를 굽혀 여덟 자를 바로 잡는다"는 옛 기록을 거론하며 웬만하면 마음에 들지 않는 제후라도 만나시라고 권유했다. 그러나 맹자는 단호했다. 자기 지조를 굽힌 자가 남을 곧게 할 수는 없다는 이유에서다(등문공하:56). 제(齊)나라 왕이 감기가 들어 약속을 다음 날로 연기하자 자신 또한 병이 났다고 하며 약속을 파기하기도 했다(공손추하:36). 아무리 제후라도 자신을 만나고자 하는 뜻이 간절해야만 그는 만났다(등문공하:62). 

그래도 맹자는 공자보다 사정이 좋았다. 전국시대는 진정한 의미의 약육강식의 시대였다. 그래서 제후들은 백가쟁명의 재사(才士)들에게 무척 후했다. 제자인 팽경(彭更)은 맹자가 수십 대의 수레에 수행원 수백 명을 데리고 제후들 사이를 옮겨 다니는 모습을 비판한 적도 있었다(등문공하:59). 제후들의 대접은 후하고 말은 부드러웠다. 그러나 실제 그의 의견을 받아들이는 나라는 없었다.

작은 나라인 등(滕)나라 왕 문공(文公)만이 맹자의 말을 잘 따랐다. 대신들의 반대에도 아버지 3년 상을 치르고, 5개월 동안은 움막에 거쳐 하며 정무 일체를 보지 않았다(등문공상:50). 그는 나라의 생존에 대해 고민이 많았다. 그래서 맹자에게 물었다. 우리는 작은 나라로 제나라와 초나라 사이에 끼어 있는데 어디를 섬겨야 합니까? 맹자는 난감해하며 대답했다. "무어라 말할 수 없는 일이지만 일이 터지면 성의 해자를 깊게 파고, 성벽을 높이 쌓고, 백성과 죽을 각오로 싸울 수밖에 없습니다."(양혜왕하:20). 인자무적(仁者無敵)을 강조하는 맹자도 인의도덕만으로 난세를 헤쳐나갈 수 있다고는 차마 말하지 못했다. 

그래서 맹자는 자신의 이상을 강력한 제(齊)나라와 양(梁)나라를 통해서 실현하고 싶어 했다. 거기에서라면 왕도정치가 잘 작동될 것 같았다. 그러나 기회는 오지 않았다. 맹자도 결국 60세가 넘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공자와 마찬가지로 교육과 연구의 생활로 말년을 보냈으며, 83세로 세상을 떠나기 바로 직전에 제자들과 함께 『맹자』를 편찬했다. 

세상이 나를 몰라주어도

공자나 맹자나 벼슬길의 노력은 눈물겨웠다. 심지어 공자는 악독한 반란의 수괴에게 가려고 했던 적도 있었다. 공자 나이 51세에 공산불요(公山弗擾)가 초대하자 노나라를 동주(東周)로 만들겠다는 포부를 밝히며 가려고 했다(양화:5). 필힐(佛肹)이 초청하자 자신은 검은 물속에서도 전혀 물들여지지 않을 자신이 있다고 하며 협력할 의사를 밝혔다(양화:7). 그러나 실제로 출사하지는 않았다.
 

▲ 논어집주대전(論語集註大全) / 논어(論語) - 유교 경전인 사서(四書)의 하나로 공자와 그의 제자들의 언행을 적은 책으로, 공자 사상의 중심이 되는 효제(孝悌)와 충서(忠恕) 및 인(仁)의 도(道)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 논어집주대전(論語集註大全) / 논어(論語) - 유교 경전인 사서(四書)의 하나로 공자와 그의 제자들의 언행을 적은 책으로, 공자 사상의 중심이 되는 효제(孝悌)와 충서(忠恕) 및 인(仁)의 도(道)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당시의 많은 사람들은 공자에게 손가락질했다. 춘추시대의 명재상이었던 안연(晏然)은 "용모와 복식을 추존하고, 번잡스러운 예절만을 따지고, 세세한 절차만을 따르는" 별 쓸모없는 사람이라 평가했다(『사기』 공자세가), 이름난 산적이었던 도척(盜跖)은 공자가 요설로 천하의 임금을 미혹시키고, 학문을 어지럽히는 '위선자'라며 화를 냈다(『장자』 도척). 한 성문의 문지기는 안 되는 일임을 알면서도 하고 있는 무모한 사람이라고 비웃고(헌문:39), 장저와 걸익이라는 노장사상의 도인들은 공자의 제자 자로에게 부질없는 짓 하지 말고 차라리 나를 따르라고 설득했다(미자:6). 이 모든 비판에 대해 공자의 대답은 비장했다. 세상이 엉망인 것은 내가 잘 안다. 그러나 이 세상 사람들과 아니라면 대체 누구랑 일을 도모할 것인가. 자기 몸만 깨끗하면 되는 일이 아니지 않은가?  

맹자 또한 진정으로 출사하여 정치를 하고 싶었다. "선비가 벼슬자리를 잃는 것은 마치 제후가 그의 국가를 잃는 것이나 같다"고 말하고, 공자의 사례에 따라 국경을 나갈 때에는 제후에게 드릴 예물을 준비하곤 했다(등문공하:58). 그러나 맹자에게도 기회는 오지 않았다. 그런데도 맹자는 무척이나 씩씩했다. 자신이 정치를 한다면, 한 나라만이 아니라 천하의 백성들이 모두 편해질 것이며(공손추하:46),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도 지금 세상에는 오로지 자신만이라고 말했다(공손추하:47). 하늘의 명이 공자를 통해 자신에게 이어지고 있다고 스스로 다짐했다(진심상:183).

비루하지 않은 지식인의 삶

지식인의 자기수양과정은 좋은 세상 만들기 위한 벼슬길(出仕)의 준비과정이었다. 그러나 비루하면 안 되었다. 공자는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권력을 잡으려 온갖 술수를 다 부리는 사람을 '비루한 사람'이라 불렀다(양화:15). 그래서 그는 말한다. "천하에 바른 도가 행해지면 나타나 일하고, 올바른 도가 없어지면 곧 숨는다. 나라에 올바른 도가 행해지는데 가난하고 미천하다면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고, 나라에 올바른 도가 없는데도 부귀를 누린다면 역시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다."(태백:13). 

맹자는 공자보다는 좀 더 현실적이었다. 일종의 생계형 출사에 대해서는 인정했다. 그럴 경우에는 ‘문지기나 야경꾼’ 정도의 낮은 자리만 허용했다. 제대로 된 자리에 있으면서도 세상을 좋게 바꾸지 못한다면 당장 관두어야 한다고 그는 생각했다(만장하:141). 출세만을 위한 무원칙한 벼슬길을 무척이나 혐오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부정한 권력에 항거해 수양산에 들어가 굶어 죽은 백이(白夷)와 아무 군주에게나 충실히 섬겨 능력을 발휘했던 노나라의 유하혜(柳下惠)를 대비하며, "백이는 도량이 좁고 유하혜는 공손하지 못하다"라고 비평했다(공손추상:34).

은일(隱逸)은 시대가 난세라고 생각했을 때 지식인이 선택하는 방식이었다. 자신의 머리와 지식이 난세를 연장하는데 일조하지 않겠다는 결단이기도 했다. 그런 경우에 올바른 지식인은 물러 나와 공부하며 제자들을 키워냈다. 그래서 맹자는 인생의 3가지 즐거움(君子三樂)을 말했다. 부모형제가 모두 무고한 즐거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즐거움, 그리고 천하의 영재를 얻어 교육하는 즐거움이 그것이었다(진심상:201).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것. 윤동주는 맹자의 이 구절로 절창의 서시(序詩) 첫머리를 장식했다.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고 담담히 읊조렸다. 지식인이 비루하지 않고 한평생 살아가기 위해 명심해야 할 내용이다.

조선 지식인의 출사와 은일

출사(出仕)와 은일(隱逸)에 대한 이들의 생각은 한국 땅에도 그대로 전해졌다. 퇴계 이황(李滉, 1501-1570)과 율곡 이이(李珥, 1536-1584)는 수없이 출사와 은일을 반복했다. 남명 조식(曹植, 1501-1572)처럼 아예 출사 자체를 거부한 사람도 있었다. 그는 조정이 내린 벼슬을 마다하는 그 유명한 상소문(丹城縣監辭職疏)을 보냈다. 벼슬로 나가봐야 그 어떠한 개혁도 불가능하니 나가지 않겠다는 조선 지식인의 날 선 항변이었다. 

조식선생은 진주 옆 단성(丹城) 땅에서 공부와 교육에 힘썼다. 방울종(惺惺子)과 단검(敬義劍)을 항상 차고 다니며 스스로를 경계했다. 그리고 많은 제자들을 키워냈다. 후일, 곽재우 등 그가 키운 제자들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의 배후를 지켜냈던 훌륭한 의병장들로 성장했다. 조선왕조 500년은 권력에 빌붙고 백성을 착취하는 '비루한 자'들만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출사와 은일의 정도(正道)를 지키고, 끊임없이 공부하고 성찰하며, 제자를 길러내고 백성들의 삶을 걱정해 왔던 수많은 선비들의 땅이기도 했다.
 

<공자와 맹자>의 전체 목차는 다음과 같습니다.

1. 덕치라는 시대정신
2. 공자와 맹자의 삶
3. 공자의 생각
4. 맹자의 생각
5. 공자와 맹자를 넘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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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걸(한양대 국제학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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