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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아메리카의 유럽, 퀘벡의 사회적경제를 가다(2)
  • 정원각 상임이사(경남사회연대경제사회적협동조합)
  • 승인 2019.07.03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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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 위기로 인해 고용위기를 겪고 있는 경남에서 사회적경제는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 이런 고민과 대안을 모색하기 위해 KBS창원총국이 '고용위기에 대한 사회적경제의 대응'을 주제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있다. 이번 제작물에는 경남사회연대경제사회적협동조합 정원각 상임이사가 기획과 자문에 직접 참여했다. 정 상임이사가 캐나다 퀘벡과 스페인 몬드라곤에 함께 동행해 보고 느끼는 것을 가볍게 여행기 형식으로 기고 한다. 퀘벡에서는 사회적경제의 대명사인 샹티에 그리고 노동조합연합회가 운영하는 기금과 투자(노동조건을 좋게 하거나 친환경, 사회 과제 해결 등을 하는 기업) 그리고 쇠락지역의 도시재생 협동조합, 데잘뎅은행의 역할 등을 살펴본다. 몬드라곤에서는 파고르 가전 부분 파산 이후 노동자들은 어떻게 재배치 되었고 일자리를 다시 찾았는지를 살펴본다. 라이프인은 총 3회에 걸쳐 우리 사회의 고용, 실업 문제를 해결하는데 작은 팁이라도 제공할 수 있기 위해서 사회적경제의 매력을 소개하는 연재를 싣는다. 


지난 회에 이어 이번에는 연대기금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데잘뎅'과 그 데잘뎅의 도움을 받아서 협동조합을 성공적으로 운영하고 있는 '쁘띠샹블랭'을 소개하고자 한다.

▲ 캐나다 퀘벡시의 레비스에 위치한 데잘뎅 기념관. 알롱스와 도리멘 데잘뎅 부부가 처음으로 '민중금고(people's bank)'를 만들었던 곳이다.

퀘벡 사회적경제의 뿌리 데잘뎅신협 

데잘뎅 박물관을 다시 찾은 것은 6년만이다. 퀘벡의 자랑 데잘뎅 신용협동조합을 창립한 알퐁스 데잘뎅. 데잘뎅이 도리멘 부인과 자녀들을 키우면서 사무실로 사용한 곳. 신협을 창립한 1900년부터 6년 동안 사무실로 사용했고 이후 삶을 마감한 소박한 집과 그 옆집을 터서 데잘뎅박물관을 만들었다. 6년 전에 왔을 때에는 데잘뎅의 집만 박물관으로 사용했는데 확대한 것이다. 아무래도 2008년 세계 경제위기 그리고 2012년 세계협동조합의 해를 거치며 협동조합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방문객도 늘어났기 때문일 것이다.

데잘뎅은 이곳 퀘벡시 레비 지역에서 부인과 함께 자녀 10명을 키우면서 1년 중에 6개월은 수도 오타와에 가서 의회 속기사라는 직업을 하면서 데잘뎅신협 운동을 한 것이다. 알퐁소 데잘뎅과 그 부인 도리멘 데잘뎅은 1900년부터 죽을 때까지 신협 일을 하면서도 돈 한 푼을 받지 않았다는 가이드의 설명은 우리 일행에게 큰 울림이었다. 더구나 그 어마어마한 금용 사업체를 책임 경영하면서 자산을 전혀 남기지 않았다는... 10명의 자녀 중에 데잘뎅 신협 일을 한 사람은 1명. 그도 조합원에게 선출되어 이사장을 지낸 것이라 했다.

이번이 두 번째 방문인데 좀 더 커진 박물관 그리고 체계화된 운영으로 6년 전에는 보지 못한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었고 듣지 못한 설명들이 있었다. 가령 데잘뎅은 은퇴 후에도 죽을 때까지 데잘뎅 일을 했으며 1920년 장례식에는 무려 20만 명의 사람들이 운집하여 그의 죽음을 슬퍼했다는... 조직의 명칭에 사람을 써서 우상화가 아닌가 하고 반발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런 설명을 들으니 오히려 숙연해 졌다. 부부가 수십 년을 일 하면서 급여를 한 번도 받지 않았다니... 이런 헌신이 있었기 때문에 퀘벡 민중의 가슴에 깊이 각인되고 그 수많은 민중들이 모였을 것이다.

다시 박물관 가이드에게 들은 내용을 좀 더 설명하면 아래와 같다. 먼저 알퐁스 데잘뎅은 의회 속기사로서 매우 실력 있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1800년 말, 1900년 초 퀘벡 지역에서 노동자들이 주급 5달러 정도를 받을 때 데잘뎅은 40달러를 받아서 비교적 안정적으로 살았다. 그리고 데잘뎅이 오타와 의회에서 일을 하는 6개월은 부인 도리멘 데잘뎅이 신협 메니저 일을 봤다. 당시의 메니저들이 모두 자원활동이었으며 신협 메니저 역할의 50%는 여성들이 담당했다고 한다. 이유는 남성들이 직업상, 퀘벡에 1년 내내 머물지 못하고 타 지역에서 근무하는 경우가 많아서 그 공백을 부인들이 메웠다는 것이다. 특히 부인 도리멘 데잘뎅은 바쁜 남편 때문에 50%를 훨씬 넘게 담당했다는 것이 데잘뎅 박물관 역사 가이드의 설명이다.

데잘뎅이 신협을 만들어야겠다고 결정적으로 생각하게 된 것은 당시 퀘벡 지역의 한 사람이 사채를 150달러 빌렸는데 갚은 전체 금액은 5천 달러라는 이야기를 들은 후라고 한다. 그런데 이런 살인적인 고리사채가 당시에는 불법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런 충격 속에서 데잘뎅은 당시 국제협동조합연맹의 대표인 헨리 울프가 쓴 '시민의 은행들(People’s Banks)'이란 책(사진)을 읽고 퀘벡의 레비 지역 주민들을 모아서 신협을 설립했다. 1900년 12월 6일 설립할 때 132명의 주민들이 참여했고 그 중에 12명은 여성이었으며 출자금은 1인 5달러였다. 첫날 조합원들이 예금한 돈은 28달러. 그러나 불과 6개월 후에는 조합원이 9백 명에 1만 달러 예금이 들어오는 등 엄청난 호응을 받았다.

데잘뎅의 역할이 다시 두드러진 시기는 1929년 경제공황 때다. 물가가 치솟고 경제가 어려워지자 서민들이 은행에서 돈을 빌려야 하는데 쉽지 않으니 다시 사채를 쓰게 되었다. 그런데 그런 와중에 고리사채업을 하는 자본가들이 등장하여 서민을 울렸다. 데잘뎅신협은 이때 많은 서민들에게 큰 힘이 되었고 조합원은 크게 늘어나게 되었다. 데잘뎅은 1950년대부터 제3세계에 협동조합 설립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1962~1963년에는 아프리카에 있는 말리, 부르키나파소 신협 설립을 도왔고 1970년에는 데잘뎅 협동조합 연구소(ICD)를 세워 아시아, 라틴아메리카, 아프리카에서 인턴을 받아 훈련했다.

데잘뎅은 1995년 본격적으로 진행된 퀘벡의 사회적경제에 대해 초기에는 소극적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유는 협동조합을 제외한 사회적경제 조직들 대부분이 빈곤 극복을 중심으로 활동하였고 정부와 긴밀한 관계와 지원을 받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협동조합은 전통적으로 자원을 외부에서 동원하는 방식보다는 스스로 동원하는 자조와 자기 책임을 중요하게 생각했고 100년 이상 투쟁하면서 정립한 <자본으로부터 '독립'>, <정부로부터 '자치'>를 돌이켜보면 납득이 간다. 하지만 현재의 데잘뎅은 연대 기금에 깊숙이 참여하여 퀘벡의 사회적경제에 큰 축을 이루고 있다.

건축가, 사업가, 예술가, 주민, 그리고 데잘뎅신협이 지원하고 협동조합이 중심이 되어 도시 재생에 성공한 '쁘띠샹블랭' 

드라마 도깨비에서 대추 색 문을 열면 한국에서 퀘벡으로 순간 이동을 한다. 이동한 퀘벡에서 첫발을 딛는 곳이 바로 '쁘띠샹블랭' 거리다. 오늘은 금요일(6월 28일)인데도 사람들로 북적인다. 그런데 쁘띠샹블랭이 처음부터 늘 이렇게 활기찼던 것은 아니다. 시기에 따라 부침이 있었다고 한다. 가장 가까운 시기인 1980년대에는 쇠락해 가는 거리, 사람이 오지 않아 상가 건물의 75% 이상이 빈 유령 같은 곳이었다고 한다. 그 삭막했던 곳을 지금처럼 활기차게 만든 사람들과 조직이 있었으니 바로 쁘띠샹블랭협동조합이다. 오늘은 이곳을 방문하여 이야기를 듣기로 했다.

'쁘띠'는 프랑스어로 '작은'이란 뜻이고 샹블랭은 이 거리를 처음 만든 사람의 이름이다. 샹블랭 거리는 북미에서 가장 오래된 지명 가운데 하나인데 1700년대 세인트로렌스 강 쪽으로 '그랑 샹블랭(큰 샹블랭)'거리가 새롭게 형성되자 이와 구분하기 위해 '작은' 뜻을 가진 '쁘띠'를 붙여서 '쁘띠샹블랭'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쁘띠샹블랭은 퀘벡에서 오랜 기간 사람들의 발길이 꾸준한 곳이었다. 하지만 20세기 중반 이후 퀘벡항구가 쇠락하자 함께 몰락하기 시작했다.

이런 '쁘띠샹블랭'이 번화한 상가로 변신하는데 그 중심에는 '쁘띠샹플랭협동조합'이 있었다. 1970년대 말, 1980년대 초가 되면 상가의 75% 이상이 이 거리를 떠나는데 이때에 건축가와 사업가 두 사람이 쇠락한 건물 2개를 매입한다. 그리고 그 건물을 예술가들이 이용할 수 있게 싸게 제공한다. 이후 이 지역의 시민사회단체들과 협력하여 건물을 매입했다. 당시에는 보통 낡고 오래된 건물을 부수고 새 건물을 신축하는 것이 유행이었으나 그 방식을 따르지 않고 수리, 재생을 한 것이다. 이는 지역에 역사적인 자산이 남아야 한다는 뜻으로 진행된 것이다. 이런 모습을 보고 미국의 자본이 매입을 하려고 시도했는데 거부하고 1985년 11월 25일 협동조합을 창립하고 본격적인 사업을 시작했다.

현재 쁘띠샹블랭에 있는 상가 중에 27개 건물, 45개 가게가 협동조합 소유다. 조합원은 협동조합에 가입을 하고 임대료를 지불하는 방식이다. 신입 조합원을 제외한 기존 조합원의 임대 기간은 3년에서 5년으로 선택할 수 있다. 임대료는 주변 시세와 상권, 그리고 가게의 규모 등을 감안해서 전체 조합원 총회에서 결정하며 임대 기간에는 올리지 않는다. 조합에서는 쁘띠샹블랭 거리와 협동조합 등을 홍보, 마케팅, 상품 콘셉트 등을 정하고 컨설팅을 한다. 특히, 경영이 어려운 상점에 대해서는 경영 컨설팅을 하고 그 결과를 기반으로 자금 지원 등 다양한 협력을 한다. 쁘띠샹블랭협동조합의 홍보 실력이 알려지자 인근의 지방자치단체가 자기 지역의 상가를 홍보를 해달라고 위탁을 한 일도 있다고 한다. 한편 이 쁘띠샹블랭 협동조합이 초기에 어려움을 겪었다. 이때 데잘뎅이 컨설팅과 자금을 지원해서 정상화 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건물이 협동조합인 쁘띠샹블랭 거리에는 아직도 일부 건물은 개인이 건물주이고 그곳에서 사업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쁘띠샹블랭협동조합은 현재 소유하고 있는 27개의 건물 외에도 계속 늘려 나갈 것이다. 이유는 거리 전체를 협동조합으로 만들고 싶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협동조합의 건물들은 장기적으로 쁘띠샹블랭 거리의 상인, 지역 주민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퀘벡시 전체의 것이기도 하다. 쁘띠샹블랭은 쇠락한 상가 지역이 어떻게 다시 살아났는가? 그리고 거기서 '협동조합, 사회적경제는 어떤 역할을 하고 어떤 미래를 지향하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퀘벡시에 그리고 쁘띠샹블랭 거리를 방문하는 사람들이 이런 내용도 알면 더욱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 본다.

 

정원각 상임이사(경남사회연대경제사회적협동조합)  jwongak@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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