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숙님
상태바
은숙님
  • 2018.01.29 13:33
  • by 양영희 시민기자
사진출처 픽사베이

자기 일을 가진 여자들이 아파트에서 다른 사람들과 섞이는 일은 거의 없다. 같은 아파트에서 10년을 넘게 살았는데도 한 번도 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 인근에 쓰레기 처리장이 생긴다고 비상이 걸려 대책위를 만들고 싸우면서 ‘우리’가 되었었다. 늦은 밤까지 회의하고 주민들께 홍보하고 집회도 하고 문건도 만들고......, 매일 붙어 다니며 고생한 시간들은 우릴 끈끈하게 엮어 주었다. 투쟁은 처참하게 무너졌지만 함께 했던 여자6명은 남았다.

돌아보니 우린 모두 같은 유전자를 지니고 있었다. 불의를 보고 참지 못하고 부르르 떠는, 우린 보통사람들과 다른 피를 가진 듯 했다. 우린 서로의 감정 상태를 너무나 잘 읽었고 잘 통했다. 그래서 공식적 싸움은 끝났는데 우린 자석처럼 끌려 간간이 얼굴을 본다. 보지 못할 때는 카톡방을 통해 서로 사는 이야기를 공유한다. 이름 하여 6인방이다. 모두 다른 일을 하고 있고 연령도 다양하지만 전혀 불편함이 없다. 그 중에서도 은숙님은 같은 나이인데도 나보다 훨씬 언니 같고 듬직하다. 아는 것도 많고 일도 잘한다. 그리고 너무나 재미있다.

"우리 부친이 00공사를 가셔서 '연금이 103세까지라니까', '그럼, 그 이후엔 뭘로 사냐고?'한 거에요. 그랬더니 여직원이 얼굴이 벌게져서 답을 못해요. 그래서 ‘내가 드릴게요. 오래만 사세요.’라고 말했어요. 연세 드시면 본인은 아주 오래 사실거란 착각을 하시는 건 아닌지...., 딸로서도 별로 달갑지 않은 건 내가 나쁜 사람이란 증거인가요?"

"난 어떨 땐 외국 가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오늘은 모친 발톱 깎아 주는데 울 모친은 아프다며 18년이랍니다. 정신이 돌아와서는 미안한지 눈도 못 마주칩니다. 하루에도 천국과 지옥을 수없이 오가지요. 겪어보고 돌보지 않으면 절대로 느낄 수 없는 경험이지만 늘 후회 없이 하자고 최면을 겁니다. 아님 나도 돌 거 같아서......,숨 쉴 곳이 필요합니다. 휴식은 필수입니다. 모두를 위해서."

카톡방을 보며 혼자 키득거리다 숙연해지는 일은 모두 은숙님의 글 때문이다. 얼굴보고 얘기할 때도 끝도 없이 우릴 즐겁게 해주는데 카톡방에서도 그녀의 이야기는 늘 우리 삶의 모습이 총체적으로 들어있다. 그녀는 치매에 걸린 모친을 몇 년 째 혼자 돌보는 중이다. 치매뿐 아니라 곳곳이 아픈 모친이 쓰러지거나 병원에 가야 할 때 자다가도 일어나서 친정으로 달려가는 일을 밥 먹듯이 하고 산다. 그런 모습을 보며 우리는 감탄과 걱정을 보내곤 한다. 6인방 누구도 그녀처럼 잘 할 자신이 없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런데도 그녀는 늘 씩씩하고 다른 사람들의 투정을 다 받아 준다. 게다가 그녀도 암수술을 받은 지 오래되지 않은 사람이다.

얼마 전 몸살이 심하고 설사가 종일 났다. 기운이 하나도 없는데 일요일이었다. 약국에 갈 기운도 없는데 차도 없었다. 그래서 은숙님께 혹시 당번 약국을 알 수 있는지, 아픈 내가 헛걸음 않고 한 번에 갈 수 있게 좀 찾아달라고 부탁했다. 은숙님은 걱정을 하며 알았다고 하더니 바로 또 전화를 걸어왔다. 약국을 찾았고 차를 갖고 나갈테니  집 앞으로 나오기만 하라고 했다. 그래서 고생하지 않고 약국을 들르고 편의점에서 즉석 죽과 이온음료까지 챙겨 집으로 왔다. 평소에 친정 엄마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아플 땐 찬물 떠다줄 사람만 있어도 행복하다고.’은숙님 덕분에 약도 사고 비상식량도 구했으니 그보다 감사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고 얼마나 지났을까? 은숙님이 다른 6인방 멤버 한분과 직접 찾아오셨다. 손에는 커다란 짐을 들고서. 음식을 먹지 못한 나를 위해 호박죽을 끓여주시겠다고, 호박 자른 것과 찹쌀 불린 것 그리고 블랜더까지 챙겨오셨다. 그리고 마치 자신의 주방처럼 필요한 것들을 꺼내 근사한 호박죽을 금새 끓여냈다. 이미 24시간 이상을 아무것도 먹지 못한 나는 눈물이 날 정도로 고마웠다. 그리고 은숙님의 밝은 수다는 혼자 앓고 있어 우중충했던 공기를 단번에 바꿔 놨다. 나도 누군가 혼자 앓고 있다면 꼭 찾아가서 죽을 끓여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재미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픈 사람에게 약보다 좋았다.
 
은숙님의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
 “어린 시절 부모님이 부부싸움을 많이 하셨는데 그때마다 아버님이 상을 엎어서 난 한 손으로 상다리를 붙들고 밥을 먹었지 뭐야. 또 상을 엎을 까봐!”
나는 그 장면이 머릿속에 그려져 한 참을 웃었다. 가스렌지 위에 한 솥 가득 노오란 호박죽을 남겨두고 현관문을 나서는 그녀가 참 커다란 사람처럼 느껴졌다. 거실엔 정다운 이야기와 웃음이 오래 나를 감쌌다.

라이프인 열린인터뷰 독점기사는 후원독자만 볼 수 있습니다.
후원독자분들은 로그인을 하시면 독점기사를 바로 볼 수 있습니다.

후원독자가 아닌 분들은 이번 기회에 라이프인에 후원을 해보세요.
독립언론을 함께 만드는 자부심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양영희 시민기자
양영희 시민기자
중요기사
인기기사
  • (07317)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영등포로62길 1, 1층
  • 제호 : 라이프인
  • 법인명 : 라이프인 사회적협동조합
  • 사업자등록번호 : 544-82-00132
  • 대표자 : 김찬호
  • 대표메일 : lifein7070@gmail.com
  • 대표전화 : 070-4705-7070
  • 팩스 : 070-4705-7077
  • 등록번호 : 서울 아 04445
  • 등록일 : 2017-04-03
  • 발행일 : 2017-04-24
  • 발행인 : 김찬호
  • 편집인 : 이진백
  • 청소년보호책임자 : 송소연
  • 라이프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라이프인. All rights reserved.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