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없는 농장"의 기억 – 삶이 언어의 옷을 입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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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없는 농장"의 기억 – 삶이 언어의 옷을 입기 전에
엄형식 (벨기에 리에쥬 대학 사회적경제센터 연구원)
  • 2017.12.26 17:47
  • by 라이프인
'주인없는 농장'에서의 2년간 경험은 그 자체로 즐거운 추억이고 기억이 되었다. 그 뿐일 수 있었다.

지역의 사회운동 활동가들과 함께 “주인없는 농장"이라는 일종의 주말농장을 함께 운영해 본 적이 있다. 가족마다 일정한 규모의 텃밭을 나누어서 각자 관리하던 전통적인 주말농장 방식이 아닌, "할 수 있는 만큼 일하고, 원하는 만큼 가져간다"는 이상사회를 구체적으로 실천한다는 취지를 빙자한 여가활동이 목표였다. 물론 운영은 쉽지 않았다. 경제학 이론에서 비판하는 집단주의의 폐해들이 구체적으로 속출했다. 누구는 헌신적으로 일하고, 누구는 열심히 하다가 점점 소극적이 되고, 누구는 와서 웃고 떠들다가 뒷풀이에 집중하고, 누구는 이런 불균형을 보면서 다른 사람을 비판하고, 누구는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 농장을 자기 것처럼 여긴다고 비판했다. 누구는 농장의 전체 방향을 고민하면서 과도하게 열심히 일했고, 누구는 농작물 자라는 모습 자체가 좋아 활동에 몰입했으며, 누구는 우리 가족이 일한 만큼을 정당하게 확보하는 것에 촉각을 세웠으며, 가끔 구경 온 사람들은 “뭐 이런 난장판이 다 있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주인없는 농장"의 대전제는 누가 어떤 생각을 하던 상관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각자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다만 그 결실에 대한 소유권을 배타적으로 주장하지 않는 것이 중요한 원칙이었다. 여러 가지 작물들을 심었는데, 수확을 하는 날 참여한 가족들이 필요한 만큼 챙기고 남은 것은 지역공부방이나 사회단체들에 가져다 주었다. 갈등이 생기면 천천히 이야기를 해가면서 해법을 찾았고, 합의된 사항은 일종의 규칙이 되었다. 이 실험은 2년간 이어지다가 빌렸던 농지가 용도 변경되면서 중단되었다.

함께 했던 사람들은 각자 다른 생각과 경험을 가지고 있었지만 호기심에 이끌려 이 실험에 참여했고, 모두가 "어떤 일이 벌어질까?"에 대해 궁금해하면서 시작했다. 함께 일을 하고 소소한 재미 그리고 다양한 긴장을 경험하면서 참여자들은 미리 정해진 답과 원칙을 따르는 것이 아닌 서로에 대해서 배우고 이해해가면서,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하기 위한 규칙을 만들고 존중하는 경험을 했다. 이 실험은 "다행히도" 언론이나 외부에 알려지거나, 안정적인 운영을 위한 조직의 형태를 가지기 이전에 종료되었다.

사회적경제 논의, 그중 사회혁신과 관련된 논의에는 다양한 논리들이 주장된다. 유력한 논리 중 하나는 사회적경제와 사회혁신의 요체가 “제도에 의해 다루어지지 못한 문제나 바램을 당사자들 스스로의 조직화를 통해 적절한 해법을 찾아내고, 작은 실험으로 시작되는 해법들이 공공정책을 통해 지원하거나 법제화 또는 시장메커니즘을 이용한 규모화(scaling-up)를 이룸으로서 거시적 사회변화를 이끌어낸다”는 것이다. 실제로 인상적인 사회적경제 사례들을 사회혁신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이러한 분석틀이 유효함을 확인할 수 있다.

성급한 사회혁신의 제도화와 규모화에서 범해지는 오류를 검토해야...소비되어 지는 것에 대한 경계

그러나 이 논리에서 간과되는 것은 시민들의 작은 실험들에서 당사자들 스스로가 갖는 의미해석의 중요성이다. 제도화와 규모화 자체가 '선'은 아니다. 어떤 것은 제도화 이전 상태로 남아있는 것이 더 좋을 수도 있다. 규모화를 통해 잃어버리는 가치와 얻을 수 있는 효과에 대한 검토의 결과로 규모화의 길을 걷지 않을 수 있다. 무엇보다 문제당사자의 의미해석이 공적 공간으로 들어가는 순간, 외부의 시선에 의해 그 의미가 재해석되면서 당사자들의 통제를 벗어나게 되고, 더 나아가 특정한 방식으로 '활자화'된 의미는 종종 다른 의도를 위한 기능적인 도구로 전락하는 것을 쉽게 관찰할 수 있다.

때때로 어떤 경험과 생각들은 그 자체로서 빛났다. 혁신의 사례를 제도화하는 과정에서, 그 에너지를 잃을 수도 있다. 어떤 경계가 필요하다.

많은 사회혁신의 사례들은 절박했던 당사자들의 싸움에서, 또는 열정에 가득 찬 몽상가들의 실험 속에서 틀에 박히고 순응된 방식으로는 볼 수 없었던 것을 함께 보고, 이를 세상 속에 함께 끌어내면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정부나 각종 재단들이 사회적경제와 사회혁신이 가져오는 결과를 높게 평가하고 이를 육성하기 위해 다양한 지원을 도입하면서, 사회혁신에 대한 기능적 도식이 교과서처럼 정리되었고 이를 전파하는 중간지원조직과 컨설턴트들이 증가해왔다. 우리 사회에서 증가하는 사회적경제와 사회혁신에 대한 관심을 보면서 가끔은 이런 질문이 든다. “시민들의 문제와 바램은 과연 시민들 스스로의 문제인식과 의미부여를 통해 그 언어와 논리를 얻고 있는가 ? ” “혹시 지원기관들이 선호하는 언어와 논리에 익숙한 전문가들에 의해 프로젝트 기획서를 통해 고안되고 주민들은 그것을 자신들의 것이라고 소비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 ” “이런 [가치 비즈니스]가 살아남기 위해 시민의 문제와 바램이 과장되는 것은 아닌가 ? ”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나와 내 이웃의 문제 자체를 경험하고 해석할 시간을 갖지 못한 채, 제도와 전문가, 그리고 매체에 의해 “문제”로 포장된 상품들을 소비하고 있다. 함께 머리를 맞대고 “뭐가 문제지 ?”, “우린 뭘 하고 싶은거지?” 이야기를 나누어야 할 시간에 각자가 소비한 멋진 가치들을 가지고 멋들어진 논쟁을 나누면서 얼마나 많은 “가치” 와 “문제의식”을 구매했는지 과시하는데 시간을 빼앗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 ?

오늘날 우리는 온라인 소셜네트워크와 다양한 매체들의 증가가 가져온 언어와 논리의 과잉 시대를 살고 있다. 사회적경제, 사회적기업 그리고 사회혁신이라는 공식적 언어와 개념, 논리에 이르기 이전에, 무엇이 우리에게 “사회적”인 것이고, 어떤 해법이 “사회적”인 것인가 대해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생각을 나누고, 함께 공감할 수 있는 규칙을 합의하는 과정과 시간이 더 필요해 보인다. 아니, 문제라고 생각되는 것이 별로 없으면 구태여 “사회적”이라는 이름으로 모여서 머리 아픈 이야기를 하기 보다, 더 다양한 삶을 경험하고 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더 실질적인 “사회적” 삶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회혁신가들이 끓어 오르는 삶의 마그마를 적절한 언어와 논리로 표현해내기 보다, “혁신”과 “가치” 자체에 사로잡혀, 성급하게 제도화되고 공식화된 (또는 잘 팔리는) 의미로 이 마그마의 열기를 식히는 것은 아닌지 늘 돌아볼 일이다. 그 방법 중 하나는 “혁신”과 “가치”를 생각할 시간에 우리 이웃에 아픔하고 신음하는 사람들 옆으로 가서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저 밥 한끼를 함께 먹는 것일 수 있다.

사족 – 이 글로 인해 “주인없는 농장"에 대한 역동적이고 다양한 “우리의” 기억들은 엄형식이라는 게을렀던 참여자의 개인적 해석으로 축소되어 공적공간을 돌아다닐 활자가 되어 버렸다. 이런 모순과 배신의 딜레마를 너그러이 이해해주시길...

 

엄형식 연구원(벨기에 리에쥬 대학 사회적경제센터 연구원국제노동자협동조합연맹(CICOPA) 통계조사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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