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수첩] 채식지향주의, 결정적인 계기는 없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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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수첩] 채식지향주의, 결정적인 계기는 없습니다만
  • 2021.04.09 16:36
  • by 전윤서 기자

'비건(Vegan)'. 모든 동물, 식물의 존엄성을 인정하면서 공존을 실천하는 사람. 이 단어를 처음 접한 건 2015년 린다 매카트니의 사진전이었다. 식당에서 양고기를 먹다 창문 밖 초원의 양들을 보고 충격을 받은 그녀는 그날부터 채식하기로 마음을 먹었다고 한다. 당시 나는 '왜 이런 감수성이 없을까?'하고 자책했다. 그리고는 나에게도 이런 드라마틱한, 결정적인 계기가 찾아오기를 기다렸다. 그때 비로소 채식지향주의가 될 수 있겠지. 

채식의 세계는 힘들어 보였다. 주변에서는 그 엄격해 보이는 세계로 당당히 들어선 사람들이 있었다. 모두가 치킨을 먹을 때에도 샐러드와 감자튀김을 꿋꿋하게 먹던 선배, 단체 생활이 중요했던 연수에서도 고기가 아닌 다른 대안을 찾아 식사했던 친구. 가깝게 지냈던 동기도 고기 특히, 붉은색 살코기는 먹지 않겠다고 '채밍아웃'했다. 채밍아웃은 그리 간단하지 않아 보였다. 이 친구는 어떤 이에게는 건강상의 이유로 먹지 않는다고 핑계를 대었고 비건을 이해해줄 만한 사람에게는 자신의 신념과 그 가치를 공유했다. '동물과 환경을 위해 채식을 하기로 했어'라는 자신의 신념을 말하면 '그럼 식물은 안 불쌍해?'와 같은 핀잔을 듣는다는 것이 이유였다. 

이런 친구들이 하나, 둘씩 생겨나니 어떻게 이들과 함께 밥을 먹을 수 있을까는 나의 또 다른 과제가 되었다. 그들과 함께 지내면서 자신의 신념을 바탕으로 삶을 살아간다는 것에 손뼉 치면서 격려해주고 싶었다. 

▲ 당시 나는 '왜 이런 감수성이 없을까?'하고 자책했다. ⓒ라이프인
▲ 당시 나는 '왜 이런 감수성이 없을까?'하고 자책했다. ⓒ라이프인

그리고 점차 채식지향주의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피어났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옥자'를 보며 충격을 받기도 하고, 템플 스테이에서 채소중심의 식단을 경험하면서 '이 정도면 채식할 수 있겠는 걸'이라고 느끼기도 했다. 그런데도 마음 한구석에는 '난 완벽한 채식주의자는 될 수 없어'라며 채식과 거리를 두었다. 완벽하지 못할 거라면 소란스럽게 굴지 말자는 것이 나의 태도였다. 이런 나에게 '나의 비거니즘 만화'의 저자인 작가 보선의 말은 힘이 되었다. "완벽한 비건 한 명보다 불완전한 비건 지향인 100명이 더 가치 있다." 나는 그동안 스스로 채식은 엄격하다고 바라보면서 허들을 높이고만 있었다. 결정적인 계기를 기다리면서. 일단 할 수 있는 것만 해보자. 일주일에 한 끼 아니, 한 달에 한 끼라도 의식적으로. 

맨 처음 한 일은 내가 좋아하는 채소를 발견하는 것이다. 나의 경우 두부, 시금치, 고사리, 양배추를 특히 좋아한다. 이런 채소들로 할 수 있는 요리를 생각해보는 건 또 다른 즐거움을 주고 있다. 그다음은 좋지 않은 고기 경험을 떠올리는 것이었다. 나는 고기 굽는 냄새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리고 함박스테이크처럼 다진 고기 특유의 식감과 먹은 후 식도에서 올라오는 향을 좋아하지 않는다. 만두 속 다진 고기도 마찬가지. 이렇게 좋고 싫음의 구분이 생겼고 챙겨 먹고 싶은 채소, 굳이 먹고 싶지 않은 고기가 명확해졌다. 채식지향주의로 나에 대해 더 집중할 수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건 무엇인지. 또 다른 취향을 알아가는 것. 규제가 생겼을 때 더 창의적이게 된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었다. 정말 그랬다. 요리하는 재미를 알아가고 동물성 재료들을 대체해도 좋을 만한 재료들을 알아가는 과정이 그랬다. 채식하면 외식 못 하나? 그것도 아니다. 곳곳에 비건 식당과 비건 메뉴가 숨어있었다. 요즘은 마음 맞는 채식지향주의 몇몇과 비건 식당을 찾아다니는 '비건 투어'를 만들기도 했다. 

▲ 동물성 재료를 뺀 요리를 만들면서 새로운 '맛'을 알아가고 있다. ⓒ라이프인
▲ 동물성 재료를 뺀 요리를 만들면서 새로운 '맛'을 알아가고 있다. ⓒ라이프인

채식지향주의 식사는 설거지도 간편하다. 물로만 간단히 헹궈내거나 세제를 조금만 사용해도 된다. 채소로 한 끼를 먹으면 더부룩한 불편함 없이 속도 편하다. 이렇게 몇 달 채식지향주의 식사를 실천하니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얼굴색이 밝아졌다는 이야기도 해주었다. 채식에 관심 있었던 친구들과 대화하면서 지구, 환경에 대한 이야기도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불완전한 비건 한 명의 영향력이 이렇게나 크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마트에서 쉽게 지나쳤던 제철 채소도 눈에 들어온다. 뭐니 뭐니 해도 제철 재소가 저렴하고 맛있으니까. 채소로 만들어내는 다양한 맛도 소소한 즐거움을 준다. 요리를 준비하면서 각각의 채소의 효능을 찾아보면 '만병통치약'이 따로 없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채식지향주의는 '존중'의 감각을 깨우기도 한다. 다른 입맛을 가지고 사는 사람에 대한 존중, 공장식 축산으로 길러진 가축들에 대한 존중, 유제품을 위해 임신한 상태를 유지해야 하는 젖소에 대한 존중, 육식으로 오염되는 환경에 대한 존중.

결정적인 계기는 없지만 불완전한 비건 지향인이 되어 채식을 실천하고 있다. 결정적인 순간을 기다렸다면 어쩌면 나에게는 평생 채식지향주의 삶을 의식적으로 실천하는 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드라마틱한 결정적인 순간은 말 그대로 ‘드라마틱’이니까. 이 글을 읽는 독자분들 중에서도 이전의 나처럼 채식을 너무 엄격하게만 보고 있진 않은지 생각해보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엄격함의 허들을 낮추고 채식지향주의로 삶을 실천해보기로 마음먹었다면 그 과정에서 나를 알아가고 창의성을 발휘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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